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차버린 소꿉친구와 전 여친이 같은 반이라 곤란하다-32화 (32/201)

〈 32화 〉 회고 (3)

* * *

#10

파지지직——

소리가 난 곳은 그리 멀지 않았다. 그렇게 생생히 들릴 정도면, 어느 정도는 가까이 있다는 뜻이었다.

시야는 어두캄캄하다. 얼마 없는 마력을 끌어올려 희미한 스파크를 일으킨 다음에, 그것을 등불 삼아 수풀을 헤쳐나갔다.

시들었다곤 해도 여전히 잎사귀는 날카로웠던 까닭에, 맨살이 닿을 때마다 핏방울이 맺히며 생채기가 하나둘씩 그어졌다.

이 정도 따가움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포기했고, 그 까닭에 이보다 더한 대가를 반드시 받아야만 했으므로.

되레 자그마한 격통들이 쌓이고 쌓여 내 비틀거리는 정신을 꽉 붙잡게 해주었으니, 차라리 이 편이 훨씬 나았다.

“열어어어어어!! 열라고!! ——꿰뚫는 냉기여, 오라!!”

음산한 숲을 빠르게 가로지른다.

목소리가 가까이서 들린다.

어느 수풀 너머에서, 회색 코트를 차려입은 남자가 바락 외치며 주문을 외는 모습을 보았다.

우우우웅—

긴 시동어 이후에.

강렬한 마력 파동이 퍼져 나갔다.

쐐애애액—!

냉기 서린 푸른빛의 마법진이 다중적으로 겹치며 펼쳐지고, 남자가 활짝 펼친 손바닥 앞에서부터 조형된 거대한 얼음의 쐐기가 폭발적인 충격과 함께 전방으로 발사되었다.

카가가강——!

분명 눈앞의 모든 걸 꿰뚫고 나아갈 것처럼 돌진하던 그 얼음 덩어리는.

곧 아무것도 없는 허공 앞에서 움직임을 멈추더니, 가장 날카로운 끝부분에서부터 허망하게 부서져 버렸다.

“제길… 제길……!”

초조해 보이던 남자가 이번에는 제 손에 푸른 마력을 칭칭 두른다.

키이이이잉——

내가 일으킨 마력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의 강렬한 빛이 터져 나오고, 이를 악물었던 남자가 두 손에 칭칭 감긴 고순도의 마력을 그대로, 방금 얼음이 깨부숴졌던 허공을 향해 휘두른다.

콰아아아아앙—!!

귀가 쩌렁쩌렁할 정도의 굉음이 일었다.

바위도 부술 수 있을 것만 같은 어마무시한 위력. 만약 내가 맨몸으로 저 일격을 맞는다면, 아마 생을 장담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런데도.

남자는 끝내 제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

“하아, 하아… 큭……”

가히 폭발적인 위력에 남자 역시 온전치 못했다.

찢어진 손등 위로 선혈을 주륵 흘리면서, 결국 헛된 주먹질이었음을 깨닫곤 가쁜 숨을 내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대체, 대체 왜, 이런 일이……”

남자가 문득 오른편을 돌아보았다.

“……너는…?”

그곳에는 내가 있었다.

흔들리는 눈동자. 연갈빛 머리칼. 곱게 생긴 미청년. 그 언젠가 겨울날 보았던 사람과 아주 똑같이 생긴 얼굴이었다. 졸업생 대표 연설에서 어렴풋이 들었던 이름 역시도, 기억하고 있었다.

마법부인 루비아의 선배였던.

슈리엘 데 라파르트.

나는 슈리엘을 내려다보지 않았다.

이유는 잘 모르겠으나, 지금 내 정신은 아주 침착했다. 나 혼자 그렇다고 느끼는 것일 수도 있었다.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다.

슈리엘이 아닌 방금 전 슈리엘의 마력이 폭발했던 곳에 시선을 향하며, 그에게 조용히 물었다.

“로르센 아카데미 졸업생 슈리엘 데 라파르트 선배님, 맞으시죠?”

“……맞다만.”

잠깐 상황을 이해하려 미간을 찌푸리던 슈리엘은, 곧이어 내게 말했다.

“그런 너는…… 분명, 통합학부 2학년… 아니, 지금은 3학년이겠군. 이번 졸업 예정인 에지오 크라닐이었던가.”

