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화 〉 회고 (9)
* * *
#32
“뭔 일 있었니, 루비아? 성적이 훅 떨어졌구나.”
어느덧 겨울이 되어, 12월 중순.
로르센 아카데미 3학년 학생들의 마지막 정기고사가 끝난 이후, 루비아를 따로 호출한 담임 교수가 걱정스러운 눈길로 그런 말을 꺼냈다.
속뜻을 담진 않았다. 어떠한 다른 의도도 없이 순수하게 루비아의 상태를 걱정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죄송해요, 교수님.”
컨디션이 늘 최고조를 유지할 수는 없다지만, 루비아는 그동안 꾸준히 마법부 전체를 통틀어 석차 1순위를 기본적으로 달성했던 수석 졸업 예정의 무척 뛰어난 학생이었다.
물론 루비아도 한 명의 사람인지라, 어떤 날에는 잠깐 미끄러져 2순위에 그쳤던 날도 존재하긴 했으나, 두어 번 정도라면 오히려 루비아의 인간미를 보여주는 부분이 되는 법이었다.
하지만 이번 정기고사에서 미리 계산해 본 루비아의 성적은…… 놀랍게도 전체 15위였다.
루비아의 성실함은 로르센 아카데미의 교수진 전부가 익히 들어 알고 있던 까닭에, 이러한 결과는 정말로 의외였다.
하물며 이번 시험은 특히나 더 어렵다거나 그런 것도 아니었다.
물론 졸업 직접 마지막 시험인 만큼 지금까지 배워 왔던 것을 총결산한다는 느낌으로 복잡한 문제가 여럿 출제되긴 했었으나, 평소의 루비아였다면 어렵지 않게 풀 수 있었을 수준의 문제들이었다.
그런 루비아가 필기에서도 4문제 이상을 틀려버리고, 늘 만점에 가까웠던 실기에선 계산을 실수해 제시된 마법의 형태를 온전히 구성하지 못했다.
그 결과 목표는 어찌저찌 달성하긴 했으나 영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 완벽에 가까운 퀄리티를 구사하던 루비아의 마법은, 그날따라 초보 마법사처럼 참으로 어리숙해 보였던 것이었다……
“……컨디션이 많이 안 좋았나 봐요.”
루비아는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마지막 정기고사.
거하게 망쳐버렸다.
……그래도 루비아가 아직 쌓아온 많은 것들이 있던 까닭에, 예정되었던 수석 졸업이 하루아침에 증발한다거나 그런 일은 없을 것이었다.
대신 이처럼 담임 교수가 따로 루비아를 불러 무슨 사정이 있었던 건지 걱정할 정도로, 루비아를 아는 타인에게 있어 큰 화젯거리가 되긴 했다.
“너를 질타하려고 부른 게 아니란다. 실수야 누구나 할 수 있다지만…… 정말 괜찮은 거니? 얼굴빛도 많이 안 좋아진 것 같구나. 만약 어디가 심하게 아픈 거라면……”
“아, 아녜요. 교수님. 그런 거 아니고…… 진짜 컨디션이 안 좋아서 실수한 것뿐이니까, 괜찮아요. 저 지금은 멀쩡해요.”
“…그러니? 무슨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렴. 졸업이 얼마 남지 않았다곤 해도 마지막까지 내 학생을 챙겨주고 싶으니 말야. 루비아 네가 심지 굳건한 아이라는 건 잘 알고 있지만, 정 힘들 때는 주변인을 가끔은 의지해봐도 좋아.”
“……감사합니다, 교수님.”
루비아는 다시금 고개를 꾸벅 숙였다. 교수는 마지막까지 루비아를 걱정했으나, 루비아에게서 다른 대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끼이익—
그렇게 짤막한 인사와 함께 교수의 연구실을 나선 루비아가 닫힌 문 앞에서 잠시 가만 멈춰 섰다. 고요히 눈꺼풀을 닫은 채 밀려오는 한숨을 그대로 길게 토해낸다.
“……하아아.”
정말 왜 이러지, 나.
