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 회고 (1)
* * *
#1
“이거 맛있다, 유리. 너도 먹어봐.”
“응? 이게 뭐야?”
“젤리 같은 건데, 맛이 신기하네. 각자 맛이 다른가봐. 내가 방금 먹은 건 멜론이었던 것 같아.”
“그래? 그럼 나도…… 냠.”
제 2학구 에픽 클래스 기숙사.
불그스름하게 빛나는 조명만 희미하게 켜진 2동 기숙사 로비의 소파에서, 루비아와 유리는 늦은 밤의 밀회를 가지고 있었다.
사실 밀회라곤 해도 그냥 늦은 시간에 밖까지 나와서 수다를 떨며 간식거리를 집어 먹을 뿐이다.
어릴 때부터 계속 왕궁 안에서만 살아와 아르티나 국왕의 지도하에 일정한 수면 패턴을 지키며 밤 10시 전에는 무조건 잠들었던 유리였고, 그랬기에 또래 친구와 이런 깊은 밤에 같이 한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던 경험은 더더욱 없었다.
자그마한 일탈이라고 보아도 좋았다.
조금 나쁜 짓을 하는 것 같아서 심장이 미약히 두근거리기도 했다.
프론티어에 오길 잘했다고 생각하면서, 유리는 루비아가 건넨 노란색 젤리를 입에 던져 넣었다.
잠시 뒤.
유리의 표정이 찌그러졌다.
“……으엑, 셔!”
유리가 먹은 젤리는 상큼한 레몬맛이었다.
다만 신 것을 잘 못 먹는 유리였기에, 젤리를 먹자마자 혀를 쭉 빼밀면서 안쪽에 자연적으로 고이는 침을 연신 삼켜 댔다.
루비아가 준 것이니 이걸 그대로 뱉어내지도 못하고…… 결국 끙끙거리며 꾹 참곤 목구멍 너머로 꿀꺽 삼켰다.
“그, 그렇게 억지로 먹지 않아도 되는데……”
“…으으으, 아니야. 이런 것도 먹을 줄 알아야지. 편식은 나쁜 거라구.”
말은 그렇게 해도 상당히 강력한 후유증이었다.
손등으로 입가를 훔치던 유리는, 곧 소파에 앉아 다리를 휘휘 저으면서 루비아에게 물었다.
“루비아, 오늘은 언제 잘 거야?”
“……응? 졸리니?”
“아니아니, 전혀? 나는 괜찮은데 네가 많이 피곤해 보이는 것 같아서. 졸리면 들어가서 자도 된다구 말하려고 했지.”
루비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가? 하는 모양새였다.
겉으로 보기엔 평소의 루비아와 별다를 것 없는 생기였지만, 그 눈가 아래에 슬쩍 드리운 그림자는 역시나 숨길 수 없었다.
잠을 설치고 있는 걸까. 아마 그랬을 것이라고, 유리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밀회 아닌 밀회를 잠이 오지 않는다며 먼저 제안해 온 것도 유리가 아닌 루비아였으니 말이다.
“아하하, 그러게… 사실 조금 피곤하긴 한데, 졸리지가 않네. 왜 이럴까?”
루비아는 애매하게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유리의 말처럼 살짝 몸이 피로한 참이었다. 그런데도 잠이 통 오질 않아서, 평소 유리가 바라 마지않던 늦은 밤의 티타임을 넌지시 권했던 것이었다.
그렇게 벌써, 대략 삼십 분쯤 로비 소파에 앉아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글쎄, 언제 잠 한번 잘못 잔 거 아냐? 그때 패턴이 망가져서 몸이 엄청 피곤하지 않으면 잠들 수 없는 걸지도.”
“그런가? 으음, 그럴 수도 있겠네……”
요새 잠이 잘 오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잠깐 머릿속으로 고민하던 루비아는, 별안간 스쳐 지나가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에지오가 안 보였네.”
“……”
또 에지오 이야기다.
유리가 살짝 질린 표정을 짓든가 말든가 아무런 상관도 없이, 루비아는 오늘 하루 간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던 에지오의 모습을 떠올렸다.
