소설리스트

날 차버린 소꿉친구와 전 여친이 같은 반이라 곤란하다-22화 (22/201)

〈 22화 〉 평온한 일주일 (4)

* * *

#9

오늘은 정말로 우리의 수준을 파악하기로만 끝낼 것이었는지, 수업 시간 내내 인형을 상대로 검술을 펼치다가 끝이 났다.

사샤는 아벨의 조교수가 따로 교육할 예정이라더라. 일단 뭐라도 배워야 자기 수업을 제대로 따라올 수 있을 거라면서……

아무튼 1시쯤에 검술 전공 수업이 마무리되었고, 게브라관을 빠져나온 나와 가브리엘, 그리고 스텔라는 학생 전용 식당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었다.

— 스텔라 너 머리색 진짜 예쁘다. 유전이야?

— ……에, 에지오 씨가 보기엔 어떤 것 같나요?

— 아니, 야. 잠깐만. 내가 물어봤잖아.

우리 셋이 함께한 식사 자리는 뭐랄지.

가브리엘이 스텔라에게 계속 말을 걸었는데, 스텔라는 가브리엘의 말을 무시 내지 불편하게 여기는 듯했다가, 가브리엘의 질문을 역으로 받아 내게 물어보는 식의 기묘한 대화 방식을 취했다.

“에지오.”

“응?”

“넌… 존재해서는 안 될 생물이다.”

……그렇게 식당을 나오면서 가브리엘은 내 어깨를 감정이 실린 듯한 힘으로 몇 번 주물러준 뒤에, 먼저 강의가 있다며 떠났다.

내가 뭘 잘못했던가. 모르겠다.

스텔라 역시 잠깐 기숙사에 들어가서 쉬겠다며 나와 헤어졌고, 그렇게 초감각특론 강의가 시작되는 3시까지 할 일이 없어진 나는 체력단련장에 들릴까 하다가, 문득 어느 한구석을 바라보았다.

“……”

멀지 않은 곳에 지어진 건물 하나.

웅장한 건물 출입구를 통해 드나드는 사람들의 일부가, 몇 권의 책을 저마다 손에 들고 있었다.

“……흠.”

어떻게 할까.

책을 읽을 여유도 읽고 싶은 마음도 딱히 없었지만, 내부 구조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기는 했다.

그냥저냥 구경하자는 느낌으로.

나는 도서관의 출입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10

에픽 클래스 도서관의 명칭은 따로 있다.

이름하여, 호크마 관.

건물 하나가 통째로 도서관이었다.

‘여기…… 장난 아닌데?’

시원한 공기와 익숙한 종이 내음들이 콧잔등을 간질였다.

학생증을 제시하며 들어선 문 안으로, 어마무시하게 넓은 내부 공간에 비해 얼마 없는 사람들의 인영이 희끗희끗 보였다.

고개를 직각으로 꺾어야 간신히 눈에 담을 수 있을 정도의 아득히 높은 천장과, 그 끝까지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고풍스러운 책장.

높은 곳에 있는 책을 꺼낼 수 있도록 사다리도 군데군데 배치되어 있고, 나뉘어진 층수마다 넓은 테이블이 여럿 자리하고 있었다.

로르센 아카데미의 도서관보다 대략 세 배 정도는 크지 않을까 싶다. 가슴이 절로 웅장해지는 위엄에 입을 살짝 벌리며 감탄했다.

역시 에픽 클래스라 이건가. 아카데미 내부 도서관마저 제국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재학생들을 위한 전용 독서칸이 따로 구석에 설치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책을 읽을 생각을 하고 들어온 건 아니었는데, 뭐라도 집어 안에 들어가고 싶도록 만든다.

뚜벅, 뚜벅—

마음에 들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는 도서관의 장엄한 풍경이, 내 발걸음을 안쪽으로 이끌었다.

워낙 조용하고 한적했던 탓에, 뚜벅거리는 소리가 유독 크게 울린다.