시험을 치르는 과정에서 조금만 더 큰 실수가 벌어졌다면 수석을 유지 못하게 될 뻔했다.
학습한 공부량도 평소와 전혀 차이가 없었을 만큼, 아니, 어쩌면 평소보다 더 많은 시간을 투자했던 것 같은데 대체 왜였을까.
그야, 제대로 된 효율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머리를 끙끙거리며 열심히 공부하면서도 자꾸 어딘가 하나씩 삐끗했었으니……
안 하던 짓을 해버린 이유는 딱 하나였다.
……
마지막으로 에지오의 행방을 물어보기 위해 뮤를 찾아갔던 이후로, 루비아는 뮤에게 말 한번 걸 기회조차 얻을 수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럴 수 없다고 보는 게 맞았다. 왜냐면 더 이상 눈에 보이지도 않았으니까.
기숙사 짐은 싹 정리해서 이미 어디론가 거처를 옮긴 듯했고, 듣기론 어디 한 군데 틀어박혀서 오로지 검만 휘두른다고 한다. 아무와도 사적으로 만나지 않으려 하며, 정말 무언가에 미친 사람처럼 검에 몰두하기 시작했다고……
그렇게 벌써 3주가 넘는 시간 동안, 뮤라는 검술부 2학년 학생이 같은 학부 선배는 물론이고 검술부 교수진들을 도장깨기처럼 하나하나 격파하고 다닌다는 괴이한 소문이 돌기도 했다.
그 전설적인 모습을 일부라도 엿본 학생들은 하나같이 공포에 떨거나 뮤의 천외천적인 재능에 소름이 돋도록 감탄하기 바빴다고 한다.
물론, 그런 소문은 루비아에게 있어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타박, 타박.
교수의 말처럼 낯빛이 살짝 창백해진 루비아는 별관 내부 복도 위를 정처없이 걸었다. 갈 곳 잃은 시선은 축 늘어져 바닥을 향했고, 언제나 부드러운 생기가 넘쳤던 루비아의 분위기는 이전보다 확실하게 칙칙해져 있는 상태였다.
…에지오를 찾을 수 없었다. 갈수록 미스터리였다. 대체 에지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어디로 가버린 걸까. 어떤 곳에서도 에지오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카데미 안에서 잘만 보였는데, 이젠 그가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지, 정말 살아는 있는 건지 아무것도 정확하게 알아낼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뭘까. 뭐인 걸까. 나한테는 한마디 말도 없이 어디로 간 거야, 에지오……
다른 건 몰라도 자퇴 같이 중요한 일이라면 언질 한마디쯤은 해줄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우리, 너무 멀리까지 와버린 걸까.
아니면 누구한테 말해줄 여력도 없이 진짜로 크게 다쳤던 게…… 그건 아닌 듯했다.
뮤는 에지오의 소식을 자기보다 더 자세히 알고 있었다. 적어도 뮤에게만큼은 에지오가 사전에 여러 말들을 해준 것이 분명했다.
홀로 복도를 걷는 루비아의 주위를 감싼 우울한 감정이란, 고독 혹은 고립감이었다.
어릴 적 울창한 숲속에서 길을 잃어 혼자 덩그러니 남겨졌던 기억이 떠오른다. 정말이지 두렵고 무서운 순간이었다.
그럴 때 수풀을 헤치며 에지오가 나타나주면, 자리에 쪼그려 앉아 울던 루비아의 눈물은 거짓말처럼 뚝 그치기 마련이었다.
지금처럼 루비아의 머릿속을 꽉 채워버린 불안감은 한순간에 눈 녹듯 사라지고 마는 것이었다……
루비아는 그동안 에지오에게 은연중 조금씩 생활을 의지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의 존재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셈이었다.
하지만 이젠 아니었다. 아예 찾을 수도 닿을 수도 없는 머나먼 곳으로 잠적해버려서, 에지오를 더 이상 시야에 담지 못하게 된 루비아는 극심한 무기력감에 빠져버렸다.
그러곤 조금씩 미련한 생각을 하는 것이다.
……억지로라도 대화를 걸어볼 걸 그랬나.