“……예?”

슈리엘의 입에서 내 이름을 들을 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나는 무심코 놀랍다는 듯의 반응을 보였다.

“아, 다른 사람인가. 내가 착각했나? 미안하다.”

“아뇨, 맞습니다. 맞는데… 제 이름을 어떻게…”

슈리엘과 나는 아무런 접점이 없었다. 아카데미 내에서 마주친 적도 아예 없었을 거다.

내가 슈리엘의 모습을 제대로 본 건, 올해 초에 있었던 졸업생 대표 연설 때 말고는 전무했다. 그런데도 그가 내 얼굴만 보고서 이름을 말한다는 것이 여간 신기했다.

슈리엘이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말했다.

그는 나와 같이 옆을 보고 있었다.

“……못 믿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 네 친구인 루비아가 저 안에 있다.”

“……”

“합숙 준비를 위해 상점가로 향하는 도중 머리에 뿔 달린 것들이 루비아를 끌고 여기까지 와서, 저 이상한 결계를 펼치고는…… 그대로 저 안에 데려갔다. …미안하다. 내가 옆에 있었는데, 네 친구이자 나의 후배를 지키지 못했어. 전부 내가 부족했던 탓이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

“……”

역시 내가 아는 루비아가 맞았다.

다만 루비아의 이름을 언급하며 구태여 나의 친구라는 수식어를 붙인 까닭은, 이상한 일이었으나 왠지 그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단 하나밖에 없는 것이었다.

……슈리엘에게, 루비아가 내 얘기를 언젠가 해주었던 것이었겠지.

내 얼굴까지 보고서 딱 알아낼 정도면, 따로 사진이라도 보여주면서 설명해 준 게 아니었을까.

“……”

그런 건 지금 중요하지 않다.

슈리엘의 말에서 포인트를 집어 골라낸다.

머리에 뿔 달린 것들이라고 하면.

마족을 말하는 건가.

예상대로, 심각한 상황이다.

……엄청나게.

내가 알기론 슈리엘 데 라파르트는 작년 마법부 수석 졸업생이었다. 그 총명함과 우수함을 인정받아 이번 연도에 아카샤의 별 최연소 하급 마법사로 들어가게 되었다던가.

웬만한 고등부 졸업생들도 2단계 시험부터 걸러지는 무시무시한 곳이었으니, 그 시험을 전부 통과한 슈리엘은 과연 수준급의 마법사라고 부를 만했다.

그 슈리엘도 뚫지 못한 결계였다.

그렇다면,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절망하지 않는다.

“선배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가볍게 운을 띄웠다.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녜요. 마족에게 끌려간 루비아가 지금 무슨 짓을 당하고 있을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 아닙니까?”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도저히 부서지질 않아. 마족의 결계는 너무나 비상식적인 구조를 갖고 있어서…… 내가 알고 있는 지식으론 파훼 시도조차 불가능하다. 강도마저 내 마력의 세기를 아득히 초월한 것 같아. 이대론, 할 수 있는 게 없어……”

그의 마음은 이해하고 있다. 슈리엘은 나보다 뛰어나고 똑똑하니까, 상황을 객관적으로 판단했을 때 결계를 부술 수 있는 가능성이 1도 없는 것을 알아내고선 금세 절망해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포기하고 싶지는 않겠지. 주먹을 꾹 쥔 채로 입을 다물고 있는 슈리엘의 모습이 그 증거였다.

“……아카데미 후배를 이런 일에 휘말리게 해서 미안하군. 하지만 이젠 방법이 없다. 여기서 가급적 빨리 나간 뒤에, 신전에 도움을 요청해야 해. 그것 말고는 더 이상——”

“그건 안 돼요.”

“……”

타박, 타박.

나는 주저앉은 슈리엘을 지나쳐서.

생성된 얼음이 녹아 물이 흥건한 흙바닥을 딛고 선 뒤에, 슈리엘의 말처럼 환상 같이 일렁거리는 결계를 내 앞에 두었다.

파지지직—

“…큭!”

그것은 일정 반경을 감싸고 있는 것 같았다.

