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차버린 소꿉친구와 전 여친이 같은 반이라 곤란하다-34화 (34/201)

〈 34화 〉 회고 (5)

* * *

#19

달빛이 내 뒷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시들어버린 수풀을 헤칠 때마다 여전히 생채기는 하나둘씩 생겨 난다.

쓰라리다. 따갑고 아픈데, 전혀 개의치 않았다. 뒤틀린 관절 같은 것도 대충 꺾어 맞춰 놓았다. 무척 고통스러웠지만, 그것 역시 잠깐 아프고 끝이었다.

아작난 내 몸이 지금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다만 걸을 수 있으니 걷고, 움직일 수 있으니 움직인다.

단지 그뿐이었다.

“하아, 하아……”

숨이 버거웠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왔던 길을 찬찬히 되짚어 가면서, 나는 내 기억 속을 더듬으며 어딘가로 향했다.

루비아를 구했으니 이제 뮤에게 돌아갈 차례였다. 보름달이 환하게 떠오른 늦고 깊은 밤이긴 했지만, 나는 반드시 광장에 돌아가야만 했다.

거기 뮤가 있을지 없을지는 몰라도 어떻게든. 오늘을 알리던 시계의 시침이 12시를 가리키기 전에. 연인으로서 나와 맞는 뮤의 첫 번째 생일이 끝나기 전에……

“……으큭.”

심장이 크게 욱신거렸다.

나는 순간적으로 비틀거렸다.

넘어질 뻔했지만, 땅에 손바닥을 얹고서 가까스로 버텨냈다. 빌어먹을. 몸이 슬슬 제대로 움직여주질 않는다.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걸 잃어버려선 절대로 안 되었던 까닭이다.

현재로선 마력을 쓸 수도 없는 몸이니 등불 역할의 스파크를 일으키지 않아도 된다는 점만큼은 마음에 들었다.

달빛을 이정표 삼아 나는 조금씩 수풀 사이를 헤쳐 나가면서, 이전에 나뭇가지로 그어 두었던 표식을 향해 걷고 또 걸었다.

정말이지 필사적이었다.

내가 이대로 죽어도 괜찮다 느낄 만큼, 아니 오히려 죽는 게 당연하다고 느낄 정도로 필사적이었다.

“……”

……알고 있었다.

그 자리에 있던 건 내가 아니라 슈리엘이었단 사실을. 박쥐 날개를 단 마족들에게 납치를 당하기 전까지만 해도, 마법부 합숙 훈련이니 뭐니 했던 걸 보면 분명 슈리엘과 함께 있었을 것이었다.

나보다 빨리 루비아의 상황을 알아차리고선 결계를 부수고자 했던 것도 슈리엘이었고…… 무엇보다, 그 자리에 내가 있었을 거란 상상조차 하는 것이 불가능했을 터다.

나는 약하니까.

누군가를 도울 힘도, 구해줄 힘도 제대로 없었던 무재능 찌질이 찐따 그 자체인 인간이었으니까.

……그러니까, 그게 맞는 거였다.

나도, 알고 있었다……

“……”

기분은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사실 잘 모르겠다.

어찌 되었건 루비아를 구했고, 그것만큼은 변한 게 없었다. 만일 조금만 늦었더라도, 혹은 내가 죽음을 각오하지 않았더라면 루비아는 분명 그 마족들에게 생명을 갈취당했을 테니까.

그건 정말이지 좋은 일이었다.

그런데 왜.

기쁘게 웃어야 할 날에.

“……하하.”

나는 울고 있는 걸까.

어쩌면 상쾌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름 뻥 뚫린 듯한 시원함을 느꼈기 때문에, 묵힌 것을 전부 풀었다면서 이제야 모든 걸 훌훌 털어놓을 수 있게 되었음을 축하하는, 스스로에 대한 해방의 눈물일 수도 있었다.

말하자면 감격이었다. 차라리 시원하고 통쾌해서, 기쁨의 웃음을 넘어 크게 감격한 나머지 제 기분을 그 이상으로 표출할 방법이 더 이상 없어 그저 웃는 얼굴로 울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흐하, 하흐, 하흐흐흐……”

하여, 나는 웃는 동시에 울었다.

