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 상실의 대가 (4)
* * *
#7
“진짜로?”
“…네.”
엘레나가 짐짓 엄한 표정을 지었다. 한쪽 눈을 가린 안대를 살짝 들기까지 했다.
“이 깜찍한 후배야. 내 앞에서 구라는 안 통하는 거 알지? 다 예상이 된다고, 예상이.”
“지, 진짜예요.”
“허……”
정말이네.
그러니까, 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 같은 새파랗게 어린 병아리들이 서로 정분을 나누었다는 말이 아닌가……
청춘이네, 청춘이야 라는 말을 하긴 했지만 진짜 그랬을 줄이야. 엘레나 본인도 아직 안 해본 연애를 저 녀석과 이 녀석이 했단 말이지. 그것 참 묘하고 신비한 일이었다. 참고로 엘레나는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였다. 라고 스스로 생각한다.
근데 전 여자친구라면 둘은 이미 깨진 관계라는 것일 텐데, 엘레나가 알기로 주변 친구들 중에서 전(?) 이란 단어가 붙는 관계는 뭐랄까… 결코 끝맺음이 좋았던 경우가 없었다.
어떻게든 재결합 각을 보면서 지켜보는 사람 열불나게 만든다거나, 혹은 철천지 원수만도 못한 적대적 관계가 되어 우연히 마주치기라도 하는 순간 그날 하루는 기분을 모조리 잡치게 된다든가……
“그 뭐야… 너 쟤 아직 좋아하냐?”
다만 뮤의 경우는 다른 듯했다.
헤어졌음에도 헤어진 연인을 잊지 못하고 계속 그리워하는 케이스.
용케도 그런 둘이 같은 반이 되었다며, 참 골때리는 상황이 아닐 수가 없다고 엘레나는 생각했다.
눈물을 닦던 뮤가 나지막이 머리를 끄덕인다.
“네. 사랑해요.”
“…어, 그래. 미안하다. 사랑도 하는구나.”
정작 말하는 뮤는 덤덤하기 그지없는데, 왠지 그 말을 듣는 엘레나의 등줄기에 소름이 돋을 만큼 낯부끄러운 말이었다.
자기보다 한참 어린 후배들의 뒤얽힌 연애사를 듣는 기분이란 뭐랄지, 이런 데 은근 면역이 없는 엘레나로선 떨떠름한 반응을 내보일 수밖에 없었다.
“근데 후배야, 마음은 이해 가는데 뭐 방법이 딱히 없거든. 네가 정말 쟤를 사… 좋아한다면 그냥 여기서 보내주는 편이 제일 나을 거 같다. 백 명 죽을 거 한 명 죽고 끝나는 게 이상적이잖아?”
엘레나는 냉철하게 그리 말했다.
어디까지나 사실에 의거한 말이었다. 이대로 에지오를 폭주 상태로 놔두게 되면, 이 건물의 마기를 모조리 흡수한 뒤에는 또 다른 먹잇감을 찾아 프론티어 전역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버릴 것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아직 완성된 건 아닌 모양인지라 현재의 엘레나로서도 어렵지 않게 죽일 수 있을 것이었다.
뮤가 요청하던 제압은, 글쎄. 저 상태의 에지오라면 엘레나도 두 대 내지 한 대 맞는 순간 큰일이 날지도 모른다. 자체의 출력과 파워는 약해도 그 안에 담긴 것이 위험했다.
“……그건 싫어요. 어떻게, 방법이 없나요? 우선 제압해놓고 차차 방법을 찾아 보면……”
“거, 없다니까 그러네.”
“……”
뮤는 다시금 눈물을 글썽거렸다.
마치 사망 선고를 들었을 때의 기분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엘레나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자 반박도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철렁거리는 심장을 안고서 고개를 푹 숙일 뿐이었다.
어떻게 재회한 에지오인데, 제대로 된 대화 한번 못 해보고 떠나보내는 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아직 에지오를 사랑하는 뮤의 입장에선 반드시 에지오를 원래대로 되돌리고 싶었다.
만약 여기서 에지오가 죽어버린다면, 뮤 자신이 훗날 어떻게 될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너무 비약된 생각일지도 모르나, 어쩌면 그를 따라서……
그런 뮤의 절망적인 심정을 읽은 것일까.
“…뭐, 정 죽이는 게 싫다면.”
엘레나가 푸욱 한숨을 쉬었다.
