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차버린 소꿉친구와 전 여친이 같은 반이라 곤란하다-27화 (27/201)

〈 27화 〉 뮤 (1)

* * *

#1

뮤는 이기적이다.

『안타깝지만, 앞으로 10년이 한계입니다.』

아버지를 닮은 검은 빛깔의 머리칼.

어머니를 닮은 자주색 눈동자.

솔라 제국의 이름도 모를 영지에서 평민 일가의 외동딸로 태어난 뮤는, 그녀의 불안정한 탄생을 지켜본 신관에 의해 가혹한 운명을 점지받았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지병이라고 했다.

선천적으로 여리고 작게 태어나, 이 세상 바깥 공기의 풍부한 기운을 연약한 육체가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 말했다.

그걸로 설명은 끝이었다. 수도로부터 찾아온 태양의 신관은 뮤의 부모님에게 그 이상의 것을 알려주지 않았다……

뮤가 열 살이 될 때까지, 뮤는 마당의 울타리 밖에 나가본 기억이라곤 단 한 번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뮤의 아버지가 어린 뮤를 데리고 마을까지 나가봤다가, 그곳에서 뮤가 정신을 잃고 쓰러지자 뮤를 업고서 집으로 허겁지겁 달려왔던 것이었다.

창문 하나 달린 방이 뮤의 유일한 쉼터이자 활동 영역이었고, 당연하게도 아카데미 입학 같은 것은 불가능했다.

하루의 대부분을 침대 위에서 보냈으며, 직접적으로 피부 위에 따스한 햇살을 받아본 것은 세 살 때가 마지막이었다.

뮤에게 또래 친구란 존재하지 않았다.

가끔 창문 밖으로 뮤의 나이대 아이들이 나무를 타고 오르거나 연못가를 뛰어다니며 까르르 웃는 모습을 보기도 했지만, 뮤는 그에 동경심 같은 감정은 딱히 품지 않았다.

비록 친구와 즐겁게 논다는 일을 경험해 본 적은 없었으나, 그랬기에 구태여 필요하다 느끼지 않았던 것이었다.

뮤에게 있어 세상이란 좁은 방 하나가 전부였고, 뮤는 그 어린 나이에 자신의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원인도 알 수 없는 지병의 진행을 조금이라도 늦추고자 밤낮 가리지 않고 집 밖을 나서는 부모님의 뒷모습과, 하루에 수십 번씩은 아찔한 현기증이 도는 연약한 몸뚱아리. 항상 약기운에 절여져 힘없이 비실거리는 더없이 나약한 육신……

이런 자신과 저렇게 활기찬 이들이 서로 어울려봐야, 도대체 무엇이 즐겁다고 웃을 수 있을까——하는 마음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어린 뮤에게 있어서, 미지로 가득한 세상 밖을 볼 수 있는 방법이란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뮤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문자는 매력적이었다.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뮤의 여섯 살 생일 선물로 받은 한 권의 책.

뮤는 그 책을 하루에 여섯 번도 더 넘게 처음부터 끝까지 글자 하나 남기지 않고 꼼꼼히 읽었으며, 심지어는 꿈에서까지도 그 내용을 달달 복기했다.

그만큼, 책이 뮤에게 보여주는 환상이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실소를 금치 못할 재미난 이야기를 읽으면 뮤의 입가에도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태어나서부터 크게 웃어본 적 한 번 없는 뮤였지만, 책을 통해 비로소 즐거움이라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말없이 이불 속에서 훌쩍이기도 했다. 어린 뮤의 감성으론 이해하지 못할 복잡한 이야기라곤 해도, 등장인물들이 느끼는 슬픔 같은 감정에는 더없이 공감하고 있던 것이었다.

결혼까지 약속했던, 사랑하는 연인을 잃고 그녀를 품에 끌어안으며 슬피 울부짖는 남자의 모습을 묘사한 줄글을 보면서, 뮤는 밤늦게 부모님이 자다가 놀라 뛰쳐 달려올 정도로 꺼이꺼이 울었다.

책을 읽기 시작한 뒤로 뮤의 표정이 조금이나마 밝아진 것을, 뮤의 부모님 또한 알고 있었을 것이다.

매일, 매달, 매해.

뮤의 방은 종이 내음으로 서서히 물들었다.

개인용 책장이 생겼고, 그것은 세 달 만에 전부 꽉꽉 채워져서, 결국 하나를 더 구입했다.

뮤의 또래 아이들이 밖에서 뛰놀기 바빠 문자를 깨우치기도 한참이나 멀었을 적에, 뮤는 이미 아카데미 고등부 수준의 놀라운 언어력을 갖추고 있었다. 원체 뮤의 지능 수준이 평균 이상을 웃돌긴 했으나, 그것을 고사하고서라도 굉장한 일이었다.

뮤가 아홉살을 갓 넘었을 시기에, 뮤가 여섯 살부터 여태 탐독한 책의 개수는 족히 천 권을 넘어서 있었다.