에지오에게 부담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적극적으로 말을 나눠봐야 했을까. 에지오가 자신을 불편해하는 걸 감수하고, 내가 그에게 상처를 줘버린 일들을 말로 풀어볼 걸 그랬나.
뒤늦게서야 그런 후회 섞인 미련한 생각들을 해보지만, 결국 이미 모든 게 끝나버린 상황이었다.
당연하게도 이젠 어쩌할 도리조차 없어졌다.
에지오와 자신은 멀어진 채 아무런 전환점도 없이 그대로 헤어지게 되었다. 묵힌 갈등을 풀 기회도 없었다. 에지오는 떠나버렸고, 자신은 여기 남겨졌다.
그 때문에 지금 자신의 몸과 마음이 점점 피폐해져 가는 것도, 그 모든 일들이 전부 자신의 탓만 같아서, 루비아는 어두운 자책감과 우울함에 조금씩 물들어 가는 것이었다.
……그렇게 교수실을 나선 뒤로 루비아에겐 남은 오후 수업이 연달아 두 개 정도 있었으나, 역시나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다.
#33
며칠 전, 겨울의 첫눈이 내렸다.
— 루비아, 여기 있니? 잠깐 나와보렴.
오늘도 대실한 연구실에서 하라는 마법 연구는 안 하고 에지오의 행방을 수소문 해볼 방법을 깊이 고민하던 루비아에게, 너를 부르는 사람이 있으니 하던 것을 그만두고 밖에 나와보란 지시가 내려졌다.
이전보다 살짝 마른 듯 보이는 인상의 루비아가 허둥거리며 테이블 위를 정리했다. 그러곤 연구실 키를 챙겨 문을 나서고, 교수가 부른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누가 불렀을까. 그에 대한 해답은 얼마 지나지 않아 빠르게 내놓을 수 있었다.
“오랜만이군, 루비아. 잘 지냈나?”
낮은 천장 아래서 의자에 앉아 눈 내리는 경치를 즐기던 연갈빛 머리의 청년이, 손을 흔들며 루비아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 슈리엘 선배님?”
루비아만큼은 아니었으나 그도 어딘가 살이 조금 빠진 듯한 모양새였다. 마탑에서의 활동이 힘들었던 걸까. 고생이 많아 보였다.
“우선 여기 앉지.”
“아, 네. ……히얏!”
루비아는 슈리엘이 가리킨 오른편 의자에 가서 조심스레 앉았다. 야외에 배치된 의자였던 까닭에 엉덩이가 시리도록 차가웠다. 루비아의 미약한 비명소리가 들려오자, 슈리엘이 자리에서 일어나 입었던 외투를 벗으려 하며 말했다.
“이런. 옷이라도 깔아주는 것을 깜빡했군.”
“아, 아녜요! 마법으로 충분해요!”
슈리엘의 행동을 제지한 루비아가 곧 빠른 계산을 마쳤다. 눈꺼풀을 닫고 여는 것으로 충분했다.
——우우웅……
루비아는 곧 손바닥에 떠오른 붉은 빛깔의 소형 마법진을 앉고 있는 의자에 바짝 갖다 대었고, 타는 일 없이 성공적으로 열을 흡수한 목재 의자가 따스하게 물들었다.
곧 입김을 불며 서서히 녹아내리기 시작한 루비아의 표정을 보던 슈리엘이, 문득 미리 준비해놓았던 커피 한 잔을 그녀에게 건네며 입을 열었다.
“꽤 헬슥해졌구나, 루비아.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나?”
“네? 아…… 그냥, 요즘 졸업 때문에 이러저러 생각이 많아져서 그런가 봐요.”
고개를 짧게 숙이며 커피잔을 받아든 루비아가 호호 불며 그것을 입술 안에 살짝 담았다. 뜨거웠다. 하지만 썩 좋은 맛이었다. 커피잔을 두 손으로 감싼 채 루비아는 슈리엘과 비슷한 질문을 했다.
“선배님도 조금 야위신 거 같아요.”
