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차버린 소꿉친구와 전 여친이 같은 반이라 곤란하다-35화 (35/201)

〈 35화 〉 회고 (6)

* * *

#22

그동안 많은 사람들, 특히나 남성들이 뮤의 곁에 서성거리며 접근해 왔다.

광장 내부가 놀러온 사람들로 북적거릴 대낮부터 쭉 벤치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아름다운 소녀에게 관심을 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무렴 그냥 스쳐 지나가도 무심코 등을 돌려 바라볼 만큼 뮤는 파멸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던 것이었다.

그러나 뮤는 본인이 허락한 사람이 아니라면, 특히나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접근하는 남성한테는 가차가 없었다.

오직 자신의 선배이자 연인인 에지오 크라닐을 제외하고선, 본인에게 호감을 보이는 모든 이성들한테 싸늘한 얼굴로 그리 말하는 것이었다.

“꺼져.”

말이 심하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뮤는 자신의 눈앞에서 그들이 꺼지길 바랐고, 그 마음을 입밖으로 꺼냈을 뿐이다.

뮤의 차가운 면박을 들은 사람들은 부리나케 뒤로 물러서기 바빴으나, 이따금 괴이한 취향을 가진 이들은 오히려 더욱 흥미로운 얼굴로 뮤와 대화하기를 계속하여 시도하는 것이었다.

뮤가 고요히 웅혼한 마력을 일으키자 그런 부류의 사람들마저 전부 도망쳐버렸다.

한심한 남자들 같으니라고.

한숨과 함께 뮤는 다시금 무릎 속으로 머리를 숨겼다. 그러곤 눈을 꼭 감은 채로 생각을 비우는 것이었다.

숨길 수 없는 초조함과 불안함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벌써 네 시간밖에 남지 않은 자신의 생일이, 기약 없는 기다림으로 끝나버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상기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다……

날씨는 점점 추워졌다. 배는 고팠다. 한 자리에 계속 머물러 있으니 몸도 딱딱히 굳어 어딘가 아픈 듯했고, 이따금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이 뮤의 귀 끝과 손마디 등을 불그스름하게 물들였다.

그럼에도 뮤는 움직이지 않았다.

단 한 발자국도.

에지오의 예상처럼 약속 시간이었던 오후 1시보다 무려 삼십 분이나 일찍 도착했던 뮤는, 생글거리는 미소로 하루를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했었다.

오후 1시 30분.

준비를 오래 하나 보다, 같은 생각을 하면서 쿡쿡 웃었다. 선배가 했던 말이 있으니 그걸 지키기 위해 여러 가지로 준비하는 것일 터다. 이 정도는 애교로 봐줄 수 있었다.

오후 2시.

벌써 한 시간이나 지각해버렸지만 괜찮았다. 아직 하루는 무려 10시간이나 남아 있지 않은가. 사실 선배가 약속했던 가장 행복한 하루라기도 뭣한 게, 뮤는 이렇게 좋은 날 선배와 함께하는 모든 순간이 바로 가장 행복한 날의 시작이었음에.

오후 3시 30분.

뮤는 그쯤에서 벤치에 앉았다. 슬슬 선배에 대한 걱정도 하기 시작했다. 조금씩 밀려드는 서운함은 뒷전이었다. 배가 고프긴 했는데 참을 만했다. 오늘은 선배와 같이 밥을 먹을 예정이었으니까.

생일을 핑계 삼아 자신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길 부탁할 생각이었다. 부끄러운 부탁에 주저할 귀여운 선배의 얼굴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웃음이 나오는 것이었다. 그걸로 버텼다.

오후 5시.

좀 많이 버티긴 했는데 그로부터 적잖은 시간이 더 지나자 왠지 축 늘어져버렸다. 안되지, 안 돼. 한편으로는 진심으로 걱정이 되었다. 정말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닐까. 선배는 함부로 약속을 이렇게 어길 만한 사람이 아니었을 텐데.

그래,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것이었을 터다. 옷장 앞에서 옷을 이러저러 맞춰보다가 옷자락에 걸리고 미끄러져 넘어진 뒤 책장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혔을지 어떻게 알겠는가…… 뮤는 차라리 그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생각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말았다. 그러다가 늦게라도 도착한 선배와 엇갈리면 큰일이었던 까닭이다. 그래서 그냥 가만히 있었다.