에지오의 생활 패턴은 무척이나 단조로웠기 때문에, 언제라도 틈이 날 때마다 3동 체력단련장 부근에 향하면 에지오의 그림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1동 남자 기숙사는 물론이고 체력단련장에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며, 아예 에픽 클래스 부지 내를 벗어나버린 것 같았다.
물론 그렇게 이상히 여기지는 않았다. 아무렴 주말은 각자의 자유 시간이었으니까. 트램을 타고 멀리 나가서 가브리엘인지 하는 친구와 함께 놀 수도 있는 것이었다.
루비아의 골똘히 생각하는 얼굴을 지긋이 보던 유리가, 툭 던지듯 입을 열었다.
“걔가 그렇게 좋아?”
“……어, 어? 응? 뭐, 뭐가?”
얼빵한 루비아의 얼굴을 보며 유리는 픽 웃었다.
“얼굴에 다 쓰여 있거든. 저는 하루종일 그 뺀질한 남자애 생각만 하고 있어요, 라고.”
루비아는 얼굴을 붉히며 손을 휘저었다.
“아, 아냐. 그냥 친구가 걱정돼서……”
“얼씨구, 퍽이나 믿겠다.”
가소롭다는 듯 웃던 유리가 말을 이었다.
“걱정할 필요가 뭐가 있어? 길 가다 지 스스로 자빠진 거만 아니라면 아무런 위험도 생길 이유가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안전한 장소가 바로 여기 프론티어인데.”
“으, 응. 그야 그렇지만……”
말을 흐리던 루비아에게 유리는 덧붙였다.
“그리고, 걔가 어디로 갔는지 나는 좀 알 거 같거든.”
“……어? 정말?”
유리가 머리를 끄덕였다.
“응. 며칠 전에… 목요일인가? 나랑 걔랑 같은 수업 듣잖아. 거기 되게 엄청난 여교수가 한 명 있었는데, 걔를 따로 부르더라구. 수업 끝나고 잠시 자기랑 얘기 좀 괜찮냐면서. 딱히 들으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복도를 지나가다가 문이 열려 있어서 대화 내용이 조금 들렸거든.”
“교, 교수님이랑… 응… 뭐라고 했어?”
그때와 대화를 떠올리며 유리가 말했다.
“글쎄? 자세한 건 모르겠는데, 무슨 약속 잡는 거 같던데? 그게 아마 토요일이었으니까… 어, 오늘 맞네. 아마 그 교수 만나러 간 것 같아. 정확히 들은 건 아니라 아닐 수도 있지만.”
에지오를 강의 이후 개인적으로 호출한 교수는, 유리를 비롯한 수강생들에게 초감각특론을 가르치는 나디엘리 할렌니아였다.
처음 그 흉포하게 덜렁거리는 미지의 뭔가를 목격했을 땐 저도 모르게 경악했던 유리였으나, 곧 그것을 몇 번 접하니 익숙해지…… 기는 개뿔이, 언제 봐도 참 놀라운 가슴이라고 생각했다.
……뭐, 어쩌라고.
난 아직 어리거든요?
주변에 루비아 빼고는 아무도 없었지만 괜히 심술 부리면서 속으로 중얼거리는 유리였다.
아무튼, 나디엘리는 이번에 새로 에픽 클래스 교수진에 부임한 신임 교수였다.
듣기로는 프론티어에서 나디엘리의 놀라운 업적을 경력 삼아 석좌교수로서 데려왔다고 했는데…… 그 때문인지 나디엘리의 개인 연구실은 에픽 클래스 부지가 아닌 다른 곳에 위치해 있었다.
어디였더라, 분명.
제 4학구였나……
그때.
위이이이이잉——!!!
“……히야아악!”
“……가, 갑자기 뭐야?!”
갑자기 로비 내에 쩌렁쩌렁히 울려 퍼지기 시작한 경보음 소리에, 소파에 앉아 있던 루비아와 유리는 화들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헤, 헤윽……”
심장이 순간적으로 덜컹거렸다. 얼마나 놀랐는지 손을 부들부들 떨던 유리의 귓가로, 무감정하디 경직된 안내음이 들려왔다.