흔히 찾아보기 힘든 고서도 보관하고 있는 책장들을 쓱 훑어보면서, 나는 천천히 무수한 책들의 사이를 기분 좋게 거닐었다.

으음.

뭔가 안심이 되네.

고향에 돌아온 느낌이다.

지금에 이르러 책이란 사물에 그다지 좋은 느낌을 가지고 있진 않았지만, 아무래도 이런 멋진 도서관을 보게 되면 절로 흥미를 가질 수밖에 없도록 되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손가락으로 책 표지를 쓸면서 지나가는데.

골라서 뭘 빼낼 생각 없이 그냥 그러고만 있었으나, 문학 장르의 어느 한 장소에서 멈춰 선 내가 잠시 고민을 거듭하다가.

자연적으로 그 책을 집어 꺼내들었다.

“……”

팔락, 팔락.

익숙한 책이다.

좋아하는 작가가 쓴, 좋아하는 책.

[ 너와 나만의 세계 / 유크레미안 지음 ]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가는 어느 남녀의 이야기. 여운 깊은 엔딩으로 독자들 사이에서 유명했다.

책의 표지를 마주한 순간.

— …어, 저도 그 책 좋아하는데.

아주 옅고 희미하게.

기억 속에 잠겨 있던 환청이 들리는 듯했다.

……이 책은 그 뒤로 읽은 적이 없다.

만약 이번에 읽게 된다면, 아마 다섯 번째가 아닐까. 물론 그럴 일은 절대로 없겠지만 말이다.

낡은 책의 표지를 넘겨 한 장씩 펼쳐보다가, 중요한 복선으로 시작하는 서두 부분의 글자를 읽자마자 냅다 책을 덮어버렸다.

조용히 책장에 그것을 돌려놓았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다. 몇 페이지에서 특정 등장인물의 무슨 대사가 나오는지도 죄다 외워버릴 지경이다. 여태 네 번씩이나 읽었으면 됐지, 뭘 또 읽을 필요가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이제 이 책을 다시 펼쳐볼 이유는 없었다.

“……하아.”

왠지 운동이 하고 싶어졌다.

잠깐 샤워라도 할 겸 체력단련장에 들리기 위해서, 의미 모를 한숨과 함께 계단을 타고 내려가 도서관 바깥으로 향했다.

#11

“……휴우.”

호크마 관 3층.

짧은 휴식을 취하던 도중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하곤 본능적으로 어느 책장 뒤에 숨어 있던 뮤가, 계단을 타고 내려가는 에지오를 빤히 바라보다가.

살금살금.

출입문 밖으로 완전히 나간 것을 확인한 뒤에, 조용히 걸음을 옮겨 방금까지 에지오가 있던 자리를 둘러보았다.

에지오를 피하고 싶어서 피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조용한 곳에서 마주친다면, 에지오의 독서를 방해하는 일이 될 것 같아서 잠깐 책장 뒤에 숨었을 뿐이었다.

……언젠가 제대로 사과해야 할 텐데.

기회를 잡을 수 있을까.

그런 서글픈 생각을 하면서 뮤가 천천히 구경하듯 책장을 넓게 둘러보던 순간——

“……어?”

에지오가 머물렀던 그곳에는, 양옆에 꽂힌 다른 책들보다 살짝 앞으로 표지가 툭 튀어나온 책이 한 권 있었다.

잠시 멈칫하던 뮤는.

스윽.

이윽고 말없이 책을 조심스레 꺼내들었다.

[ 너와 나만의 세계 / 유크레미안 지음 ]

“……”

표지를 쓸어내리는 뮤의 눈동자가 얕게 일렁이고, 무언가를 참으려는 듯 입술을 질근 깨물었다.

팔락, 팔락……

그로부터 꽤 오랜 시간 동안.

뮤는 아주 느릿하게 조금씩, 에지오의 온기가 묻은 책의 겉면을 조심스레 매만져 가면서, 차츰 고개를 바닥 방향으로 숙여가고 말았다.

