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 회고 (2)
* * *
#5
간만에 유니폼이 아닌 사복 차림이었다.
뮤가 옛적에 사주었던 와인색 머플러를 두른 채로, 가을 바람을 맞으며 걸어 나갔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상점가였다. 주말이고, 또 정오라 그런지 방금 들렸던 가게의 주변 거리를 제외하고선 사람이 꽤나 북적거렸다. 활기 가득한 생기가 영 불편하기 짝이 없다. 시장통에 외치는 장사치들의 호객 샤우팅도 굉장히들 시끄러웠다.
뮤와 만나기로 한 장소는 여기서 대략 한 시간을 더 걸어가야 한다. 꽤 멀리까지 온 셈이다.
하지만 그나마 제일 가까웠던 주문 제작 장신구 판매점이 여기밖에 없었던 까닭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래도 늦지는 않겠지.
1시 언저리에 만나기로 했으니, 지금처럼만 걸어 가면 딱 맞춰 갈 수 있을 것이었다.
주머니에 든 박스를 만지작 거렸다.
케이스의 겉면은 까슬까슬하지만 부드러웠다. 척 만져 보기만 해도 고급스러운 물건이란 걸 알 수 있을 듯했다. 그래, 뭐. 비싼 돈 주고 구입한 건데 이 정도 값어치는 해야지. 혹시나 사기 당하진 않았는지 꼼꼼히 확인도 해놓은 상태였다.
뮤는 내 선물을 좋아해 줄까.
뮤라면, 반드시 그럴 것이었다.
선물을 받고서 날아갈 듯 펄쩍 뛰는 뮤의 모습을 상상하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뮤의 독특하디 활기찬 웃음은, 지금 상점가를 거닐며 뭇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생기와는 전혀 달랐다. 거부감이 없었다. 그냥 보기만 해도 나까지 절로 기뻐지는 웃음이었다.
그래……
나는 뮤를 좋아하고 있는 게 맞다.
그러니, 이제 결정할 때였다.
여기서 한 걸음 나아가면 절대 돌이킬 수 없기 때문에, 신중에 신중을 가한다는 그런 변명 따위로 내 우유부단함을 감춰 왔다.
어차피 루비아와는 그 이후로 대화를 나눠본 적도 거의 없다. 같은 아카데미 내부에서 활동하는 이상 당연히 몇 번 마주치기는 한다.
물론 마주치기만 한다.
루비아는 내게 말을 걸고 싶은 눈치였지만, 억지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나 역시도 루비아를 내 인생에서 완전히 배제하고 싶은 건 아니었으나, 글쎄. 지금의 나에게는 뮤라는 연인이 있었다.
……아직도 어리석디 미련하게, 루비아를 떠나보내지 못한 내 입장에서, 루비아와 다시 어설픈 관계를 구축하는 건 누구도 아닌 뮤에게 가장 못 할 짓이라고 생각했다.
만일 루비아와 평범하게 대화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은 내가 마음 한구석에서 루비아를 완전히 떠나보낸 이후가 될 것이었다.
그게 아마,
오늘이 될 것 같았다.
“……”
어느덧 상점가를 벗어났다.
인기척은 줄어들었고, 소음 또한 작아졌다.
입을 가린 머플러를 손으로 살짝 내린 채, 나는 내가 걸어왔던 길을 재탐색했다.
저기로 가면 1시에 딱 맞춰 갈 수 있을 거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옆을 돌아보았다.
조금 외진 곳으로 향하는 비탈길이 존재했다. 너머로 초목들과 풀숲이 보인다.
경험상 여기로 가면 아마 40분쯤 더 안 걸릴 테지. 두 번쯤 왔다갔다 해본 기억이 있다.
약속 장소에 늦지만 않게 도착하면 되는 일이겠지만…… 아무렴, 뮤는 약속 시간보다 한참 빨리 도착하는 타입이었다. 그런 맥락에서 아마 지금도 날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그것을 나도 잘 알고 있었던 까닭에, 기왕 만날 거 빨리 만나면 더 좋지 않은가—— 같은 생각으로 발 끝을 회전시켜, 평평한 길이 아닌 조금 울퉁불퉁한 곳으로 향했다.