“음? …그런가? 나는 별일 없었다만.”
“정말요? 전혀 그렇게 안 보이는데……”
슈리엘은 제 턱을 쓰다듬었다.
그러더니 쓰게 웃었다.
“확실히, 나는 별일이 없긴 했지. 내 주위가 난리였던 까닭에 요새 잠을 통 자지 못해서 말이야.”
“……선배님의, 주위요?”
“그래.”
무슨 뜻이었을까.
슈리엘은 그 이상 말해주지 않았다.
머리를 끄덕인 슈리엘이 루비아를 돌아보았다.
“네게 언젠가 한번 찾아가겠다고 했었지.”
“아, 네. 선배님.”
“여러모로 바빴던 탓에 통 여유가 나질 않더군. 겨우 시간을 내어 네게 찾아오긴 했다만, 여기 머무르도록 허락된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아. 아마 삼십 분이면 곧 돌아가야 할 거다.”
“그, 그런가요……? 얼마나 바쁘시길래…”
“……”
말없이 커피를 홀짝인 슈리엘은.
자신이 앉은 곳으로부터 조금 멀찍이 떨어져, 언제나 늘 같은 거리감을 유지하고 있는 루비아에게서 시선을 거둔 채 말했다.
“학교에서 치르는 시험은 전부 끝났겠지?”
“네, 네.”
“그렇다면 이제 정말로 졸업만 남은 셈이구나.”
“그렇죠.”
슈리엘은 새하얀 숲 너머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시간이란 어찌 이리도 빠른지.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인데 2년이 훌쩍 지나가 버리다니. 가끔은 믿기질 않을 정도야.”
“……”
“음. 다름이 아니라, 내가 이렇게 찾아온 건.”
슈리엘이 말을 이었다.
“올해 마지막 기말 시험도 예정대로 다 치렀고, 이제 아카데미 졸업만 남은 네게 해줄 말들이 있어서였다. 아무래도 1월이 되면 네 진로를 결정해야 할 테니까. 중요한 시기이니만큼 선배된 입장에서 조언을 해주러 온 셈이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계속 도움만 받아서야 이래도 되는 건지 잘 모르겠네요.”
그에게 목숨을 빚진 루비아의 입장에서 슈리엘은 한번 만나긴 해야 했다. 아직 그날의 감사를 제대로 표하지 못했던 까닭이다.
다만 루비아나 슈리엘이나 여러모로 바빴던 까닭에 서로 시간을 맞추기가 어려웠는데, 오늘은 슈리엘 쪽에서 겨우 시간을 내어 로르센 아카데미로 직접 찾아온 것이었다.
슈리엘은 옅게 웃었다.
“무얼,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니 감사하지 않아도 좋다. ……그리고, 오늘은 딱히 네게 조언만 하러 온 것도 아니었으니까.”
“…네?”
“잘 들어라, 루비아.”
슈리엘은 커피잔을 한 손에 쥐었다.
그리고는 진지한 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네겐 특별한 재능이 있다. 일반적인 마법사들과는 비교대상조차 찾을 수 없는 그런 놀라운 재능이 말야. 그러니 아카데미 졸업 이후 너를 찾는 이들은 무수히 많을 것이다. 거기서 대표적으로 두 군데를 뽑아보자면… 거대 마탑 아카샤의 별과, 황립 프론티어 아카데미. 아마 그 정도겠지. 아니, 그들은 반드시 널 필요로 할 거다.”
“……”
“아카샤의 별은 일찍이 내가 말했듯 네 재능을 살리기에 무척이나 적합한 장소다. 더군다나 내가 보기에 너는 이미 위계 상승의 조건을 달성했어. 졸업 이후 아카샤의 별에 들어간다면 곧바로 정식 마법사의 위를 하사받을 수 있을 거다. 내가 장담하지.”
“……”
“프론티어는… 글쎄, 그곳 역시 뛰어난 재능을 가진 학생들이 무수하게 모이는 곳이라곤 하나, 적어도 너와 비교할 수 있는 수준이 되려면 저기 에픽 클래스 정도 되어야 할 터다. 듣기론 일반인과 궤를 달리하는 비범하디 특별한 녀석들로만 구성된 클래스라고 하더군. 아마, 루비아 너 정도면 무리 없이 합격할 수 있을 거다.”
