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 뮤 (2)
* * *
#2
뮤의 탄생과 병세를 진찰했던 신관이 찾아왔다.
일전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생기발랄한 모습으로 침대 위에 앉아 있는 뮤와 그녀의 부모님에게, 드높은 하늘에 대한 경외심을 감추지 않으며 짧은 한마디를 건넸다.
『……이건, 기적입니다. 어찌 이런 일이……』
물을 주어도 더 이상 살아날 수 없을, 이미 말라 비틀어진 식물처럼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던 육체가 기적처럼 호전된 것을 모자라 아예 새로운 몸이 되기라도 한 것 같다고, 그리 말했다.
밖에 잘 나가지 못해 새하얗디 창백한 피부 등은 여전했지만,
뮤의 총명한 자줏빛 눈동자에선 이전과 비교할 바 없는 희망과 기쁨, 생기라는 것이 가득했다.
『부디 축복하소서.』
신관은 그런 뮤의 모습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제 눈앞에서 일어난 살아있는 기적에 다만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다.
그날은 이른 아침의 축제가 열렸다.
뮤가 좋아하던 케이크도, 평소 읽고 싶었던 책도, 그림책으로밖에 보지 못했던 멋진 동산 위의 구름과 반짝거리는 밤하늘 구경도, 원체 연약하여 한 번도 타보지 못했던 목마도……
뮤는 자신의 지병이 낫는다면 하고 싶었던 것들을 그날 원 없이 이루었다.
제 발로 걷는 풀잎 위는 발바닥이 참으로 따가웠지만, 그것이 기뻐서 웃음이 나왔다.
이건 고통이라고 보기에도 썩 민망한 수준이었으니까. 약소한 간지러움에 불과했던 것이었다.
폐부 깊숙이 들이마시는 맑은 바깥 공기. 뮤는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분명 형체도, 냄새도 없는 공기에 불과하건만 뮤에게는 생일날 케이크보다 맛있게 느껴졌다. 볼에 잔뜩 바람을 넣고서 몇 번이고 목구멍 너머로 삼켜보았다. 달콤했다. 행복했다.
집 안에서 조금만 걸어도 금방 지쳤던 허약한 체력은, 뮤가 산등성이 위를 하루종일 뛰어다녀도 전혀 문제가 없을 수준이 되었다.
때문에, 뮤의 부모님들은 자기 딸의 넘치는 체력을 감당하지 못해 중간중간 나무 기둥 위에서 허리를 꺾으며 잠시 쉬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주홍빛 노을이 하늘을 예쁘게 물들이던 날.
새하얀 원피스를 차려입은 뮤는 맨발로 잔디 위를 밟곤 그 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은하수의 찬란함을 담은 듯한 머리칼이 가닥가닥 나뉘어 나풀거리고, 생글거리던 미소에는 그 나이대 어린아이의 천연덕스러움이 깃들었다.
바깥 세상이란 이리도 즐거운 것이었다.
이런 즐거운 경험조차 해보지 못하고 이승을 떠나버렸다면, 자신은 정말로 죽어서까지 피눈물을 흘리며 후회했을 것이었다……
깊은 밤이 찾아오고.
풀벌레 우는 소리 속에 고요히 잠들어, 조금 전까지 밤하늘에 떠오른 별자리를 올려다보던 뮤를 그녀의 아버지가 조심히 업어 들어 집까지 데려갔다.
뮤는 그때부터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했다.
또래 친구를 사귀는 건, 의외로 뒷전의 일이었다. 그보다 흥미가 생기는 일을 먼저 시작했다.
뮤의 부모님 역시 딸의 뜻을 전적으로 따라주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엽고 어여쁜 딸이 똘망한 눈으로 간절히 부탁을 해오면, 들어주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1년 동안, 정말로 많은 것을 했다.
하나하나 열거하자면 끝이 없을 정도였다.
부모님과 함께 멀리 여행도 다녀와 봤다. 그곳에서 뮤는 동화 속 요정 같은 신비한 외모로 많은 이들의 열성적인 인기를 얻었다.
뮤는 그제서야 자신이 평범하지 않게 생겼다는 걸 작게나마 인지했다. 결코 나쁜 기분은 아니었으니까, 그럼 괜찮다고 생각했다.