#6
『아, 아. 기억 난다. 저때 아마 특히 참을성 없는 깜찍한 귀염둥이들이 저기에 셋 정도 있었을 거야. 하필이면 걔네들 눈에 걸리다니…… 네 친구는 얼마나 운이 안 좋은 거람. 그치?』
#7
11월 19일 토요일.
오후 12시 13분.
정오의 햇살을 맞으며 반짝이는 잎사귀 아래.
“놀러온 게 아니라고는 해도 말이다, 루비아.”
“네, 선배님.”
고목 지팡이와 마법부 학생들이 먹을 식자재 구입을 위해 준비된 크고 아름다운 재화 주머니를 짤랑거리며, 울창한 숲 사이의 길을 거닐던 슈리엘과 루비아가 있었다.
“가끔은 식당에서 해결해도 될 것을 굳이 숙소에서 조를 나누어 직접 음식을 해먹는다는 선배님들의 발상…… 솔직히 이건 누가 봐도 캠프의 그것에 가깝다고 생각은 한다만…… 무얼, 이런 즐거움조차 없으면 확실히 기운은 빠지겠지. 작년 경험자로서 이해는 하고 있다.”
“아하하… 그래도, 재밌을 거 같아요. 같은 반에서 지내던 애들끼리 한 장소에 모여 직접 같이 밥을 해먹는다니…… 뭔가 두근두근거리네요.”
슈리엘은 픽 웃었다.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확실히 작년에 재미는 있었지. 물론, 녀석들의 희망사항에 따라 식자재를 구입하러 온 우리 입장에선 그닥 달가운 일은 아니지만 말이야……”
마법부 3학년들의 인원 수가 인원 수인 만큼, 먹여야 할 입이 산더미였다. 돈이야 충분하다곤 하나 들릴 상점만 해도 열 군데가 족히 넘을 듯했다. 슈리엘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원래라면 다섯 명 정도 와서 각자 짐을 분담해야 했겠지만, 구태여 슈리엘과 루비아 둘이서 식자재 조달을 맡은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 자리에서 아공간(???) 같은 공간계 마법을 세밀히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이 루비아밖에 존재하지 않았던 까닭이다.
다만 로르센 아카데미 정도 되면 부르는 게 값이라는 아공간 아티팩트를 보유하고 있긴 했겠으나, 안타깝게도 합숙 이전 누군가 이미 서류를 작성하여 단기간 대여해 간 상태였다.
그렇기 때문에 유일한 공간계 마법 활용자인 루비아가 아티팩트의 대타로 나섰다.
공간계 마법은 어쩌면 차원에 간섭하는 영역이었기에, 누구나 쉽사리 다룰 수 있는 종류의 마법이 아니었다. 슈리엘마저 그 위험성을 인지하고서 다른 영역의 마법을 전공했다.
그러나 루비아는 달랐다.
무려 초등부 6학년 시절부터 누구의 가르침도 없이 스스로 공간계 마법의 기초를 깨우친 것이었다.
과연, 로르센 아카데미 개교 이래 역대급 재능이라 칭송 받는 마법 천재다웠다. 슈리엘은 루비아의 그 뛰어난 천재성을 인정하고 있었다.
자신마저 한 수 접고 들어가야 할 만큼, 루비아는 마학에 관련하여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의 우월함을 갖추고 있었다.
그것도 루비아가 성씨 붙은 귀족이 아닌 저 외딴 시골 마을에서 온 평민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더욱 놀라운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물론 슈리엘은 솔라 제국 라파르트 백작가의 우수한 장남으로서 평민을 함부로 차별하지 않는 훌륭한 인품을 지녔던 까닭에, 루비아의 재능을 시기하며 수업 외적으로 괴롭힘을 가한다거나 그러한 일은 단언컨대 절대로 없었다.
오히려…… 호의를 가졌다면 모를까.
정작 말은 덤덤히 하면서 루비아와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슈리엘이었으나, 그의 목소리 끝이 살짝 떨리고 있다는 사실은 아마 슈리엘의 어머니만이 눈치챌 수 있을 것이었다……
짹짹거리며 지저귀는 새들의 울음소리를 배경 삼아, 슈리엘은 문득 왼편의 루비아에게 말을 건넸다.
“곧 루비아 너도 졸업하겠구나.”
“아, 네. 그렇죠……”
“졸업하는 심정이 어때?”
“음……”
잠시 고민하던 루비아가 대답했다.