오후 7시.

추웠다.

오후 8시.

……선배. 언제 와요.

오후 9시 30분.

벤치 위에서 무릎을 끌어안고 가만 있었다.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었다.

오후 10시.

오후 10시 30분.

오후 11시.

현재였다.

“……”

선배는 올 거다.

반드시 올 거다.

자신을 이렇게 버려두고 갈 선배가 아니었다.

비록 늦게 온다고 해도, 분명 사정이 있었을 거다. 오히려 너무 늦어진다 싶었기에 뮤는 선배에게 무슨 큰일이 난 게 아닌지 걱정했었다.

다만 그 마음도 두 시간이 지나자 먼지처럼 흩날려 사라져버렸다.

하늘은 새까맣게 변해버리고, 이윽고 광장을 지나는 사람들의 발자취마저 확연히 줄어들었다. 광장 분수대 앞 벤치 위에 덩그러니 남겨진 뮤는 그로부터 한 시간이나 더 가만히 웅크려 앉아 있었다.

많이 기대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예쁘게 힘을 주어 차려입고 나오지 않았을 것이었다.

패션 센스는 딱히 없지만 그렇기에 주말에도 기숙사에 눌러붙어 있던 룸메이트를 통해 직접 코디네이션을 받았다. 완성된 뮤를 본 룸메이트는 말없이 엄지 손가락을 치켜 들었다.

자신이 보기에도 썩 예쁘게 꾸며졌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모습을 본 선배라면 분명, 겉으로 티는 안 내도 내심 부끄러워할 것이라 여겼다.

선배와의 추억이 담긴 머플러도 두르고 왔다. 처음에는 손에 들고만 있었지만, 갈수록 추워지자 얼굴에 칭칭 둘렀다. 그게 아마 다섯 시간쯤 지났을 때였던 것 같다.

그래.

그렇게 긴 시간이었다……

생각을 텅 비운 뮤는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그리고 체감상 30분이 더 지났을 때였나.

타박, 타박……

왜, 글쎄.

한 사람에 대해 아주 많은 것을 알고, 또 곁에 오래 있다 보면 자연스레 알게 되는 것이 있었다. 발자국 소리도 그 한 종류였다. 조금은 느릿하지만, 뮤는 왠지 모르게 정체를 알아챌 수 있었다.

그래서 아무 말도 없이 있었다.

알아도 모른 척했다.

뮤의 특히나 발달된 기감에 잡혔던 누군가의 발소리. 저 멀리서부터 걸어오다가, 갑자기 뛰기 시작했던. 그런데도 그 뛰는 소리는 조금 불규칙해서, 뭔가 이상한 것 같았던 부자연스러운 걸음걸이.

뮤는 귓가로 그 발소리를 들었으나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았다.

들 수 없었다. 들기 싫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좋아하는 선배의 얼굴을…… 지금은 보기 싫었다.

타박.

마지막으로.

그것이 제 앞에 멈춰 섰을 때.

“……뮤.”

“……”

그 한마디를 내뱉었을 때.

뮤는 순간 울컥하고 말았다.

“……많이 늦었네. 미안해.”

“……”

많이 늦긴 했다.

많이.

……엄청, 엄청.

“……사정이 있었어.”

그랬을 거다.

결국 이렇게 도착했으니까.

약속을 지키러 와줬으니까.

……지킨 게 맞는 걸까, 약속.

“……무슨 사정, 이요?”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아서였는지.

아니면, 지금 자신이 느끼고 있는 기분이 목소리에 섞이고 섞여서 결국 잔뜩 갈라지고 말았는지.

놀랄 정도로 금이 간 차가운 음성이었다.

사정이라니. 대체 뭐였을까.

자기가 생각한 것처럼 책장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혔다면, 지금쯤 광장이 아니라 신전에 있어야 할 터였다. 하지만 선배는 버젓이 광장에 도착했다.

보름달이 뜬 밤 11시가 꼬박 넘어서야. 자신의 생일이 고작 한 시간도 남지 않게 되어서야…비로소 도착한 것이었다.

다른 사정은 잘 떠올리기가 힘들다.

뭐였길래.

