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 상실의 대가 (8)
* * *
#16
‘…일단 여기 두면 되겠지?’
명색이 한 나라의 왕녀였다. 환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 정도는 갖추기 위해 준비했던 꽃다발을 루비아의 향로 옆에 두었다.
향기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거 괜찮은 걸까.
병실 내부가 꽃내음으로 가득 찬 걸로도 모자라 향로에서 솔솔 피어오르는 아로마가 유리의 기분을 오묘하게 만들었다.
나쁠 거 없겠지 뭐. 꽃 알레르기도 없다는 거 같았으니까. 잠깐 재채기를 하던 유리가 다시금 의자로 돌아와 착석했다.
주변은 무척 조용하다.
뮤와 루비아가 빠져나가니, 앞에서 숨만 쉬고 있을 뿐인 에지오와 자신뿐이었다. 벽에 걸려 있는 시계의 초침이 일정 주기마다 째깍이는 것 정도 빼고는 이렇다 할 소음이랄 게 더 이상 없다.
“…후아아.”
차라리 이게 나았다. 방금 이유도 모르는 채로 뮤와 루비아의 신경전 사이에 껴버리게 된 유리로선 숨 막혀 죽는 줄만 알았다.
특히나 친하게 지내고 싶었던 친구들끼리 서로 말싸움을 벌이니 곤란함은 배가 되었다.
지금쯤 밖에서 무슨 얘기를 하고 있을까.
방음이 확실한 덕분에 문밖으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어쩌면 둘만 얘기할 수 있는 한적한 곳으로 이동했을 수도 있었고.
…일단 뭐든 잘 해결됐으면 좋겠다.
유리 자신이 개입해서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라면 얼마든 도와줬겠지만, 척 보기에도 뭔가 복잡한 비밀이 얽혀 있는 것 같아 함부로 나서지 못했다.
과거니, 잘못이니 뭐니…… 뮤와 루비아를 프론티어에서 처음 만난 유리의 입장에선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말로 가득한 대화였다.
그렇지만.
딱 한 가지만큼은 알 수 있었다.
‘쟤네랑 대체 뭘 하고 다녔던 거야, 너는……?’
뮤와 루비아가 나눈 대화 주제의 포커스는, 전부 눈앞의 이 녀석에게 맞춰져 있었다.
오늘따라 일찍 찾아온 밤그늘이 하늘 위에 새까만 암막을 드리웠다. 의료원에 들어설 땐 분명 노을이 지고 있던 것 같았는데, 어느새 어둑해진 유리창 너머의 풍경을 고스란히 눈에 담는다.
쏟아지는 별빛은 스산하디 차가웠다.
문득 그 아래로 시선을 내려본다.
남자치고 길게 늘어진 속눈썹을 굳게 닫은 채, 얌전히 들숨과 날숨을 미약하게 반복하고 있을 뿐인 혼수 상태의 에지오가 보인다. 유리는 의자에 가만 앉아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진짜 뭐하는 애일까.’
입학 첫날부터 통 마음에 들지 않았던 남자애.
지금도 딱히 변한 건 아니었지만, 말품새와 행동거지가 다소 경박하고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인간, 이라는 첫인상에선 어느 정도 벗어나긴 했다.
물론, 루비아가 왜 이런 녀석이랑 어린 시절부터 같이 붙어 다녔던 건지에 대해선 아직도 이해는 잘 못하겠지만은.
과거에 둘이 매우 친했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라는데 자신이 뭘 어쩌겠는가. 제삼자나 다름없는 나로선 그냥 그러려니 해야지……
“……”
생각해 보니 그렇다.
과거에, 였다.
유리도 눈치가 아예 없는 편이 아니다.
지금도 간간이 그때 일을 떠올리면서 발로 이불을 뻥뻥 차대던 식당에서의 순간이라든지, 루비아와 에지오가 기숙사 부지 내에서 마주치면 보이는 서로의 반응이라든지, 그런 걸 따져 봤을 때 아마 지금은 전보다 좀 덜 친하지 않은가, 싶기도 하고.
둘의 관계에 자신이 간섭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긴 하지만. 그냥 순수하게 궁금한 거였다.
아무튼,
루비아만 해도 그런데.
…뮤마저 얘랑 뭔가 있는 거 같았다.
