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 〉 상실의 대가 (3)
* * *
#5
가장 먼저 든 감정은 안도감이었다.
다행이다. 여기 있었구나. 에지오가 아직 살아 있는 걸 확인한 순간 뮤는 덜컹거렸던 심장을 그제야 한결 쓸어내릴 수 있었다.
“에지오, 괜찮아? 일단 여기서……”
에지오는 뮤의 적이 결사코 아니었다. 지켜야 할 대상이었다. 그러니 검을 거두고선 뮤가 천천히 에지오를 향해 다가가려 했다.
타박, 타박……
뚝.
두 걸음쯤 가다가 그대로 멈춰 섰다.
「……」
어둠 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나는 새하얀 눈동자가, 정말 소름 끼치도록 무감정한 시선으로 뮤를 응시했던 까닭이다.
“……에지오?”
뭔가 이상했다.
에지오의 눈은 본디 푸른빛이었다. 바다처럼 맑고 투명한. 그런데 지금은 홍채와 동공마저도 오로지 흰색으로만 가득 차버린, 도무지 평범한 인간 같지 않은 색깔로 칠해져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으나, 먼지 등으로 더러워진 얼굴의 양 볼을 타고 흐르는 검은색의 물줄기. 그것은 에지오의 눈꺼풀 아래쪽으로부터 흘러내리고 있었다.
검게 물든 눈물로 울고 있는 것이었다.
“괘, 괜찮은 거야? 에지오, 너……”
「……」
뮤는 섣불리 선택하지 못했다.
에지오를 여기서 확보하고 당장 내려가는 게 맞긴 한데, 함부로 가까이 접근할 수 없었다.
에지오의 상태가 이상하다. 평소와는 너무나도 다르게 께름칙한 감각. 눈앞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는 에지오가 아닌 것 같았다.
그나저나 에지오는 천장을 부수고 내려왔다. 방금 뮤가 서 있던 층을 진동시키던 그 순간에도, 무언가를 부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에지오가 쥐고 있던 주먹 부근에서 검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뿐만이 아니라 몸 구석구석에도 상흔이 가득한 게, 아마 막무가내로 건물 내부를 여기저기 활개하며 다닌 듯했다.
뮤는 조심스레 물었다.
“……에지오. 내 말 들려?”
「……—.」
다시금 에지오의 입에서 알 수 없는 언어가 튀어나왔다. 그쯤에서 뮤는 확신했다. 에지오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다.
연구 협조를 명목으로 그 교수에게 무슨 짓을 당한 걸까. 인체 실험이라도 당한 것일까. 일순 뮤의 손아귀에 힘이 바짝 들어갔으나 그것을 풀 만한 대상은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야.
일단은 에지오를 구하는 게 먼저였다.
스윽.
뮤가 침착하게 자세를 잡았다. 가급적 에지오를 더 이상 다치지 않게, 신속히 제압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나머지는 프론티어에 맡기면 될 일이다. 그러니 가장 먼저 에지오를 기절시킨다.
“에지오, 미안하지만 지금만 용서를……”
그때였다.
스으으으으——
에지오는 입을 크게 벌렸다. 그 안에서 공기가 새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어쩌면 터질 듯 빵빵해진 풍선에 바늘로 구멍을 뚫었을 때와 비슷한 소음이었다.
치이이이이익——까득.
한순간.
주변의 검은 연기를 입속으로 빨아들인 에지오가, 이가 세게 맞물리도록 닫고선 그것을 으득으득 씹었다. 그러고는 목구멍 너머로 꿀꺽 삼켰다.
뮤는 그 이해할 수 없는 광경에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지금 자신이 뭘 보고 있는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치이이이이익——까드드드득.
에지오의 기행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다시 한번 연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시더니, 곧 으적으적 씹어댔다.
그러한 행위 덕에 뮤와 에지오를 둘러싸고 있던 연기는 점차 걷혀지고 있었다. 입을 틀어막고 있던 뮤의 콜록거림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여전히 내부는 어두웠으나, 이전보다는 아니었다. 한층 밝아진 가운데 에지오가 별안간 느릿하게 손을 들어 가슴과 배 부근의 사이를 움켜쥐었다.
