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차버린 소꿉친구와 전 여친이 같은 반이라 곤란하다-33화 (33/201)

〈 33화 〉 회고 (4)

* * *

#13

눈이 자꾸 감긴다.

졸린 건가. 거부할 수 없는 수마(??)였다.

그거랑 좀 비슷한 감각이지만, 살짝 다르다. 당장이라도 눈을 감고 편해지고 싶은 건 같다.

그러나, 여기서 지금 내가 눈꺼풀을 닫아버리면…… 두 번 다시 깨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검은 쇠사슬 같은 것으로 몸이 속박당했다.

“남자는 싫은데.”

키마리스가 중얼거렸다.

“너는 보지 못한 것 같다만, 이 인간. 결계를 분명 부수고 들어왔다. 아주 강력한 신성이다. 지금은 안으로 숨어버린 것 같지만.”

“……흐음, 그래?”

“그걸 깨운 뒤에 먹어 치우는 게 답이다.”

파퓰라가 싸늘히 날 내려다본다.

루비아가 누워 있는 연못가 주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로 등 뒤에 손이 묶여버린 모양새였다.

내 몸에 무슨 짓을 해놓은 건지, 입에서 피는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피를 잔뜩 토해내다가 멋대로 죽을 것을 염려한 걸까.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싶을 정도로 온몸에 성한 곳 하나 없었으나, 유감스럽게도 그들은 내가 죽길 원치 않는 것 같았다.

“……루비아를, 어떻게, 할 셈이야…”

“응?”

간신히 입을 열었다.

성대가 망가진 건지, 음의 높낮이가 괴이하기 그지없었다. 글자 하나 내뱉는 데도 목이 뜨겁게 달궈지는 듯한 고통이 일었다.

키마리스는 고개를 옆으로 꺾는다.

“아까 내가 말하라고 할 땐 한마디도 안 하더니…… 너 진짜 뒤지고 싶구나?”

그에 나는 입매를 비틀어 올렸다.

“…죽여, 보던가…… 박, 쥐년아…”

“……흐으으응.”

키마리스가 음산히 웃는다.

“파퓰라, 나 아무래도…”

“참아라. 인간 따위의 도발에 넘어가서야 되겠나?”

파퓰라는 손을 들어 키마리스를 제지한다.

“……후, 그래. 너 알아서 해라. 난 계속 준비나 하고 있을 테니까.”

화가 난 듯 키마리스는 등을 돌렸다.

살짝 상쾌해졌다.

파퓰라라는 이 악마가 내 목숨이 유지되길 바라고 있는 이상, 키마리스는 함부로 날 죽이지 못한다.

욕이라도 시원하게 박아주니 기분은 썩 좋았다. 물론, 전신을 옥죄이는 고통 탓에 그 통쾌한 느낌은 금세 사라져버리고 말았지만.

이제는 생각할 때다.

여기서 루비아를 어떻게 구출하고, 나 또한 이 마족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어떤 방법을 통해 결계 밖으로 탈출해야 할지.

사실, 가망은 어디에도 없다.

저 키마리스라는 마족에게 배를 얻어맞을 때부터 그런 확신이 들었다.

내가 지금 여기서 무슨 짓을 한들, 내 미래는 오직 죽음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다만 아주 작은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지금쯤 결계 밖에 있을 슈리엘이 어딘가에서 지원군을 구해 결계를 파훼하고 마족들을 척살해주는 것이었다.

……그러기 전에 내가 먼저 죽으려나.

그냥, 잘 모르겠다.

차라리 들어오지 말걸 그랬나.

루비아가 죽게 놔둔다는 선택지를……

정말 골라야만 했던가.

……아니, 난 절대로 그럴 수 없었을 거다.

봐라, 나는 오늘까지도 루비아를 잊지 못해서 그제야 떠나보내기로 결심했던 한심한 남자였다.

중등부 1학년. 루비아를 어설픈 관계로 속박하고자 그런 어이 없는 고백을 후퇴 없이 박아버렸고, 당연하게도 차이고 말았다.

그런 다음 루비아는 나와 계속 친구로 지내주길 원했다. 나는 그 당시 미소를 가장하며 그러겠노라 약속했으나, 결국 그 비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건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었다.

혼자 열등감에 찌들어 루비아와 멀어져버린 주제에 그 고백을 기점으로 다시 친구로 지낸다는 건, 내 스스로가 너무 한심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루비아를 다시 예전처럼 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내 첫사랑은 그렇게 허망히 깨지고 말았던 것이다. 루비아의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그날의 기억이 오버랩될 것만 같았다.

처음부터 내가 부족했던 탓에 거절당한 고백이었는데, 잘못이랄 것 하나 없는 루비아를 보면서 그녀를 탓할 이유 따위 어디에도 없었던 것이었다……

루비아는 분명 나와 다시 친한 친구로 지내고 싶어 했을 거다. 실제로 그래왔다. 루비아는 종종 내 소식을 주변인들에게 묻고 다니는 듯했다.