대체 얼마나 중요한 무엇이었길래, 자신의 생일날을 반드시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그런 장담을 해놓고서도 이리 늦어버린 걸까……

밉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서운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감정들도 결국 뮤가 그토록 사랑하는 선배를 향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 사정이라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뮤는 선배의 진심 어린 사과 한마디와, 고개를 들어 선배의 얼굴을 마주하고 나면 그런 서운한 감정들은 전부 풀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실은 그 묵은 감정이 조금 오래 갈 것 같긴 해도, 선배로서도 분명 어쩔 수 없는 일이 있었을 테니까.

나와의 약속을 일부러 깨뜨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파탄낸 것이 아니었을 테니까, 뮤가 듣고서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말이었다면 괜찮았다.그걸로 충분했다.

하지만.

뮤는 끝내 말을 전부 듣지 못했다.

“……루비아가——”

짧은 한마디였다.

1년이다.

선배와 사귀었던 기간이 벌써, 그렇게 되었다.

인연을 맺었던 건 2년이 다 되었겠지.

그 2년 동안.

선배의 모든 걸 가지고 싶어 했던 자신이, 결코 손대지 못할 정도로 아득히 먼 영역에 홀로 자리한 그 사람의 이름이.

……오늘은.

오늘만큼은.

선배의 입에서 듣고 싶지 않았던.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던 사람의 이름이.

생일날 선배와의 대화 첫마디로 나왔다.

그 순간에.

“하.”

툭.

뮤의 마음속에서 뭔가가 끊어지고 말았다.

“……그만 좀 해요, 이제.”

뮤는 그날 처음으로, 선배를 향한 감정에 감히 분노와 역정이라는 것을 품어 보았다.

어떤 사정이라 해도 납득해 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데……

이건 아니었다.

도저히 아니었던 것이다.

대체 왜.

여기서까지 그 이름을 내가 들어야 하는데.

오늘은 나와 너만의 날이었잖아.

근데, 왜……

또 그 사람이 방해하는 건데.

내가 무슨 짓을 해도 결국 닿을 수 없는 위치에 있어서, 하지만 그 모든 걸 감수하고서도 선배와 이어지고자 한 건 오로지 자신의 뜻이었어서, 그간 선배에게 아무런 불만을 표하지도 못했다.

처음부터.

본인의 이기적인 마음으로 시작했었기에.

자신의 접근을 거부하는 선배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스스로 그 사람의 대신이 되고자 선배의 마음에 들어갔었던 게 아닌가.

그걸 모두 알고서 시작한 관계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뮤는 북받쳐 오르는 설움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방향은 조금 잘못되었다.

“……선배가 그 모양 그 꼴이니까, 언니가 싫어할 수밖에 없었던 거잖아요.”

“……!”

——정말이지 미쳤다고 생각했다.

아니야, 뮤.

너는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돼.

선배가 지금까지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 알면서. 그걸 옆에서 가장 많이 지켜봐왔던 게 바로 너였잖아. 너만큼은 선배의 노력을 폄하해서는 절대로 안 되는 거잖아. 다른 누구도 아닌 너만큼은.

그리고, 선배가 그렇게까지 노력하게 만든 상처를 직접적으로 건드려버리는 심한 말은…… 더욱 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잖아.

하지만 이미 뱉은 말은 주워담을 수 없다.

감정은 조절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다.

특히나 그것의 정도가 심하면 심할수록, 한 번 토해내면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 결국 속에 있는 걸 모두 꺼내어 텅텅 비어버릴 때까지 절대로 멈출 수 없는 것이었다.

목소리에 어린 떨림이 차츰 짙어진다.

이러고 싶지 않은데.

이럴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가 혐오스러워질 만큼, 뮤는 선배의 자세한 사정조차 듣지 않고 그저 설움과 분노에 물든 채 점점 모진 말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선배 같은 사람을 사랑해준 게 도대체 누군데. 선배 같은 걸, 내가 얼마나 진심을 다해서 사랑해줬는데……”

“……”

선배 같은 사람이라니.

정작 그 사람을 사랑한 건 뮤였다.

그런 사람에게 반해서, 점점 그 사람의 모든 걸 좋아하게 되어서, 뮤에게만큼은 선배가 그 어떤 남자보다도 사랑스러웠지 않는가.