뮤에겐 세상 모든 것이 신기하고 흥미로웠다.
직접 두 눈으로 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들 천지였다. 여태 책으로만 읽었던 것들이 제 눈앞에 펼쳐지자, 뮤는 과연 살아있다는 감각이 무엇인지 그때마다 깨닫는 것이었다.
매 순간이 짜릿하고, 늘 새로웠으며, 몸 아플 걱정 없이 논다는 것은 전혀 질리지 않았다.
10년간 억압되어 있던 환경에서 벗어나, 바라 마지않던 평범한 소녀 그 이상의 넘치는 체력을 가지게 되어버리자, 뮤는 그야말로 하나의 폭주하는 마력 열차가 되어버렸다.
가련한 소녀에게 사용하기엔 썩 과격한 표현이긴 했으나 비록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집안 사정상 불가능한 일이 있다면 깔끔히 포기했지만, 그 외의 것은 흥미가 생긴다면 반드시 꼭 이루고야 말겠다며 다짐하고는 그 말을 어떻게든 실천해버리는 것이었다.
또한, 놀랍게도.
뮤는 모든 방면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허약한 육체 탓에 여지껏 해보지 못했던 시도들을 하고 나서, 그것의 대부분이 비범한 성취를 단시간에 이루자 뮤의 부모님은 딸의 진로에 대해 어느 순간부터 깊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뮤는 무엇을 해도 대성할 아이였다.
좀 많이 활발해졌다는 것을 제외하고서라도, 한때 마을에서 이름을 날렸던 어머니와 아버지의 우월한 유전자를 이어받고, 독서를 통해 향상된 높은 지적 수준과 흘러넘치는 체력 등을 모두 지닌 뮤에게 불가능이랄 것은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딱 하나 걸리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뮤의 신분이 평민이라는 사실이었으나, 한 세기 전과는 다르게 제아무리 평민이라 할지라도 능력만 있다면 어렵지 않게 인정받을 수 있는 세상이 도래했다.
물론 아직 대륙 곳곳에 평민에 대한 차별이 만연하다곤 하나, 제국에서 가장 유명하고 강대한 황립 아카데미—— 프론티어의 최상위 클래스에도 평민 출신이 여럿 분포해 있었던 것이다.
그런 고민 아닌 고민이 지속되던 어느 날.
『……심심해.』
오늘의 하고 싶었던 것 리스트를 전부 채웠던 뮤는, 그래도 심심한 나머지 집구석에 가만 굴러다니는 길쭉한 무언가를 시야에 담았다.
뮤의 아버지가 젊었을 적 사용하던 낡은 검.
오랜 세월이 흘러 검파 부분의 가죽이 닳아 까칠해져서, 그대로 잡고 휘두르면 손바닥에 상처가 날지도 모르는 녹슨 검이었다.
어린 소녀가 다루기에는 위험한 물건이었다.
뮤는 그 무거운 검을 어렵지 않게 두 손으로 잡아 들었고, 부모님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마당에 나가서 검을 뽑아 들었다. 뻑뻑한 검집으로부터 쇳소리가 스릉거리며 얕게 울려 퍼졌다.
검이란 물건은 책에서 본 적 있었다.
오로지 검 하나만을 손에 쥐곤 불타오르는 전장에서 악귀처럼 날뛰던 어느 위대한 전사의 이야기 역시, 알고 있었다.
그때 묘사가 어떻게 되었더라.
물론 소설이니만큼 과장된 표현도 있었을 테지만, 분명 검을 가볍게 휘두른 것만으로 주변 기파를 크게 진동시켰다고 했다.
『흐얍.』
뮤는 묘사대로 검을 이리저리 휘둘러 보았다.
그러나 휙, 휙, 하는 소리만 날 뿐이지, 공기가 떨린다거나 주변에 있는 잎사귀가 춤을 춘다거나 하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힘이 약했던 걸까.
그렇다면 조금 더 세게.
휘이익—
『……』
이번에도, 별로였다.
뭐가 잘못된 거지.
