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 회고 (10)
* * *
#34
——결국, 또 이렇게 되는구나.
루비아는 허벅지 위에 올려놓았던 손을 꾹 쥐었다. 의자에 앉힌 몸은 자연스레 위축되었다. 한기가 불어와 으슬으슬하게 추웠던 탓일지도 모른다. 자길 똑바로 바라보며 그리 진중히 읊조린 슈리엘의 눈을, 왠지 제대로 마주하기가 힘들었다.
그래.
……이래서였다.
자기가 아는 사람이.
지금까지 쭉 친하게 지냈던 나름 가까운 사람이, 이렇듯 눈앞에 두고서 갑작스레 부담스러워진다.
루비아는 지난 3년간 숫하게 있었던 일에 대한 기시감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매우 안타까운 감정 또한 느끼고 말았다.
“저, 음… 그게……”
애써 괜찮은 척하지만 눈동자에는 떨림이 가득하고, 입술은 바싹 말라가며 감사의 말을 건네야 할 슈리엘에게 무어라 말을 꺼내야 할지 전혀 떠오르지 않아 머릿속이 그만 새하얗게 변해버린다.
마음이란 건, 감정이란 건. 개개인이 마음대로 정할 수 없었다. 참으로 모순적이었다.
분명 자기가 보유한 마음일 텐데, 그것을 원하는 대로 컨트롤할 수 없다는 게.
얼굴과 가슴 부근에 피가 몰리는 듯한 기분이 든다. 호흡의 간격은 여유를 잃어버리고, 고개는 조금씩 아래로 내려간다. 주변의 소리가 멀어져 곧 아무것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두근, 두근.
고요해진 공간 속에서.
루비아의 심장은, 점점 크게 뛰기 시작한다.
슈리엘은 좋은 선배였다.
인품, 실력, 배경, 모든 면에서 아카데미 재학생들의 존경을 받는 훌륭한 사람이었다.
그를 시기함에 질 나쁜 헛소문들이 학생들 사이로 나돌 법도 하건만, 슈리엘 데 라파르트에 대한 뒷소문 같은 건 단언컨대 재학 3년간 어느 무엇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깔끔하다. 친절하다. 잘생겼다. 존경스럽다. 슈리엘을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여학생들의 말에선 꼭 그런 단어가 들어갔다.
더군다나 작년 마법부 수석에 이어 이번에는 아카샤의 별 소속 정식 마법사가 되었다.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루비아에게도 슈리엘이란 마법사를 존경할 만한 가치는 충분하고도 남았다.
맞다. 루비아는 슈리엘을 존경하고 있었다.
좋은 사람이라고도 생각하고 있었다.
항상 루비아를 잘 챙겨줬고, 그로 인해 루비아는 슈리엘에게서 받은 많은 은혜들을 갚아야만 했다. 감사의 말이 되었든 뭐가 되었든 간에.
무엇보다 슈리엘은…… 그때, 자신이 납치를 당했다고 했을 당시 크게 다치면서까지 자기를 구해낸 사람이었다. 진심으로 후배를 위해주는 마음은 당연했고, 그리고, 그걸 넘어서서……
……그런 거였구나.
슈리엘만큼은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평소 그의 언행을 보면 자신을 다른 후배들보다 좀 더 특별히 아껴준단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으나, 결국 그런 줄로만 알았다.
서로에게 이로운 관계가 되어주는 좋은 선후배 사이. 루비아에게 있어 슈리엘이란 선배는 스승 내지 친구… 라고 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아니었던 거다.
어느 순간부터인지 몰라도, 슈리엘은 이미 루비아를 평범한 후배로 보고 있지 않았던 거였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루비아는, 거부할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다.
언제나 친절하고 부드럽게 보였던 슈리엘 선배가…… 지금은, 왠지 무섭게만 보였다.
많은 미래가 예상되었다.
이를 거부함으로 루비아는 슈리엘과 멀어지게 될 터다. 이와 비슷한 상황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루비아는 가급적 모두와 친하게 지내고 싶어했다.
하지만 불가능했던 거다.
루비아가 조금만 친절하게 대해줘도, 같은 반 남학생들은 몰래 루비아를 불러 이처럼 예상에도 없었던 고백을 해왔다.