투명한 물방울이 내 발자국 위에 시간차를 두고 떨어질 때마다, 나는 한 조각씩 내 안에 두었던 것을 천천히 밖으로 꺼내었다.

타박, 타박……

그렇게 한동안 숲속을 거닐며.

마침내 목적지에 거의 다다랐을 즈음에.

나는 눈을 살짝 크게 뜨고선.

“……다행이다.”

눈꺼풀을 누그러뜨리곤.

두 가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직 있었구나……

뮤에게 줄 선물.

머플러는 조금 많이 더러워졌지만.

저게 그대로 있다는 건 그 아래에 깔려 있을 선물 역시 온전하다는 뜻일 터다.

그러한 의미에서 내쉰 한숨이었다.

그리고, 나는.

“……정말, 다행이다.”

루비아를 이제,

완전히 떠나보낼 수 있게 되었다.

그게 좋았던 거다.

안심이 되었던 거다.

이제야, 뮤를 온전히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되어서 좋았던 거라고, 믿고 싶었다.

“……기다려, 뮤.”

그리 중얼거린 뒤.

타박, 타박……

천천히.

앞을 향해 비척거리며 걸었다.

#20

떨리는 손으로 머플러를 들었다.

그런 뒤 목 부근에 칭칭 감았다.

핏방울이 잔뜩 튀긴 채 찢어지고 구멍 난 옷은 어떻게 감출 도리가 없겠지만, 가능하면 얼굴 쪽이라도 가리고자 했다.

오랜 기간 한 자리에 노출되어 있던 탓인지 흙먼지가 묻긴 했다. 털긴 했는데 그래도 좀 남았다. 하지만 굳이 신경 쓸 필요까진 없었다. 그깟 게 뭐 대수라고. 기침 조금만 더 하면 되는 일 아닌가.

그렇게 머플러를 두르고서, 구멍이 났던 까닭에 빠질지도 모르는 물건을 손으로 단단히 꽉 붙잡곤, 한 손을 주머니 속에 넣은 채 다시금 왔던 길을 되돌아 갔다.

찌르르르……

보름달이 찬란한 밤이었다.

정확한 시각이 어떻게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벌써 새벽이 넘어가진 않았겠지. 뭐든 상관 없었다.

중요한 건 이미 하늘 위가 전부 새까맣게 물들었다는 사실이었다.

뮤와 만나기로 했던 건 오후 1시.

적어도, 7시간 이상은 아득히 넘어버렸다.

그게 최소치라는 것을 감안하면.

……지금쯤 뮤는 이미 광장을 떠난 후겠지.

“……”

괜찮았다.

돌아가서 확인해도 늦지 않을 거다.

그 길로 신전에 돌아가, 선물을 간직한 채 당장 내일이라도 뮤에게 전달할 수만 있다면……

나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건 안 돼.

반드시 오늘 전해줘야만 했다.

오늘이 무슨 날인가.

뮤의 생일이다.

생일 한 달 전에도 꼬박 내게 자신의 생일을 앵무새처럼 알려오면서, 무엇을 해줄 거냐고 꼬치꼬치 캐물어 왔던 뮤의 모습을 기억한다.

그렇게나 오늘을 기대했던 뮤였다.

……전부, 망가져버렸지만.

하나, 마지막 순간만큼이라도 뮤에게 꼭 말해주고 싶었다.

오늘로서 12시가 지나가버리기 전에 나는 뮤에게 선물을 전해주며 그 말을 반드시 함께하고 싶었다.

뮤의 놀라운 듯한 눈동자와 행복에 겨운 얼굴을 보면서 나 역시 기쁜 듯한 웃음을 지어주고 싶었다. 딱 한마디를 건네주고 싶었다.

——생일, 축하한다고.

그것만큼은……

포기할 수 없어.

“……으큭.”

굳은 정신으로 점점 아득해져 가는 희미한 정신을 꽉 붙들었다.

누군가 내 모습을 본다면 살아 있는 게 기적이라고 대번에 기겁할지 모른다.

사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난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었다. 일격에 전신이 뼈와 내장 구분할 것 없이 죄다 아작나버리고, 악마의 손가락이 내 머리를 꿰뚫고선 뇌를 직격으로 관통했었다.

그 순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참을 수 없는 몸서리가 처질 만큼의 끔찍한 감각. 줄기줄기 찢어진 팔뚝에 소름이 우수수 돋는다.