반면 나는 루비아의 옆에 다시 설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기엔 부족한 점이 너무나도 많았다. 스스로가 떳떳하지 못한데 어찌 얼굴에 철판을 깔고 루비아의 친구를 자처할 수 있겠는가.

해서, 가급적 루비아를 피해 다녔다.

뮤와 친해지고 나서는 루비아 쪽에서도 나를 잠깐 보기만 할 뿐, 그 이상 다가오지는 않았다.

그리고, 내게 뮤라는 연인이 생긴 다음에는…… 아예 접점조차 만들지 않았다고 봐도 좋았겠지.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 했던가.

우리는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었다.

멀지 않은 공간 속에 서로가 여전히 존재하는데, 그렇기에 신경이야 늘 쓰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지금은, 바로 내 눈앞에 있었다.

나처럼 죽음을 앞둔 채로.

그 꼴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제아무리 루비아와 멀어졌다고 한들, 루비아의 죽음을 코앞에 두고서 제정신을 붙들고 나의 생존을 위해 루비아를 버릴 수가 없었다.

그러기엔…… 루비아가 내게 준 소중한 기억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이대로 루비아가 죽는다면, 나는 매일 밤 어릴 적의 행복했던 추억을 악몽 삼아 꾸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포기할 수 없다.

죽음이 코앞까지 다가왔는데도 간신히 정신을 붙들고 있을 수 있는 이유는 오로지 단 하나.

내가 여기서 눈을 감게 되면, 루비아의 생존을 더 이상 보장할 수 없게 되는 까닭이다.

어떻게든, 루비아를 구해야……

——라고 생각할 찰나에.

“……!”

“키마리스!”

어.

……방금, 뭐였지.

“닥쳐봐, 파퓰라. 아까도 그랬는데 이번에도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빡치는 거야. 내가 왜 이런 허접한 인간 따위한테 비아냥을 듣고 가만히 있어야 돼? 존나 좆같잖아. 씨발.”

“이 참을성 없는 년이……”

뿌드드드드득.

키마리스가 내 팔을 단단히 붙잡고, 그대로 관절을 꺾어버렸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이번에는 다리를 붙잡는다. 똑같이. 역으로 꺾어버린다.

비명은 여전히 나오지 않았다.

“좆까, 파퓰라. 그 신성인지 뭔지가 어디서 언제 나올지 어떻게 알아?”

“……”

“애초에 이 결계 안에서 바칠 수 있는 제물은 하나잖아. 우린 엘리고스 같은 년들처럼 그냥 푹 집어넣고 쏙 빼먹을 수 있는 정밀한 기술도 없는데, 여태 준비한 걸 싸그리 갈아 엎으면서까지 위험을 굳이 감수해야 하나? 난 그렇지 않다고 보는데.”

“……”

의식이.

점점 멀어진다.

“그리고 이 꼬맹이, 이대로 놔두면 어차피 뒤져. 어디 데려가서 써먹지도 못해. 빨리 하던 거나 끝내고 여길 벗어나는 게 좋을걸? 달이 떠오르는 밤까지야 외부에서 뭔 공격이 들어오든 멀쩡하겠지만, 그 이상은 시전자인 저 녀석도 감당할 수 없을 테니까.”

키마리스의 얼굴이 내 코앞에 있었다.

얼굴인가. 아니면 핏덩이 같기도 했다. 아, 그것은 내 이마에서 흐르는 피였다.

그것들이 한 데 모이고 모여서 응축된다. 사물을, 형체를 분간할 수 없어 격렬히 흔들리는 동공은 곧 시선이 닿는 목적지를 상실하고 만다.

푸욱——

“아무튼, 잘 가라.”

내 이마를 뚫고 들어온 키마리스의 검지 손가락이 물컹한 무언가를 건드리는 것 같았다.

쪼그려 앉은 키마리스는 피 튀긴 입술을 혀로 낼름 핥으면서, 생명을 급속도로 잃어가는 내게 조용히 속삭인다.

“……네 친구는 잘 먹을게, 꼬마야. 그러게 누가 겁도 없이 막 들어오래? 하여튼 인간들이란 참을성이 없어서 문제라니까.”

키마리스가 키득인다.

……안 되는데.

생각이 전부 끊겨버린다.

이제, 무리였다.

루비아가……

내가 여기서 죽으면……

……

……

……미안해, 뮤.

#14

그로부터 몇 시간 뒤.

“자, 이제 거의 다 됐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키마리스가 허리에 양손을 짚고 웃었다.

어린 소녀의 몸체는 이전보다 더 높은 공중에 떠올라 있었다. 달빛을 더 가까이서 받을 수 있도록.

둥그런 연못가에 투영되어 쏟아지는 희끄무레한 달빛이, 수면에 비쳐 베일에 감싸인 루비아의 온몸을 구석구석 물들인다.

신성을 부여하는 것은 태양이나,

신성을 배제하는 것은 달이다.

인간을 사랑한 태양의 신이 오로지 인간에게만 하사한 기적—— 신성(??).