— 프론티어의 모든 학생 여러분께 긴급히 알립니다. 현재 시각으로부터 5분 전, 프론티어 제 4학구 루나틱관에서 원인 불명의 테러와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건물이 연쇄적으로 폭발할 위험이 있사오니 현재 외출 중이신 학생 분께서는 조속히 기숙사로 복귀해주시고, 제 4학구의 교직원 분들께서는……
웅성웅성……
기숙사 내부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무슨 일인지 확인하기 위해 잠옷 차림으로 로비에 뛰쳐 나온 여학생들이 몇 있었다. 선배들이 거주하는 위층 계단에서도 쿵쿵거리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로비 소파에 가만 앉아 있던 루비아 역시 소리가 흘러나온 천장을 올려다보면서 진정하려는 듯 가슴 위에 차분히 손을 얹었다.
“테, 테러…? 화재? 폭발? 프론티어에서? 정말로…? 이, 이런 일이 최근에도 있었나?”
“……”
“……유리? 무슨 일 있어?”
“……”
루비아처럼 고개를 꺾어 천장을 올려다보던 유리가, 별안간 심각한 표정으로 침음성을 삼켰다.
#2
『눈을 돌리지 마. 여기 있는 건 너야.』
#3
휘이이이——
……
세찬 바람이 불자.
가을 낙엽이 우수수 떨어졌다.
발에 채일 정도로 길거리에 만연한 그것을, 나는 사박거리며 밟았다. 묘하게 중독성 있는 소리였다. 아티팩트로 녹음해서 밤새 틀어놓으면 기분 좋게 잠들 수 있을 것 같은 편안한 기분이었다.
주머니에 든 재화를 짤랑거리면서, 한낮 정오의 따사한 햇살을 한 몸에 받았다. 가을 바람은 차가웠기에 어느 정도 밸런스가 맞았다. 그 때문인지, 나는 사계절 중 겨울 다음으로 가을을 가장 좋아했다.
하늘은 높고 파랗다. 미리 예약해 둔 상점을 향해 걸어가면서, 문득 저 넓은 하늘 위로 떠다니는 구름을 올려다보았다.
왠지 무섭다는 느낌을 받았다.
지금의 나는 상당히 근심 가득한 상태였으나, 높고 푸른 하늘만큼은 그저 흘러가는 대로 내 복잡한 마음이야 어쨌다는 듯 무관심하게 존재하고 있던 것이었다……
“하아.”
또 한숨이 나왔다.
근래 들어 습관적으로 한숨을 쉬는 일이 많아졌다. 걱정할 일도 많고, 생각할 일도 많았다. 그냥, 요즘 계속 그런 상태였다.
아카데미 졸업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나는 정말 성실하고도 꾸준한 학생이었으므로, 지금까지의 성적은 1학년 때와 비교해 놀랍도록 비슷한 숫자를 유지하고 있었다. 나보다 우직하게 한결같은 학생은 아마 로르센 아카데미 내부에는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러니까, 거의 전부 낙제점이었다.
……아, 필기는 빼고.
그것만큼은 유일한 내 자존심이었다.
아무튼, 이대로면 정말 유급이다.
그렇다기보단 낙제로 인한 강제 유급인가.
딱히 결석을 한 것도 아니었고, 정말 실기 평가로 인한 성적만 처참히 낮았을 뿐이었으니까.
듣기론 낙제점을 수집하다시피 한 불량 학생들만 따로 모아서 추가 시험을 치른 뒤에, 거기서도 낙제를 한다면 정말로 유급시켜버린다고는 하는데…… 솔직히 통과할 자신이 없었다.
지난 뮤의 열성적인 지도로 1년간 꽤 작은 성취를 이루긴 했는데, 진짜 작은 성취였는지라 겉으로 보기엔 티도 나지 않을 발전이었다.
……그래, 뮤의 지도로.
뮤 생각을 하니 또 착잡해진다.
이유는 별거 아니었다.
……아니, 이번에는 좀 별거였을지도 모른다.
뮤와 사귄 지 어느덧 일 년째를 맞이한다.