「……그으아—.」
그러더니 곧, 그의 얼굴에 어렸던 검은 눈물이 더욱 짙어지며 왈칵거리고선 또 다시 줄줄 흘러내렸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뮤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찌 되었든 좋은 상황이 아니라는 건 분명했다. 뭔가 비현실적인 모습을 멍하니 보고만 있던 뮤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곤, 에지오를 안전히 기절시키기 위해 자세를 다잡았다.
이 공간에 떠다니던 연기는 에지오가 전부 들이마신 직후였다.
천장에 뻥 뚫린 구멍으로부터도 연기가 새어나오지 않는 걸 보니, 최상층에 가장 먼저 피어올랐을 연기도 지금처럼 에지오가 이미 흡수한 이후였을 터다.
그래서였는지.
잠시 비척거리던 에지오는 잔해더미 속에서 한 발자국 빠져나와, 성큼성큼 어딘가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한다.
삐걱거리는 발걸음을 보면 몸 상태는 그리 성치 않은 듯했다. 제 의지는 분명 아니었을 터지만, 뒤따를 피해도 생각하지 않고서 몸을 함부로 굴려댄 것이었다.
‘…이 연기는 위험해. 저대로 계속 들이마시게 했다간 에지오가 나중에 어떻게 될 지 몰라.’
그리 생각한 뮤가 검의 손잡이를 꾹 잡았다.
에지오의 몸에 직접적인 상처를 입힌다든가, 그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으로선 이 방법밖에 없었다. 방금 천장을 부수고 내려온 것만 보아도 그를 허투루 상대해서는 안 될 터다. 가급적 진심을 담은 일격으로 끝내야만 했다.
그렇게 다짐한 순간.
——휙.
뮤의 반대쪽으로 향하던 에지오가 등을 돌렸다.
즉, 정확히 뮤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
에지오의 백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뮤는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어, 어……”
묘한 느낌이었다. 제자리에 발이 딱 달라붙어 움직이질 않았다. 무형의 압력이 풀려 간신히 움직일 수 있게 되었을 때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살짝 벌린 채 천천히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처음 보는 에지오의 모습 때문이었을까. 이유 모를 공포심일까. 저 눈동자에 담긴 감정이 무엇인지 뮤는 읽어낼 수 없었다. 그게 가장 큰 두려움이었다.
하지만 똑바로 이쪽을 향해 쿵쿵거리며 다가오고 있다는 점에서, 뮤는 앞이 아닌 뒤를 향할 수밖에 없었다.
“에, 에지오……?”
「……」
에지오는 대답 없이 다가왔다.
……턱.
뮤는 어느 순간 자신의 뒷걸음질이 벽에 막혔음을 인지했다. 매끈한 벽면에 가로막혔다. 계단으로 향하는 문 바로 옆의 벽이었다.
제압을 해야 한다기보다 왠지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이대로 타격을 한들 에지오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할 것 같았다. 왜일까. 뮤는 지금 저렇게 너덜너덜한 상태의 에지오를 보고서도 아무런 약점조차 찾아낼 수 없었다.
뮤는 문득.
자신의 손끝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느꼈다.
겁먹을 여유 따위 어디에도 없는데, 분명히 떨고 있었다. 상위 포식자를 마주한 초식 동물이라도 되어버린 듯, 거의 본능에 가까운 두려움을 품고선 침착하게 검을 들었다.
에지오를 벨 생각은 없었다. 하더라도 아마 검면으로 치는 게 전부겠지.
뮤는 침을 꿀꺽 삼켰다.
확실하게 제압할 수 있다는 확신이 사라지자, 그 안에 대신 들어찬 긴장감이 뮤의 호흡을 불규칙하게 흐트렸다.
에지오를 제압할 수 없다면 차선책은 무엇일까. 제정신이 아니게 되어버린 에지오를, 어떻게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는 걸까……
비록 자신의 목소리는 닿지 않을테지만.