투명하기 그지없었으나, 손끝이라도 살포시 갖다 대면 이유 모를 스파크가 튀기면서 내 행동을 방해했다. 흡사 불에 데인 듯한 뜨거움. 화끈거리는 손가락을 감싸며 결계 너머를 주시한다.

어둠 속에서 연못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다.

저 숲속의 연못가를 중심으로, 반원 형태의 결계가 그 주변에 일렁거리며 쳐져 있는 것이었다.

“방법이 없다고 했잖나.”

뒤에서 슈리엘이 나지막이 읊조린다.

틀린 말은 아니다. 내 콩알만한 마력으론 이 결계에 생채기 하나 내지 못한다.

억지로 흠집을 내려고 하면 반대로 내 몸에 그보다 더한 상처가 생길 것이었다. 그게 반복되고 반복되다 보면, 나는 결국 죽을 거다.

그러니 슈리엘의 말처럼 모든 것이 무의미했다.

……다만.

“없어도, 어쩔 수 없잖아요.”

“……”

내 목소리는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슈리엘의 말은 전부 사실이다.

믿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 불쾌한 감각은 태어나서 처음이다.

머리끝까지 잠식된 칠흑 같은 공포로 어깨와 손은 파들파들 떨리고, 당장이라도 등을 돌려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다.

죽음을 앞두면 누구나 공포심에 휩싸인다. 엄청 무섭다. 여기서 도망치지 않으면, 그러지 않으면 내가 먼저 죽을 테니까.

아니, 그러면 적어도 나만큼은 살 수 있을 테니까.

슈리엘의 말처럼 차라리 이곳을 빠져나간 뒤에 신전에 도움을 요청해서, 그 사람들에게 루비아의 구출을 맡기는 편이 최선이다.

안에서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지 몰라도, 우리가 여기서 당장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게 맞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합당한 처사이고 현재 상황에 대한 최선이자 아무도 우리를 탓할 수 없을 만큼 어쩔 수 없는 일——

……라는 것들은,

전부 버러지 같은 생각들이다.

“사람이, 루비아가…… 죽는다고요. 우리가 여기서 도망쳐버리면.”

머리를 싹 비운다.

난 슈리엘처럼 똑똑하지 않다.

상황을 누구보다 냉철하게, 그리고 객관적으로 판단할 능력도 없다.

이성보다는 늘 감정이 앞서는 편이었고, 그것 때문에 문제도 많이 겪었다.

지금 이 상황을 해결할 힘은 커녕 앞으로 순탄히 살아갈 수 있을 만큼의 어떠한 재능도, 능력도 갖추지 못한 쓸모없는 인간이었다.

가만 놔두면 사회에서 자연히 도태될 것이 뻔한, 타지 않는 인간 쓰레기.

그게 크라닐 남작가의 외동아들 에지오 크라닐이었고, 지금 이 급박한 상황에서 누구보다 도움 되지 못할, 주위 사람에게 민폐 그 자체인 남자였다.

그래.

“……”

이런 나를.

——뮤는 사랑해주었다.

바깥에서 뮤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언젠가 뮤는 내게 말했다.

연인이 되고 난 지 세 달쯤 되었을까.

누구라도 궁금한 법이었다.

대체 왜 나 따위를 사랑해주는가, 그렇게 열성적으로 좋아해 주면서 나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 싶어하는가.

더욱이 애정을 아낌없이 주는 대상이 고작 나 따위라면, 아무래도 그 이유가 너무나도 궁금하여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 넹? 한번 사랑하게 되니까 다 좋아지던데요?

노을 진 뒤뜰 계단에서 샌드위치를 나눠 먹으며, 뮤는 평소와 같은 얼굴로 그런 말을 시작했다.

— ……라고 말하면 너무 흔한 말 같으니까, 굳이 꼽아보자면요. 으음, 음, 으으으음…… 아, 없는 거 찾아내려 하는 거 아녜요? 너무 많아서 한 가지만 고르려고 하는 거거든요?

— 아, 이거다. 1학년 때 선배 스토킹할 당시부터 든 생각인데……

— 선배는 포기를 저어어얼대 안 해요.

— 완전 징글징글해. 정말 할 수 있는 데까지 다 해보고서, 그때 안 되면 놓아버리잖아요. 근데 또 그냥 놓는 것도 아녜요. 뭔가 가능성 있다 싶으면 다시 또 시도하잖아요? 진짜 선배처럼 구질구질한 사람은 처음 봤다니까요? 보는 입장에서 완전 속 터지는 거 아는가 몰라.