당연히 처음 잡아보는 검인 만큼 묘사처럼 될 리가 없다는 걸 알았지만, 왠지 모르게 오기가 들었다.
지금까지 하고 싶은 것은 웬만하면 그대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오랜 숙련을 요하는 이런 무기술의 경우는 처음이었기에, 뮤의 가슴속에 잠들어 있던 호승심이 점점 고개를 드는 것이었다.
휙, 휙, 휙……
뮤 본인이 보기에도 참 아쉬운 검술이라 생각했다. 정말로 모든 걸 잘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을까.
아냐. 그래도 조금만 더 해볼래.
아직 포기하긴 이르잖아.
책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비록 9의 거짓이 섞여 있어도 1의 진실만큼은 그 안에 담겨 있었다.
뮤는 자신이 읽은 책에 적혀 있던 위대한 전사의 검결을 1이라도 구사하고 싶어 했다.
뮤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지금, 멀리서 어린 뮤가 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누군가 보았다면 솟구치는 경악과 공포를 감추지 못할 것이었다.
검을 처음 붙잡는 어린아이는 제 키만한 검을 제대로 들지도 못할진데, 뮤는 그것을 별로 어렵지 않게 휘두르는 것도 모자라 미약하게나마 형이 잡힌 검술을 펼치고 있던 것이었다. 마치 한평생 검을 갈고 닦는 데 일생을 바쳤던 전생을 깨우친 것처럼.
그것은 천재의 발로였다.
이제야 비로소 눈을 뜬 천재가, 마지막으로 온 호흡을 담아 일순간 자신을 제외한 세상을 정지 상태로 만들었다.
『……!』
순간, 뮤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검세가 나온다.
우우우웅—
오른쪽으로 틀어진 상체. 떨림 없는 몸.
혈도가 뜨겁게 타오르는 듯한 기묘한 열기.
시야가 쨍하게 물들고, 아릿하게 눈이 멀어버릴 듯한 감각 속에서 뮤는 길을 잃지 않고 두 손으로 잡은 검파를 꽉 쥐었다.
그렇게, 형체 없는 목표를 향해서.
사아악—
어깨 위로 올린 검을 그대로 내리긋는다.
『우리 딸, 네가 좋아하는 빵 사왔……?』
……탁.
뮤의 어머니가 놀라 손으로 입을 가렸다.
옆에 있던 뮤의 아버지는 들고 있던 빵을 저도 모르게 떨어뜨렸으나, 그것에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입을 떡 벌리며 경악을 숨기지 못하는 채였다.
세찬 바람이 일었다.
마당에 깊이 뿌리박은 나무의 잎사귀가 날카로운 바람에 찢겨 대각선으로 잘려 나갔다.
뮤는 그곳으로부터 한참 떨어진 장소에 있었다.
내리그은 검을 거두곤 뮤가 중얼거렸다.
『……아, 됐다.』
뮤의 검이 그린 반월의 잔상에,
검푸른 음영이 묻어나 있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났다.
친척을 만나러 고향에 들린 로르센 아카데미의 학장은, 어느 집 마당의 한구석에서 검무를 추는 한 소녀의 모습을 보았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녀의 나이가 이제야 중등부에 입학할 적기였고, 또 초등부 졸업 수준 따위는 이미 한참이나 전에 넘어버린 듯한 총명함을 검증하자마자.
학장은 뮤의 부모님에게 정중히 허리를 숙이며 뮤를 로르센 아카데미로 스카우트했다.
반대는 없었다.
오히려 좋은 기회였다. 딸에게도 또래 친구라는 것은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으니.
더군다나 로르센 아카데미는 제국에서도 위세 높은 명문 아카데미였다. 자리한 곳도 수도로부터 무척이나 가깝다.
뮤의 집안 사정을 고려해 전액 장학금 지원까지 약속했으니, 이보다 좋은 기회랄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뮤는 정작 그렇게 반겨 하지 않는 듯했다. 물론 검술이 재밌긴 했는데, 그것에 평생을 바치라 하면 또 고민이 되는 것이었다.
그보다는, 뭐랄지.
애석하게도 차라리 침대에 누워 좋아하는 책을 읽는 편이 더 좋았다.
