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차버린 소꿉친구와 전 여친이 같은 반이라 곤란하다-48화 (48/201)

〈 48화 〉 상실의 대가 (9)

* * *

#17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죽을 수 없었다. 그래야만 할 이유가 있었다. 여기서 얼마나 더 노력해야 하는 걸까. 없는 걸 만들어 낸다니.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니. 아무런 재능도 없는 내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해서, 아직 죽기 싫었다.

살아야 해.

뭐라도 잡았다.

“——히읍!”

무언가 손에 잡혔다.

“이, 이익… 이거… 놔아아……!”

안 돼. 놓지 마. 죽기 싫어…

벼랑 끝에서 튀어나온 돌을 잡고 겨우 버티듯 했으나, 얼마 견디지 못하고 힘이 스르르 빠져나간다.

아래로 떨어지는 거다.

가장 밑바닥의 아래보다도 더욱 깊은 곳.

다시 올라오려면 도대체 얼만큼의 생명과 시간을 깎아야 할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는 까마득한 심연 속의 공간으로…… 그렇게, 영원에 가까운 고행을 반복하게 되는 거다——

“…진짜, 모르겠네.”

한숨 소리가 선명히 들려오고.

오랜 잠에서 깨어난 내가, 슬며시 눈을 떴다.

환상 혹은 꿈처럼 부유하던 현실감.

그것은 곧 무거운 바위처럼 내 몸을 꾹 짓누르기 시작하더니, 점점 수면 아래로 깊숙이 침잠하던 내 정신을 현실로 끌어올렸다.

……낯선 천장이다.

감상은, 하얗다. 그걸로 끝이었다.

아니, 지금은 좀 까맣게 생겼다. 이 넓은 공간 내부를 은은하게 밝히는 푸르스름한 빛을 제외하면 전부 어둠에 감싸였던 까닭이다.

반사광 덕택에 살짝 어두운 잿빛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아냐, 이게 아니다. 의식과 생각의 흐름이 온전치가 않다.

그때.

“…엑?”

일순, 옆으로 시선이 옮겨 갔다.

깜빡.

한 번의 깜빡임에 많은 정보를 흡수했다.

금발 머리. 검은 리본. 흰색 유니폼. 내 손으로 보이는 것에 붙잡힌 손목. 희고 고운 피부. 그 위를 물들이는 창백한 달빛과 그 때문에 유난히 도드라져 보이는 옅은 홍조까지.

직후, 정말 찰나의 순간이 지났을까.

“———히얏­ 누, 누누누눈, 눈, 눈 떴……!”

갑자기 내 몸이 옆으로 확 기울어졌다.

의자가 덜컹거린다. 내게 붙잡혀 있던 손이 그 뒤로 당겨진다. 힘이 풀려 있던 탓인지 미끄러지며 손을 놓쳤고, 짧게 비명을 지른 그녀는 허공에서 팔을 허우적거리며 그대로 넘어지는가 싶었다.

위험해­.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탁.

“……!”

눈이 동그랗게 커진다.

대번에 왼손을 뻗어 손목을 다시 붙잡고선.

화악!

내 쪽으로 빠르게 끌어당겼다.

……쿠당탕탕!

의자는 요란한 소음과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

저대로 같이 넘어갔다면 뒤통수가 거하게 깨졌을 것이었다. 꼭 그렇지 않아도 여간 위험했겠지. 척수반사적인 행동이었다. 갑자기 움직이느라 머리가 잠시 크게 지끈거리긴 했지만서도.

그건 그렇고.

내 힘에 이끌려 품 안에 들어온 그 작은 체구로부터, 상큼한 레몬향에 우유향을 섞은 듯 새콤달큰한 향기가 훅 끼쳐 왔다.

내 오른팔로 보호하듯 감싼 등과 허리는 이대로 힘을 더 주면 어딘가 부서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작고 연약했다.