다른 종족보다 나약하고 보잘것없는 종족이었던 인간이, 대륙을 제 손아귀에 둘 수 있었던 가장 크나큰 이유. 태양이 아닌 달 아래서 태어난 마족들은 그것을 너무나도 가지고 싶어 했다.

——누군가는 이르길, 이 세상 모든 진미의 정점이라더라.

한 번 맛보면 그 이상의 것을 탐나할 수밖에 없는 지상 최대의 마약이라더라.

평범한 인간에게선 아무것도 뽑아낼 수 없기에, 더욱 특별하고 깐깐한 조건을 통해 골라낸 인간의 신성만이 가장 가치 있는 것이므로, 그것을 개인적으로 취하려 하는 악마들의 숫자만 해도 족히 수천을 넘긴다고 하더라……

다만, 지금에 이르러 몇 년 전 있었던 남부 마계의 대전쟁이 그러한 악마들의 숫자를 대폭 줄여버렸다.

남은 건 그때 벌어진 전쟁에서 꼬리를 빼고 도망쳤거나, 전쟁에 자력으로 참여하길 거부한 악마들.

지금 이 연못가에서 루비아의 강력한 신성을 탐하려 하는 악마—— 키마리스, 파퓰라, 그레모리는 그리하여 마계에서 추방된 72악마의 주요한 구성원들이었다.

전쟁 따위는 애초에 관심도 없었고, 마계에 충성을 바치지도 않았으며, 오로지 제 안위와 목적만을 생각하면서 인간계에 숨어들어 특별한 신성을 가진 인간들을 사냥하고 다녔다.

오늘로서 그것도 몇 번째였던가.

아마 수백은 족히 넘겼을 것이었다.

그레모리가 펼친 고유 결계 속에서의 시간은 고정된다. 이곳은 언제나 처연한 달빛이 내려앉는 밤이었다. 아직까지 결계가 외부의 충격으로 흐트러진 적 한 번 없었으나, 분명 어림 잡아도 결계 속에서 이미 대여섯 시간은 흐른 뒤였다.

제물로 잡아온 인간의 곁에 있었던 또 다른 인간.

슈리엘 역시 그럭저럭 봐줄 만한 신성의 소유자였으나, 다름 아닌 남성이었기에 키마리스의 취향에 맞지 않았을 뿐더러 지금 데려온 인간보다는 훨씬 작은 신성의 빛깔이었다.

글쎄,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탈출에 실패했을 것이라고, 키마리스는 생각했다.

그야 가장 강력한 중심 결계는 이곳에 설치했으나, 애초에 숲의 절반을 감싸다시피 넓게 구성된 결계였던 것이었다.

시간이 점차 흐를수록.

마기에 의해 생성된 그림자 마물들이 그 인간을 사방에서 덮칠 것이었고, 그것을 상대하기도 벅찬데 외부 결계를 고작 그 실력으로 파훼하고서 성공적으로 탈출한다는 미래는 키마리스의 입장에서 영 떠올리기가 힘들었다.

지금쯤 시체가 되지 않았으려나.

뭐, 차라리 잘 됐다. 남색을 즐기는 자신의 친구에게 툭 던져주면 알아서 권속으로 만들 것이었다.

……그건 그렇고.

“……”

키마리스는 문득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쯤 땅바닥에 대충 널브러져 있는 핏덩이. 아까 키마리스가 머리를 꿰뚫고 단숨에 죽여버린 자그마한 인간 소년이었다.

어찌나 연약한 몸을 가지고 있었는지, 첫 일격에 팔과 다리 관절이 죄다 부서져버렸다.

내장 기관도 심하게 파열된 것 같았고. 아마 가만 놔뒀어도 5분 내로 즉사할 것이 분명했다.

어차피 뒤질 인간 좀 빨리 죽였다는데, 저리 꽁해서 팔짱을 낀 채로 가만 눈을 감고 있는 파퓰라가 키마리스는 좀처럼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기회를 봐서 언젠가 뿔을 꺾어버려야 하나. 제 집에 장식품으로 진열하면 썩 봐줄 만은 할 것 같았다.

아무튼.

아까 하던 얘기는 마무리 지어야겠지.

“파퓰라, 그레모리.”

“……”

“……”

키마리스의 부름에 파퓰라가 눈을 슬며시 뜬다.

거구의 그레모리도 느지막이 이곳을 바라본다.

“내가 먼저 맛을 보는 것에 이견은 없는 걸로 알고. 준비는 내가 거의 다 했으니까 이 정도면 나름 합리적이지?”

“……쯧, 마음대로 해라.”

“속 좁은 새끼.”

키마리스는 키득거렸다.

여전히 말 없는 그레모리였으나, 그는 입을 다문 채로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아무렴, 저 녀석은 자신의 계획에 군말없이 협조해주는 참 좋은 악마였다.

……대신 그 대가로 깊은 밤마다 끔찍하게도 싫은 그걸 자꾸 제 몸 안에 집어넣으려 한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모든 준비는 끝났다.

맛있는 만찬이 눈앞에 차려졌다.

식기도 준비되어 있고, 이제는 정말로 씹고 뜯고 맛보며 즐기는 일만 남았다.