사샤 엘네였나 누구였나. 걔 말은 고사하고 그 어떤 남자애의 말도 쌀쌀맞게 무시하던 뮤가, 수업까지 전부 빼먹으며 에지오를 성심성의껏 간호하는 것도 모자라 본인을 제외한 다른 이의 접근을 철저히 차단하려 하고 있었다.
말인즉 굉장히 진심이라는 거다. 이 녀석한테.
그 때문에 루비아와도 말다툼을 벌이다가, 상황이 꽤 길어질 것 같자 따로 얘기를 나누기 위해 병실을 빠져나가지 않았는가……
‘다들 로르센… 아카데미 출신이었나?’
셋 다 같은 학교 출신이라고 듣긴 했다. 그거 참 운명이 아닐 수가 없다고, 유리는 생각했다.
살짝 부러운 듯한 동경심도 들었다. 유리는 프론티어 아카데미 고등부에 입학하기까지 그간의 교육 과정을 개인 과외로 전부 대체했었던 까닭이다.
물론 고위 귀족이라면 그게 당연한 일이었지만, 유리는 그 넓은 왕궁에서 흔한 친구 한 명 없이 폐쇄적으로 보호받는 삶을 살아왔기에, 남들처럼 평범한 학교 생활을 늘 꿈꾸곤 했었다.
셋이서 같은 학교에 다녔다면 분명 재밌었겠지. 라고 생각은 하지만 막상 이들의 관계를 보면 또 그런 것만도 아닌 듯하고……
그래.
언제였더라. 입학식 당일의 일이었다.
연회장 안에서 이 참한 아이가 자기 딸이라며 유리를 데리고선 거의 순회를 돌듯 하던 아르티나 국왕과 왕후로부터 간신히 떨어져, 잠시 한숨 돌리고자 연회장 밖으로 나왔을 당시에 보았던 광경.
가까운 산책로의 벤치에 앉아 있던 에지오와, 그 앞에서 울고 있던 루비아, 그리고 마찬가지로 눈물을 글썽거리며 울먹이는 듯했던 뮤의 모습까지…… 그 모든 정황을 보고선 자신의 눈이 결코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했었다.
기어코 입학 첫날부터 같은 반 친구를 울리고 마는구나. 그것도 한 번에 두 명씩이나.
그렇게 생각해서, 막 대화를 마치고 오는 건지 이쪽으로 걸어오는 녀석에게 한마디 해주려고 했었다.
‘너, 쟤네한테 대체 뭔 짓을 한 거야?’
‘……내가 뭘?’
…그랬었는데.
‘…어, 어… 너……’
그때 에지오의 표정은 저들보다 심하면 심했지 전혀 한결 나은 얼굴조차 아니었기에, 차마 준비했던 말을 꺼내진 못하고 그저 당황스러운 마음에 입을 벙긋거릴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화나네. 그렇다고 사람 머리를 막 만져? 대상이 싫어할 걸 알고서 하는 행동이었으니 더욱 마이너스 점수였다. 앞으로 한 번만 더 정수리에 손을 올렸다간 능력으로 날려버릴 것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얘한테는 안 먹혔었나.
아니, 반드시 날려버릴 거다. 어떻게든. 능력을 발전시켜서라도. 한 나라의 귀하신 왕녀로서 외간 남성에게 한 번도 당해보지 못했던 수많은 치욕과 굴욕…… 언젠가는 배로 갚아줄 것이었다.
생각하다 보니 괜히 열불이 치솟았다. 세상 모르게 잠들어 있는 에지오의 코라도 잡아 확 늘어뜨리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아무튼.
연회장의 뒤편에서 보았던 모습처럼 에지오와 뮤, 그리고 루비아는 마냥 평범한 친구 관계가 아닌 듯했다.
…사실 잘 모른다. 아무것도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지금 당장은 좋은 사이가 아닌 듯했다. 유리는 그것이 참 의외였다.
과거에 뗄래야 뗄 수 없었을 정도의 친한 친구 사이였다 하더라도, 언제든 그런 관계가 깨질 수 있는 걸까. 한번 단단히 맺어진 관계에도 영원이라는 건 정말로 없는 것일까……
“……”
알 게 뭐야. 결국 얘가 잘못한 거겠지.
유리는 의자에 앉아 다리를 천천히 흔들었다.
쉬지 않고 연속되었던 생각이 불시에 끊기니 문득 고요함을 느꼈다.