그렇게 사랑하는 선배에게.

——’선배 같은 거’라니.

자신의 설움과는 별개로, 그건 절대로 해서는 안 될…… 평생토록 상처가 될 말이었음이 분명했다.

처음 선배에게 고백했던 건 자신이었다.

그를 마음 깊이 사랑한 건 맞지만.

선배가 먼저 매달려 온 것도 아니었거니와.

선배 쪽에서 부담스러울 만큼 듬뿍 사랑을 준 것은, 온전히 자신의 의지와 뜻으로 이루어진 행위였다.

그것을 선심 쓰듯, 그에 대한 마땅한 보상을 받아야겠다는 듯 이기적이기 짝이 없는 말로 포장해서 지성 없이 내뱉고 있었다.

그러나 멈출 수 없었다.

“그런데 여전히 나 따위는 관심에도 없고, 또, 또, 또…… 또, 그 언니냐구요. 대체 그 루비아란 사람이 어쨌는데요. 제가, 제가… 저보다 그 언니가 정말, 2년 가까이 대화 한 번 해본 적도 없는 그 언니가 저보다 소중한 거냐구요. 너무한 거 아녜요. 이건 진짜 안 된다구요, 선배. 제가, 오늘을, 얼마나……”

“……”

문득.

뮤의 입매가 비틀렸다.

더욱 돌이킬 수 없는 곳으로, 뮤는 걸어갔다.

“제가 뭘 더 해야 하나요? 여기서 얼마나 더 선배를 사랑해줘야, 선배는 저를 제대로 봐줄 건가요? 네? 제발 그만 좀 해요. 이제 그만 할 때도 됐잖아. 오늘만큼은 그러면 안 되는 거였잖아요. ——그런데 도대체 왜! 왜! 왜…! 그 사람이 여기서까지 나오냐고! 평생 잊지 못할 행복한 하루로 만들어 준다며. 최악이잖아, 이런 건…! 제발 그만 좀 하라고!”

악을 질렀다. 소리를 쳤다.

심장이 격하게 뛰었다. 온몸이 뜨거운 열기로 뒤덮히고, 파묻은 고개 한가운데 사이로 눈물방울이 줄지어 떨어졌다.

울컥거리며 자꾸만 튀어나오는 모진 말들은 보이지 않는 선배를 향해 폭격처럼 쏟아진다.

“그 언니한테 선배가 그렇게 소중한 친구였으면, 그때 고백을 받아줬겠죠! 하지만 아니었잖아! 이 모양 이 꼴에, 지금도 구질구질하게 잊지 못할 만큼 얼마나 질척거렸으면…! 있는 정도 다 떨어지는 게 분명하잖아……! 그럼 이제 포기할 때도 된 거잖아. 나로는 안 되는구나, 그냥 그렇게 잊으면 되는 건데, 뭐가 그렇게 소중하다고. 이미 그 언니는 선배를 잊어버렸을 게 뻔한데. 혼자서만 지겹도록 그리워하고, 잊지 못하고, 그러는 게 정말 좋은 거라고 생각해요? 그만 좀 놓고 날 봐줄 때도 됐잖아요, 네? 선배……”

선배가 그토록 소중하게 여겼을 정도면.

그 언니와의 추억이란, 절대 잊을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을 터다. 뮤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질투가 났다. 도무지 참을 수 없었다. 자신으로선 절대 가지지 못하는 것이었기에. 루비아와 에지오의 사이란 도대체 얼마나 깊은 관계였으면, 선배가 지금까지도 종종 그리워했을까.

그런 사람 때문에.

결국 나보다 그 사람이 더 소중해서.

자기 멋대로 상황을 해석하고, 상대방의 말은 전혀 듣지도 않고. 선배의 사정을 마음대로 추측해서 그가 자신을 버린 거라고, 그렇게 생각해버렸다.