— 옛날에는 안 그랬든 뭐든 간에, 지금의 선배는 그런 사람이잖아요. 저는 선배를 작년에 처음 봤거든요. 그때 제가 뭔 생각을 했는지 알아요?

— 우와…… 저런 사람도 연애할 수 있을까? 같은 의문이 가장 먼저 들었어요. 헤히.

— ……욕하는 거 아녜요. 알잖아요.

— 그런 선배한테 반해버려서, 지금 이렇게 샌드위치도 먹여주는 사이가 됐네요. 전 지금 선배랑 이어져서 누구보다 행복해요. 진심으로.

아직도 그 찬란한 웃음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게 뮤가 날 좋아하기 시작한 이유라면.

만일 거꾸로 들어 탈탈 털면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내게서, 그나마 가치 있을 아주 조그마한 점이라면.

그것만이 유일한 내 장점이라면.

나는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이번에도, 그리 할 수밖에 없다.

콰아앙—!

“……! 뭣, 그만둬라!”

뒤에서 슈리엘이 외친다.

굉음으로 귀가 순간 멀었다. 이를 악물고 희미한 마력을 두른 채 돌진하여, 그대로 결계에 부딪혔다.

그러자, 오른 어깨부터 허리에 이르기까지 불타오르는 듯한 뜨거움이 작렬한다.

화상을 입었나.

그을린 옷 아래 피부가 미친 듯 따가웠지만,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한번.

콰아앙—!

“에지오 크라닐!”

“……으큭.”

이번에는 내 입에서도 강한 신음이 나왔다. 이미 다친 곳을 또 부딪히니 충격은 두 배였다.

피가 주륵 흐르는 입가를 훔치면서, 나는 가쁜 숨을 내쉬며 땅바닥에 손을 얹었다.

이러는 이유는 별거 없다.

슈리엘이 아까 마법을 사용하여 결계를 뚫고자 했을 때, 잠깐 결계의 틈이 벌려지면서 일렁거리더니, 곧 원래 형태로 돌아왔던 걸 보았던 까닭이다.

하여 온몸에 마력을 두른 채 부딪히면 일시적으로 벌려진 결계 안에 흡수되듯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싶은 무식한 생각이었다.

뭐, 물론…… 결과는 보잘것없었다.

애초에 마력량이 터무니없이 적다. 슈리엘의 것과는 비교도 안 된다. 그 슈리엘마저 손가락만한 구멍을 내는 것에 그쳤다.

당연히 이래서야 그냥 맨몸을 결계에 부딪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콰아앙—!

슈리엘이 내 행동을 똑같이 따라 한들, 아마 안 될 거다. 결계는 상상 이상으로 단단했으니까. 그렇다면 지금의 내 행동은 무의미했다. 죽음을 향해 스스로 달려가는 것이나 다름이 없잖은가.

이번이 벌써 세 번째 충돌이었으므로, 나는 머리가 진탕 흔들리는 듯한 어지러운 충격을 받고 있었다.

슈리엘이 급박하게 외친다.

“에지오 크라닐! 미친 짓거리 하지 마라! 여기서, 여기서 너는 기다리고 있어라. 나라도 밖에 나가 신전에 도움을……”

“마음대로 해요.”

나는 손등으로 피를 훔치며 중얼거렸다.

……역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나.

포기하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방법이 생겨나는 건 아니다. 현실은 소설이 아니었으니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그걸 인정해야 했다.

나는 아무런 재능도 능력도 없는 쓰레기에 불과한 인간이고, 어떤 노력을 해봐야 결국 죄다 실패로 돌아갈 거라는 사실을.

……하지만.

내가 지금 여기서 포기함으로, 만약 저 결계 너머에 있을 루비아가 마족에게 죽임을 당한다면.

내 최선의 노력조차 하지 못한 채로 루비아의 쓸쓸한 사체를 맞이하게 된다면.

어쩔 수 없다는 상황 때문에 결국 루비아가 죽어서도 훗날 미친 듯 후회하게 될 것이라면.

그때 나는, 도저히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스윽.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만 더, 부딪히고자 일어섰을 때.