그런 나날이었다.
사랑이란 감정에 아직 확실한 형태를 갖추고 있지 못하던 루비아는, 당연하지만 이성적인 호감도 없는 남학생들의 고백을 마주하고서 다만 미안해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거절함으로 그들은 상처를 받게 되겠지. 그것이 안타깝고 미안하기만 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거다. 좋아하지도, 사랑하지도 않는데 고백을 받아들이는 일 따위 있을 리가 없는 거였다.
그들을 받아들일 거였다면…… 그보다 한참 전, 에지오로부터 갑작스러운 고백을 받았을 때 이미 수락했을 터였다.
그래.
에지오였다면.
……에지오가 고백해 왔을 때도 비슷한 느낌이었던 것 같다. 두렵고, 무서웠다. 하지만 뭔가 다른 것도 같다. 지금의 슈리엘은 부담스러웠다. 거부감이 느껴졌다. 만약 그와 연인이 된다면 벌어질 터인 여러 일들이, 루비아에겐 싫은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이쯤에서 대답은 거의 확정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루비아는 슈리엘을 사랑하지 않았다.
깊게 빠진 생각은 흐르는 물처럼 이어져 어딘가에 닿는다. 에지오 때의 일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자신을 자꾸 피해 다녔던 에지오가 자길 불러주었을 때. 루비아는 매우 기뻤다. 그리고 그곳에서 에지오의 진심을 들었다. 지금처럼, 무섭고 두려웠다.
에지오와의 6년, 슈리엘과의 1년. 소중히 쌓아온 관계를 무너뜨린다는 건 언제나 무섭다. 그것은 공통적이었다. 그러나 둘은 묘하게 다른 것이었다.
만일 그들과 연인이 되었을 때, 친구들로부터 간간이 이야기를 들었던 것처럼 여러 행위가 이어진다 생각하면, 슈리엘은 가장 먼저 싫은 감정이 든다. 본능적인 거부감인 것이었다.
다만, 에지오는…… 모르겠다.
하나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슈리엘처럼 마냥 싫은 감정을 느낄 정도는 아니란 것이었다.
조금 더 자세히 들어가면 그것은 미지에 대한 두려움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테지만, 루비아는 거기까지 미처 닿지 못했다.
무엇보다 아무런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루비아가 아는 사랑이란, 지금껏 사랑하여 자신을 낳은 부모님을 보고 자라며 깨달은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걱정 없이 행복해 보였다. 서로가 곁에 있으면 그 어느 누구보다도 편안해 보였다. 마음을 터놓고 의지할 수 있었고, 그들의 관계는 영영 깨질 것 같지 않았다. 마치 영원처럼.
그래서였을까. 로르센 아카데미에 들어와 친구들이 연애하는 모습을 보고서도 루비아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행복하니 좋다니 그런 감정이 들기 전에, 근본적으로 루비아의 감성은 뭇 사춘기 여자아이들의 무언가와 다른 점이 있었던 것이었다.
어떠한 이성들에게서도 자기가 아는 사랑이란 감정의 편안함을 찾지 못했으니, 애당초 시작조차가 불가능한 것이었다고 봐도 좋았다.
1년이란 시간에 걸쳐 친해지며 조금은 편하게 느꼈을지도 모르는 슈리엘마저도, 결국 마찬가지였다.
그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온 이상, 루비아는 이제 예전처럼 슈리엘을 대하지 못할 것만 같았다……
“아, 음……”
루비아는 한참 입속에서 말을 굴렸다.
체감상 2분은 가만 앉은 채로 생각을 한 것 같았다. 양 볼은 뜨겁게 달아오르고,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할지 갈피조차 잡지 못했다.
고마운 사람한테 어떻게 그래.
처음부터 그런 마음이 있었다곤 해도, 자길 그렇게 챙겨줬을 정도면 그는 진심으로 루비아를 위해주고 있었던 것이었다.
뿐만이 아니라, 설령 자신의 목숨을 죽음으로부터 구해준 은인이라 하더라도…… 루비아는 끝내 마음을 다잡지 못했다.