격한 흔들림에 순간적으로 나풀거렸던 순금빛의 머리카락이 곧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동물의 꼬리를 닮은 듯한 그 움직임을 보면서, 지금 나한테 끌어안긴 모양새로 자리한 소녀의 이름이 유리 폰 아르티나라는 사실을 불현듯 알아차렸다.

——드르륵.

“무슨 일이야!? 방금 큰 소리가……”

새하얀 공간의 문이 열렸다.

잠깐 굳은 듯 정지해 있던 유리의 낯빛이 언젠가 보았던 홍당무처럼 더없이 붉게 물들고, 열린 문틈 사이로부터 모습을 드러낸 익숙한 얼굴 두 명은 곧 침상 위의 나와 유리를 번갈아 돌아본다.

“……아­?”

“……”

“……”

3초 정도의 기묘한 정적이었다.

잠시 뒤.

“커윽.”

강제로 침상 위에 드러눕혀졌다.

소리 없는 비명을 온몸으로 빼액 질러 대던 유리가, 기겁하며 침상으로부터 뛰쳐 나오듯 펄쩍 뛰더니 내 몸을 두 손으로 재빠르게 밀쳐냈던 것이었다. 정말 한순간의 일이었다.

유리는 속사포로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얘, 얘얘얘, 얘가! 갑자기 누, 눈 뜨길래, 그래 가지고! 응! 깜짝 놀래서! 너, 넘어질 뻔했더니, 어……!”

아니, 그 정돈 다들 알고 있을 거다. 당장 바닥에 의자가 넘어져 있는 모습만 봐도 대강 무슨 상황인지는 알 수 있겠지.

하지만 반드시 나와 이런 묘한 자세가 된 경위를 철저히 객관적인 입장에서 너희들에게 설명하고야 말겠다는 듯, 그로부터 한참이나 횡설수설하며 이런저런 말을 떠벌리던 유리는.

“……나, 나가서 사람 불러올게—!” 라며 저 둘의 사이로 육탄돌격을 감행하곤, 결국 열린 문밖으로 누구보다 빠르게 도망쳤다.

…저러고 여기 다시 돌아올진 의문이다.

아무튼.

깨어나자마자 정신머리가 영 사납기 그지없다.

그런 내 주변으로.

“……이, 일어난 거야? 에지오?”

단체로 석화 마법이라도 맞은 듯 자리에 가만 서서 굳어 있던 그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곤 내게 천천히 다가왔다.

#18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거였다.

…대가리 깨질 거 같다.

관자놀이 부근이 지끈거려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본다. 그래도 통증은 여전히 가시질 않아, 결국 인상을 구길 수밖에 없었다.

여긴 어디야, 대체.

나 왜 여기 있는 거지……

“무, 물이라도 좀 가져다 줄까…?”

얘네는 또 왜 여기 있고.

넘어진 의자를 일으켜 세운 뒤 그 위에 앉은 뮤와, 뮤의 옆에서 걱정스러운 눈길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던 루비아가 조심스레 그리 물어왔다.

“…아, 응. 한 잔만 부탁해도 될까?”

목소리가 살짝 잠겨 나온다.

“당연하지. 잠깐만 기다려.”

“고마워.”

별거 아니라는 듯 부드럽게 웃은 루비아가 등을 돌려 문밖을 나섰다.

잠시 뒤.

“……몸은 좀 괜찮아?”

뮤의 물음에 잠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환자복을 입고 있었다. 여긴 병실인 모양이고. 전체적인 공간은 꽤 널찍해 보이는데 정작 이용하는 환자는 나 한 명뿐이었다. 개인 병실이라도 되는 건가. 상당하네.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나를 지독하게 괴롭히던 머리의 통증은, 이 병실 내부에 감돌고 있던 향기가 몇 번 내 콧잔등을 쓰다듬자 조금씩 완화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저 탁상 위의 향로에서 아로마가 피어오르는 것 같다. 진정 효과라도 담겨 있는 모양.