“조금, 시원섭섭하네요. 그동안 아카데미에 정도 많이 들었구…… 뭔가 실감이 안 난다고 할까요. 입학한 게 엊그제 같은데, 눈 떠보니 졸업이라니… 에헤헤, 역시 잘 모르겠어요.”
“이해한다. 나도 지금 아카데미를 떠나서 아카샤의 별에 들어온 지 벌써 1년쯤 된 몸이긴 하다만, 아직도 가끔 아카데미 시절이 그리울 때가 있지.”
“그런가요…… 아, 맞아요. 거기 생활은 어때요?”
“음? 아카샤의 별?”
“네에.”
“뭐… 그곳에선 내가 제일 최연소이자 하급 마법사니까. 잡일도 일부 도우면서 선배 마법사님들의 가르침을 받고 있다.”
“슈, 슈리엘 선배님이 잡일을요……? 헤엑.”
“수석 졸업이라곤 해도 결국 작은 물에서 가장 큰 물고기였단 셈이지. 알다시피 아카샤의 별에 소속된 마법사는 기본 위계만 해도 엑시(6)를 가뿐히 넘어서니까.”
현재 슈리엘의 마법 위계는 펜테(5)였다. 아카샤의 별 소속이란 꼬리표를 달려면 아직 1위계가 더 남아 있는 상태.
그 때문에 재능을 인정받아 일찍이 거대 마탑 안에 발을 들이긴 했어도 아직까진 정식 연구에 뛰어들진 못했던 것이었다.
“루비아, 너도 이제 펜테였나?”
“아, 네. 올해 초에……”
슈리엘이 놀라 눈썹을 들어 올렸다.
“올해 초? …그렇군. 내가 졸업한 지 몇 개월 만에 그리 빠른 성취를 이루었다는 건가…… 역시 너다, 루비아.”
“아, 아뇨. 다 선배님이 재학하시면서 절 많이 지도해주신 덕분이죠. 막상 제가 한 건 별로 없어요.”
“하나를 가르치면 스스로 열을 깨우치는데 오히려 그런 너에게 무얼 가르쳐야 하나, 싶었던 게 바로 나였다. 루비아, 너는 나보다 훌륭해. 겸손함도 좋지만 마법사의 세계에선 지나친 겸손은 되레 화를 부른다는 걸 가급적 명심하는 게 좋아.”
“네, 네에…… 죄송해요……”
“……죄송하라고 한 말은 아니다만. 아무튼.”
슈리엘은 잠깐 발걸음을 느릿하게 만들었다.
그러다가,
“루비아.”
“네, 선배님.”
“졸업하면 어디로 갈 생각인가?”
“……졸업하면요?”
“그래.”
슈리엘은 루비아를 보지 않고 말했다.
목이 조금 칼칼했다. 물이라도 마시고 싶은데, 수통을 챙겨 오지 않았다. 상점가에 들어서면 하나 구입해야겠다고, 그리 생각했다.
타박, 타박.
“아카샤의 별은 기본적으로 유망하며 재능 있는 신입 마법사들의 입탑을 언제든지 환영하고 있다. 물론 그 조건이 더할 나위 없이 빡빡하긴 하다만, 루비아 너라면 틀림없이 통과할 수 있겠지. …아니, 그쪽에서 먼저 접근을 해왔을 수도 있을 거다. 네 재능은 정말 특별하니까.”
“……”
“무엇보다 루비아, 네가 원하는 진로 방향도 어렵지 않게 거기서 정할 수 있을 거다. 아카샤의 별은 본디 세 개의 마학파를 흡수하며 탄생했으니까 말이지. 특히나 다루기 어렵다는 공간계 마법 또한 아카샤의 별이 가장 많은 성과를 올렸다. 그쪽으로 진출하길 원한다면 아카샤의 별은 네게 아주 알맞는 보금자리가 될 거다.”
“……”
“아, 그렇다고 해서 내 말에 너무 부담을 갖지는 말아라. 나는 사실을 말하고 있을 뿐이야. 네 마학에 관한 탁월한 재능은 어디 가서 썩히기엔 내가 다 아까울 지경이니 말이다. 아무렴 대륙 제일의 마탑에 가서 성취를 이루는 것이 좋지 않겠냐, 같은 의미였다.”