상념 속에서 빠져나와 주변을 둘러본 유리는, 곧 이 넓은 병실 내부에 있는 사람은 에지오와 자신뿐이라는 사실을 새로이 받아들였다. 외간 남자와 밀실에 단둘이 있는 것이었다. 다만 의식을 잃고 있었으니 아슬아슬하게 세이프인가. 아무래도 좋았다.
유리 자신이 구태여 의도하지 않아도 본능적인 불편함을 느껴버리게 된다. 물론 에지오는 혼수 상태라 그런 기색이 덜하긴 했지만, 영 께름칙한 감각은 도무지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여러 감정의 덩어리가 뭉치고 섞인 유리의 루비 같은 눈동자가 지긋이 에지오를 향했다.
‘……마음에 안 들 수밖에 없잖아.’
…남자는 싫다.
이렇게 생긴 남자는 더욱 싫다.
뺀질하다 해야 할지. 귀족적이라 해야 할지. 그냥 전자로 하기로 했다. 뺀질하게 생긴 이 남자애는 정말, 정말로 다년간 축적된 객관적 사실에 의거하여 유리가 지금껏 보아 왔던 남성의 잘생김이란 기준에 있어, 정말 부정하고 싶을 만큼 합격점이었다.
그래서 더 싫다. 진짜로.
눈을 닫아 길게 늘어진 속눈썹 끝에 별빛 조각이 걸려 있었다. 반짝이는 눈꺼풀 아래 달빛을 받아 창백하디 푸르스름하게 물든 피부결은 잡티 하나 없이 깔끔하며, 어쩌면 웬만한 관리를 받는 귀족 여성들보다도 훨씬 깨끗하디 눈처럼 새하얀 빛깔을 드러내고 있다. 왠지 재수 없었다.
얼굴의 전체적인 형을 그리는 매끈한 굴곡은 이게 자연적으로 형성된 게 맞는지 의심될 정도의 미려한 라인을 자랑하고 있었는데, 아마 손으로 매만져 보면 어디 걸림 하나 없이 평탄하고 부드럽게 턱선을 쓸며 내려갈 수 있을 것이었다.
물론 본인이 그러고 싶단 건 절대로 아니었다. 유리 자신의 손으로 에지오의 볼을 쓰다듬는 상상만 해도 헛구역질을 하게 될 것만 같았다……
유리가 한참 고개를 들어 올려다봐야 할 만큼 길쭉한 신장을 가지고 있음에도, 대충 어림잡아 7에서 8등신은 가볍게 넘길 듯한 얼굴의 미니멀한 사이즈가 참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 주제에 이목구비는 또 확실하게 들어가 있어서, 직선에 가까운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높이 솟아오른 콧대가 얼굴 한가운데 비틀림 없이 위치하고 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고고하게 자리한 모양새가 참으로 거만하기 짝이 없었다.
그 끝에 걸려 있는 잿빛의 머리카락 두 올. 왠지 심하게 거슬렸다. 보는 내가 다 간지러워.
유리는 그걸 한참 바라보다가, 결국 불편함을 참지 못하고 입으로 바람을 불어 날려보내려 했다.
하지만 곧 그만두었다.
잠깐 볼을 빵빵하게 만들었던 유리가 살포시 공기를 삼켰다. 그리고는 슬며시 한 손을 들었다.
침상 주변의 그늘진 공간을 벗어나자 유리의 뽀얀 손등 위로 차가운 달빛이 내려앉았다.
‘…짜증나게, 닮았어.’
에지오의 콧대 위에 걸린 머리카락을 자신의 손으로 치워낸 유리가, 불현듯 침잠한 눈빛으로 에지오의 손을 내려다본다.
꽤 컸다. 유리의 손 크기와 비교하자면 두 배 정도 되지 않을까. 굵은 뼈마디와 푸른 실핏줄이 갈래를 나뉘어 손등 위에 돋아 있다.
말없이 에지오의 손을 바라보던 유리는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스윽.
그런 뒤 의자 팔걸이에 팔꿈치를 편히 대고서, 턱을 괴듯이 오른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반쯤 덮었다. 흐응, 하는 얕은 콧소리가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
잠깐 먼 곳을 바라보기 시작한 유리.
불시에 찾아온 환영은 안개처럼 뇌리에 스며든다.