굉장히 오랜만인 것 같은 저리 찬란한 신성을 눈앞에 두고서, 달빛은 더욱 강렬한 빛깔을 흩뿌린다. 순식간에 기운이 충만해진 키마리스가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인간에게 신성을 내려주신 히페리온께 감사를!”

악마에게 있어 종교 따위는 없다.

그저 이 질 좋고 맛 좋은 만찬을 즐길 수 있도록, 나약한 인간에게도 신성 같은 쓸만한 가치를 부여해 준 이에게 무한한 경의를 표한다.

달의 악마는 태양의 신을 향해 기도했다.

기쁨과 환희로 가득 찬 키마리스가 팔을 활짝 벌린 채, 꼬리를 살랑이며 적갈색의 긴 머리칼을 공중으로 펄럭거리며 흩뿌렸다.

달빛은 더욱 찬란히 빛난다.

우우우웅……

잠겨 있던 신성이 몸 밖으로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내어, 숫제 빛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아름답게 발광하는 루비아의 몸체가, 키마리스의 눈동자 속으로 비쳐 들어와 더없는 행복감을 가져다 준다.

그 이상 벌릴 수 없을 정도로 떡 벌어진 입을.

번들거리는 눈의 키마리스는 날개를 펄럭이면서 그 빛무리 가까이에 서서히 다가가——

“에라 모르겠다, 씨발! 잘 먹겠습니———”

그리 외치는 것이었다.

『여(?)를 두 번 귀찮게 하는구나. 소년이여.』

픽——

단 한 줄기였다.

“……음?”

키마리스가 눈을 깜빡였다.

실처럼 가느다란 무언가가, 결계의 천장을 꿰뚫고 파퓰라와 키마리스의 사이에 꽂혀 들어왔다.

이게 무엇인가.

“……뭐야, 한참 좋을 때?”

그 존재를 눈치챈 키마리스 역시, 짧은 의문을 표하며 흥이 깨졌다는 듯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옆을 홱 돌아본다.

달빛처럼 희미한 빛으로 감싸인 실이었다.

아니, 달빛은 아니었다.

그럼 뭐지?

“……”

파퓰라가 갑작스러운 일에 하늘을 올려다본다.

달이 떠오른 밤하늘은 겉보기엔 아무런 문제도 없어 보였다. 결계의 시전자인 그레모리 팔짱을 낀 채로 역시 가만 의문을 표했다.

다만 이처럼 빛나는 실이 뻗어진 곳은 저 높은 하늘 속, 구름을 뚫고서 그보다 아득한 너머에 자리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구축한 결계보다도 더 높은 장소에서부터——

“……어? 저거…”

그 순간.

키이이이이이이이이—!!

애벌레가 뽑은 실처럼 가느다랗던 그것이.

콰아아아앙!

지천을 울리는 굉음과 함께 지름을 급격히 넓혔다.

“뭐, 뭐, 뭔데! 갑자기 무슨……!”

일순.

달의 음영이 희미해진다.

새까맣던 밤하늘이 백색으로 물든다.

그리고.

쾅­!

콰아아앙­!

콰아아아아앙—!

한 번.

두 번.

수백 번.

결계를 아무런 저항도 없이 부수고 들어오는 빛기둥이, 그 작은 실처럼 생겼던 희미한 가닥이.

수백, 수천을 넘어 수만 번—— 삼 초 내지 일 초에 공간을 진동시키며 연못가에 내리꽂힌다.

키이이이이이이——

그리하여 겹쳐진 빛의 기둥은 희미한 달빛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찬란한 태양빛을 주위에 퍼트리면서, 단 하나의 목적지를 향해 벽력처럼 결계를 깨부수고 들어오는 것이었다.

“이런 씨……!”

키마리스는 위험을 감지하고서 몸을 피했으나.

“파, 파퓰, 파퓰라……?”

그 자리에 있던 파퓰라는,

흔적도 없이 재가 되었다.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창백한 피부가 급속도로 차갑게 식어 간다.

참을 수 없는 흥분과 기쁨, 환희로 가득했던 키마리스의 기분은 순식간에 나락을 향해 치닫는다.

상황을 머리가 따라 가지 못한다.

‘대체, 대체 무슨 일이……’

쩌적, 쩌저저적……

결계가 조각조각 부서지고 있었다.

“그, 그레모리! 결계, 결계가!”

마치 하늘이 격노하기라도 한 듯이.

꽈아아아아앙——!

“히이이이익……!”

방금 파퓰라를 세상에서 말끔히 지워버렸던 빛기둥은, 또 다시 내리꽂히며 이번에는 그레모리의 몸을 머리부터 집어삼켰다.

화르르륵!

재밖에 남지 않게 된 그 자리로부터, 미약한 불꽃이 화륵거리며 타올랐다.

쾅! 쾅! 쾅!

화르르르르륵!

키마리스의 주위로 하나 둘씩 광범위하게 천둥처럼 내리치는 거대한 빛의 기둥이, 연못과 어느 특정한 부분을 제외한 곳에 사정없이 충돌하며 겁화와도 같은 불길을 만들어 낸다.