완전한 죽음을 알리는 순간이었으나, 그럼에도 나는 이렇듯 되살아나 숲길을 빠져나가고 있다.

말하자면 기적이었다.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

세상의 이치와 순리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기적 그 자체가, 어느 누구도 아닌 내 쓸모없는 몸뚱아리에 일어났던 것이었다.

……대체 뭐였을까, 그 빛은.

그렇게 처절했던 기억을 찡그린 얼굴로 찬찬히 되짚어가던 어느 순간에, 나는 별안간 고개를 들어 탁 트인 전방을 보았다.

“……”

불 꺼진 건물이 가득한 어둠의 광장.

그곳으로 향하는 길이 쭉 뻗어진 골목길.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21

광장의 분위기는 스산했다.

집집마다 달려 있는 등불은 켜진 곳이 거의 없었다. 때문에 어떤 골목은 환하게 밝았고, 어떤 골목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웠다.

나머지 길목은 그나마 달빛이 내려앉고 있었던 까닭에 앞 정도는 보면서 걸을 수 있었다.

지나다니는 사람도 거의 안 보였다. 그것은 달리 말하자면 한 두명 정도는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게, 오늘 내가…… 흐억!”

“꺄아아악! 뭐, 뭐야!”

“……”

연인으로 추정되는 젊은 남녀가 시시덕거리며 길을 지날 때, 문득 나와 마주치자 서로 기겁을 하면서 뒤로 물러났다.

머플러를 스윽 내려 겁에 질린 채 도망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뭐가 어떻길래 사람을 괴물 취급하고 도망가는 걸까.

정말 너무하다 싶다. 물론 지금의 내 꼴을 보자면 딱히 부정할 순 없지만서도……

이러다 경비대가 와서 나 잡아가는 거 아닌지 몰라. 그렇다고 순순히 잡혀줄 의향도 없었으나 포위망을 벗어날 능력이 없기에 임시 감옥행은 확정이나 다름이 없음이 분명했다.

뭐, 시답잖은 생각은 되었다.

이후로도 광장 한가운데 배치된 분수대를 향할 때까지 꽤 여러 사람들을 마주쳤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나를 보고서 비명을 지르며 도망을 치거나 혹은 걱정스러운 눈길로 조심스레 내게 물어왔다.

어딜 크게 다친 거냐며. 그렇게 심한 상처를 가지고 있으면 여기서 이러지 말고 신전에 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며. 길을 모른다면 내가 데려다주겠다며……

선한 얼굴로 그리 물어오는 자들도 있었으나, 개중 몇은 무언가 불순한 의도가 숨어 있는 듯했다.

내가 제대로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테니 어디 데려가서 한 몫 챙기려는 것이었을까.

물론 이곳은 제국의 중심과 무척이나 가까운 만큼, 남들 있는 앞에서 함부로 날 납치할 생각은 미처 하지 못하는 듯했다.

대충 무시하면서 걸었다.

걸을수록 속도가 조금씩 느려졌다.

호흡과 심박은 불규칙하게 이어지다가, 어느 순간부터 아주 천천히 감속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았다.

쓰러지지 않았다.

이대로 가는 길에 뮤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어쩌면 나를 원망하며 기숙사에 돌아갔더라도.

내 최선의 최선까지 다한 다음에.

나는 언제나처럼 그렇게 몸과 마음을 전부 불사른 뒤에야, 비로소 포기란 단어를 입에 올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아까 봤어? 걔 아직도 있던데?”

머플러로 입가를 가리며 절뚝인 채 길을 걷는 내 귓가로, 주변을 스쳐 지나가는 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걔? 그게 누구지?

“봤지. 그래도 말은 못 걸겠더라.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다가가는 거 좀 봤었는데, 전부 도망치듯이 도로 뛰어가더만. 얼마나 표정이 살벌하면 그랬겠냐.”

“난 딱히 살벌한 건 모르겠고, 잠깐 얼굴 들었을 때 진짜 감탄밖에 안 나왔다. 와……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생길 수가 있지? 내가 원래 나보다 어린애들은 별로 안 좋아하는데, 그냥 와…… 이 소리밖에 안 나오더라.”