“……저는, 요. 선배님.”
한참 입술을 달싹이던 루비아가.
마침내 결심하곤 고개를 들었다.
“선배님께 아직 하지 못한 감사의 말도 많이 남아 있고, 선배님께서 지금까지 절 도와주신 것에 대한 보답도 드리고 싶어요. 이번에는 더욱 선배님께 큰 빚을 져버려서 슈리엘 선배님한테만은 제가 감히 몹쓸 짓 같은 건 하기 싫———”
바로 그때.
“아, 거기까지 하지. 되었다 이제.”
“……네, 네?”
슈리엘이 문득 한 손을 들었다.
루비아의 대답이 돌아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고 있다가, 드디어 나온 루비아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서 그리 끊는 것이었다.
직후 슈리엘은 씁쓸하게 웃었다.
“대충 예상하고 있었더니 타격도 그리 크지 않군. 시간을 들여 고민해도 좋다고 했더니 그리 짧은 시간만에 대답을 내놓으면 아무리 나라도 눈치를 채기 마련이다. 뭐, 그렇지 않아도 이미 예상하고 있던 결과였으니…… 그쯤 말해도 좋다는 이야기다.”
그러더니 루비아를 향해 묻는다.
“어찌 되었든 거절이란 말 아닌가?”
“……”
결국 슈리엘 선배에게도 상처를 줘버리는구나.
루비아는 입을 다물고선 아주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 그렇게 된 거군……”
그리 중얼거리던 슈리엘은.
“루비아.”
“……네, 선배님.”
갑자기 꽤나 충격적인 말을 꺼냈다.
“나는—— 이번에 하사받은 정식 마법사의 위(?)를 반납할 생각이다.”
“……네? 바, 반납이요?”
루비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래.”
“어, 어째서……”
슈리엘은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잘못된 일이기 때문이지.”
“……잘못된, 일?”
무슨 뜻일까.
“물론이다.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지. 본인이 세우지도 않은 공적으로 내 주변인들과 세상을 속여놓고 마음 편히 발 뻗으며 잘 수나 있겠나? 근래 들어 몇 주간 잠을 하루에 두 시간도 숙면하지 못했다. 자꾸 그때 생각이 나서 말이야.”
“그게 무슨 말씀……”
“무얼, 어차피 분수에 맞지도 않는 일이었다. 진작에 내려놓으려 했지만 믿지도 않더군.”
루비아의 의문 섞인 시선이야 당연하다는 듯, 슈리엘은 저 멀리서 불어온 눈송이들이 묻은 팔소매를 탁탁 털며 말했다.
“막상 승격하고 나니까 굉장히 여러 방면에서 힘이 들더군. 직접 겪어보니 알겠어. 나는 그냥 당분간 잡일이나 하면서 경험을 쌓는 편이 더 좋을 거란 사실을 깨달았지. 대단하신 분들 사이에 나 같은 초보가 껴버리니 아주 죽을 맛이더구나. 흐하하하하!”
“슈, 슈리엘 선배님……?”
루비아는 살짝 당황하고 말았다.
슈리엘은 머쓱하게 뒷통수를 긁으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를 오래간 보았던 루비아로선 어색하기 그지없는, 어쩌면 처음 보는 듯한 슈리엘의 모습이었다.
“아 그래, 차라리 우는 것보다 이렇게 웃으니까 훨씬 좋아보이지 않나?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만. 무얼, 네가 거절할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래서야 영 기운이 나지 않을 것 같아서 말이다, 하하……”
갈수록 씁쓸해지는 어투에 루비아가 천천히 죄스러운 마음으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선배님.”
“죄송할 필요가 뭐 있나?”
슈리엘은 픽 웃었다.
“사랑은 노력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닌 것을.”
“……”
루비아는 입을 다물었다.
별안간 침묵이 감돌던 새에,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며 시간을 확인한 슈리엘은 곧 목을 몇 번 가볍게 꺾더니, 다시금 입을 열었다.
“아카샤의 별에 들어오란 권유의 말도, 하고 싶었던 말도 전부 했으니, 이제 마지막으로 네게 해야만 하는 말밖에 남지 않았군.”
슥.