“씨, 씨발… 뭐, 뭐야. 뭐냐고! 뭔데 이게!”

연못가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꽈르르르르릉—!

다시 한번.

이번에는 키마리스의 머리를 향해 내리친다.

“흐이아아아아악!”

죽음의 경종을 감지하고 진즉 날개를 펄럭이며 회피한 키마리스는, 방금 자신이 있던 자리가 새하얀 빛으로 불타오르는 모습을 보자마자 이루 말할 수 없는 공포에 휩싸여버렸다.

제물, 제물이 중요한 게 아냐.

살아야 해.

당장 여기서 도망쳐야……

연못가를 둘러싼 초목의 숲은, 불과 십 초도 되지 않아 전부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가장 위에서부터 조각 나기 시작한 결계에 서서히 금이 가고 있었다. 저대로면 깨진다. 깨져버린다. 그전에 탈출해야 해.

키마리스는 연못 위로 떠오른 루비아의 뭔가를 챙길 새도 없이, 미친 듯 날개를 빠르게 펄럭이며 하늘로 비상하려 했으나——

꽈르르르르릉!

“끼야아아아아악!”

어림도 없다는 듯 내리친 빛기둥이, 키마리스의 비행을 단숨에 제지했다.

바로 옆에 내리꽂힌 그것을 보고 일순 휘청인 키마리스가, 균형을 잃은 채 바닥을 향해 운석처럼 낙하했다.

콰아앙!

“끄, 끄윽, 으으으으윽……”

주변은 어느덧 불길이 만연해 있다.

사방에서 잿빛 연기가 피어오르고, 타닥거리며 수풀을 비롯한 모든 것이 타오르고 있었다.

불타오르는 겁화(?火) 속.

꽈르르르르릉—!

마지막으로, 한 개의 빛기둥이 더 내리꽂힌다.

바닥에 엎드려 벌벌 떨던 키마리스가, 문득 저 앞을 향해 고개를 슬며시 들었다.

“……씨발?”

키마리스의 눈동자는 생전 처음 느껴보는 공포심과 겁에 잔뜩 질려, 죽음의 경종이 울리는 머릿속에서 오로지 생존 본능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으나.

“……말도 안 돼.”

저것만큼은.

확실하게 인지할 수 있었다.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래,

기적이었다.

“어, 어떻게……? 분명, 죽었던 게……”

“……”

악마를 흔적도 없이 지워버렸던 찬란한 빛무리 속, 그것을 맞고도 제 형태가 멀쩡한 무언가가 비틀거리며 일어선다.

기형적으로 꺾여버린 팔과 다리.

키마리스의 눈에 저 몸속에 남은 마력이라곤 1도 보이지 않았다.

완전히 바닥 끝까지 텅텅 비어버려서, 억지로 끌어올리기라도 했다가는 회로가 망가져버릴 것이었다. 진탕 헤집어진 내장 탓에 울컥거리며 입에서 핏덩이를 토해낸다.

다만, 이마에 뚫린 구멍만큼은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 하나도 알 수 없었다. 키마리스는 곧 미지의 공포에 잠식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빛기둥은 더 이상 이 자리에 내리꽂히지 않았다.

저 인간의 시체를 마지막으로, 점차 깨부숴지는 결계 속에 남은 건 오로지 불길에 먹혀버린 숲과, 아직도 연못 위에 떠오른 채 그대로인 찬란한 신성의 제물 뿐이었다.

……아니다. 저건 이제 시체가 아니었다.

“……아.”

“히이이이이익……!”

키마리스가 서서히 뒤로 물러났다.

‘바, 방금 말했어!’

분명 죽었었는데.

다시 살아났다.

……어떻게?

마물에 속하는 좀비와는 다른 성질이었다.

전신에서 미약한 생기가 느껴진다.

완벽한 소생.

……저게, 가능한 것이었던가?

잠시 멈췄다고는 하지만 언제 어디서 자신을 집어삼킬지 모르는 빛의 기둥에 대한 두려움이, 키마리스를 함부로 움직일 수 없도록 만들었다.

끝이 뾰족한 꼬리가 발발발 떨렸다. 키마리스는 엉덩이를 뒤로 쭉 뺀 채 머리를 손으로 덮으며 땅에 엎드린 자세였다.

“…오, 오지, 오지 마……”

그런 키마리스의 앞으로.

“……”

천천히, 되살아난 에지오 크라닐은 움직였다.

#15

정신이 돌아왔나 싶었더니.

“……쿨럭.”

참을 수 없는 격통이 밀려들었다.

화르륵, 화르르륵……

본능적으로 땅을 짚고 일어선다.

주변이 전부 불타오르고 있었다. 걷잡을 수 없는 뜨거운 열기가 피부를 달구고, 나는 그 속에서 잘 움직이지 않는 관절을 삐걱거리며, 어떻게든 땅 위에 선 채로 고개를 들어 상황을 살펴본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난 분명 죽었던 게……

아작난 몸뚱아리가 기적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너무 초월적인 고통을 겪었던 탓일까. 지금은, 살짝 불에 그을린 듯한 전신이 오히려 더 편안했다.