“……”
“하지만 그 프론티어가 어떤 대단한 커리큘럼을 가지고 있다 한들, 마학(??)에 있어 아카샤의 별을 따라올 정도의 수준을 갖춘 시설은 대륙에 전무하다. 그러니 아카샤의 별이 백 년 전 세워진 이래로 쭉 마학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상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겠지.”
“……”
“저번에 내 권유를 진지하게 생각해보겠다고 했었나, 루비아?”
“……네, 선배님.”
“시간도 없고 하니 길게 말하지는 않겠다.”
후우.
커피를 홀짝인 슈리엘은 곧 입김을 내뱉었다.
“나는 네가 아카샤의 별에 들어왔으면 한다.”
“……”
“나에게 네 미래를 결정한 권리는 어디에도 없다. 저번에도 말했듯이 선택은 너의 자유다. …다만 네가 그러고자 하면 나는 전심전력을 다해 너를 도와줄 생각이 있다. 권유를 구구절절 길게 할 이유도 딱히 없으니, 그저 그렇다고만 알아두길 바란다.”
“……”
루비아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물론 입탑을 아예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앞으로의 진로는 루비아의 인생에 있어 정말로 중요한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슈리엘이 권했던 입탑에 대한 생각은 유감스럽게도 최근 들어 깊게 고민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왜냐면, 당연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루비아의 머릿속을 온통 뒤덮고 있었던 까닭이다.
“……”
“……”
잠시 둘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슈리엘은 이곳에 머무를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으나 말없이 커피를 홀짝였다.
오늘 당장 루비아의 입에서 대답이 나오리라 기대하지도 않았고, 하물며 이런 중요한 고민거리는 무엇보다 충분한 시간이 준비되어야 할 터였다.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인생이 크게 뒤바뀔 수도 있었으니까. 재촉할 권리는 없었다.
그래, 어차피 기대하지도 않았던 거다.
루비아에겐 좀 더 시간이 필요하겠지.
생각할 시간은 앞으로도 많을 거다.
……그렇다면.
기회는 지금밖에 없었다.
“루비아.”
“……아, 네. 선배님.”
루비아가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조금 내려간 듯한 눈꼬리. 그 안에 담긴 영롱한 녹빛 눈동자. 언제나 윤기 있게 반짝이는 벚꽃색의 화사한 머리칼은 슈리엘이 루비아를 볼 때마다 자연스레 미소 짓게 할 정도로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누구에게나 항상 친절하면서, 그 속에 악심을 절대 품지 않고, 무척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으나 기본적으로 겸손하기에 남을 기만하는 듯한 행위 또한 일절 벌이지 않는다.
남을 헐뜯는 악담보다는 따뜻한 칭찬을 먼저 할 줄 알고, 타인의 나쁜 점보다 좋은 점을 먼저 보려고 하는 훌륭한 인물상이었다.
때문에, 점차 바뀌어가는 시대상에도 여전히 평민을 무시하고 깔보는 귀족가의 자제들마저 루비아만큼은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루비아는 그 정도로 아카데미 내부에서 드높은 인망을 구축하고 있던 것이었다.
무엇보다 그 어여쁜 외모로 뭇 남학생들의 인기를 끌어 여러 여학생들의 질투를 사는 듯했으나…… 아쉽게도 고백에 성공한 남학생들은 지금까지 단 한 명도 없었다.
굳이 이상하게 여길 필요도 없이, 곰곰이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당장 슈리엘과 루비아가 앉은 벤치 사이의 거리만큼이나, 루비아는 여느 남학생들과 일정 거리 이상 가까워지려 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것은 슈리엘에게도 예외란 없어 보였다.
바로 그 차가운 사실이.