— 다녀왔다, 유리! 늦어서 미안하구나! …하지만 이 오라버니께서 대륙 남부 제일의 왕국 크리톤의 명물이라는 기념품을 친히 사왔으니 이걸로 한번만 봐주거라!
머리카락 색깔도.
눈동자의 빛깔도 전혀 다르지만.
— 요 녀석, 유리. 나한테 달라붙으면 네 옷이 더러워지잖니. 깨끗이 씻고 와서 놀아줄 터이니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고 있거라.
얼굴만 보면.
분위기만 보면은.
무심결에 떠올라 버리고 마는 거다.
— ……울지 말거라, 유리. 멀리 가는 것이 아니다. 서른 번째 밤이 지나기 전에 반드시 네게 돌아올 테니, 그동안 아버님과 어머님 말씀 잘 듣고 있어야 한다. …네가 좋아하던 간식, 돌아오는 길에 꼭 사오도록 하마. 자, 손가락에 걸고 약속하자……
서른 번째도, 마흔 번째도.
결국 사천 번에 가까운 밤을 지나고도.
자신과의 약속을 어겼고, 돌아오지 않았다.
“……흥.”
…나는 오라버니를 원망하고 있는 걸까.
그러기엔 아직도, 이렇게나 선명히 기억한다.
잊고 싶지 않은 거였다.
하지만 떠올리기도 싫은 거였다.
그러나, 이 에지오란 녀석은 정말 짜증나게도 자신의 오라버니와 매우 비슷하게 생긴 것이었다.
그 때문에.
입학식 당일 연회장에서 에지오에게 오래간 머무르던 아르티나 국왕과 왕후의 이유 모를 시선 역시도, 유리는 계속 기억하고 있던 것이었다……
“…어라?”
무의식에 한참 빠져 있던 탓일까.
어느샌가 상념 속에서 벗어나 정신을 차린 유리는, 문득 자신의 검지 손가락이 에지오의 손등 위에 닿아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기얏!”
화들짝 놀라 급히 몸을 뒤로 뺐다.
내가 대체 뭔 짓을……? 외간 남자의 몸에 자발적으로 손을 대다니. 스스로가 한 일이라곤 도저히 믿기질 않았다.
더군다나 정말 무의식 중에 저지른 행동이라는 사실을 깨닫자 유리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누가 보기라도 했으면 큰일날 뻔했네.
자기가 먼저 건드려놓고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손을 탁탁 털던 유리는, 여전히 아무런 미동도 반응도 없이 편안하게 눈을 감고 있을 뿐인 에지오를 별안간 돌아보았다.
…아니.
“……응?”
편안하지가 않네?
“……으, 으…”
방금까지만 해도 분명 정상적으로 호흡하고 있던 에지오가, 미간을 살포시 좁히며 식은땀을 흘려대고 있었다.
그러고는 미약하게 끙끙거리는 신음까지 내면서 몸을 비틀며 무언가 괴로워하고 있던 것이었다.
…뭐야.
“얘, 얘 갑자기 왜 이래…?”
어디 아픈가?
…설마 내가 건드려서 그래?
아냐, 그건 아니겠지.
에지오의 손등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멀리서 보아도 확연히 눈에 튈 정도였다.
유리는 혼란에 빠졌다.
이거 빨리 사람 불러야 하는 거 아냐? 바, 밖에 나가서 뮤랑 루비아 데리고 와야 하나?
근데 걔네 지금 분위기 장난 아니던데?
내가 중간에 방해해도 되나? ……어라? 하지만 환자가 갑자기 이상행동을 벌이는 게 더 중요한 거 아닌가?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는 게 좋지 않을까?
그렇게 몸을 뒤틀며 신음하기 시작한 에지오의 옆에서 팽팽히 머리를 굴리던 유리는——
“——히읍!”
불현듯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유리의 동공이 벌벌 떨렸다.
꽈악.
다름이 아니라.
간헐적인 떨림과 함께 파르르 진동하던 에지오의 손가락이 무언가를 찾듯이 침대 위를 더듬다가, 그 주변에 있던 유리의 오른 손목을 갑작스레 콱 붙잡았던 까닭이다.
‘이, 이게… 갑자기… 사람 놀래게…!’
진심으로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얼마나 놀랐는지 목소리도 제대로 안 나왔다.