#12

화요일의 마지막 강의 시간이 다가왔다.

체력단련장에서 무거운 바벨과 즐거운 시간을 보낸 뒤에, 차가운 물로 샤워까지 깔끔하게 마친 나는 초감각특론 강의가 이루어지는 다아트 관으로 빠르게 향했다.

‘사람이 별로 없네.’

내부가 다른 건물보다 상대적으로 조용했다.

“……음?”

강의실이 있을 2층으로 향하기 위해 승강기를 찾았는데, 승강기 앞에 먼저 대기하고 있던 누군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동물의 꼬리처럼 살랑이는 금발.

“……”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모양인지, 7층에서부터 천천히 내려오는 승강기를 기다리며 팔짱을 끼고 있는 유리의 뒤로 다가갔다.

그런데 인기척을 눈치채지 못한 걸까.

내가 가까이 다가가도 아무런 반응이 없길래, 그 뒤에서 유리의 귓가에 대고 일순간 속삭였다.

“뾱.”

“———기야아아아악?!”

옳커니, 반응 좋고!

괴상한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펄쩍 뛴 유리가, 제 어깨를 손으로 감싼 채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머, 머머머, 뭔, 무슨……?”

순간적으로 겁에 질렸던 얼굴은 곧 붉게 물들어, 범인이 나라는 것을 알아채곤 미간을 팍 좁혀 짜증을 토해내기 시작한다.

“까, 깜짝 놀랐잖아! 뭐하는 거야 미친놈아!”

나는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안녕, 유리. 여기서 다 만나네.”

“안녕 못하거든—?!”

빽 소리를 지른 유리가 복도를 쩌렁쩌렁히 울렸다. 목청도 크셔라.

잠시 귀를 막았던 나는 손을 떼고 물었다.

“뭘 그렇게 열심히 생각하고 있었어? 바로 뒤에 사람 있는 것도 눈치를 못 채더만.”

“……네가 알 바 아니야.”

유리는 내 말에 더 대꾸하기도 귀찮은지, 고운 이마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내게서 몸을 돌렸다.

“뭐야, 화났어?”

내 물음에 유리가 목소리 톤을 높이며 대답했다.

“……어, 화났다. 왜. 그러니까 저리 좀 가줄래?”

“미안. 나 수업 들으러 이거 타야 되거든.”

“……”

“어라, 그러고 보니 너도 지금 수업 들으러 가는 거 아냐? 혹시 초감각특론 강의 너도 수강 신청했냐?”

“……하아.”

반응을 보니 아무래도 맞는 거 같다.

재밌는 수업 시간이 되겠네, 이거.

위이이잉—

단단히 잘못 걸렸다는 의미가 푹푹 담긴 한숨을 내쉬던 유리와 함께, 나는 곧 도착한 승강기를 타고 2층으로 이동했다.

#13

승강기가 움직이는 동안 유리에게 놀래켜서 미안하다고 넙죽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잠시 골치 아픈 듯했으나 결국 화를 푼 유리는 한 번만 더 그러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뺨을 후려치겠다면서, 내게 툭 쏘아붙이곤 나와 함께 강의실 안으로 들어섰다.

“여, 가브리엘.”

가장 먼저 보인 사람은 맨 앞에 앉은 가브리엘이었다. 아까 강의 있다더니 끝나자마자 바로 온 건가.

피곤한 듯 책상에 늘어져 있던 가브리엘은 고개만 살짝 들어 날 보면서 손을 휘휘 저었다.

“저리 가라, 에지오. 오늘은 너랑 앉고 싶지 않아.”

“응? 왜?”

친구에게 합석을 거부 받았다. 상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브리엘의 말을 고분고분하게 듣지는 않았다. 날 거부하는 녀석의 옆자리에 잽싸게 착석했다.

가브리엘은 질린 표정을 짓는다.