“……아.”

“히이이이이익……!”

비척거리며 본능을 따라 앞을 향해 걷는다.

“…오, 오지, 오지 마……”

누군가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린다.

저게 누구였더라……

초점을 맞추면서 옆으로 시선을 돌린다.

연못가에, 루비아가 아직도 떠올라 있었다.

……아, 다행이다.

아직…… 살아 있었구나.

물론 확신할 수는 없다.

공중으로부터 끌어내려서 직접 심장이 뛰고 있는지 확인한 뒤에야 안심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전에.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리니.

내 머리를 꿰뚫었던 악마가 보였다.

몸을 벌벌 떨면서, 땅바닥에 엎드린 채로, 날 올려다보며 공포에 잔뜩 질려 있었다.

다른 악마들은……

모르겠다. 도망간 걸까.

무슨 상황이 일어났는지 모르겠지만, 겁화 속에 뭉쳐 있는 잿더미가 두 군데 정도 놓여 있었다. 저건 아니겠지.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으니까.

키마리스를 향해 걷는다.

“오, 오지……”

한 걸음.

두 걸음.

“……하, 하. 너 별거 아니잖아. 약해 빠진 주제에, 지금 한 번 죽었다 살아났다고 해서 뭐가 된 거 같아?”

세 걸음.

네 걸음.

“마침 공격도 멈췄겠다, 이, 이제 내 차례야. 그 이상 다가오면 너 진짜 뒤져. 이번엔 진짜 뒤진다고. 한 번은 몰라도 두 번은 살아날 수 있을 것 같아? 되겠냐고, 씨발아!”

그리고, 마침내 다섯 걸음이 되었을 때.

“오, 오면 죽어. 이 씨발, 씨발…”

키마리스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분명 온갖 두려움에 가득 차 있었으나, 지금은 정신을 차린 건지 그나마 허세 떠는 듯한 얼굴로 날 향해 손을 뻗는다.

이를 뿌득 갈았다.

너 때문에.

지금, 저 빌어처먹을 악마 하나 때문에……

시간은 벌써 밤이 된 건가.

주변은 환하기 그지없었으나, 저 위에 떠오른 달만큼은 똑똑히 보였다.

결계 안에 떠오른 달이 아니라, 쩌적거리며 균열이 생겨 부서진 결계 밖으로 보이는…… 밤하늘 위의 둥근 보름달.

……결국.

늦어버렸다. 한참이나.

“……”

나는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정신을 잃은 사이에 대체 뭔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처음 결계에 들어왔을 때처럼, 내 몸을 희미한 빛무리가 감싸고 있는 중이었다.

……달리 말해서.

지금이라면 무엇이든 가능할 것 같았다.

타악,

탁, 탁, 탁, 탁——

“……! 오지 말라고 했잖——”

키마리스가 손바닥에서 검은 구체를 생성했다.

“끄으으으… 으으으으아아아아아!!”

한 걸음 강하게 지면을 박찰 때마다 고통이 밀려들었으나, 무너지지 않고 악을 쓴다. 눈을 부릅뜬 채로 저 적갈빛 머리의 악마를 향해서, 내 몸이 부서질 각오로 이를 악문 채 바닥을 내달린다.

콰아아앙!

마력은 텅텅 비었다. 그러니 쓰지 못한다.

불타오르는 숲속에서, 나는 뒷걸음질 치는 키마리스가 황급히 쏘아내는 마탄을 정통으로 맞았다.

“……! 마, 말도 안 돼……!”

내 손에 그것이 닿은 순간.

사아아아—

마탄은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렸다.

타악—

당황한 차에 키마리스가 뒤로 펄쩍 뛰려 한다.

날개를 펄럭이려 한다.

그렇게 놔두지는 않는다.

내가 더 가까웠다.

타악!

도망치려 하는 키마리스에게 돌진한다.

그러자.

후웅!

키마리스가 이전처럼 다리를 꺾어 내 배를 향해 발을 뻗는다. 굉장히 빠른 속도였고, 역시나 마족이었다. 제대로 피하지 않으면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정도로 강렬한 세기였다.

그런데.

파지지지직——

“꺄아아아아아아악!”

비명을 지르는 건 내가 아니라, 키마리스였다.

빛나는 내 몸에 자기 발이 닿자마자 괴성을 지르더니, 그대로 자세가 무너진 채 바닥에 쓰러져버린다.

“바, 발이… 끄윽, 끄그그그극……”

발목에서부터 형체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이, 이런, 이런 건, 있을 수……”

눈물을 흘리며 절단면을 부여잡던 키마리스가, 문득 날 올려다보더니 삐걱거리는 웃음을 짓는다.

패배자의 저열한 미소였다.

“자, 잠깐만. 꼬마야. 아, 아니, 인간아. 내, 내가 미안해. 응? 저 친구 아직, 아직 살아 있거든? 나 아직 아무 짓도 안 했어. 어? 너, 너도 지금 살아 있잖아. 그럼 된 거잖아.”