다만 그 많은 책들을 전부 책장에 둘 수는 없었던 노릇이었으므로, 다 읽은 책은 뮤의 부모님이 시장에 되팔거나 하는 식이었다.

뮤는 가능하면 자기가 읽었던 모든 책을 방 안에 두고 싶었지만, 그건 불가능한 소망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금방 포기했다.

각기 다른 저자, 분야, 수많은 장르의 책들 중에서도 뮤가 가장 큰 호기심을 보였으며, 또 흥미롭게 읽은 책은 대부분 로맨스 소설이었다. 그러니까, 남녀의 사랑을 다룬 이야기 말이다.

뮤도 한 명의 소녀라는 것이었을까.

어른들의 사랑이라는 내용을 전부 이해할 수는 없어도, 왠지 모르게 자꾸만 읽고 싶었다.

등장인물들이 별 헤는 밤 아래서 낯간지러운 대사를 읊으면 뮤는 침대 위에서 별안간 피식거렸으나, 한편으론 그 묘한 간지러움이 꽤나 중독성 있어서, 읽다 자연히 잠들 때까지 종이에 그려진 문자로부터 결코 눈을 떼지 않았다.

다만 살면서 또래와 제대로 대화해 본 적도, 같은 또래 남자아이를 만나본 적도 없었으니, 뮤는 이성에 대한 설렘이라는 감정을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 때문에 소설에서 흔히들 표현하는 잘생겼다, 라는 형용사 또한 가슴에 잘 와닿지 않았다.

그렇지만.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이유는 알 것도 같았다.

어떤 사람과 사람 사이에 티끌만큼 작은 인연이 차곡차곡 쌓이고, 헤아릴 수 없는 밤을 같은 공간에서 지새우며, 때로는 갈등을 겪기도 하나 결국 그들이 쌓아 올린 인연보다 소중한 것은 없었기에, 끝내 모든 갈등을 풀고서 진실된 행복을 찾아 떠나는 것이었다.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것만이 로맨스 소설에서 뮤가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감정이었으며, 동시에 창문 밖 세상을 동경한 적 없던 뮤에게 아주 작은 희망의 불씨를 품도록 만들었던…… 소중한 기억들이었다.

……그렇게.

정작 뮤는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으나, 좁고 작은 직사각형 창문 밖으로 보이는 잎사귀들의 색깔은 형형색색 바뀌어 갔다.

계절이, 시간이 흘러갔다.

책을 읽는 동안에는 무아에 빠져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좋았던 한때가, 마치 영원할 것만 같았던 행복한 순간들이, 점점 끝을 향해 달려오고 있다는 것을 뮤는 어렴풋이 느꼈다.

핏덩이 섞인 기침의 빈도가 잦아졌다.

잠깐의 현기증에 그쳤던 어지러움은, 어느 순간 자기도 모르는 새 정신을 잃어버릴 정도의 간헐적인 실신으로 바뀌었다.

두꺼운 이불을 덮고 있지 않으면 언제라도 금세 오한이 들어 몸과 어깨가 파들파들 떨렸으며, 간헐적으로 심장이 욱씬거리는 격한 고통에 하루에도 수 번은 자다 깨기를 반복했다.

정말 좋아하는 책의 페이지를 넘기는 것도 가끔은 힘이 들었다. 손가락이 제 말을 들어주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것만큼은 왠지 참을 수가 없어서, 뮤는 그럴 때마다 은구슬 같은 눈물을 글썽거렸다.

뮤의 병세는.

하루를 기점으로 날마다 심각히 악화되었다.

약은 더 이상 소용이 없어졌다.

억지로 먹여도 먹은 것을 토해내기만 하고, 몸에 전혀 받지 않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뮤의 부모님은 새로운 신관을 불렀다.

뮤에게 맞는 약은 아무것도 없었다.

신관은 그저 기도를 올린 뒤에 돌아갔다.

때문에.

뮤의 부모님은 언제부터인가, 밤늦게까지 일 나가기를 전부 그만두고서 뮤의 옆자리를 지켰다.

뮤는 그들의 앞에서 힘없이 미소 지었다.

엄마와 아빠는 누구보다 열심히 해주었다.

어리고 유약한 딸을 돌보는 것이 참 힘들었을 텐데, 그들의 몸을 가리지 않는 헌신은 뮤에게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집에 가끔 찾아와주는 할아버지도, 몇 번 보지 않았을 손녀를 지극히도 예뻐해 주셨다.

지금까지 읽었던 책은 무척이나 재밌었고, 이따금 일 년에 한 번쯤 먹었던 조각 케이크 역시, 혀가 사르르 녹아내릴 정도로 맛있었다.

그러니 충분히 행복했다고, 뮤는 생각했다.

그래서, 뮤가 열 살이 되던 해.

신관이 감아놓은 10년의 태엽이 멈추는 날.

……뮤는, 처음으로 죽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앞을 선명히 보는 것조차 힘들었던 것 같다.