뭇 남학생들 중에서 자신만큼은 루비아와 가장 가깝다고 생각했던 슈리엘의 입장에선 조금 씁쓸했던 것이었다……
“나는 널 선배된 도리로 챙겨주고 싶었다. 격을 달리하는 네 재능에 매료되었던 점도 아주 없다고 할 수는 없다만…… 그런 것이야 전부 차치하고서라도, 나는 결국 너를 마음에 들어했기에 이처럼 널 찾아와 직접 아카샤의 별로 들어오길 권유하고 있는 것이다.”
슈리엘의 말은 틀림 하나 없었다. 루비아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머리를 꾸벅 숙인다.
“…선배님께는 항상 감사하고 있어요. 절 도와주셨을 때도 그랬지만, 이번에는 특히나 더——”
그때,
“너와 함께했던 시간은 고작 1년밖에 되지 않았었지, 루비아.”
“……?”
루비아가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였다.
차가운 한숨을 내쉬던 슈리엘의 표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복잡해 보였다.
“그 1년이, 내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
말을 마친 순간에.
루비아는 입을 다물었다.
눈 내리던 풍경이 일순 사진처럼 정지해버린 듯했고, 방금까지 슈리엘이 권유했던 아카샤의 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던 것들은 싹 사라져, 그 안에 남은 건 오로지 이유 모를 긴장감뿐이었다.
휘오오오……
냉기 어린 차가운 바람 속에 슈리엘의 나긋한 말소리가 섞여들었다.
“감정에 호소할 생각은 절대로 없었다. 하지만, 때론 뜻대로 되지 않는 일도 많더구나.”
“……”
“루비아, 네가 만일 아카샤의 별에 들어오지 않게 된다면…… 나는 조금, 슬플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많이 힘들지도 모르지. 너와 떨어진 지난 1년 동안은 네 졸업 이후 어떻게 하면 네가 나와 같은 마탑에서 함께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겨우 버텼으니 말이다.”
“……”
“……그래, 그런 거다.”
“……”
“너와의 1년이 그리도 좋았을 텐데, 남은 인생의 전부를 너와 함께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더 좋을까. 때때로 그런 생각을 했다. 지금도 그리 하고 있지. 아마, 매일이 즐거울 터다.”
그쯤에서.
루비아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선배님.”
“루비아. 지금은 너의 선배가 아니라, 슈리엘 데 라파라트로서 하는 말이다.”
여느 때보다 담담하고 진중한 듯한 슈리엘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정작 그 속은 유례 없을 정도의 긴장감을 한참 넘어섰던 까닭에, 오히려 잔잔한 수면처럼 차분해진 상태였다.
“……고민이 많아보이는 듯한 네게 또 다른 고민거리를 던져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졸업을 앞둔 지금밖에 기회가 없다고 생각했다. 모든 걸 각오하고서 네게 찾아온 것이니, 너는 지금 이 자리에서 네 뜻대로 대답을 해주어도 상관없다.”
지긋이.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뜬 슈리엘은.
루비아를 눈앞에서 잃을 뻔했던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또한 그 자리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자신의 무력함을 상기했다.
그런 자신과 달리 포기하지 않고 나서서… 진정한 의미로 목숨을 불사르며, 결국 루비아를 죽음으로부터 구해냈던 한 소년의 얼굴을 떠올렸다.
덕분에 슈리엘의 마음은 조금 편해질 수 있었다. 대체 왜였을까. 어쩌면, 돌아오는 결과를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까닭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대로 아무것도 시도해보지 않은 채 끝나버리면, 그것이야말로 훗날 반드시 후회하게 될 일이라 생각했기에.
2년이 다 되어가는 시간 동안 그저 속에 담아두기만 하고 있던, 그 퀘퀘묵은 마음을 드디어 밖으로 표현해보는 것이었다.
살을 에는 바람이 다시금 불었다.
볼에 달라붙은 머리칼을 귀 뒤로 쓸어넘기는 루비아를 똑바로 돌아보면서, 쓴웃음을 입가에 띤 슈리엘이 마침내 모든 걸 털어놓았다.
“……후배로서, 여자로서. 널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다, 루비아. 그러니 나와 같이 아카샤의 별에 들어와 주지 않겠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