뮤는 힘겹게 입을 열어본다.
“에, 에지오. 나야. 알아보겠어? 네가 날 많이 싫어하는 건 알아. 하지만———”
후웅!
에지오가 몸을 날렸다.
아무런 전조도 없었다. 그랬기에 더욱 당황했고, 예상보다 훨씬 빠른 움직임에 뮤는 제대로 된 대처를 할 수 없었다.
“꺅——!”
콰아아아앙!
짧은 비명과 함께 뮤가 옆으로 긴급하게 굴렀다. 비명소리가 굉음에 묻혀 일순간 사라지고 말았다.
쿠르르릉—!
손에 들고 있던 검은 공중에 붕 떠오르고, 방금까지 서 있던 뮤의 뒤편에 위치한 벽면이 와르르 무너지기 시작한다.
채앵.
“어, 어어, 어……”
뮤는 말을 절었다. 온 감각을 뒤흔드는 거대한 진동 탓도 있었으나, 그보다는 심리적인 충격이 뮤의 머릿속을 새하얗게 물들였다.
실로 어마무시한 충격이었다. 그만큼 겁에 질리고 말았다. 아무리 지금의 에지오가 제정신이 아니라곤 해도, 자신을 향해 명백한 살의 내지 파괴적 감정이 담긴 주먹을 내질렀다는 사실이 바닥에 주저앉은 뮤의 심장을 더없이 박동시키고 있었다.
쿵— 치이이이익——……
뮤가 멍한 눈으로 무너져 있을 때, 에지오는 쩌적거리며 균열이 일은 벽면의 뻥 뚫린 구멍 사이로 무거운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면서 그곳에 가득 찬 연기를 다시 한번 들이마시며, 뮤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에 쓰러져 있든 말든 상관없이 계속하여 전진하는 것이었다.
이상해. 이런 건 이상해.
에지오를 빨리 말려야, 멈춰야 해……
방금 에지오의 행동을 보며 단순히 자기를 공격하려 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으나, 그래도 여전한 충격은 뮤의 가슴속에 깊숙이 남았다.
……꾸욱.
뮤는 작은 결심과 함께 떨어뜨린 검을 다시금 제 손에 쥐었다. 그러면서 슬그머니 일어나 에지오의 뒤를 빠르게 따라잡는다.
스으으으으——
이제 망설이지 않는다. 뮤는 잠시 콜록였다. 그러고는 에지오가 누군가의 연구실로 보이는 방에 가득 들어찬 연기를 막 들이마실 타이밍에 맞추어,
“미안해, 에지오……!”
화악!
검면에 웅혼한 마력을 실은 이후 에지오에게 달려들었다. 나머지 한 손으로는 에지오의 움직임을 봉쇄한 이후 팔 등을 묶어 제압할 생각이었으나——
“……!”
찰나의 순간.
에지오의 고개가 옆으로 확 꺾였다.
뮤의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위험을 감지해도 이미 늦었다.
뿌드드드득—
에지오가 억지로 몸을 비튼다. 일반적인 사람의 관절이라면 절대로 시도조차 불가능한 움직임이었다.
파아앗—
돌아간 에지오의 상체가 바닥을 향해 아래로 깊숙이 숙이고는, 뮤가 휘두른 검면을 피해 주먹을 쥐고 그 사이로 새하얀 빛을 머금었다.
“으읏……!”
터져 나오는 빛무리에 뮤의 시야가 일순 새하얗게 물들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번개같이 빠른 속도의 공격을 피하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다만 뮤의 극도로 발달된 기감은 그것의 방향과 위치를 정확히 캐치하긴 했으나, 인지하기만 했지 이미 앞을 향해 달려든 상태에서 갑자기 멈출 수는 없는 것이었다.
‘……아.’
부우우웅!
에지오의 주먹이 뮤의 유니폼 복부 부근에 닿았다.
두말할 것 없는 완벽한 타격.
당장 반격을 취하면 될 일이었지만, 그렇게 되면 적어도 누군가는 심하게 다치게 된다. 에지오의 경우 자신을 향해 뻗은 팔 한쪽이 절단되어 날아가 버릴지도 몰랐다.