중등부 2학년 1학기 말부터 뮤와 알고 지내기 시작했으니, 그녀와의 인연은 벌써 2년이 다 되어 가는 셈이었다.
새삼 오래도 보고 지냈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정말 하루도 거르지 않고 얼굴을 보았었나. 이젠 눈을 감고 그림을 그려도 뮤의 초상화를 완벽히 그려낼 수 있을 수준이 되었을 것이었다. 물론 퀄리티는 장담할 수 없다……
11월의 초입을 넘어 중순이 되었다.
애석하게도 시간은 흐른다.
흐르고 흘러서, 오늘이 되었다.
……오늘은, 뮤의 생일이었다.
11월 19일.
뮤와 연인으로서 처음 맞이하는 그녀의 생일.
작년에는 선후배 사이로서 선물을 주었지만, 글쎄. 이번에는 조금 다른 의미가 되어야 할 것 같았다. 때마침 내가 근심이 그득한 이유 중 하나도 다름이 아니라 뮤의 생일 선물에 관련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모르겠다.
……언제부터인가, 뮤랑 예전처럼 지내는 게 힘들어졌다.
정확히는 뭐라고 할지.
뮤 쪽에서, 조금 달라진 거 같았다.
애정이 변했다는 게 아니다. 여전히 뮤는 날 너무나도 좋아했고, 시간이 날 때마다 내 얼굴을 보고 싶어 했다. 우리는 언제나처럼 뒤뜰 계단에서 만났다. 일상에 변함은 없었다.
그게, 문제였던 것 같다.
……뮤는 우리의 관계가 지금보다 더 나아가길 바라고 있었다.
지금처럼 정체되어 있는 순간이 아니라, 조금 더 진지하고 애틋한 연인 관계가 되길 바라는 마음을, 어느 순간부터 내게 숨기지 않고 드러내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하아아.”
다시금 한숨이 나온다.
뮤의 마음을 모르는 게 아니다. 가장 잘 알고 있는 건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었다.
그렇지만 곤란한 것이었다.
아무래도 불가능한 것이었다.
여태껏 내게 달라붙어 오던 뮤가 날 좋아한다느니, 사랑한다느니 하는 말은 수도 없이 많이 꺼내주었다. 나 역시, 몇 번은 사정 같은 부탁에 못 이겨 뭇 좋아한단 말 정도는 해주었다.
……그러니까, 사랑한단 말은 못 해줬단 얘기다.
“하아.”
이번으로 세 번째 한숨.
그것 때문이다. 요즘은 그게 가장 큰 걱정거리였다. 뮤의 헌신을 알고 있었고, 나 또한 그에 보답해주기 위해 여러 가지로 노력했다.
내 입장에서 뮤를 싫어하는 것도 절대 아니었거니와, 오히려 좋아하는 편에 가까웠던 나는 날 그렇게나 사랑해주는 뮤에게 그와 같은 마음으로 보답해주고자 했으나, 그게 말처럼 되는 것이었다면 지금 이러고 있지 않았겠지……
거짓말로 사랑한단 얘기를 꺼내는 건, 정말 못 할 짓이다. 내 스스로 그걸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말은 진심에서 우러나올 때 비로소 가장 가치 있는 궁극의 애정 표현이었다.
아무튼.
그런 이유에서, 며칠 전.
뮤와 처음으로 싸웠다.
……모든 커플은 싸운다. 불변의 진리다.
사실 싸움이라고 보기에도 애매한 투닥거림이었다. 뮤의 애정 어린 투정이 평소보다 좀 더 격했고, 그 때문에 내 곤란함의 정도도 평소보다 좀 더 올라갔을 뿐이다.
곧 자신의 생일이라 그런지, 조금 정도는 자신에게 집중해줄 수 없는 거냐며 살짝 글썽이던 뮤의 앞에서, 나는 그저 미안하단 말과 함께 내 쪽에서 뮤를 먼저 안아주는 것으로 작은 화해를 했다.
말하자면 아직도 우리 사이에 남은 앙금은 완전히 풀리지 않은 것이란 소리였다. 사실 이걸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문제가 딱 하나 있었다. 그게 필수였다.