그러나 뮤로서도 아카데미라는 교육 시설에 흥미는 있었다. 같은 나이대의 친구라는 것도, 슬슬 관심이 생기던 찰나였다.
지금껏 마을에서 뭇 소년들과 소녀들이 뮤와 어울리기를 원했으나, 그들은 왠지 모르게 뮤의 감성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일찍이 많은 걸 깨우쳐버린 탓일까. 자신과 동갑일 터인 아이들은 되레 한참이나 어려 보였다……
그렇게 반년 뒤.
눈물 섞인 배웅 끝에 뮤는 마을을 나섰다.
이제부터 정겨운 시골을 떠나 놀랍고 새로운 것이 가득한 제국의 중심으로 향한다. 부모님과 헤어진다는 것이 슬프기는 했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마차를 타고 도착한 장소에서 학장과 함께 뮤는 처음으로 마력 열차에 탑승했고, 짧은 시간 동안 뮤는 아주 환상적인 경험을 했다.
『……와아.』
열차에서 내린 뮤가 로르센 아카데미의 웅장한 풍경을 한눈에 담았을 때, 심장이 흥분으로 크게 뛰는 것을 느꼈다.
성적과 공부 같은 것에는 일절 관심이 없었다.
오직 흥미와 관심을 따라 진학한 아카데미였다.
그러니 여기서도 뮤는, 여전히 제멋대로였다.
신입생 뮤의 입학은 대대적으로 알려졌다.
본인이 나서서 뭘 한 것도 아니었는데, 굉장한 신입생에 대한 소문이 아카데미 내부에 절로 퍼져 나갔던 것이었다.
검술부 특별 진학 내정자.
일 년에 네 명밖에 뽑지 않는다는 전액 장학생.
멀리서 보아도 그 존재가 찬란히 빛날 만큼 아리따운 외모 하며, 뭇 남학생들의 순정을 자극할 만큼 청순하게 생긴 절세의 미소녀. 입학 초기부터 뮤를 향한 지성 없는 고백이 쏟아졌다.
당연히, 전부 거절했다.
알지도 못하는 남자와, 하물며 자기는 관심도 없는데 뭐라도 하나 접점을 만들기 위해 치근덕거리는 꼴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기가 예쁘게 생겼다는 건 진작에 알아차린 지 오래였으나, 그것이 직접적으로 귀찮다고 느낀 건 아카데미 입학 이후부터였다.
그래도 잘생겼다, 라는 뜻의 의미는 희미하게 알게 된 것 같아서, 그것만큼은 마음에 들었다. 확실히 객관적으로 살펴보았을 때 누가 못나고 누가 잘생긴 것인지는 판단이 가능했던 것이었다.
『순 거짓말이야.』
하지만 이내 뮤는 실망하고 말았다.
뭇 연애 소설에서 한 남자의 잘생김을 묘사하며 두근거리던 소녀의 설레임을, 정작 자신은 전혀 느끼지 못했던 까닭이다.
역시 소설이란 작가의 망상에 의한 거짓말이 일부 첨가되어 있던 것이었다……
신입생이었던 뮤는 입학하자마자 자신이 활동할 부를 이미 정해놓은 상태였다.
그동안 여러 가지 일을 해보느라 뜸하긴 했어도, 독서란 건 마치 습관처럼 하루에 한 권씩은 펼쳐 보고 있었다.
그간의 축적된 경험 탓일지 몰라도, 독서만큼은 변함없이 뮤에게 있어 감동과 재미를 꾸준하게 가져다 주었던 것이다.
그렇게,
뮤는 3월부터 도서관 관리를 시작했다.
아침에 잠깐 틈이 날 때, 점심 시간, 부활동 시간, 방과후부터 도서관의 문이 닫힐 저녁 시간까지.
뮤는 책 속에 묻혀 살았다.
책을 읽는다는 행위는 언제나 재미있었던 까닭에, 지루할 틈도 없이 뮤는 데스크에 기대거나 앉아서 조용히 독서를 했다.
……대략 2주쯤 그러고 있었을까.
『……흐으음』
뮤는 언제부터인가, 아카데미 도서관에 하루도 거르지 않고 꾸준히 드나드는 한 남학생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