“일단 대가리 몇 대 쳐서 넉다운 시켜볼 수는 있는데. …물론 다시 깨어나도 그대로겠지만, 네 말처럼 반쯤 조져놓고 방법을 찾아보는 게 나을 수도 있겠지. 좀 성급했던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원래 싹이 보이면 그 자리에서 뿌리까지 뽑아버리는 지랄맞은 성격이라 말이다.”
“……!”
반쯤 자포자기했던 뮤의 가슴속에 새로운 희망이 피어올랐다. 화색이 돌은 얼굴로 뮤가 고개를 빠르게 숙였다.
“가, 감사합니다… 엘레나 선배님!”
“감사할 일 아냐, 새꺄. 힘 조절 잘못해서 머리 터트려버릴 수도 있어. 그건 일단 제압에 성공하고 나서——”
그 순간.
파악!
엘레나의 말은 끝맺어지지 못했다.
말보다 행동이 빨랐다.
새까만 머리칼이 흩날리며 펄럭이더니, 그 자리에서 홀연히 사라졌다. 엘레나가 서 있던 자리에 작은 크레이터가 생겼다.
“이 미친 새끼가!”
주변의 연기를 죄다 들이마시는가 싶더니, 곧 행동을 멈추었던 에지오가 정말 예상지도 못한 행동을 개시했던 것이었다.
엘레나가 깨부수고 들어온 14층의 창문.
달빛이 쏟아지는 밤거리.
“멈춰 이 새끼야아아아아——!”
휘오오오오!
세찬 바람이 불어오는 와중.
에지오는 그곳으로 뛰어들었다.
#8
— 텔레포트! 텔레포트 능력자 어디 없나? 3학구 알카디아 클래스에 한 명 있다고 들었는데!
— 확보하는 대로 들것에 실어 옮겨!
— 연기를 조심해라! 함부로 들이마시면 위험하다!
프론티어로부터 호출받은 교수진들을 비롯해 긴급상황에 투입된 인력들이 루나틱관 주변에 바리게이트를 치고 인명구조에 들어섰다. 사건 발생 이후 약 10분 정도가 흘렀을 즈음이었다.
혹시나 건물이 폭삭 무너지더라도 연쇄적인 피해가 없도록 그 주변에 단단한 보호 마법을 설치하고,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는 이들은 마기가 듬뿍 담긴 연기를 바깥에서부터 걷어내기 시작했다.
어디까지나 시설의 보존은 뒷전이었다. 건물 안에 있을 프론티어 시민들의 목숨을 구조하는 것이 가장 우선이었기에.
촤아아악——!
아래서부터 폭발적으로 뿜어지는 물줄기가 일순 건물의 중간 지점을 향했다. 폭포처럼 치솟는 출력. 6위계 급의 수(?)마법이었다.
건물 안에서 붕괴가 일어나며 터지고 깨진 시약들이 작은 마력 폭발을 일으켰던 까닭에, 7층과 9층 등에서 칙칙하디 매캐한 연기를 풀풀거리며 화재가 나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 위험합니다! 뒤로 물러서세요!
— 거기 구경하지 말고 빨리 뒤로 좀……!?
주변 일대는 소란스레 시끄러웠다.
전대미문의 사건에 웅성거리며 모여든 인파라든지, 그들을 통제하기 위해 일사불란하게 뛰어다니는 기사들이라든지, 여기저기서 마력이 들끓고 준동하며 바닥을 울리는 소음이라든지——
그런 난잡한 상황 속에서도 유난히 귀에 들어오는 비명이 한순간 솟구쳐 올랐다.
“꺄아아아악! 저, 저기! 떨어져요!”
어떤 여성이 건물의 최상층 부근을 가리켰다.
순간적으로 집중된 사람들의 시선이 곧 건물의 창문 밖으로 떨어지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아주 작은 형체였으나 그것의 정체를 알아차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틀림없는 사람의 실루엣이었다.
— 사, 사람이다!
— 어떡해! 떨어지면 죽는 거 아냐?
— 나 못 보겠어!
후우우우웅!
몽실거리는 연기를 찢고 나온 그것은 지상을 향해 빠른 속도로 낙하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마법사들이 일순 행동을 멈추었고, 곧바로 식을 전환해 새로운 마법을 펼치려 했으나.
— ……어? 한 명 더 떨어진다!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다.
후우웅——!