“큭큭. 그럼 네가 가서 말 걸어보든가.”

“어우, 한 대 쳐맞을 거 같아서 싫어. 낯선 사람에 대한 태도 보면 성격도 존나 싸가지 없을 거 같아.”

“그래? 난 그래도 막상 성격은 괜찮을 거 같던데.”

“뭐? 왜?”

“그야 대체 누굴 기다리는지 몰라도, 우리가 처음 봤을 때부터 아까까지 계속 한 자리에서 미동도 없이 가만 쭈그려 앉아 있었으면 적어도 그 누군가한테만큼은 진심이라는 거 아니겠어? 만약 남자 새끼면 복 받은 거지.”

“……그건 좀 무서운데. 집착 수준 아냐?”

“병신아, 네가 그래서 솔로인 거다. 난 오히려 그런 여자 한 번쯤 사귀어 보고 싶던데. 나 말고 다른 거 거들떠도 안 보는 일편단심 현모양처…… 크, 그거야말로 남자의 로망 아니겠냐?”

“그런가? 흠…… 일단 난 좀 그렇다. 엉.”

그렇게 한참 키득거리며 대화하던 두 남자는, 등불 속 거리를 향해 사라지고 말았다.

“……”

무슨 말이었을까.

나는 저들이 지나쳐 온 길을 뒤돌아 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 흰 조각상이 보였다.

그것은 달빛을 받아 누런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거리가 상당히 먼 탓에 아주 작게 보이는 조각상은 그 주위를 둘러싼 분수대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설치되어 있었다.

기억 상으론 아마 트럼펫을 불고 있는 아기 천사의 모양을 하고 있던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을 법한 조각상이었다.

분수는 뿜어지지 않고 있었다. 다만 그 아래에 잠든 잔잔한 물결만이 평소처럼 흐르고 있을 뿐이었다.

투명한 물가 주위에는 운치 있는 광장의 풍경을 즐길 수 있도록 길쭉한 벤치가 자리하고 있는 채였는데, 늦은 밤 산책하는 사람들이 이번에는 별로 없었던 건지 거의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

이번에도 달리 말하자면.

한 명쯤은, 보였다.

조각상만큼이나 작게 보인다. 인영만을 간신히 구분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것은 방금 지나간 두 남자들의 대화처럼 벤치 위에 쭈그려 앉아서, 제 얼굴을 무릎 사이에 파묻고 있는 듯했다.

떨리는 나의 눈동자 속으로 그 모습이 비쳐 들어왔다. 맞는지 아닌지도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본능적으로 앞을 향해 한 걸음 옮긴 채였다.

타박.

결계에 들어가기 전에 별안간 그런 생각을 했다. 밤이 되면 날씨가 좀 추워질 거다. 그러니 부디 따뜻하게 입고 왔으면 좋겠다고, 그런 생각을 했다.

참으로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그녀는 내 바람과 관계없이 반드시 따뜻하게 입고 올 수밖에 없는 거였다.

오늘이 전부 지나가기 전까지.

나와 하루종일 같이 있을 생각이었을 테니까.

타박, 타박……

몇 걸음 나아가자 인영은 조금 더 확실해진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아.”

익숙한 색깔의 머플러였다.

타박, 타박……

탁, 탁, 탁.

걷다가 뛰었다.

다리가 고장난 듯 삐걱거리고, 그 부위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통증이 전신으로 퍼져 나가도 나는 뛰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바보 같았다. 광장에 들어섰을 때부터 이리 뛰어야 했던 것을. 몸이 조금 아프다 해서 비척거리며 걸어올 만큼 여유 있는 상태가 아니었잖는가.

그런데 말이다.

이렇게 격렬히 박동하는 심장과 더불어 통증이 온몸 구석구석에서부터 날 찔러온다고는 해도, 어째서인지 그것들은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그런 것보다 지금 내 떨리는 어깨와 손의 진동이 더 민감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나는 익숙한 그 모습을 보자마자 내 몸의 고통 따위는 전부 잊어버리고 그저 길 위를 달리고 또 달렸던 것이었다.

공중을 허우적거리듯 내달리며 향하는 내게 이따금 알 수 없는 비명들이 쏟아졌지만, 그게 뭐 어쨌다는 걸까. 나는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았다.