……내가 뮤를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
말은 하지 않았어도 우리 둘은 알고 있었다.
그것 또한, 새로이 추가된 걱정거리였다.
뭐라고 해야 좋을까.
나는 지금 하나의 갈림길 앞에 서 있다고 보아도 좋았다. 회피를 택하며 뒤로 돌아갈 수도 없는, 오로지 양자택일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현재 내 처지를 조목조목 따져 보았을 때 가장 이상적인 선택지 역시 이미 제시되어 있는 상태였다.
나는 이제,
루비아를 떠나보내야 했다.
그리고, 뮤를 받아들여야 했다.
……그게 맞았다.
저 멀리까지는 그냥 이대로 직진하면 된다. 길거리도 널찍하고 한산하니 누군가와 부딪힐 염려도 없었다. 때문에 살포시 눈을 감고, 낙엽 위를 사박거리며 천천히 걸어간다.
루비아를 향했던 내 마음과.
현재 뮤가 내게 쏟아붓는 막연한 사랑.
뮤는 좋은 후배였다.
예쁘고 귀엽다.
이젠 부정할 생각도 없다.
가끔 날 보기 좋게 놀려먹기도 하지만, 나쁜 의도에서 장난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내 우스운 꼴을 보면서 뮤가 해맑게 웃으면, 나도 왠지 모르게 피식 웃게 되는 것이었다.
조금은 제멋대로이긴 하지만, 뮤는 틀림없이 착하고 다정한 아이였다. 그것도 분명한 사실이었다.
하물며 다른 남자에겐 일절 관심도 없이, 오직 나에게만 그 사랑을 퍼부어주기까지 한다. 이따금 내가 그 무거운 사랑에 눌려 질식해버릴 것 같은 기분도 느끼긴 했었으나…… 말했듯 나쁜 의도가 아니었으니까. 어쨌거나 날 진정으로 위해주기에 그런 행동들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 뮤의 마음도, 이해하고 있다.
날 좋아해주는 건 솔직히 말해서 아직도 이해가 잘 안 가긴 하지만, 이전과는 다르게 뮤에 대해서 많이 알게 된 나였다. 뮤가 제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게 된 이유 역시도, 뮤의 아픈 과거를 듣게 되면서 비로소 납득하게 되었다.
내가 마음 한구석에서 루비아를 놓아주고 오직 자기만을 바라보길 원하는 그 간절한 마음 역시도, 나는 이해하고 있었다.
당연히,
머리로 이해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다.
……또, 한숨이 나와버린다.
오늘은 주말이었다.
그랬기에 뮤와는 바깥에서 만나기로 했다.
이른바 데이트라는 것이었다.
다소 낯부끄럽지만 연인 사이가 서로 데이트하는 것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한 법이었다.
반대로 당당해져야만 했다.
물론 남의 앞에서 자신 있게 뮤와의 데이트 일정을 떠벌릴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지만서도……
아무튼.
다른 누구도 아닌 뮤의 생일이니까, 우리 둘이서 함께 외출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불과 어제였던가.
아직도 삐진 듯한 뮤와 약속을 하나 잡았다.
다만 그 말을 하기 전날에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면서까지 고민하고 또 고민하면서, 결국 그 어려운 한마디를 내놓았던 것이었다.
— 거기서 기다리고 있어. ……내일은, 너와 나에게 있어서 엄청 큰 의미가 될 수 있을 만큼 가장 행복한 하루로 만들어 줄 테니까.
— ……네?
그때 내 얼굴이 얼마나 붉었던가.
오글거린다고 하지 마라. 나름의 생각이 있어서 그랬다. 뮤도 내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 몰랐는지, 처음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선, 곧 웃음을 숨기지 않고 푸흡 하며 새된 소리를 냈다.
뮤는 기쁘게 눈물을 찔끔 흘리며 웃었다.
선배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자기는 엄청 엄청 기대할 거라고도 말했다.
……나 역시, 뮤의 앞에서 작게 미소 지었다.
“어서 옵쇼”
눈을 뜨고서 걸음을 지속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예약했던 가게의 간판을 발견한 내가 그 안쪽으로 거침없이 들어섰다.