선배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얼굴이 보이지 않아서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보고 싶지 않았으니 당연한 거였다. 선배의 얼굴을 정면에서 보고선 이런 말을 내뱉을 용기가 뮤에겐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다만 응어리진 울분을 전부 토해내고 싶었기 때문에 절대 고개를 들지 않는 것이었다. 이기적이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대체 왜…! 왜! 왜 난 안 되는데! 나 아니었으면 선배 같은 남자를 누가 사랑해줬을 것 같아요? 선배는, 선배는 정말 은혜도 모르는 사람이에요…? 전 선배만 바라봤어요. 다른 사람한테는 관심 하나 없었다구요. 그럼 선배도 저만 봐줘야죠. 그래야 공평하잖아요. 아니, 평소엔 그렇지 않아도 오늘은. 오늘만큼은 선배는 저만 바라봐줬어야죠……!”

은혜라. 그 단어를 결국 꺼내고 말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뮤 자신이 꺼내버렸다.

선배에게 해준 게 많다. 그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전부 자기가 바라서 해준 것이었다.

틈을 채워준다고 한 것도, 자기와 있을 땐 아무 생각하지 않아도 좋다고 한 것도, 선배의 힘이 언제라도 되어주겠다며 가슴을 탕탕 쳤던 것도 전부 뮤 스스로 했던 말과 행동들이었다.

그것에 보답을 바라는 거다.

보답해주길 바라는 마음이야 내심 조금이나마 들 수 있다곤 해도, 그것을 이렇게 응당 받아야 할 권리처럼 들먹여서는 절대로 안 되는 것이었다……

“오늘은…그 언니랑 대체 뭘 했어요?”

——그만, 그만해야 돼.

“언니가 다른 남자랑 부대끼기라도 했나요? 선배 몰래 누군가랑 사귀고 있던가요? 그 모습을 봐서 충격 때문에 늦기라도 했나요? 하, 차라리 잘 됐네요. 그럼 선배가 깔끔히 포기할 수 있었을 테니까!”

선배가 지금까지 놓지 않을 정도로 사랑했던 사람이라면, 그렇게 말을 해서는 안 되는 거잖아. 상처를 더 크게 벌려버려선 선배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는 것은 뮤, 바로 내가 되어버려.

“그럼 된 거잖아요. 이제 다 끝났잖아요. 그냥 그 길로 돌아와서 저랑 시간을 보내면 됐던 거잖아요. 저라면 다 해줄 수 있었다구요. 그 언니가 해주지 못하는 거, 저라면 전부 다 선배한테 해줄 수 있었다니까요? 네? 그만 좀 질척거려, 제발……”

“……”

“이러다가 저도 선배를 싫어하게 될 것 같아요. 절대, 절대로 싫어하고 싶지 않았는데, 이제는 진짜 그렇게 되어버릴 것 같아요.”

“……미안, 해.”

바로 앞에서 선배의 목소리가 들렸다. 쩍쩍 갈라져 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선배가 그렇게 말하자, 더욱 참을 수 없어졌다. 미안함을 느껴야 되는 거였다. 반드시 미안해야 되는 일이었다. 아니, 저것보다 더 자신한테 미안해야만 했다.

그런 식으로 뮤는 점점 격해지는 감정을, 더 이상 주체하지 못할 만큼 표출하고 있던 것이었다.

뮤의 입에서 냉기가 어려 나왔다.

“사과하지 마.”

“……”

“어차피 진심도 아니잖아. 결국 그래놓고 날 사랑해주지 않는 거잖아. 그럼 차라리 미안해하질 마. 그냥 미안할 짓을 하지 말라고…… 너 때문에 내가, 앞으로 얼마나 이렇게 힘들어 해야 하는 건데……”

“……”

“선배는, 선배는 정말……”

쓰레기예요.

그 말을 담으려 하던 순간에.

뮤는 가까스로 멈칫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 말만큼은……

왠지 꺼내선 안 될 것 같았다.

정작 겉으로 티내지도 않았으면서 혼자 속으로 삭히고 삭히며, 그렇게 쌓이고 축적되었던 울분과 설움이 화산처럼 폭발해버렸다곤 해도, 직접적인 욕설을 담는 순간 모든 게 끝이 나버릴 것 같았다.

그런 생각에 말을 잠깐 멈추었던 거다.

……아니다.

아니었다.

사실은 이미, 전부 끝나버렸다.

“……흐으, 흐…”

뮤는 흥분으로 들썩이던 가슴을 천천히 진정시켰다. 너무 격한 감정이었다. 그렇게 잔뜩 토해내고, 눈물을 흘리고 나서, 그제야 자신이 했던 말들을 천천히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뮤의 어깨를 진동시키던 떨림이 점차 잦아들었다.