물론 다른 사람일 수도 있었다. 내가 아는 그 사랑스러운 후배가 아닐 수도 있었다.

어쩌면 우리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 그저 한 자리에 굳어 누군가를 밤새도록 기다리고 있을 뿐인 긴 흑빛 머리칼의 베이지색 머플러를 두른 소녀——

아니.

뮤였다.

“……”

두근, 두근.

터질 것 같은 심장을 이 악물며 부여잡고서.

마침내 분수대 앞에 도달했을 때.

내 바로 열 걸음 앞에 뮤가 있었다.

이것은 현실이었고 꿈이 아니었다.

나와 약속했던 시간인 오후 1시부터.

아니, 그보다 더 이전부터 오지 않는 날 기다리면서, 계속하여 이 벤치 위에 쪼그려 앉아 가끔은 오늘 무엇을 할지 기대하며 행복한 상상을 하다가, 1시가 지나버리자 조금씩 의문을 품었을 것이었다.

점점 추워지는 날씨에 손을 비비기도 했겠지. 머플러를 위로 더 올려 썼을 것이었다. 광장에 사람들이 지나가는 모습을 보며 턱을 괴기도 했을 거고, 행복해 보이는 듯한 연인들이 웃음을 띠곤 뮤의 곁을 지나갈 때 뮤는 과연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을까.

그러다가 2시와 3시를 넘어 4시.

이후론 점점 노을이 저물고, 사람들의 발자취도 조금씩 멎어갈 즈음에. 뮤는 그때도 웃고 있었을까.

결국 저녁을 먹을 시간인 7시가 한참이나 지나서도 약속을 지키러 오지 않는 날 생각하면서, 뮤는 천천히 이 무릎 사이로 고개를 파묻기 시작했을 것이었다……

그렇게 계속.

10시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오직 나만을……

이 자리에서 가만 기다려 왔을 거다.

“……”

얼굴을 덮듯이 감싸인 베이지색 머플러.

군청색 자켓과 체크 무늬 스커트.

뮤의 매끈하도록 긴 다리를 감싸고 있는 것은 검은 빛깔 스타킹이었다.

그 발 아래는 예쁜 검은색 구두로 덮여 있었다.

오늘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듯한 옷차림이었다.

……타박.

뮤는 내 얼굴을 보지 못한다. 나 역시 뮤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 그러니 서로가 무슨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인지 절대 알 수가 없다.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마주해야 할지, 역시나 아무것도 모른다.

다만 느낄 수는 있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앞에 존재한다는 것만큼은 비로소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타박, 타박.

걸음을 하나씩 옮길 때마다 마음은 점차 무너져 간다. 입술이 바싹 말라 간다. 도대체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머리가 새하얘져서 나는 결국 아무런 말도 먼저 꺼낼 수 없었다.

뮤에게 사과를 먼저 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내가 왔다는 것을 알려야 할까. 고개를 들고 서로의 눈을 맞추면, 나는 그때 과연 어떤 표정을 하게 될까……

모르겠다. 울컥하는 마음이 터져 나온다.

그것은 자책이었다.

원망이었다.

오로지 나를 향하는 비난의 화살이었다.

처음에는 뮤에게 솔직하게 털어놓고 싶었다. 나도 많이 힘들었다고. 죽을 뻔한 고생을, 아니, 죽음에서 돌아와 얻은 것은 결국 상처뿐인 마음이었다고.

어떠한 결심과 참혹한 심정으로 울고 불며 루비아를 구하기로 결심했었는지, 루비아를 마침내 구해내고 난 다음에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부 다 털어놓고 용서받고 싶었다.

그건 해서는 안 될 짓이었다.

용서를 구하는 건 이제 불가능하다.

뮤의 심정을 헤아릴 수 없는 내가, 어찌 내 사정을 먼저 설명하면서 이해와 용서를 바랄 수 있겠는가.

뮤에게 있어 가장 소중했을 터인 하루를 만신창이로 망가뜨려놓고 나는 평소처럼 뮤로부터 따뜻한 위로를 받길 원하는 건가.

그거야말로 양심 없는 행위이자 소위 악마나 다름없이 지탄 받을 짓거리였다.

죄스러움이 밀물처럼 몰려든다.

때문에 나는 아무런 말도 꺼낼 수 없었다.