‘그건… 안 돼.’
뮤는 차마 그 길을 선택하지 못했다. 결국 반격하길 포기한 채 이를 악물곤 눈을 감았다.
그때.
“——저놈한테서 떨어져라. 1번.”
챙그랑!
저 너머의 창문에서 무언가 연기를 가르고 창문을 깨부쉈다. 달빛이 누르스름하게 새어 들어온다.
홰액!
어찌나 빠른지 잔상이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인간을 아득히 초월한 육체는 불가능을 넘어섰다.
뮤로서도 결코 따라잡지 못할 속도로 건물에 진입한 누군가는, 에지오의 일격을 맞기 일보직전이었던 뮤의 뒷덜미를 확 잡아끌었다.
“——꺄아아악!”
뮤의 시야가 한순간에 뒤틀렸다. 굉장한 속도감이었다. 공간에서 강제로 밀려난 듯한 감각.
쿠당탕탕!
“으, 으으으……”
“괜찮냐곤 안 묻겠다. 어차피 괜찮을 테니까.”
울렁거리는 귓가에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온다.
뮤는 머리가 어지러운 상태에서도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어렴풋이 눈치챌 수 있었다.
다만 이전과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조금은 진중해졌다는 것일까.
“쯧, 어제 떠나지 않길 잘했군. 무난하게 잘 지낼 것 같길래 더 신경 안 쓰려고 했는데 말이야. …설마하니 어떤 개같은 새끼가 강제로 열어버릴 줄 누가 알았겠어?”
잔뜩 썩은 표정을 하고 있던 여성이 푹 한숨을 쉬었다. 뮤는 말없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아무렇게나 묶은 검은 머리칼. 잠시 닫았던 눈꺼풀 안에 자리한 금빛 동공. 나머지 한쪽은 안대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고, 고도로 단련된 팔뚝은 교차된 채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뮤가 그 모습을 보곤 중얼거렸다.
“에, 엘레나 선배님……?”
입학식 이후로 제 집에 돌아간 줄 알았던 엘레나 크라이모어가, 이 늦은 시간 프론티어 제 4학구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 하늘 같은 네 선배님이시다. 이제 좀 존경심이 드나? 위기의 순간에 멋지게 나타나주는 선배라니, 크 내게 박수를 쳐주고 싶군.”
아니, 그보다. 여긴 14층일 텐데. 어떻게 밖에서부터 창문을 깨부수고 들어온 거지, 싶었던 뮤의 의문은 금세 묻혔다.
엘레나가 저 멀리 에지오를 턱짓으로 가리킨다.
“너 말야, 저거 정통으로 맞았으면 적어도 한 달은 꼬박 죽은 채로 지냈을 거다.”
“…네, 네?”
“구해준 대가는 나중에 똑똑히 받겠다 이거지.”
엘레나는 픽 웃었다.
스윽.
곧 안대를 가볍게 들었다 놓은 엘레나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영 상태가 좋은 것 같진 않군. 수작질을 하나만 했으면 모를 텐데, 적어도 둘 이상은 한꺼번에 터트린 모양이야. 나약한 병아리 새끼. 정신 수련이 부족해도 한참 부족하구만……”
“……에지오가, 지금 어떻게 된 건지 알고 계시는 거예요?”
“음? 대충은? 진짜 대충이니까 뭐 물어볼 생각은 마라. 나도 명확하게 대답해 줄 수 있는 게 없거든.”
그리 말하며 엘레나가 에지오를 바라보았다.
엇나간 주먹은 애꿎은 허공만 휘둘렀었다. 그러곤 공격이 빗나가자 관심을 뚝 거두고선 곧바로 다른 연기가 있는 곳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간다.
“상실 뒤에는 갈망과 복수심만이 남지. 마(?)와 관련된 힘을 모조리 흡수하고 있는 거다. 그걸 방해하는 녀석들은 죄다 처부술 생각이고. 그러니까 함부로 접근해선 안 돼.”