“저리 가라니까.”

“뭐야, 뭔데. 왜 그러는데.”

가브리엘이 힘없는 미소를 띄웠다.

“네 녀석의 얼굴을 가까이서 보니 있던 자신감도 사라져서 그런다. 엉? 아무리 그래도 너무하지 않냐? 친구 놔두고 너 혼자 막 잘나가는 건 좀 양심이 없지 않냐 이말이야.”

“……그게 뭔 개소리야?”

가브리엘은 느릿하게 어깨를 으쓱인다.

“에휴… 됐다, 됐어. 동정 아다가 뭘 알겠…… 악! 아, 알았어! 알았다고! 그냥 장난 한번 쳐본 거니까아아악!”

애들 있는 데서 뭔 헛소리를 하는 거야.

집게손가락으로 가브리엘의 귓불을 쭉 잡아당기는 와중, 멀리 떨어져 앉은 유리의 한숨 소리가 나지막이 들려오는 듯했다.

그렇게.

나와 가브리엘, 그리고 유리와 저 뒤에 앉아 내게 손을 흔들고 있던 스텔라까지.

내가 알고 있는 네 명에다가, 추가로 기존의 남학생 무리 중 두 명이 이쪽을 못마땅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는 걸 확인했다.

수강생은 대충 6명 정도인가.

적다면 적은 숫자다.

뭐, 평범한 강의는 아니었으니까.

불만이 남은 듯 계속 궁시렁거리는 가브리엘의 귓불을 몇 번 더 잡아당겨주고 있자니, 곧 벽에 걸린 시계가 3시 정각을 알렸다.

드르르륵—

때에 맞추어 가까운 문이 열렸다.

“어머… 다들 모이셨나요?”

나풀거리는 남색 로브를 입고.

풍성하게 웨이브 진 연갈빛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린, 성숙하디 부드러운 인상의 미인이었다.

“……와우.”

입을 살짝 벌린 가브리엘이 작게 중얼거린다.

그러니까, 이건.

특정 인물에게 무언가 실례되는 생각이지만……

유리와 서로 상극의 크기를 자랑하는 압도적인 존재감의 흉부가, 폭력적으로 제 존재감을 과시하며 나긋한 걸음걸이에 따라 격렬히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단상을 향해 구두를 뚜벅거리며 다리를 교차하던 그녀는, 싱그러운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만나 뵙게 되어서 반가워요, 여러분.”

정말 인간이 맞나?

저런 거 달고 다니면 목 아프지 않을까?

“아시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지만, 제 이름은 나디엘리 할렌니아 라고 해요. 오늘부터 여러분께 초감각특론을 가르치게 되었답니다.”

고개를 내리면 바닥이 보이기나 할까?

머그잔 네 개 정도는 가볍게 올라갈 것 같다.

“……아, 그리고 저는 프론티어 소속이 아니라, 따로 외부에서 초빙받은 석좌교수예요. 만약 제게 찾아오실 일이 있다면 본부에 미리 연락을 해주시길 바라요.”

순수한 호기심으로 그런 의문을 담던 와중,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던 나디엘리가 문득 여길 빤히 바라보는 것을 느꼈다.

너무 쳐다봤나 싶어 살짝 민망해지려는 찰나에, 나디엘리는 다만 아무런 지적도 없이 그저 이곳을, 특히나 내 눈을 오래 마주치려 하는 것 같았다.

내게 무언의 경고라도 주는 것일까, 싶었는데.

부르르.

그런 것보다 별 이유도 없이 등줄기를 내달리는 소름에, 나는 추위에 젖은 듯 몸을 살짝 떨고 말았다.

뭐라고 해야 할지.

유연한 곡선을 그리며 휘어진 나디엘리의 입꼬리에선 아무런 위화감도 발견할 수 없었으나——

“그렇게 됐으니.”

말을 마치며 뜬 눈동자는 고요하기 그지없어서.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왜인지, 전혀 웃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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