“……!”

——불현듯.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렸다.

맥동하는 심박이 두어 번 크게 진동한다.

슈리엘의 외침이 순간적으로 멀어진다. 이명이 사방을 시끄럽게 울린다.

휘청거리며 자리에 주저앉은 채로, 나는 울컥거리는 검붉은 핏덩이를 목구멍 속에서부터 토해냈다.

……아니다. 피가 아니었다.

“……너, 너. 무슨…”

“……”

찬란한 빛무리의 잔재였다.

형체 없는 빛이 스파크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의 강렬한 빛을 흩뿌리다가, 곧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스며들어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 모습을 나만 본 게 아닌지, 슈리엘도 당황하면서 내 상태를 묻고 있었다. 당연하지만 지금의 내게 멀쩡히 대답할 만큼의 정신은 없었다.

기현상이라고 생각했다. 이게 뭔……

그 순간.

꽈지지직——

내 오른눈에 거대한 격통이 일었다.

“끄으으으으으윽……!”

“……! 괜찮나?!”

무릎을 꿇고 주저앉은 채로 눈을 부여잡았다.

눈에서 피가 줄줄 흐르는 것 같다. 모르겠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끔찍한 고통이었다.

마치 유리체가 터지며 눈알이 생채로 뽑혀 나갈 것 같은 느낌이 스멀스멀 기어 오르면서, 어떻게든 내 눈을 보호하기 위해 나는 필사적으로 내 두 손을 겹쳐 오른 눈가에 갖다 대었다.

“끄아으윽……?”

그리고,

보였다.

터져 나오는 빛무리 속에서, 저 결계 너머의 모습이 보인다. 마치 투시하는 것처럼. 분명 조용하디 음산한 연못가였을 뿐인 저곳은, 어느샌가 그 주위에 정체불명의 인영을 여럿 두고 있었다.

— …지금… 해야……

— 여기선…… 부터… 너…

— ……무리한… 너무……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뿔이다.

슈리엘이 말했던 마족의 증거. 날개를 펄럭이며 무언가를 회의하고 있는 듯한 모습의 마족들이, 셋 정도 모여서 서로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이게 왜 보이는 건지는 모르겠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끔찍한 고통이어서, 정신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용한 일이었다.

……그리고.

세 명의 마족들 가운데.

“……!”

연못가에 아무런 장치 없이 수면 위로 가만 몸을 눕히고 있는, 연분홍빛 머리카락의 루비아가 보였다.

마족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성스러운 베일 같은 것을 몸 위에 덮은 채로, 새하얀 천을 눈가리개처럼 두르고 있었다.

루비아가 있다.

저 너머에.

그것을 본 순간.

“……! 에지오 크라닐!”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방금까지 오른눈에 일었던 격통은 말끔히 사라지고, 환상마저 신기루처럼 사그라들었다.

우우우웅……

대신.

내 눈에서 터져 나왔던 빛무리가 어둠에 잠식된 일대를 찬란히 밝혔던 직후, 천천히 잦아든 그것은 지금에 이르러 내 몸의 외곽선을 희미하게 감싸고 있는 것이었다.

“너, 너…… 대체 무슨…?”

전신이 미약하게 따스했다.

마력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대체 뭘까.

……하나도 알 필요 없다.

중요한 건.

지금이라면,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흡!”

슈리엘은 상관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이 정체불명의 빛을 몸에 두른 채로.

콰아앙——

———콰지지지직!

결계를 유리처럼 깨부순 채.

그 안에 몸을 밀어넣고, 마침내 들어섰다.

#11

『……이건 몰랐네. 정말 몰랐어. 시련을 통과해서 없는 신성을 획득한 줄 알았더니, 완전히 틀린 계산이었네.』

『……너, 처음부터 한번 죽어야 할 운명이었구나?』

#12

“——데려온 건 좋은데, 제물이 하나잖아. 신성 분배는 어떻게 할 건데? 지금 당장 재료가 충분한 것도 아니고, 여기서는 일단 내가 먼저 먹는 게 맞는……?”

콰지지지직!

쿠당탕탕!

돌진을 멈추지 못해 그만 굴러 넘어졌다.