엘레나는 현재 에지오의 상황에 대해 꽤나 상세히 알고 있는 듯했다. 그리 중얼거리다가 문득, 치마에 묻은 먼지를 털며 일어서는 뮤를 향해 묻는다.
“너네 혹시 많이 친했냐?”
“……네?”
“너랑 쟤, 친한 친구였냐고.”
“아……”
뮤는 잠시 대답을 주저하다가.
“……맞아요. 친한 친구.”
조금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 그럼 더 질질 끄는 건 좋지 않겠지. 계속 이래 봐야 쟤만 더 아프고 말 거거든.”
고개를 끄덕인 엘레나가 말을 잇는다.
“나도 겪어본 적 있어서 아는데, 그때 기억을 없애기 전엔 내가 매일 자살 시도를 했더랜다. …좀 웃기지 않냐? 지금의 난 아직도 천년만년 안 뒈지고 영원히 살고 싶은데, 대체 뭔 일이 있었으면 사람이 그 지경까지 갔겠냐고.”
“……?”
무슨 말씀일까. 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이해할 필요는 없다. 너네 둘이 친구라면 더욱. 그냥 앞으로 쟤는 잊고 사는 편이 좋을 거야.”
엘레나는 맞댄 주먹을 뿌득거리며 말했다.
“——너를 위해서라도 빠르게 죽여주마. 후배를 내 손으로 직접 조진다는 게 영 내키진 않지만, 어쩔 도리가 더 이상 없다. 여기서 깔끔히 보내주는 편이 더 나아. 그러니 날 미워하진 마라, 1번.”
#6
거의 본능적인 대답이었다.
“시, 싫어요!”
“……뭐?”
안 돼요도 아니고.
싫어요, 였다.
엘레나가 눈을 깜빡였다.
“야, 후배야. 네가 싫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니까? 저대로 놔두면 대악마 셋 정도 잡아다 생채로 바치지 않는 이상 절대 안 멈춰. 만약 우리가 쟤를 제압해서 어따 갖다가 짱박아둔다고 해도 기절해 있는 동안 계속 고통받을걸? 게다가 강제로 각성시킨 거라……”
“에, 엘레나 선배님도 같은 경험 하셨다면서요! 그럼 지금 이렇게 멀쩡히 계신 이유도 분명 있을 거 아녜요?”
엘레나가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야, 그렇긴 한데. 내 경우랑 쟤 경우랑 좀 많이 다르거든? 어차피 이대로 가다 뒈지는 건 마찬가지일 테니까 차라리 일찍……”
“그, 그러니까 싫대두요! 안 돼요! 그러지 마세요! 절대로 싫어요! 에지오를, 제발, 죽이지 말아주세요… 제발요……”
“……뭐, 뭐야. 왜 이래 갑자기?”
뮤가 눈물을 글썽거리기 시작했다.
친한 친구가 자기 눈앞에서 죽는다니, 충분히 그럴 수 있긴 한데.
그리고 입학식 당일 연회장에서 뮤와 루비아가 나누던 대화를 일부 엿들은 엘레나의 입장에서, 뮤가 저 에지오란 후배를 일반적인 감정으로 보고 있진 않다는 사실도 알고 있긴 한데.
엘레나는 잘 모른다. 그런 거. 애당초 본인의 청춘을 죄다 무술에 바쳐 일생을 보낸 사람이기도 했고.
“이럴 시간 없어, 임마! 세상에 쟤 말고 남자는 많잖아. 그리고 너네 친한 친구라며. 친구가 무지성 괴물이 돼서 미쳐 날뛰는 꼴 계속 지켜볼 바에야——”
“……친한 친구 아녜요.”
“……음?”
뮤가 울먹이며 엘레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에지오를 구해야 할 이유가 반드시 있다는 듯, 호소력 짙은 얼굴로 살짝 더듬으며 말했다.
“저, 전 여자친구예요.”
“……뭐 새꺄?”
아깐 친한 친구라매.
...아니, 그럼 더 족쳐야 되는 거 아닌가?
엘레나의 표정이 황당해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