……나, 지금.

선배한테 무슨 말을 한 거지?

그런 생각을 하긴 했지만.

격한 감정으로 뒤덮인 뮤의 전신은 쉽게 진정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눈물로 흐릿하게 일그러진 시야는 여전히 어둠에 감싸여 있었다. 파묻은 고개는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한참. 얼마나 오래였을까.

“하아, 하……”

가쁜 날숨과 들숨을 반복하던 뮤는.

“…이제 됐어요. 사정이 뭐든——”

스윽.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그제야 들었다.

“……어.”

그 순간.

———뮤의 세상이 잠깐 멈춰버렸다.

“……어, 어?”

흐릿한 시야 속에, 보였다.

말하는 법을 잃어버린 듯 그냥 입을 벙긋거릴 수밖에 없었던 뮤의 눈동자가, 그보다 더할 수 없이 격렬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서, 선배……?”

뮤가 굳었던 손을 풀었다.

본능적으로 앞을 향한다.

갈라진 목소리가 또 다시 자신을 향했다.

“……미안, 해.”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만큼.

사랑하는 선배의 얼굴은…… 피투성이였다.

뽀얗고 말랑했던 피부는 푸석푸석하게 빛바래져 있었고, 그 위를 덮은 머리칼은 일부가 축축하디 검붉게 물든 채였다.

뮤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왜, 왜?

대체 무슨 일, 무슨 일이 있었던……

선배의 온몸에 성한 곳이 하나도 없었다.

맨살이 보이는 곳은 죄다 찢어지고 무언가에 할퀴어진 채, 선배는 조금 어긋난 밸런스로 바닥을 간신히 딛고 서 있었다. 다만 그냥 서 있는 것마저 힘든지 파르르 떨리기까지 했다.

손톱이 몇 개 뜯겨 있었다. 그 아래로 말랑한 살결이 드러나 있다. 날카로운 바람이 불기라도 하면 굉장히 쓰라릴 것이었다.

핏빛 얼룩이 진 셔츠와 바지에 난 구멍 사이로 미처 끊어지지 않은 실가닥이 이어져 있다. 그 안으로 보이는 살결에 상처가 가득했다. 어떤 심한 일을 당했는지 피딱지가 두껍게 굳어져 있었다.

“아, 아아, 아……”

머플러에 코를 묻고 있었던 탓에 잘 느껴지지 않았던 냄새. 피내음. 흙내음. 그 모든 것이 합쳐져 뮤의 머릿속을 진탕 헤집었다.

선배의 호흡은 간헐적이었다.

무언가에 찢기고 벌어진 얼굴로부터 자신에 대한 죄스러움이 잔뜩 묻어나고 있었다.

그건, 선배를 사랑하는 자신의 입장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너무 마음이 아픈 광경이라…… 뮤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 혀라도 깨물고 싶을 지경이었다.

흉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감싸고 있는 건, 흙먼지가 묻은 머플러였다. 그 옛적에 자신이 선물해주었던 그것을, 선배는 오늘 밖에 나설 때부터 두르고 있던 것이 분명했다.

이게, 이게……

뮤는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현실을 도저히 믿기가 힘들었다.

너무 혼란스러웠다.

갑작스레 울컥하는 감정이 솟아올랐다.

방금까지 쏟아냈던 분노도 아니고, 더욱이 선배에 대한 서러움도 아니었다.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다리를 절뚝거리며 저 멀리서부터 이 몸 상태로 뛰어왔을 선배의 모습이 갑작스레 떠오른다.

“서, 선배… 아… 아아아아……”

뚝, 뚝.

급작스레 터져 나온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뮤의 머릿속이 텅 비어버렸다.

그간의 설움이고 뭐고, 자신의 생일이고 뭐고…… 다 무엇이 어쨌는가 싶었다.

전신이 빨갛게 물든 선배를 보자마자 뮤는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어버버거리며 파들파들 떨리는 손을 들고, 휘청거리는 다리를 겨우 움직여 벤치에서 천천히 일어서는 것이었다.

“괘, 괜찮, 괜찮은…… 거예요? 선배, 선배…”

“……미안, 해.”