전신을 두껍고 뾰족한 가시로 후벼 파는 듯한 끔찍한 고통이, 하루를 쉬지 않고 뮤의 몸과 마음을 사정없이 괴롭혔다.

호흡이 점차 가빠지면서 격한 숨소리가 구멍 난 폐로부터 새어 나왔다. 쇠를 긁는 소리보다 듣기 싫은 소음이었다.

자다 깨는 수준에 그치는 게 아니라, 심한 발작을 일으키며 눈을 뜬 뮤는 그때마다 이어지는 고통에 눈물을 주륵주륵 흘렸다.

뮤의 부모님은 더 이상 안방에서 잠을 자지 않았다. 뮤가 비명을 지를 힘조차 더 이상 남지 않아 목에서 쉰 듯한 신음소리밖에 내지 못할 때면, 어린 뮤의 몸을 조심스레 끌어안고서 기도하듯 눈물지었다.

그 방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 밤이 지나면, 뮤는 죽는다.

……뮤는 어느 때보다 서럽게 울었다.

울면서, 생각했다.

차라리.

책을 읽지 않았다면 좋았을걸.

계속,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살아 있는 시체라도 되면서, 침대 위에 누워 창문 밖을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할걸.

그랬다면, 바깥 세상을 동경할 이유 따위.

……처음부터 생기지도 않았을 텐데.

억울한 감정조차 느끼지 못했다.

너무 아프고 서러워서, 뮤는 부모님이 꼭 붙잡아주는 손의 온기마저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채로 꺽꺽거리며 울었다.

……그렇게.

새벽의 황혼이 떠오르고.

어두운 밤이 저물었다.

뮤의 움직임은 지나치게 둔해졌다.

더 이상 고통스럽게 신음을 내는 일도 없이, 다만 두꺼운 이불을 목까지 덮고 누워서 느리게, 아주 느리게 호흡하고 있었다.

천장을 올려다보는 뮤의 눈동자는 흐릿했다.

많은 환상이 뮤의 시야를 찬란히 어지럽혔다.

그것은 어느 로맨스 소설의 한 장면이었고, 가을 계절시의 인상 깊은 구절이었으며, 옛날 옛적에 딱 한 번 밖으로 나가보았던 소중한 기억의 편린이기도 했다.

생각이 간헐적으로 끊기던 와중에도.

뮤는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살고 싶어.

아직 해보지 못한 것이 너무나도 많다.

내가 하고 싶은 걸 전부 하고 싶다.

나도 한 번쯤은, 마음대로 살아보고 싶다.

이렇게 많은 즐거움이, 행복이, 내가 누리지 못한 것들이 이 넓은 세상에 이리도 많다는 걸 알아버리면, 죽고 싶을 리가 없잖아. 여기서 만족하고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리가 없는 거잖아……

평범한 소녀처럼 살아보고 싶다.

아니, 평범하지 않아도 괜찮아. 오히려 그러고 싶지 않다. 더 특별하게. 남들과는 다르게. 소설처럼 멋진 삶을 살아보고 싶었다. 침대 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불쌍한 인생 같은 건 더 이상은 싫었다.

제 발로 나가서 제멋대로 살아보고 싶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렇게 헛되이 죽을 줄 알았다면, 이렇게나 아플 줄 처음부터 알았다면 차라리 밖에 여러 번 나가보는 것이 좋았을 텐데. 왜 나는 죽음에 가까워서야 비로소 창문 밖의 어여쁜 풍경을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걸까.

뮤가 보고 들은 것은 오로지 책밖에 없었다.

죽음이 목전에 가까운 지금도, 뮤는 여럿 소설에서 본 대사와 장면을 한순간에 떠올렸다.

전쟁의 물결에 휩쓸린 아내의 사체를 품에 안고는 빗물 섞인 눈물을 흘리던 남자가 빗속에서 슬피 울부짖었을 때처럼.

뮤의 곁에서 자신의 딸이 맞이할 운명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부모님의 마음과도 같이, 한 여인이 사랑하는 남자를 보내주고 싶지 않아 두 손을 모은 채 고개를 간절히 숙였을 때처럼.

평생을 헌신한 조국이 멸망으로 기우는 모습을 보며, 홀로 남은 노장이 결코 이길 수 없는 전쟁에 굳센 결심으로 참전했을 때처럼……

내게.

기적이 일어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부디 자신에게만큼은 일어나주길 바라는 끝없이 이기적인 마음으로.

소망(??)하고,

동시에 소원(??)한다.

죽고 싶지 않아.

살고 싶어.

……살려주세요. 제발요.

부탁드려요.

저를 살려주세요.

당장 드릴 게 없어도, 훗날 대가를 치를 테니.

그러니 부디,

저를 죽이지 말아주세요.

신님———

……지금의 뮤에게, 그날 밤 있었던 일에 대한 기억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음 날 아침.

울다 지쳐 잠들어버린 부모님을 일으켜 깨운 뮤는, 비로소 제 힘으로 집 밖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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