연기를 뚫고 나온 하나의 인영이, 방금 낙하했던 누군가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강하하기 시작했다.
#9
‘갑자기 돌발행동을 하고 지랄이야…!’
휘이이이이이—!
어마무시한 파공음이 귓가를 갈기갈기 찢으려 들었다. 이만한 높이의 공중에서 지상으로 낙하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라고, 엘레나는 생각했다.
지상의 풍경이 미니어처 마냥 작게 보인다.
길거리 사이로 여기저기 놓인 건물의 옥상이 한눈에 들어왔다.
아직 밖에 걷히지 않은 연기를 모조리 씹어 삼킬 듯 흡수하는 에지오를 뒤따라, 창문 밖으로 몸을 던졌던 엘레나가 발끝에 마력을 실었다.
——파앙!
더욱 빠르게 가속했다.
때마침 뛰어내렸던 타이밍도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았던 덕분에, 엘레나는 먼저 낙하하던 에지오를 금방 따라잡을 수 있었다.
“너 시발 나중에 진짜 뒤졌다아아아아!”
엘레나가 악을 지르며 소리쳤다.
중간에 휘날리던 머리카락이 입에 들어가는 바람에 에브브거리던 엘레나가 곧바로 주먹을 쥐고선,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걷어차듯 뒷발로 힘있게 진각을 밟는다.
“진짜 뒤지려고 작정했냐—?! 아무리 지성이 없다지만 이건 너무한 거 아니냐고오오오오!”
파앙—!
가속이 붙어 더욱 빨라졌다. 어느새 에지오와 평행선을 그리며 지상으로 떨어지기 시작한 엘레나가 에지오의 허리를 잽싸게 낚아챘다.
자신의 허리를 압박하는 손아귀의 존재를 인식하자마자, 에지오는 형형히 빛나는 눈동자를 뒤로 힐끗 옮기며 몸을 돌리려 했으나.
「……그으악—!」
“쌉쳐봐 새꺄!”
엘레나는 나머지 한 손으로 에지오의 뒷목을 세게 후렸다. 잠깐 쿨럭, 하면서 검은 피를 토한 에지오가 힘없이 축 늘어졌다.
후우우우웅!
이미 건물의 중간 지점을 넘어섰을 즈음, 저 지상에 웅성거리는 인파가 그들을 공포스러운 눈길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대로 떨어져 머리부터 곤죽이 되는 꼴은 보여주기가 좀 그렇지. 엘레나 역시 이대로 뒤질 생각은 없었다. 에지오가 갑작스레 뛰어내리자마자 본능적으로 반응한 것이긴 한데, 다 생각이 있었다.
애당초 엘레나는 저 5층 정도 되는 옆건물의 옥상으로부터 점프하여 이 건물의 14층 창문을 깨부수고 들어왔던 것이었다.
물론 떨어지는 충격을 그대로 받아낸다면 정말 위험하긴 하겠으나, 엘레나는 이미 일반적인 상식을 초월한 인간이었다.
키이이이이——
은퇴한 몸이긴 해도 그 실력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다.
달빛처럼 스산한 빛을 흩뿌리는 금안이 반사광을 터트린다. 엘레나의 전신으로 폭발적인 마력이 활화산처럼 들끓었다.
그것은 곧 하나의 단단한 갑주처럼 온몸을 뒤덮었고, 에지오의 몸을 꽉 붙들은 엘레나가 정신을 곧 한 점에 모았다.
그 무엇도 흐트러지지 않는 게 중요하다.
곧 다가올 거대한 충격을 모조리 흡수하는 것은 오로지 두 다리뿐.
아니, 어떠한 피해도 내부에 들이지 않는다. 충격을 받는 순간 흡수 내지 아예 소멸시킬 것이다. 감히 흠집조차 내지 못하도록.
지금에 이르러선, 세상 어느 무엇도 엘레나의 신체에 더 이상 잔흉터를 남길 수 없었다.
그렇기에.
절대 굴하거나 무너지지 않는.
금강불괴(??不?).
‘나는 괜찮겠지만… 이 녀석이 데미지를 입겠군.’
오히려 잘됐다. 적당히 안을 조져놓으면 제압하기도 한결 편할지 몰랐다.
지상에 닿기 일보 직전, 마치 다이빙을 하듯 머리부터 떨어지던 엘레나가 에지오의 허리를 팔에 감은 채로 반 바퀴 빙글 돌았다.
후우우우웅!