“……”
“……정 네가 입탑하는 것이 싫다면 그것 또한 너의 자유다. 너의 미래를 내가 결정할 권리는 어디에도 없어. 하지만, 개인적으로 그러한 바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주길 바란다. 무엇보다, 나 대신 잡일을 대신 맡아줄 후배가 들어와주면 나도 편할 것 같아서 말이지, 하하하……“
“……”
“……농담이 별로였나? 미안하다. 이런 데는 익숙하지 못해. 기분이 나빴다면 사과하마.”
“……”
“음, 아니. 그냥 권유 자체를 없던 걸로 하지. 너무 갑작스러웠던 것 같기도 해. 네가 찬찬히 생각하면 될 일인데 말이다. 그러니……”
“……”
그쯤 얘기를 마쳤을 때.
——탁.
“……”
슈리엘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타박, 타박.
……뚝.
——다시, 한 번.
타박, 타박.
……뚝.
“……”
발걸음 소리가.
자신의 것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대체 언제부터?
“……루비아?”
슈리엘이 돌아본 그곳에는.
휘오오오……
아무도 없는 비탈길 위를 스치며 지나가던, 날카로운 바람 한 줄기만이 자리할 뿐이었다.
#8
『녀석들, 취향도 참 고약하단 말이지. 쟤도 그럭저럭 봐줄 만한 신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결국 남자라는 이유로 후보에서 탈락했지 뭐야? 물론 결계 속으론 딱 한 명만 데려갈 수 있어서 그랬던 것도 있었겠지만. 후후……』
#9
날씨는 좋았다. 바람도 선선했다.
놀기 좋은 최적의 날씨가 있다면 바로 오늘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화창하디 화사한 날이었다.
그렇게 좋은 날이었다. 오늘은 특히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
가벼운 발걸음으로 비탈길에 들어섰다.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와, 잎사귀를 훑으며 찬찬히 불어와 내 콧잔등을 간지럽히는 풀내음. 썩 마음에 들었다. 역시 북적거리는 길거리와 상점가 보다는 이런 장소가 훨씬 편하고 좋았다.
주머니에 든 그것을 습관처럼 만지작거리며,
비탈길을 걸어간 지 5분쯤.
“……응?”
……
짹짹거리던 새들의 울음소리가 어느 순간 멎었다.
쨍쨍하게 내리쬐는 태양은 여전히 저 높은 하늘 위에 떠 있었는데, 어째서인지 약간 주변 기온이 내려간 것 같았다. 조금 추웠다.
바람이 차가운가 하면 그것은 또 아니었다.
이유 모를 오한이 내 어깨와 등 뒤를 뒤덮기 시작했다. 굉장히 께름칙한 감각이었다.
뭐지, 하면서도 머플러를 꾹 눌러 썼다.
그렇게,
갑자기 닥쳐온 이상현상을 무시하며 딱 한 걸음 내딛었을 찰나——
“……어?”
그 한 걸음.
한 발자국으로 주변의 모든 환경이 바뀌었다.
사아아아……
“……!”
온몸의 털이 쭈뼛 위로 솟았다.
일순 등줄기를 타고 내달리는 소름.
“뭐, 뭔……”
자다가 가위에 눌렸을 때처럼 몸 하나 꼼짝 못 하는 상태에 걸려버려서, 나는 자리에 가만 선 채로 입술을 파들파들 떨어댈 수밖에 없었다.
퍼억— 퍼억—
지저귀던 새들의 몸체가 돌처럼 굳어, 방금까지 딛고 서 있던 나뭇가지 위로부터 바닥을 향해 머리부터 추락한다.
스르르르……
방금까지 잎사귀 사이로 내리꽂히던 햇살의 빛기둥은 그 길이가 점점 짧아지더니, 결국 하늘 위로 모습을 감춰버렸다.
나를 위시한 주변 일대가 천천히 묵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거무죽죽한 흙바닥이 어둠처럼 새까만 빛깔로 변했다. 깊은 늪지대처럼 까마득한 어둠이었다.
사르르르……
주변 식물의 파릇한 생기가 순식간에 시들어 간다. 검게 변질되어 쪼그라든 이파리가 힘을 잃고 바삭거리며 흙바닥에 떨어졌다.
“뭐, 뭐야……?”
당황하며 주춤거리는 내 귓가로.