주위에 금속 내음이 가득했다. 가판대에 널린 물건들을 조심스레 살펴보면서, 나는 외알 안경을 낀 주인장에게 말을 건넸다.
“그… 이틀 전에 주문했던 에지오 크라닐이라고 하는데요……”
“잠시만 기다리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가게 안쪽의 문을 열고 들어간 주인장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박스 하나를 들고서 나왔다. 박스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했던 내가 짧은 감탄사와 함께 그것을 도로 닫았다.
그리고……
스윽.
나는 슬며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이제 대금을 치를 차례였다.
“또 오십쇼”
그렇게.
차마 비싼 포장지까지는 구입하지 못하고.
귀여운 리본을 하나 다는 것으로 타협한 내가 텅텅 빈 주머니를 보면서, 오늘로 벌써 몇 번인지 모르겠을 만큼의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하.”
뭐, 그래도……
아깝단 기분은 전혀 들지 않았다.
#4
11월 19일 토요일.
오전 9시의 아침.
“——다들 알겠지만, 명심하도록. 우린 절대로 놀러온 게 아니다. 명문 로르센 마법부의 오랜 전통을 바로 너희, 41기 졸업 예정자인 마법부 3학년들이 나를 포함한 마법부 선배들의 의지를 이어받아 올곧은 정신으로 마학을 수양하기 위하여……”
제국 수도 헬리오스의 남서부, 로르센 아카데미가 위치한 곳으로부터 대략 3km쯤 떨어진 장소.
전통적으로 로르센 아카데미 3학년들의 졸업이 다가오면, 일정한 시기를 잡아 합숙 훈련이 이루어지는 그 넓은 숙소 주변 대강당의 단상에서, 윤기 흐르는 연갈빛 머리의 미청년이 그 누구보다 엄숙한 얼굴로 그리 외치고 있었다.
졸업생 대표 신분으로서 조교 자격으로 합숙 훈련에 참가한 그 청년은, 분명 이 자리에 있는 어느 누구보다도 진지하게 합숙의 의미를 설파하며 뭇 선배들의 뜻을 후배들에게 전달하려 했으나……
“우우우! 재미없다! 고지식하다!”
“그러지 말고 첫사랑 얘기나 해주세요!”
“맞아요, 슈리엘 선배님은 잘생겼잖아요! 재학 시절에 인기도 많았으면서! 얘기 좀 풀어봐요!”
“슈리엘! 슈리엘! 슈리엘!”
“……이 녀석들아! 놀러온 게 아니라니까!”
결국 연설 따위에는 관심도 없는지.
제 40기 로르센 아카데미 마법부 수석 졸업생—— 슈리엘 데 라파르트의 외침을 끊고선, 슈리엘의 재학 시절 이야기를 듣고자 그의 이름을 대강당이 떠나가랴 연호하는 것이었다.
결국 그 뒤로 한참이나 분위기를 다잡고 고리타분한 연설을 어떻게든 이어가려 하던 슈리엘이었으나, 그 역시도 마법부 합숙 훈련을 일찍이 경험해 본 적 있는 졸업생이었다.
고작 일 년 빠르게 졸업했다고 해서 뭐가 다른 것이 있겠는가. 지금의 자신처럼 단상 위에서 쩔쩔 매던 선배님의 모습이 어렴풋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선배님께서 고충이 많으셨겠군……”
슈리엘은 한숨을 내쉬며 손목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런 그의 옆에서.
“저, 슈리엘 선배님. 혹시 곤란하시면 제가 대신 조용히 시켜볼까요……?”
“…아니, 괜찮아. 마음은 고맙다. ——지금부터 입 밖으로 첫사랑 얘기 같은 말 한마디 꺼내는 녀석은, 내가 부르는 즉시 이 단상 위로 올라와서 자신의 흑역사를 하나씩 공개적으로 실토한다! 이상!”
마법부 3학년 대표 신분으로 짤막한 연설을 준비하던 루비아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슈리엘에게 넌지시 물어왔으나, 곧 강경책을 내세워 일동 침묵시킨 슈리엘을 보면서 어설픈 웃음을 지어 보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