그쯤에서 그들은 4층과 3층의 경계면을 지나고 있었다.
“꺄아아아악!”
“으아아아아악! 도망쳐!”
지켜보던 이들이 각자 비명을 질렀고, 가속이 붙어 잔상이 남을 정도로 빠르게 낙하하기 시작한 엘레나와 에지오는 아슬아슬한 차이로 펼쳐지지 못한 부유 마법을 받지 못했으나——
———콰아아아아아앙!!
일순.
엄청난 굉음이 대지를 뒤흔들었다.
먼지를 실은 거대한 반원의 파동이 주변을 거칠게 휩쓸었다.
휘오오오오!
세찬 바람이 불고, 가까이에 있던 마법사들의 마법진이 죄다 픽 하는 소리를 내며 불발될 정도로 거친 충격파가 일었다.
검은 연기와 잿빛의 연기가 서로 뒤섞였다. 그러나 물과 기름처럼 결코 하나가 될 순 없었다.
격렬히 날뛰는 잿빛과 검은빛의 안개 속에서 희미한 실루엣이 모습을 드러낸다.
“……칵, 퉤. 지리는 줄 알았네.”
잘 포장된 길바닥에 큰 구덩이가 생겼다. 반지름만 해도 족히 7미터는 넘을 듯한 거대 크레이터였다.
민간인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예상되는 충격량과 낙하 지점 등을 계산해서 세밀히 골랐던 까닭에, 추가적인 인명 피해가 발상한다든가 그런 일은 다행스럽게도 없었다.
“후배야, 이 개같은 자식아. 살아 있냐?”
「……」
내장이 조금 어떻게 됐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일단 겉으로는 딱히 별 문제가 없어 보였다.
어떻게 살긴 살은 것 같네. 엘레나가 폭 한숨을 쉬면서 찌뿌둥한 목을 두어 번 꺾었다.
츠즈즈즈……
전신을 휘감은 마력에 의한 반사광으로 형형히 빛나던 엘레나의 금안이 곧 원래대로 돌아왔다.
— 저, 저 사람… 엘레나 아냐?
—…뭐? 엘레나 크라이모어?
— 지, 진짜인가 본데! 엘레나다! 전쟁 영웅이야!
연기가 서서히 걷히며 곧 엘레나의 모습이 드러나자 사람들이 하나둘씩 정체를 알아보고선 웅성거리기 시작했지만, 지금 그건 별로 신경 쓸 부분이 아니었다.
엘레나는 지상 위에 나온 물고기처럼 축 늘어져 자신의 팔에 매달린 모양새의 에지오를 내려다본다.
‘……나약해 빠진 정신력이라고 했던 거, 취소해야 할지도 모르겠구만.’
강제적인 각성이라면 눈앞에 보이는 모든 생물체를 말살하려 움직여도 전혀 이상함이 없을 텐데, 어째선지 엘레나 본인이 막 도착했을 즈음엔 뮤에게 아주 조그마한 피해를 입힌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게 신기할 정도다.
외부에서 트리거를 무려 두 번이나 건드렸으니, 의식의 보존이고 영혼이고 뭐고 싹 다 불타 없어지는 게 정상이었을 텐데.
지금처럼 멀쩡히 살아 움직이는 것도 모자라…… 이렇듯 갑작스러운 돌발행동을 벌인 이유도, 아마 따로 있었을 것이다.
엘레나가 굳이 죽이려 들지 않아도 이 에지오란 녀석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것이다. 언젠가는.
지금쯤 내면에서 어떤 분투를 하고 있을지 그닥 상상하고 싶진 않았다. 아무튼 잘하고 있겠지 뭐. 정말 예상 외의 케이스라, 이제 와서 에지오를 죽일 마음은 들지 않았다……
‘앞으로 고생 좀 하겠다, 후배야.’
물론 정말 기적적으로 살아나더라도, 가혹한 운명을 점지받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테지.
선배 된 도리로서 같은 길을 걸어갈지 모르는 후배의 앞길을 어떻게 인도하여 주는 것이 좋을까.
엘레나는 점점 건물 출입구 밖으로 실려 나오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우선 어따가 데려다 놓아야……”
바로 그때였다.
“——에지오!”
건물 2층 창문에서부터 뛰어내린 뮤가, 거의 세상을 잃은 듯한 표정으로 창백해진 채 엘레나가 있는 곳을 향해 달려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