“일단 괜찮은 거 같긴 한데……”

“그러면…… 나, 나 누군지 알아보겠어?”

“……응?”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옆으로 고개를 돌리니, 여러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채 울상을 짓고 있던 뮤의 얼굴이 보인다.

대뜸 병실에서 눈을 뜬다 싶었더니 갑자기 그런 해괴한 질문을 해오는 건가. 도대체 나한테 뭔 일이 생겼던 거야.

“당연한 말을 하네… 뮤잖아.”

“아…… 다, 다행이다아…”

뮤가 눈을 감곤 안도하며 가슴께를 쓸어내린다.

…아니, 그보다.

좀 어색하네. 나한테 반말 하는 거.

언제부터 뮤가 이랬더라. 분명 내가 먼저 말 놓으라고 했던 거 같은데. 그게 언제였지. 어쩌다가 그런 말을 하게 됐더라……

“…윽.”

“……! 어, 어디 아파? 괜찮아?”

모르겠다. 갑자기 뭐가 속에서 팍 올라왔다.

머리가 다시금 깨질 듯 아파온다.

연회장. 연회장의 뒤편이었다. 거기서 나와 뮤, 루비아는 서로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벤치에 앉아 있었고, 루비아는…… 울고 있었지. 그렇다면 왜, 어째서, 라는 의문이 생겨버린다.

거기서 우리가 무슨 대화를 했었더라. 그때 나누었던 대화의 내용은 단편적으로 기억이 난다.

그러나 분명 나의 기억일 것이 분명할 터인데, 어째서인지 철저한 타인의 관점으로 보는 것처럼 그 자리에 존재했을 나의 심리 따위는 어느 무엇 하나 제대로 떠올려 낼 수 없었다.

루비아는 왜 흐느끼며 울었던 거지.

뭐가 미안하다고?

…나한테 뭘 미안해 하는 거야?

그러면서, 나는 왜 그 이유에 대한 질문 하나 없이 복잡한 얼굴로 입만 다물고 있던 걸까.

도저히 알 수가 없다.

뮤의 경우에도…… 아, 그때였다.

뮤가 날 선배로 부르는 것을 정정하길 바라며 내게 말을 놓으라 지시했던 것이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딱히 이상할 것 없는 일이다. 우리는 이제부터 같은 학년이 되었으니까, 날 계속 선배라고 부르면 뭔가 자연스럽지 않은 것이었다.

그래, 그런데……

……편지는 또 무슨 말이야?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한 말이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

편지? 나는 편지로 할 말을 다 했으니 따로 할 말이 있다면 나중에 하자고? 내가 뮤한테 편지를 썼었나? 중등부 때 굳이 편지로 대화를 나눌 일도 없었으니 그런 적은 한 번도 없던 거 같은데……

혼선이 생겨 뒤얽힌 기억이 과거로 점차 들어갈수록 머리의 지끈거림은 더욱 심해졌다.

일의 앞뒤가 뭔가 이상하다. 중요한 연결고리가 부자연스럽게 빠져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애초에 난 왜 여기 있는 거지.

병실이 아니라.

이 황립 프론티어 아카데미에.

대체 어쩌다가 입학하게 된 거지?

그러니까, 신전에서 갑자기 눈을 뜬 것까지는 기억한다. 근데 그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어느 무엇도 기억해낼 수 없었다.

머리가 반으로 쪼개질 듯한 통증을 느끼며 기억을 파헤쳐 가보지만, 결국 그 끝에 있는 것은 뮤의 생일 전 혹시라도 긴장감에 밤을 새지 않도록 일찍 잠에 든 일밖에 없었다.

그래, 거기서.

……전부 뚝 끊겨버렸다.