루비아를 돌아본 슈리엘이 말을 잇는다.
“——루비아, 네게 할 얘기가 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너만큼은…… 꼭 들어야 하는 말이다.”
#35
달빛이 안개처럼 쏟아지는 깊은 밤.
“……”
루비아는.
야외 테라스 벤치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 너와 내가 실종된 그날.
아직도.
점심 즈음의 대화가 생생히 떠오른다.
— 널 구한 건…… 내가 아니었다.
— 그 소년과 달리, 나는 한심하게 네가 빨려 들어간 결계조차 뚫지 못하고 그 밖에 나타난 마물들에 쫓겨 고생하고 있었지. 내 몸에 새겨졌던 상처는 그들과 혈투를 벌이다 난 것이었다.
— 목숨을 걸고서도 널 구하고 싶었던 건 맞지만…… 나는, 네가 무사히 살아나는 데 어느 무엇도 기여하지 않았던 셈이야.
— 그런 나와 다르게 그 소년은 자기 힘으로 결계를 뚫었다. 마치 하나의 빛덩어리 같았지.
— 소년은 내가 보는 앞에서 스스로 결계를 비집고 들어가, 그 안에 있을 터였던 세 마리의 마족들과 홀몸으로 대치했다. 그리고, 내가 겨우 마물에게서 살아남아 숲속에서 다시 기회를 엿보고 있었을 즈음, 모든 게 끝났다.
— 그 소년이 마족을 전부 죽여버린 거다.
— 그런 다음… 너를 안전하게 구해냈다.
— 온몸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 현장에 있었던 내가 보기엔…… 정말 살아있는 게 맞는 건지 의문일 정도였어. 거기서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이었지만, 그 소년은 움직였다. 반죽음 상태로 버티고 버티면서, 가야 할 곳이 있다며 어딘가로 떠났지.
— 너를 내게 맡긴 채로 말이다.
— ……이것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사건의 모든 전말이다.
— 루비아, 다른 누구도 아닌 사건의 당사자인 너만큼은 꼭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 그 소년은 내게 진실을 말하지 말라고 했었지만…… 어떻게 그리할 수 있겠나. 아무리 생각해도 진실을 감추는 것이 루비아, 너를 위하는 길인 것 같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내 죄책감을 덜기 위해서라도 이 말은 꼭 해야만 했다.
— ……그 소년이 누구냐고?
— 네가 자주 얘기해주던 그 소년이 맞다. 사진이랑 별 차이가 없어서 알아보기가 무척 쉽더군.
— 아무렴, 내가 하는 말은 어디까지나 진실이다. 이제 와서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고. 그러니, 널 구한 건 내가 아니라 그 소년—— 에지오 크라닐이라는 사실을 네게 말해주기 위해서도 오늘 이렇게 널 찾아온 것이다. 루비아.
“……”
당시의 대화를 떠올리며.
읍—
루비아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
기억이 떠오른다. 희미한 기억이.
정신이 없던 사이에 어렴풋이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던…… 그 순간의 짧은 그림자가 루비아의 머릿속을 지나친다.
……그때 날 안고 있었던 사람이.
에지오였다고?
입을 틀어막은 루비아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슈리엘이 그런 거짓말까지 할 사람은 아니었다. 농담으로 가볍게 넘길 만한 일도 아니고.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갑작스러운 에지오의 자퇴.
뮤에게서 들었던 말.
슈리엘의 증언까지……
그 모든 일이.
전부 자신을 구하려다 벌어진 일이었다면.
언뜻 보기에도 심해 보였던 슈리엘의 상태보다, 정말로 살아있는 게 의문일 정도로 너덜너덜해진 에지오가 제 목숨을 바쳐가면서까지 자길 구한 게 거짓 하나 없는 사실이라면……
자신은, 그런 에지오가 자신을 품에 안고 있었을 때, 모든 것들에 무지한 채로 슈리엘 선배의 이름을 불렀다.
……정작 구해준 사람은 따로 있었는데.
당시 에지오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한테 실망했을까. 절망했을까.
뭐든, 결코 좋은 흐름으로 생각되진 않았다.