“……”

“나, 나 이제 착하게 살 테니까. 인간 사냥 같은 거 안 할 테니까. 그냥, 그냥 여기서 나 보내주면……”

“어차피.”

“어, 어……?”

나는 잘 열리지 않는 입을 열었다.

소리를 내는 게 아직도 고통스럽긴 했으나, 단어는 끊기지 않고 이어졌다. 망가졌던 성대가 어느 정도 회복된 것 같았다.

“여기서 나가도 붙잡혀 뒤질 텐데.”

“……제, 제발. 한 번만…”

애원하는 키마리스를 향해 자세를 낮춰 앉는다.

빛으로 감싸인 내 손바닥으로, 검은 선혈이 흐르는 키마리스의 날개 한 짝을 붙잡는다.

——그대로.

뿌드드드드드득!

“끄아아아아아아악!”

“그냥, 조금 일찍 죽는다고 생각해.”

귀를 찢는 비명이 울렸다.

고통에 끊임없이 신음하며, 갈갈이 찢겨진 자신의 날개를 사정없이 떨면서 피눈물을 줄줄 흘린다.

“이, 이 개새, 하악, 학, 끄으으윽……”

더 볼 필요도 없었다.

악마의 비명 따위를 관람하며 시간을 지체할 여유 따위, 진작에 사라져버린 지 오래였다.

키마리스의 목을 향해 손을 뻗는다.

검붉은 눈동자가 생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살, 살려…”

“죽어.”

화르르르륵.

뿌득.

그걸로 끝이었다.

목과 머리가 불타올라 분리되어 버린 키마리스는 그대로 절명했다.

“……”

온몸에 성한 구석이 한 곳도 없다.

키마리스의 목을 순식간에 불태워버린 내 손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강렬했던 빛이 점차 줄어가더니, 결국 형체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대체 뭐였을까.

모르겠다.

더 이상 신경 쓰지 않는다.

기적이 일어났든 뭐든 상관없다.

고개를 연못 한가운데로 돌린다.

“……루비아.”

나는, 지금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으므로.

#16

타박, 타박.

비척이며 연못가를 향해 걸어간다.

뜨겁게 타오르는 숲속.

그 한가운데 떠오른 루비아가 보였다.

찰박.

천천히 걸어가서, 연못에 발을 담근다.

찰박, 찰박.

물은 차가웠다.

고요히 물살을 가르며, 공중에서부터 점점 아래로 가라앉기 시작하는 루비아를 향해 걷고 또 걷는다.

수심은 점차 깊어진다.

“……”

허리춤까지 수면이 닿았을 때, 나는 손을 뻗어 루비아의 몸을 안전히 끌어 내릴 수 있었다.

스르륵.

로브 위의 베일을 벗겨 낸다.

새하얀 천으로 눈을 감싸고 있던 루비아는, 다행스럽게도 얕은 숨을 쉬고 있었다.

아직 호흡하는 채였다.

그러니까, 살아 있었다.

“……후우.”

그 사실에 무엇보다 안도하면서 루비아를 조심히 안아 들었다.

찰박, 찰박……

숲을 완전히 벗어나기까지, 눈가리개를 벗길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 충격적인 광경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에 썩 좋은 게 아니었으므로.

싱그럽던 초목은 지옥 같은 겁화로 불타오르고, 현재 내 몸은 말할 것도 없이 만신창이였다. 누가 본다면 좀비나 다름없는 무서운 꼴일 것이 분명했다.

가능하면 트라우마를 심어주지 않는 편이 좋다.

악마에게 납치당한 뒤로 쭉 잠들어 있던 것 같았으니, 그 기억만 보존하고 있어도 좋을 것이었다.

찰박, 찰박……

루비아의 몸은 생각보다 무겁지 않았다.

운동을 좀 했던 탓인가.

그럭저럭 들 만했다.

물론 지금 내 상태가 말이 아니었기에 조금만 움직여도 격통이 밀려들었으나, 이가 부서질 듯 세게 악물고선 가까스로 참아낸다.

정체불명의 빛무리가 몸을 감싼 뒤로, 고통은 그나마 완화되었기에 참을 만했다.

찰박, 찰박……

“……”

루비아의 목과 오금 사이에 팔을 넣어 품에 안은 채로, 연못의 물살을 가르며 밖으로 나아간다.

정말로.

……다행이다.

루비아를, 구했다.

“……”

무심코 다리가 풀릴 것만 같은 안도감에.

죽음의 공포를 드디어 벗어났다는 생각에.

……이제, 뮤에게 돌아갈 수 있다는 마음에.

영문 모를 눈물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또옥.

그 작은 물방울은, 내 얼굴에서부터 떨어져 그 아래 있던 루비아의 고운 이마에 닿았다.

그 탓이었을까.

“……으음.”

“……!”

루비아의 입술 사이로 소리가 흘러나온다.

정신을 차린 건가. 그것은 다행이었다.