선배는 고장난 것처럼 같은 사과를 반복했다.

언제나 예쁘게 반짝이던 푸른 눈동자.

찬란했던 빛깔은 탁해졌다.

눈동자의 초점은 흐릿했다.

하지만 분명 자신을 보고 있었다.

핏방울이 스며든 눈물 한 줄기를 주륵 흘리며, 다시 한번 같은 말을 입에 담는 것이었다.

“…미안, 해. 뮤.”

“마, 말하지… 말하지 마요. 선배. 아니, 이럴 게 아니라. 잠깐. 어디를, 어디를 가야 하지? 아, 아아……”

자리에 오래간 움직이지 않았던 탓에 다리가 굳어 순간적으로 휘청거렸다. 바닥에 잠깐 손을 짚었던 뮤가 재빨리 일어나,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갔다.

“선배, 무슨 일이… 대체, 이게, 뭐가……”

선배는.

무언가 잃어버린 표정으로 말했다.

“……루비아가, 납치당했어…”

“……갈 수밖에, 없었어. 나도, 거기 갇혀서…”

“……구해야 했어.”

“……구했어.”

“……미안, 해. 많이 늦어서…”

그랬구나. 그런 거였구나.

“아, 아……”

뮤는 사실 아무런 얘기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냥 그런 거구나, 싶었다. 중요한 건 선배를 이대로 놔두면 안 된다는 사실이었다. 이렇게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대체 어디서부터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러 걸어온 것이었을까.

뮤는 끔찍한 심정이었다. 참혹했다.

이런 상태의 선배에게.

자신은 대체…… 무슨 말을……

얼굴을 손톱으로 세게 긁고 싶었다. 앉아서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당장 기숙사로 돌아가 밧줄을 찾고 싶을 정도로, 뮤는 지금 심장이 멎을 것만 같은 고통스러운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이럴 게 아니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냐.

선배를 살려야 해.

“시, 신전에 가요. 신전에 가야……”

밤이 너무 늦어 아마 문을 열지 않았을 테지만, 글쎄. 뮤는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만약 문이 닫혀 있다고 해도 뮤는 어떻게든 소리를 지르며 선배를 살려달라 외칠 것이었다.

뮤는 선배를 들쳐 업으려 했다. 아니, 품에 들고 안아서 가야 하나? 어떻게 들어야 선배가 덜 아프지? 지금 함부로 움직여도 괜찮은 게 맞나? 수만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가 다시 잠들었다.

——거대한 충격에 휩싸인 뮤에게.

선배는, 에지오는.

“……뮤.”

“말하, 말하지 말라니까요…!”

“……이거.”

잔뜩 상처가 그어진 얼굴로.

어떻게든.

정말 쥐어 짜내듯이 힘겨운 미소를 그리면서.

주섬주섬.

구멍난 주머니로부터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파들파들 떨리는 손바닥 위에 들린 물건.

분명 고급스러웠을 터인 보랏빛 케이스는 흙이 묻어 조금 더러워진 채였으나, 조금 청소를 하고 나면 금세 원래 빛깔을 되찾을 것이었다.

정사각형의 작은 박스 케이스.

그것은 귀여운 리본으로 포장되어 있었다.

“됐으니까, 선배, 빨리——”

뮤는 저게 뭔지 궁금하지 않았다.

그냥, 그냥…… 선배를 들어 업고자 했다.

그전에.

스륵.

뮤의 말을 무시한 에지오는, 말없이 떨리는 손가락을 어떻게든 움직여 리본의 매듭을 풀곤.

그리고,

……딸칵.

그것의 케이스를 열었다.

“——!”

뮤는 얼결에 그 내용물을 눈에 담았다.

“……아, 아.”

——뮤의 가슴에 날카로운 대못이 박혔다.

선배는 상처투성이였다.

만신창이였다.

피투성이였다.

그럼에도 저것만큼은 꿋꿋하게 지켜왔던 것이다.

온몸이 으스러질 만큼의 끔찍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그냥 넣어두었다면 빠질 게 분명한 주머니에 그 물건을 고이 간직하고 있던 것이었다.

이제 와서.

뮤가 그토록 사랑하는 선배에게 너무나도 하지 못할 말을 참지 못하고 해버린 지금에서는.