기기기기기긱——
알 수 없는 소음이 어디선가부터 울린다.
쇠를 금속으로 미친 듯 긁어대는 끔찍한 소리 같기도 했고, 계속 듣고 있으면 귀가 멀어버릴 것처럼 시끄럽디 속삭이는 군중들의 목소리 같기도 했다.
나는 덜덜 떨리는 손을 간신히 들어 양 귀를 틀어막았으나, 그것은 곧 손등을 뚫고 내 뇌를 직접적으로 헤집는 듯싶었다.
이윽고.
파랗고 높았던 하늘은.
어느샌가 낮과 밤이 뒤바뀐 것처럼, 검은 물감으로 잔뜩 칠해져 있었다.
어찌나 하나도 남김없이 꼼꼼하게 칠해버렸는지, 반짝거리는 별자리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의 불길하고 새까만 칠흑이었다……
숨이 가쁘다.
온 신경계가 타닥타닥 타오르고 있었다.
오른손으로 얼굴을 덮은 채 허리를 구부려, 사정없이 떨리는 눈동자를 어떻게든 진정시키려 했다.
“하, 하아, 하아, 하아……”
그렇게,
빛이 싹 사라져버린 어두운 숲속에서.
——루비아아아아아아!! 이런 씨발!!!
“……!”
충격으로 정신이 확 들었다.
가깝지만 먼 곳에서 누군가의 절규가 들렸다.
굉장히 처절한 외침이라, 나도 모르게 화들짝 놀라며 소리의 발원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니, 그것보다. 잠깐만.
방금 뭐라고 했지?
내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면, 저 목소리는 분명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경직된 머리가 팽팽히 굴러간다. 연속적인 사고가 끝도 없이 이어진다.
……빨리.
여기서 빠져나가야 해.
뮤가 날 기다리고 있다.
지금이 몇 시지?
근데 방금 누가, 루비아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나?
루비아가 여기에 있다고?
정말로?
그렇지만.
지금은 위험해.
지금 나가지 않으면 죽을지도 몰라.
루비아가 죽는다.
……루비아가, 죽는다고?
아냐, 동명이인일 수도 있잖아.
너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
도망칠 곳을 빨리 찾아.
그리고 여기서 나가.
나가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어.
기회는 충분해.
당장 뒤를 돌아서 그대로 직진해.
그리고——
——깨져!! 깨지라고!!! 루비아를 내놔, 이 개새끼들아!!!
다시 한번 절규 섞인 외침이 들려온다.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인가?
기시감이 든다.
올해 초 아카데미 내부에 공연히 울려 퍼졌던 졸업생 대표 연설에서, 어렴풋이 들어본 것도 같은 익숙한 음성이었다.
하지만 그때와는 전혀 다른, 정말 처절하고 목이 찢어질세라 핏줄을 세운 채 벽력 같은 외침을 토해낸다는 느낌이어서…… 결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연장된 생각은 이윽고 어딘가로 향한다.
“……”
나는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남자치고는 무척이나 작은 손이다.
검이야 붙잡고 휘두를 수 있는 수준이 겨우 되었긴 했으나, 제대로 된 검술은 아직 구사하지도 못하는, 그런 연약한 손바닥이었다.
파직, 파지직——
마력을 한계까지 끌어올려도 미약한 스파크가 파직거리는 게 끝이었다.
애당초 기초 마법 몇 개 빼고는 다룰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위계로 따지면 디오(2)는 커녕 평범한 에나(1) 수준에 그칠 게 분명하다. 어쩌면 그보다 더 낮을지도 모르지……
그래.
이런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다고.
너는 여기서 도망치는 게 답이야.
그리고, 이곳으로부터 탈출해서 상점가로 재빨리 달려간 뒤에, 어떻게든 실력 좋은 사람을 구해서 여기로 데려와야……
“……”
……그렇게 되면,
언제가 되어 여기에 돌아오는 거지?
다짜고짜 말한들 이 상황에 대해 믿어나 줄까? 사람들은, 제 목숨이 위협당할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순순히 협력을 해줄까?
아닐 터였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생판 모르는 타인을 위해 제 목숨을 걸지 않는다.
피부 위로 느끼기론 결코 수준 낮은 결계 따위가 아니었다. 평생토록 느껴본 적 없는 죽음의 손아귀. 그게 내 목을 점차 조여오고 있었다. 지금 나보다 심각한 건 저쪽이겠지. 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다.