신전에서 깨어난 것. 몸이 달라져 있던 것. 신관님에게 도움을 받아 짐을 챙기고, 아카데미에 자퇴 신청서를 넣었던 것. 그 사이에 공허한 빈 자리. 밤늦게 신전을 떠나 어딘가로 향한 나. 그 뒤로도 쭉 칠흑 같은 어둠에 감싸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기억.

다시 떠오르는 건 프론티어로 향하는 열차를 타던 순간의 기억과, 입학 당일부터 지금까지…… 나디엘리 교수님을 만나기 위해 토요일 아침 일찍 제 4학구로 향했고, 거기서 교수님을 만났던 바로 그 순간의 기억들이었다.

정황상 그때 뭔 일이 일어난 거 같은데.

“…윽!”

모르겠다. 이 이상 떠올리는 건 역시 힘들었다. 한 조각씩 상기할 때마다 뇌를 직선으로 관통하는 통증이 일었다.

“——에지오? 여, 역시 많이 아픈 거지?”

얼마나 한참 그러고 있던 건지, 정신을 차려 보니 뮤가 내 팔을 붙잡고선 울먹이고 있었다.

그 짧은 새에 식은땀이 흘렀나. 이마를 덮고 있던 손바닥은 꽤나 흥건한 채였다. 고개를 젓고선 침상 위에 몸을 눕히며 말했다.

“현기증만 잠깐 돈 거야. 이제 괜찮아.”

“아냐, 많이 아픈 거 같아. 지금 당장 뭐 하려고 안 해도 돼. 그냥 누워서 아무 생각 말고 푹 쉬자. 응?”

거의 애원하는 모양새였다.

정말 괜찮다니까 그러네.

나는 자그마한 헛웃음을 머금었다.

스윽.

그와 동시에, 내 팔 위에 올려진 뮤의 부드러운 손등을 자연스레 매만지면서 장난기를 담아 말했다.

“걱정도 팔자다, 임마. 이럴 때만 아주 상전처럼 모시지? 평소엔 나 괴롭히는 걸 삶의 낙으로 여기더… 니……?“

내 말소리가 점차 작아졌다.

———어라?

스스로 말하면서도 직감했다.

이건 뭔가 이상하다고.

아니, 사실 깨어났을 당시부터 살짝 묘한 이질감을 느끼긴 했다.

머리가 아픈 거야 둘째치고, 군데군데 중요한 조각이 빠져 있는 기억과 더불어—— 뮤와 루비아를 대하는 나 자신의 태도가, 입학 당일의 순간과 비교해 달라져도 너무 달라진 것 같았다.

예컨대……

나디엘리 교수를 만나러 갔을 때의 일이었다.

트램을 타고 나가서 제 4학구에 도착한 뒤, 그곳 정류장에 있던 뮤와 마주쳤었다. 그냥 무시하고 지나갈 수는 없어서 인사를 건넨 뒤에 지나쳤다.

그러려고 했던 순간, 뮤는 날 불러 세우고는 결연한 표정으로 나와 진솔한 대화를 나누길 원했다.

그때 나는 예정된 선약이 있었기에 거절하려 했으나, 사실 일정 같은 게 따로 없었어도 아마 한 번쯤은 거절했을 것이었다.

그러니까 말야.

……왜 그랬던 거지?

뮤와는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게 아니었던가. 서로 간에 할 얘기는 많이들 쌓였을 텐데. 긴 해후를 나눌 법도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나는 왜……

……아니, 잠깐만.

애당초 하나부터 열까지 따져 보면 전부 이상한 일들 투성이다. 내가 이 황립 프론티어 아카데미까지 흘러 들어오게 된 경위. 그것부터가 제일 문제였다.

로르센 아카데미에 자퇴 신청서를 왜 내밀었던가. 나는 왜 뮤와 루비아에겐 아무런 말도 없이 그곳을 떠나버렸던가…… 그렇게 다시 만난 우리들은, 어째서 그렇게나 어색해져 있던 것이었을까.

루비아, 루비아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뮤.”