생명은 보장됐을지언정 그 안의 것이 멀쩡하리란 법은 없었으니까. 조금만 더 늦었다면 정말로 모든 게 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마음 깊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나는 루비아를 안아든 채로 연못 밖을 향해 계속하여 나아갔다.

축 늘어진 루비아의 몸은 차가웠다.

이곳의 기온이 차가웠던 까닭이겠지.

내 몸도 몸이지만, 루비아가 그 사이에 무슨 짓을 당했는지 알 수가 없다. 일단은 루비아도 신전에 향해야 할 것이었다.

물론 나는 그전에 가야만 하는 곳이 있었고.

찰박, 찰박……

이제 거의 다 왔다.

물가에 나오기만 하면 되었다.

출렁이는 물길이 발목만 간신히 덮었다.

바로 그때.

몸을 움직일 기운이 전혀 없는 듯 그저 입술만 간신히 움직이는 채로, 루비아는 희미한 목소리를 낸다.

“……아…”

나는 불현듯 시선을 아래로 내렸고.

루비아는 눈가리개 너머로 날 바라보면서.

——그렇게, 조용히 중얼거렸다.

“……슈리엘, 선, 배님…?”

#17

『그릇이라고 보기엔 좀 수상한 구석이 많은데, 흐음… 이건 생각보다 더 흥미로운 연구 재료인걸……?』

『……』

『……뭐야, 벌써 무너졌어?』

#18

결계가 부서졌다.

어둠으로 새까맣게 물든 밤하늘.

안에서 타오른 불길은 여전하고, 꺼질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연못을 빠져나온 뒤 축축한 하체를 움직이며 밖을 향해 걷는다.

천천히, 아주 느리게.

……길을 가다가 문득, 쓰러져버릴 것처럼.

그때였다.

“——루비아! 에지오 크라닐! 무사한가?!”

비록 나만큼은 아니지만.

잔뜩 상처투성이가 된 슈리엘이, 결계가 부서지자마자 이전보다 확실하게 작아진 얼음 덩어리를 쏘아내며 이곳으로 헐레벌떡 뛰어왔다.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슈리엘 역시 몸은 성치 않아 보였다.

“루비아는, 루비아는 괜찮은……?!”

내가 루비아를 들어올린 채로 다가가자.

슈리엘이 가쁜 숨을 토해내며 소리친다.

“……안전해요. 잠깐 정신을 잃었을 뿐.”

“아아……”

그 모습을 보기 전까지 온갖 걱정과 근심에 휩싸여 그늘졌던 슈리엘의 심각한 얼굴은, 곧 자그맣게 숨을 쉬고 있는 루비아의 편안한 모습을 보자마자 처연히 무너져 내렸다.

“아, 아아, 아… 신이시여……”

슈리엘은 숫제 울음을 터트리려 했다.

곧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주저앉는다.

“고맙다… 고마워…… 정말로, 고맙다… 이, 이걸, 어떻게… 하아아아……”

얼굴에 난 상처를 손등으로 훑으면서, 내게 연신 감사를 표하던 슈리엘은 이윽고 루비아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더니.

“……아, 아니, 너…?”

“……”

올라간 시선은 내 모습을 눈에 담는다.

슈리엘의 눈이 그보다 커질 수 없을 정도로, 크게 확장되었다. 경악 어린 표정이었다.

“상처가……”

“괜찮습니다.”

슈리엘이 떨리는 목소리로 연이어 묻는다.

“아니, 살아는… 있는 건가? 나보다, 빨리 신전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아뇨.”

나는 고개를 저었다.

자세를 낮추어, 루비아를 앞으로 내밀었다.

“일단… 루비아를 안전한 곳에 데려다주세요.”

“……아, 알았다. 하지만…”

“그리고.”

“……”

나는 짧게 숨을 한 번 들이마셨다.

……

그 말을 하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제가 여기에 있었다는 거, 절대. 절대로… 루비아에게, 말하지 말아주세요.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그건 무슨…”

슈리엘이 멍한 눈으로 날 본다.

루비아를 받아든 슈리엘의 모습을 보면서, 무릎을 털고 일어나 숲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저는 오늘, 여기 없었던 겁니다. 슈리엘 선배님, 당신이 루비아를 구한 겁니다.”

“……”

잠시 뒤.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나?”

그의 물음에 나는 잠시 대답을 고민하다가.

짤막하게 대답했다.

“루비아를 위해서, 입니다.”

“……”

슈리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그리하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진심으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전에, 너는 어서 신관에게 치료를……”

“아니라고 했잖습니까.”

“……”

슈리엘의 말을 끊은 내가.

아직 잊지 않은 기억을 느릿하게 되짚으면서, 휘청거리는 발걸음을 그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슈리엘과 루비아를 뒤로하고서.

나는 그저, 걷고 또 걸었다.

“먼저…… 가야할 곳이 있어요.”

태양빛으로 환하게 빛났던 하늘은 이미.

어둑어둑하게 저물었다.

다 끝났다.

완전히.

……뮤에게, 돌아갈 때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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