균열을 그리며 흐트러졌던 결계는, 내가 속으로 들어오자마자 일렁거리며 또 다시 원래 형태를 되찾아 갔다. 그 때문에 저 밖에서 소리치던 슈리엘의 외침 또한, 단말마처럼 중간에 잘려 나갔다.

“……뭐야, 너. 어떻게 들어왔어?”

저 멀리서 마족의 목소리가 들린다.

인간과 언어를 따로 쓰는 줄 알았더니, 이해할 수 있는 걸 보면 마냥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아니면 둘 다 할 줄 아는데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거나. 딱히 중요한 건 아니었다.

내 몸에 둘러졌던 정체불명의 빛은, 결계를 깨부수자마자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잠시나마 나를 휘감았던 전능감.

그게 사라지자, 순식간에 두려움이 앞선다.

……마족들이 내 앞에 있었다.

이를 악물곤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선다.

결계 밖과 안. 실질적인 차이는 거의 없었다. 하늘은 거멓게 물든 채였다.

그러나, 딱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연못가에 달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결계 밖의 하늘은 그저 까맣고 또 어두울 뿐이다. 한데, 이곳은 둥근 달이 떠올라 선명한 달빛이 구붓하게 내려앉고 있었다.

“……루비아.”

다만 바로 저곳에, 노랗고 차가운 빛깔로 은은하게 물든 연못가 위에 죽은 듯 잠든 루비아가 있었다.

두려움은 삽시간에 사라진다.

대신 그 안을 미약한 분노가 채웠다.

스산한 목소리가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루비아한테서 떨어져, 이 버러지 같은 박쥐 새끼들아.”

“……하?”

가장 선두에서 팔짱을 끼고 있던 적갈빛 머리의 악마가, 뾰족한 꼬리를 살랑거리며 고개를 옆으로 뿌득 꺾는다.

이윽고.

“——푸하하하하하! 야, 뭐라고? 방금 뭐라고 했냐, 너­? 으하하하하! 박쥐래! 파퓰라, 우리 보고 박쥐래, 저 인간이! 박쥐라잖아!”

밤하늘이 떠나가랴 배를 부여잡고 웃으며, 옆에 서 있던 악마의 어깨를 탕탕 두드리던 그 악마는.

“푸흐흐흐, 박쥐, 박쥐……”

어찌나 웃긴지 손으로 얼굴을 싹 쓸더니.

“……우리가 박쥐면, 너는 과연 뭘까? 응?”

찰나였다.

“커흑——”

보이지도 않았다.

내 몸이 공중에 붕 떠올랐다.

잔상을 남기며 내 앞까지 광속으로 도달한 악마가, 다리를 꺾어 내 배를 그대로 걷어찼다.

실로 어마무시한 충격과 함께, 나는 먼 거리에 있는 나무가 아닌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결계의 벽면에 정통으로 부딪혔다.

콰아아앙—!!!

한순간에.

시야가 백색으로 물들었다.

“……쿨럭.”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날아가는 순간 허리가 기이하게 구부러지면서, 으스러진 뼛조각이 내장을 진탕 헤집는 것 같았다.

일격으로 전부 부러져버린 듯한 팔과 다리가 바닥을 향해 늘어진 채로 입가에서 주륵, 피를 흘렸다. 뚝뚝 떨어지는 선혈의 핏방울이 잔뜩 찢기고 벌어진 가죽 바지 위를 조금씩 물들였다.

……아.

나, 죽는 건가.

정신이 멍하다.

보기 좋게 뛰어든 건 좋았는데, 그 이후가 문제였다. 아무렴 결계 안으로 들어가는 건 어디까지나 스타트 라인에 불과했다.

진짜는 지금부터였는데, 나는 대체 왜 아무런 계획도 없이 무턱대고 이 안에 들어가고 본 것이었을까.

……한심하다, 나.

그러니 이렇게 허무한 죽음을 맞이해도 싸다.

차라리 도발이라도 하지 말걸 그랬나. 아냐, 그때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그건 내가 하고 싶지 않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뭐가 가장 좋은 방법이었을까. 다짜고짜 자리에 넙죽 엎드려서 빌어야 했을까. 그것만큼은 절대로 싫은데……

“야, 꼬마야.”

“……”

악마가 내 앞에 다가온다.