내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차갑게 굳어 있는 뮤의 손등 위에 놓인 나의 손바닥을 본다. 이런 몸이 된 이후로는 처음 만져 보는 것 같았다. 많이 작아졌네. 정확히는 내가 커버린 것이겠지만.

병실 내부에 까마득한 정적이 흐른다.

내 심장은 미약히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그러는 동시에 잠깐 진정되었던 통증이 재차 내 머리를 헤집는다. 앞머리를 손틈 사이로 흘려보내며 이마를 오른손으로 덮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말을 끊은 뒤 옆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알 수 없는 표정의 뮤가 있었다.

마치 시간이 정지하기라도 한 것처럼, 눈 하나 깜빡이지 않은 채, 살짝 벌려진 입술 틈새에서는 말 한마디 나오지 않는다.

그러더니, 이윽고.

……또르르.

작게 방울진 그것은 실처럼 가느다란 줄기를 지어, 뮤의 양 볼을 타고서 천천히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반면, 나는.

뮤의 손등으로부터 내 왼손을 떼어 놓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아까부터 내 머릿속에 떠오르던 의문을 그대로 나지막이 입에 담는다.

“……우리, 헤어진 거야?”

그로부터 2분쯤 지났을 때.

병실의 문이 드르륵 소리를 내며 열린다. 루비아는 수통과 컵을 들고 돌아왔다. 그녀의 뒤편에선 유리가 데려온 것으로 보이는 의원이 서 있었다.

이후 루비아가 건넨 차가운 물을 받아 마시고, 그럼에도 잘 깨지 않는 정신머리에 침상 위로 다시 몸을 눕혔다.

의원이 병실 안에 들어와 그들을 잠시 밖으로 내보낸 뒤에, 내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이것저것 물어보는 동안, 나는 겉으로 꼬박꼬박 대답을 하면서도 정작 의식은 다른 어딘가에 두고 있었다.

딱히 몸에 별 이상은 없다는 것 같았다.

입학 테스트 당시 받았던 정밀 검사 기록보다도 오히려 더 건강해진 것 같다며, 내가 의료원에 실려 왔을 때 얼마나 심각한 상태였는지에 대해 설명함과 동시에 개인적인 호기심을 보이기도 했다.

물론, 특혜를 가장한 실험체 따위가 될 생각은 없었으므로 정중히 거절했다.

다만 육체야 그렇다는 거고.

정신에 조금 문제가 생겼다는 듯하다.

사고 당시의 충격으로 일부 기억이 손실되었을 수 있으며, 회복까지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으나 아마 영영 되찾지 못할 수도 있다고.

그래도 추억과 지식을 담당하는 기관 중에 추억 쪽의 영역만 지워진 듯하니, 앞으로 평범히 살아가는 데 있어선 지장이 없을 거라고 했다.

나는 그냥 그렇구나, 하는 마음에 가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육신이 건강하니 의료원에 더 있을 필요도 없었다.

하루 뒤 정상적으로 퇴원 절차를 밟았다.

— 위이이잉……

의료원의 문을 나서자 화창한 태양이 나를 반긴다.

수요일의 대낮이었다.

듣기론 오늘까지는 결석하더라도 출석이 인정된다고는 했지만, 이미 수업 진도가 다른 학생들에 비해 늦어진 건 사실이기에 돌아가자마자 강의실로 향할 셈이었다.

여전히 부담스러운 시선들을 한몸에 받으며 트램 칸에 탑승했다.

그런 뒤, 가장 구석진 자리에 앉아 눈을 감은 채 고요히 생각에 잠겼다.

헤어진 거냐는 물음에 대답을 받진 못했으나.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아마, 그랬을 거다.

우리 둘의 손가락에는—반지가 없었으니까.

‘……’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전 여자친구가 되어버린 뮤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이미 상실해버린 기억 속의 일들을 상기해 보려고 다분히 노력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떠올릴 수 없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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