나는…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그 자리에 에지오가 있었던 걸 몰랐을 수 있다는 말은 허용되지 않는다. 이해해. 아니, 이해 못 해. 왜 그랬던 거야, 루비아. 거기 있는 건 슈리엘 선배가 아니라 에지오였다잖아.
에지오를 그런 심한 일에 휘말리게 하고. 만신창이로 만들어버리고. 마족을 셋이나 죽여? 반죽음? 정말 괜찮은 거야? 머릿속이 진탕 뒤틀려 이성적인 판단조차 하기가 힘들었다.
“아, 아……”
에지오.
에지오…
……어디 있는 거야, 지금.
결국 모든 게 자신 때문이었다.
슈리엘로부터 그 말을 들었을 때도, 루비아는 갑작스럽게 흐르기 시작한 눈물 탓에 긴급히 손수건을 꺼내 들어야만 했다.
지금도 그랬다.
“…으, 아. 아으으, 으……”
심장이 찢어질 듯 욱신거렸다.
자기 때문에 크게 다쳤을 에지오의 모습을 생각하면, 그리고 자기를 구해내고서도 멋대로 착각해버리곤 또 다른 상처를 줘버린 자신이 너무 미워져서, 그동안 에지오에게 얼마나 큰일이 있었을지, 에지오가 그때 무슨 심정이었을지……
사과를, 사죄를 해야 해.
한 번으로는 부족하고, 끝도 없이 해도 부족해. 감사 인사는 할 자격도 없어.
에지오가 조금 다쳤다는 소식만 들어도 크게 걱정할 것이 분명한데, 자기를 구하려다 반죽음 상태가 되었다는 말을 듣자마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대로 심장이 멈춰버리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에지오는…… 그렇게 나와 멀어지고도, 결국 날 구하기 위해서 그런 무모한 짓까지 벌였다는 말 아냐.
그에 반해.
나는,
나는……
“…끅, 흐윽, 흐으으… 아으… 아……”
그간의 일들을 되새기는 것만으로도 목구멍이 텁텁히 메이고 눈앞이 흐려졌다.
밤이 지나가는 동안, 눈을 꼭 감은 루비아는 입을 틀어막은 채 고개를 숙여가며 구슬픈 울음소리를 손틈 사이로 흘려냈다.
……안 그래도 그의 걱정에 날이 갈수록 피폐해져 가던 루비아였다.
시험이 전부 끝나고 곧 겨울 방학이 도래한다. 원래라면 1월까지 준비해야 할 것들이 산더미처럼 많았으나, 진실을 깨달은 루비아는 더 이상 그런 것들에 관심을 두지 않게 되었다.
겨울 방학이 시작된 이후.
루비아는, 곧바로 열차 티켓을 끊었다.
——끼이이익……
추운 겨울날.
눈꽃이 휘날리는 역에서 루비아는 로브에 달린 후드를 좀 더 깊게 눌러 썼다. 날씨는 추웠지만, 얼어붙은 루비아의 마음은 그보다 차가웠다.
철도 위에서 멈춰 선 열차는 치익거리며 문을 열었다. 루비아는 말없이 칸에 올랐다.
“……”
그러곤 텅텅 빈 칸 내부에서 창가 자리에 털썩 하고 앉더니, 짐이 꾸려진 캐리어를 바닥에 고정시켜 놓곤 입을 다문 채 조용히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한 번쯤은 들릴 생각이긴 했지만.
반드시, 가야만 하는 일이 생겨버렸다.
후드를 벗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그러고는 고요히 눈을 감았다.
끼이이익……
열차는 곧 철도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루비아는 비록 눈을 감고 있었지만, 잠은 전혀 오지 않았다. 오로지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다크서클이 짙게 드리운 눈가는 그간 루비아가 잠을 얼마나 설쳤는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그렇게 열차는 어딘가를 향해 질주한다.
루비아가 잠적해버린 에지오를 찾기 위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모든 인연이 시작된 장소, 자신의 고향 마을이었다.
#35
“……가시는 겁니까?”
주름진 신관이 물었다.
타박.