신전, 가능하면 신전을 찾아가는 게 좋다. 이런 불길한 기운에 대항하기론 신전 소속의 신관과 성기사들보다 탁월한 능력을 갖춘 이들이 없었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신전은 이곳으로부터 두 시간 거리에 있었다.
“……”
애초에 나갈 수 있을지도 의문이잖아.
그럼, 나는 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아니.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어릴 적 연못에 빠진 루비아를 보자마자, 일말의 고민도 없이 본능적으로 뛰어들었던 것처럼.
할 수밖에 없는 거였다.
“……”
……스윽.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고급스러운 케이스에 담겨, 예쁜 리본으로 묶인 작은 물건. 조심히 그것을 손바닥에 담아 시들어버린 풀숲 위에 놓았다.
고개를 들어 나무를 올려다본다.
사각— 사각—
뾰족한 나뭇가지 하나를 집어 들어서, 몇 번 쭉쭉 그었다.
이것으로 위치는 기록했다.
기억상에도 똑똑히 집어넣었으니, 이곳에 다시 찾아오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저것만큼은 잃어버려선 안 되었기에.
스윽.
뮤가 내게 선물해 준 머플러 역시 돌돌 풀어서, 그 위에 덮어 씌우듯 놓았다.
“……”
나는 조용히 생각했다.
……뮤.
기다리고 있을 텐데.
지금부터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날씨는 좀 더 추워질 거다. 옷은 좀 따뜻하게 입고 왔으려나. 그랬으면 좋겠다. 아직 겨울은 아니긴 해도, 뮤가 겨울철 항상 두르고 다녔던 베이지색 머플러. 오늘만큼은 두르고 왔으면 좋겠다.
분수대 앞 광장에서, 나와 연인으로서의 첫 생일을 맞이하며, 그렇게 행복한 하루를 보내길 잔뜩 기대하고 있을 것이었다.
나 또한.
그러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하……”
이제야, 루비아를 포기하겠다고 결심했는데.
온전히 나만 바라봐주었던 고마운 뮤에게 드디어, 뮤가 바라 마지않던 선물과 함께 나 역시 앞으로도 뮤를 계속 좋아하겠음을.
……아니.
너를 사랑하겠음을, 말하려 했는데.
너무 늦긴 했지만.
비로소 내가 내 마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랬었는데.
“……씨발.”
나는 참지 못하고 이를 뿌득 갈았다.
철분 섞인 피 맛이 흐르는 혓바닥 사이로, 영문 모를 짠맛 또한 스며들었다.
왜, 글쎄.
나한테만 일어나는 것 같은 이러한 불행들 탓에, 머리끝까지 차오르는 분노를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심장이 따가울 정도로 날 격렬히 쑤셔대는, 뮤에 대한 미안함을 도저히 주체할 수가 없어서.
“씨발, 씨발… 씨발……”
눈꺼풀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이, 턱 끝에 대롱거리며 결국은 땅바닥을 향해 뚝 떨어지고 만다.
……주먹을 꾹 쥐었다.
이제는 결정을 내릴 때였다.
희망을 놓지는 말자. 가장 중요한 건, 가급적 빨리 여기서 나간 뒤에 뮤를 만나러 가는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선 지금 저 남자가 외치고 있는 이름의 주인이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인지 확인한 다음, 맞다면 그녀의 생존이 확실하게 이루어져야만 했다.
위험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으나, 반드시 내 생각처럼 되어야만 했다. 그렇다고 당장 구하기는 힘들 거다. 순탄히 흘러갔다면 루비아의 이름을 저리 처절하게 외치고 있진 않았을 테니까.
전부 어려운 일이었다.
……무척이나.
가슴으로부터 끓어오르는 폭발적인 열기가, 오한에 잠식되었던 내 몸을 뜨겁게 덥혔다.
사위가 쨍한 주홍빛으로 강렬히 물들고, 나는 자리에 굳어 미동도 없었던 발걸음을 그제야 한 번 앞으로 옮겼다. 평소보다 무거운 파동이 울려 나간다.
터벅.
뒤가 아닌 앞을 향해 걷는다.
“……”
소리가 난 근원지를 향해서, 나는 뛰기 시작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