“……”

벤치 위에서 무릎을 끌어안은 채, 고개를 그 사이로 파묻은 뮤로부터 단 두 걸음 앞에 가만 서서 말없이 있었다.

이 넓은 광장의 분수대에는 오직 우리 둘뿐이었다. 다른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하여, 우리만의 시간이었다.

이 순간만큼은 지금 이 자리에 둘뿐이었다.

시야가 아득해진다.

멀어지는 정신을 붙잡고 똑바로 섰다.

너덜너덜해진 마음을 간신히 부여잡은 내가 조금씩 떨리는 입술을 열고선, 그 안에 잔뜩 갈리고 찢어진 목소리를 어떻게든 정상적으로 내보려 애를 쓴다.

그렇게 갈고 닦은 한마디는 단 한 글자였다.

“……뮤.”

“……”

그녀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렀다.

순간.

뮤의 어깨가 움찔하는 것을 보았다.

다만 고개는 들지 않는다. 알고 있다. 지금 내 얼굴을 보고 싶지 않겠지. 시야에 보이기만 해도 해맑게 웃으며 내게 뛰어들듯 달려왔던 뮤는 지금 여기에 없었다. 있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잠시 눈을 감았다. 목구멍이 텁텁하게 메여서 나도 모르게 할 말도 못하게 될 것만 같았기에.

그리 차분히 마음을 다스리고선, 나는 내 주머니 속의 작은 박스를 만지작거렸다.

이제야 전해줄 수 있게 되었지만, 너무나도 늦어버린 뮤의 생일 선물이었다.

몇 번이고 입 안에서 말을 굴렸다. 첫마디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한참이나 고민했다. 그렇게 말한들 불과 삼 초도 지나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만큼 영겁처럼 느껴지던 시간이었다.

결국 작게 입술을 달싹였다.

“……많이 늦었네. 미안해.”

“……”

사과로 시작하는 인사라니.

최악이다.

무심코 울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다음은, 더 최악이어야만 했으므로.

“……사정이 있었어.”

“……”

한참이었을까.

어쩌면 영원처럼 느껴지던 시간.

아주 느리게, 답이 온다.

“……무슨 사정, 이요?”

“……”

뮤의 목소리는 나만큼이나 갈라져 있었다.

말을 오랫동안 하지 않은 건지, 아니면 저리 목이 쉴 정도로 고개를 파묻은 채 울고 있었던 건지. 어느 쪽도 확신할 수 없었다.

중요한 건 시종일관 뮤의 목소리에 머물렀던 생기가, 내 마음이 다 아플 만큼 검게 시들어 있다는 것이었다.

“미안해.”

다시 사과의 말을 건넸다.

순간, 무심코 휘청거릴 만큼 다리에 힘이 풀린다. 힘을 강하게 실어 버틴다. 숨이 가쁘게 차오르지만…… 여기서 정신을 잃을 수는 없었다. 한 번 위기를 버텨낸 내가 다시금 말을 이었다.

“……루비아가——”

납치당했다.

죽을 뻔했다.

나는 그 자리에 갇혔고, 결계 밖으론 나갈 수 없었다. 가까운 사람의 목숨이 위협받는 상황을 코앞에 두고 차마 혼자 도망칠 시도는 할 수 없었다.

그랬기에 필사적으로 목숨을 걸면서 루비아를 구출하려 했고, 성공했다. 모든 일이 끝나고 난 뒤에 너에게로 돌아왔다.

지금 나의 심정은 제외하고서, 오로지 사실에 근거한 일만 뮤에게 설명해줄 생각이었다.

그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었다.

“또.”

내 말을 끊은 뮤는 여전히.

나를 보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또…… 그 언니예요?”

“……”

그 서슬 퍼런 한마디에.

나는 세상이 잠깐 멈춘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한 번 내뱉은 말은 돌이킬 수 없다.

나도,

……뮤도.

“하.”

처음 듣는 뮤의 목소리였다.

아니, 몇 번 들어본 적은 있었다.

그게 나를 향한 건 처음이었다.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뮤는 조금씩, 응어리진 감정을 토해내듯이 잔뜩 갈라지고 냉기 혹은 미약한 분노가 어린 듯한 음성으로 내게 중얼거렸다.

“……그만 좀 해요, 이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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