어둑해진 밤거리를 앞에 두고서, 활짝 열린 신전의 경계선을 발 아래에 두었던 사내가 자길 부르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신전에 준비된 여벌용 옷을 입은 남성이었다. 뒤돌아본 그의 모습은 달빛을 역광으로 받아 신성히 빛나고 있었다.
그의 성스러운 얼굴과 어우러져 가히 상서로웠던 분위기 탓에, 신관은 마치 화신이라도 눈앞에 두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기분에 그치지 않을지도 몰랐다.
사내는 익숙하지 않은 듯 툭 튀어나온 목젖을 매만지며 낮게 말했다.
“떠나야죠. 더 볼 일이 없어졌으니까요.”
“…그렇습니까.”
“예. 짧은 시간이나마 감사했습니다, 신관님.”
“무얼요. 저희는…… 오히려 당신을 모시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다음에도 언젠가, 저희 신전을 찾아주시길.”
루프레스 아인하르겐.
대신관의 자격으로 이곳 로르센 태양의 신전을 관리하던 그녀는, 바로 하루 전 일어난 기적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어떠한 짓을 해도 도저히 살릴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심각한 상태의 소년. 날이 갈수록 생명의 기운은 약해져만 갔던 탓에 더 이상 신성력을 부어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을 터였다.
결국, 그렇게 소년의 몸이 얕은 숨마저 쉬지 않게 되었을 때, 완전히 사망했음을 인지한 루프레스의 앞에 기적이 일어났다.
그것은… 마치 하나의 빛나는 알 같았다.
숨을 거둔 소년의 몸 위로 하얀 천을 덮으려던 찰나에 벌어진 일이었다. 감히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아찔해질 정도의 강렬한 빛이었다. 마치 태양을 바로 눈앞에 마주했을 때처럼……
루프레스를 비롯한 어느 신관도 그 방 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방의 모든 구석을 가득 채운 빛무리가 멎었던 것은, 그로부터 꼬박 하루가 지나갔을 참이었다. 무언가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한 루프레스가 가장 먼저 문을 열고 안에 들어섰다.
그러자, 그곳에는 처음 보는 사내가 있었다.
본래 핏물 낭자한 침상 위에 누워 있던 건 어리고 작은 소년이었으나, 그들의 앞에 있는 사람은 명실상부 건실한 청년이었다.
이 모든 과정이 불과 하룻밤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것은… 달리 말할 것도 없이 신의 기적이라 부를 만했다.
“편지는… 잘 전해주실 거라고 믿습니다.”
“……물론입니다, 에지오 님.”
루프레스는 사내의 이름을 조용히 불렀다.
빠르게 떠날 채비를 마친 에지오의 모습을 보면서, 루프레스는 동시에 지금 그의 몸속에 흐르는 기운을 면밀히 관찰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신성함.
그는, 어젯밤 주신님을 뵙고 온 게 분명했다.
하지만 본인은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게 당연한 일이었다.
루프레스는 에지오처럼 운명을 거스르며 새로이 태어난 이들을 여럿 보았다. 그 수는 대륙 전체를 통틀어 세자리 수도 간당간당할 만큼 적었다.
가장 최근에 기억나는 한 사람이 있다면, 아마 구 년 전 있었던 남부 마계 대원정의 주역, 엘레나 크라이모어 정도일까.
루프레스가 알기로.
엘레나는 오십 년을 버텼다고 했다.
그 과정에서 한쪽 눈을 잃어버렸고, 대신 새로운 눈을 얻었다. 엘레나가 보지 못하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눈앞의 에지오는.
본신의 흔적만이 희미하게 남았을 뿐인 이 사내는, 대체 본인이 기억하지 못하는 동안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냈던 것이었을까.
주신님께선 비록 인간을 사랑하시나 한없이 공명정대하셨기에, 기적에 맞는 대가를 반드시 가져갔을 것이었다.
루프레스로선 감히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때가 되면.
그 또한 자연히 알게 될 것이었다.
그렇기에 지금은 그저 떠나보낼 뿐이다.
“가시는 길에 늘 주신께서 함께하길.”
루프레스는 경건히 몸을 숙였다.
……타박, 타박.
그것으로, 에지오는 희미한 기억이 가리키는 곳을 찾아 먼 길을 떠났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