그 소중한 가치가 전부 없어져버린……

선배의 진심이.

그곳에 소중히 보관되어 있었다.

“……생일, 축하해. 뮤.”

활짝 열린 케이스 안 쿠션 위에——

두 개의 실버링이.

달빛에 반짝이며 예쁘게 빛나고 있었다.

뮤의 눈꺼풀로부터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평소에……

자신과 연인임을 티내기 싫어했던 선배였다.

아카데미 내부에선 그냥 친한 선후배처럼 보이길 원했다. 자신과 연인임을 알림으로써 받을 무수한 관심이 부담스러웠던 거다.

굳이 그것뿐만이 아니더라도, 선배는 아마 여러 가지로 내심 곤란을 겪고 있었을 거다.

그렇게 수줍고, 혹은 자신과의 관계를 아무나에게 알리기 싫었던 건지 몰라도, 참 부끄러워 했던 선배였다.

그런 선배가.

에지오 선배가.

직접, 커플 악세서리를 사온 것이었다.

“선, 배……”

그 의미는…… 뮤에게 있어 너무나도 컸다.

언젠가 뮤가 했던 말처럼.

서로가 긴밀히 연결되길 바라며.

이제 곧 졸업하는 선배의 입장에서, 선배와 뮤가 언제나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선배는 자신을 계속 기억하고 있을 것임을.

그리고.

자신을……

완전히 연인으로서 받아들이겠음을.

그런 진심이 담긴 커플링과 함께.

오늘 하루를, 같이 보낼 예정이었던 거다.

“아, 아……”

……그런 선배의 마음도 모르고.

어떤 사정 때문에 이렇게 늦어버렸는지, 저런 꼴이 되어서면서까지 자신과 만나기로 했던 이 광장에 어떠한 각오로 절뚝거리며 돌아왔는지.

뮤는 아무것도 모른 채.

아니, 전혀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던 채로…… 사랑하는 선배에게 결코 돌이킬 수 없는 말실수들을 저질러 버렸다.

——짝!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부터.

뮤는 자신의 뺨을 거세게 쳤다.

——짝! 짝! 짝! 짝!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조용한 광장에 뺨을 후려치는 소리가 울렸다.

——짝! 짝! 짝! 짝!……

뮤는 스스로 뺨을 치면서 울었다. 오열에 가까웠다. 예쁜 얼굴에 흠집이 나고, 발갛게 부어 상처가 벌어져 핏방울이 튀길 때까지.

자신은 선배를 결코 힘들거나 아프게 하지 않을 거라는, 그 언젠가의 호언장담이 떠올랐다. 절대로, 그리고 영원히. 라는 말까지 덧붙이며 그렇게 가슴을 내밀곤 다짐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꼴은 뭔가.

약속을 지키지 못한 벌을 받아야 했다.

지금 얼굴에 느껴지는 화끈한 고통 따위, 뮤의 찢어질 듯 참혹한 심정과 비교하면 정말로 하찮은 고통이 아닐 수가 없었다.

——짝!

다시 한 번 뮤가 본인의 뺨을 쳤을 때.

“……그러지 마, 뮤.”

“……흐으, 흐. 흐아아아…”

“……이제, 됐어. 내가… 미안해.”

뮤는 울고 또 울었다.

한적한 광장 한복판에 오로지 뮤의 울음소리밖에 들리지 않을 만큼, 고개를 꺾어 하늘로 향한 채 서글프도록 엉엉 울었다.

타박…

그런 뮤에게 에지오는 천천히 다가갔다.

바로 앞에 있었던 까닭에, 비틀거리며.

꼬옥.

두 팔을 벌려 뮤를 껴안았다.

“……미안, 했어. 뮤.”

“흐아, 흐으으, 흐으으아아아아……”

“……전부, 내 잘못이야. 그러니까……”

선배는 살포시 눈을 감았다.

차갑고 상처 가득한 작은 몸이 느껴졌다.

당장 선배를 업어 들어 신전에 데려가야 하는데. 울음을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연이어 터져버린 격한 감정의 폭발에 뮤는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다만, 그렇게……

몸도 마음도 망가져버린 선배는.

자신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만하자, 전부.”

그 한마디를 끝으로.

에지오는 눈을 감은 채 조용히 기절해버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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