자신의 가녀린 손목을 붙잡고 있던 에지오의 손을, 잠시 소리 없는 비명을 억눌렀던 유리가 인상을 구기면서 황급히 떼어내려 했다. 누가 누구의 손을 함부로 잡아대는 거야——
“이, 이익… 이거… 놔아아……!”
그러나 마음처럼 되진 않았다.
뭔 힘이 그렇게 센지, 별로 세게 붙잡고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 손을 쉬이 뿌리칠 수가 없었다.
여전히 에지오는 눈을 뜨지 못한 채로 신음만 흘려대고 있었다. 대체 뭔 꿈을 꾸고 있는 걸까.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한 유리는 결국 제 힘으로 떼어내기가 불가능하자, 어쩔 수 없이 능력을 사용할 생각으로 붉은 눈동자에 반사광을 일으켰으나.
……스르륵.
그것은.
정말 잠깐 떠올랐다 사라지고 말았다.
또르르.
고개를 옆으로 돌린 에지오의 닫힌 눈가로부터, 촉촉한 물방울이 하나 맺히더니 이내 얼굴의 선을 타고 흘러내린다.
베갯잇을 적신 채 그 위로 또 다시 한 방울.
그렇게, 다시 또 한 방울……
……하아.
“…진짜, 모르겠네.”
유리의 손목을 붙잡고 있던 힘은 점점 약해지고, 결국 유리 스스로 풀 수 있을 정도로 약화되었으나.
잠시간 에지오가 흘리기 시작한 눈물을 바라보기만 하고 있던 유리는, 이윽고 얕은 한숨과 함께 천천히 에지오의 손을 떼어냈다.
정확히는.
그러려고 했다.
깜빡.
“…엑?”
유리의 붉은 눈동자 깊은 곳으로, 반쯤 감긴 에지오의 푸른 눈동자가 비쳐 들어온다.
머리를 살짝 든 에지오는 유리의 손목을 휘감고 있던 자신의 손을 느릿하게 바라보더니, 다시 유리에게로 지긋이 시선을 향한다.
깜빡.
깜빡.
그렇게 두어 번 눈빛을 마주한 둘.
“———히얏 누, 누누누눈, 눈, 눈 떴……!”
가장 먼저 유리가 부뚜막에 올라간 고양이처럼 앉았던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
시간차를 두고서 새된 비명을 지른 뒤 에지오가 붙잡고 있던 손목을 빠르게 뒤로 당겼고, 그 탓에 앉아 있던 의자의 균형이 흔들려 덜컹거리며 바닥을 향해 미끄러지기 시작한다.
으약 하는 단말마와 함께 뒤로 넘어가려는 유리의 팔이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잡을 것을 찾지 못해 그대로 넘어지고 만다.
“……!”
——화악!
그러기 바로 직전에.
반사적으로 벌떡 상체를 굽혀 일으킨 에지오가, 의자 모서리에 엉덩이만 간신히 걸쳤던 유리를 향해 빠르게 왼손을 뻗는다.
……쿠당탕탕!
의자는 그대로 넘어가 바닥에 쓰러졌다. 듣기 요란한 소음을 내면서 병실 내부를 짧게 진동시켰다.
바로 그때.
——드르륵.
“무슨 일이야?! 방금 큰 소리가……”
그리 멀지 않은 가까운 복도에 있었던 건지, 소리를 듣고 병실의 문을 빠르게 밀어 젖힌 루비아가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아?”
그 옆에서 언짢은 듯한 표정으로 서 있던 뮤는, 곧 루비아의 말소리가 점차 작아지는 것과 동시에 입을 살짝 벌리고 말았다.
달빛과 별빛이 내려앉은 창문 아래의 침상.
의자는 넘어져 있고, 그 바로 앞에서 새하얀 환자복을 입은 에지오가 상체를 일으킨 채 유리의 등과 허리를 감싸고 있었다.
말하자면……
에지오에게 반쯤 끌어안긴 모양새였다.
‘……죽고 싶다. 아니, 죽이고 싶다…’
……유리는 자신의 작은 체구를 에지오의 가슴팍에 반쯤 뉘인 채, 무언가 형용할 수 없는 창피와 부끄러움으로 잔뜩 붉어진 얼굴로, 입은 비록 열려 있지만 그 안에서 말이 나오지 않는 상태의 뮤와 루비아를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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