내 멱살을 잡아 들어서, 억지로 끌어 올렸다.

악마의 손아귀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모양새가 된 나는, 숨이 턱턱 막혀서 연신 쿨럭거렸다.

사방이 빨갛게 물든 것 같다. 온 사물의 형체를 제대로 분간할 수 없었다.

검붉은 빛으로 번들거리는 눈동자.

초점 없는 내 눈이 악마의 얼굴을 향했다.

“어어, 아직 죽지는 마. 나 그래도 좀 약하게 찬 편이다? 너 왜 이렇게 약하냐? 여기서 훅 가버리면 안 된다고, 짜샤.”

“……”

“그러게 갑자기 왜 남의 신경을 긁고 그래. 좀 웃기긴 했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빡치더라고. 응? 박쥐가 뭐야, 박쥐가. 좀 더 멋진 단어를 고를 수는 없었어?”

“……”

“……근데 이상하네, 너처럼 약해 빠진 인간 따위가 여길 어떻게 들어온 거야? 그 좆같은 신성쟁이 새끼들도 대장급 아니면 함부로 못 뚫는 결계인데. 응? 진짜 어떻게 들어왔냐, 너?”

“……”

“대답해, 씨발아.”

짝—!

악마가 내 뺨을 후려쳤다.

목이 단숨에 옆으로 돌아가 버렸다. 정신을 꽉 붙잡고 있지 않았으면, 그대로 돌아가서 목이 꺾여 죽어버렸을 것이었다.

악마가 입매를 비튼다.

“아프지? 죽고 싶지 않으면 말해. 그럼 살려줄게.”

“……”

“너 말할 수 있잖아. 아직 뒤질 정도 아닌 거 알아. 빨리 말하면, 넌 지금 그 상태 그대로 여기서 보내줄게.”

“……”

“물론 저 친구는 우리 거니까, 여기 나가서는 그냥 잊고 살라고. 어차피 인간은 쉽게 뒤지잖아? 오늘 말고 내일 뒤졌을지 어떻게 알겠어. 어차피 죽을 거 하루 일찍 뒤진 거라고 생각해. 응? 너희 인간은 그런 거 잘하잖아. 자기합리화. 그냥 하던 대로 하라고.”

“……”

“……하, 새끼. 눈깔 봐라?”

정신을 서서히 잃어가는 와중에도.

나는 혀를 자를 생각으로 강하게 깨물면서, 그 선명한 고통으로 간신히 내가 살아있음을 확실하게 깨닫고, 죽을힘을 다해 내 앞의 악마를 분노 섞인 눈동자로 노려보았다.

그러자 악마는 기가 찬 듯 웃는다.

“말할 생각 없으면, 그냥 뒤져. 널 죽이고 그 별볼일 없는 피라도 쭉 뽑아서 내 친구한테 가져다주는 편이——”

“잠깐. 키마리스.”

스르륵.

뒤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났다.

송곳니가 마족보다도 유달리 뾰족한 차가운 인상의 악마가, 키마리스라 불린 이 악마의 옆에 어느샌가 나타나 있었다.

“……뭐야, 파퓰라. 뭐, 왜. 뭔데 이번엔 또.”

“일단 손을 놓아라. 저대로면 죽는다.”

키마리스가 불만을 토해냈다.

“아니, 그러니까 왜.”

“저 인간은 지금 죽어선 안 된다.”

“……뭐야, 그게?”

결국 키마리스는 헛웃음을 치면서도.

스륵.

정말 말 그대로 손을 놓았다.

“끄으으으윽……”

덕분에 공중에서부터 하강하듯 떨어진 나는 딱딱한 바닥을 다시금 굴렀다.

온몸의 뼛조각이 으스러진 것만 같았던 탓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격통이 전신 구석구석을 타고 흘렀다. 간헐적인 신음과 함께 나는 눈을 부릅뜬 채로 배를 부여잡으며 가쁜 숨을 토해냈다.

파퓰라는 날 스산히 내려다본다.

달빛의 역광을 받아, 짙은 그림자가 드리운 인상은 더욱이 차가운 인상을 가져다 주었다.

새파랗게 질린 입술이 무겁게 속삭인다.

“……이 인간, 지금 우리가 데려온 인간보다 더 귀한 제물이다.”

* *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