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차버린 소꿉친구와 전 여친이 같은 반이라 곤란하다-50화 (50/201)

〈 50화 〉 우연한 인연 (2)

* * *

#3

스텔라 데 펠트라인.

그녀에 대해 아는 건 얼마 없다.

나와 동갑이며, 솔라 제국 펠트라인 공작가의 공녀님, 이라는 것 정도가 전부일까.

순은을 녹여 실로 짜낸 듯 밤하늘의 별처럼 환히 빛나는 머리칼 등 외적인 부분을 제외하곤, 그녀의 가문이 무슨 입지를 가지고 있는지 등에 대해 아는 바가 아무것도 없었다.

하물며 펠트라인이라는 성씨를 들어본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것은 참으로 의문스러운 일이었다. 대륙 변방 나라도 아닌 제국의 공작이라면 거물 중의 거물이 아니던가. 나와는 태생의 품질부터가 아득히 다른 존재인 것이었다.

가문이 몰락하며 다른 귀족 가문에 관심을 크게 두지 않게 된 것도 한몫 하겠으나, 어린 시절 귀족과 연이 닿을 일이 잘 없는 시골에서 살아온 게 가장 크지 않나 싶다.

대륙의 중심에 위치한 제국은 크고 넓다. 인구만 해도 모래사장에 널린 모래알 만큼이나 무수하다. 그러니 귀족의 수도 적잖게 분포해 있다.

봐라, 당장 나만 해도 귀족이지 않은가.

…몰락했지만.

아무튼 프론티어 내부에선 태생부터 부여받은 계급의 의미가 퇴색된다곤 하나, 한 인간이 성장해 온 배경까지 전부 동일하게 바꿔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스텔라는 행동과 몸짓 하나하나에서 귀족적인 기품이 넘쳐 흘렀고, 존재 자체가 우아한 사람이었다.

그녀 스스로 말하지 않아도, 누군가 묻지 않아도 스텔라의 몸속에 푸른 피가 흐름을 본능적으로 직감하고 마는 거다.

그러면서 황금 속에서 자라왔을 게 분명한 그녀의 일생을 추하게 질투하거나 시기하지 않고, 오로지 동경과 경외심으로만 바라보게 될 만큼 단아한 성품을 은은히 드러내고 있던 것이었다…….

근데 귀족이라면 어려서부터 사교술에 관련해 잡다한 교육을 받았을 텐데. 왜 그리 수줍음이 많은 걸까. 낯도 많이 가리는 것 같고.

라며 의뭉스레 생각은 하지만, 선천적으로 그런 성격을 가졌다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고위 귀족 영애라 해서 무조건 정형화된 사교술을 구사해야 되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프론티어 안에서만 이리 수줍고, 가문의 일에 나설 때면 이미지가 확 달라질지 누가 알겠는가. 아무도 모를 노릇이다.

종합적으로.

그런 스텔라와 한 공간에 둘만 있게 되었다.

알다시피 에픽 클래스 기숙사 규칙에는 ‘상대방 동의를 구한다면 상대 성별 기숙사 출입 가능’ 이란 참으로 유감스러운 항목이 존재했다. 따라서 규칙상으론 전혀 문제가 없었다.

스텔라가 동의했고, 이제 가면 되는 거다. 별로 어렵지 않았다. 매우 쉬운 일이다.

말로만 쉬운 일이다.

상식적으로, 아니, 일반적인 감성으로 생각해 보자. 나는 프론티어에 입학한 지 이제야 고작 일주일 정도를 넘어선 참이었다.

그동안 스텔라와 접점이라곤 식당에서 한 두번, 그리고 같은 강의에서 몇 번 얼굴을 본 게 다였다. 서로 대화도 얼마 안 해봤다.

정확히는 스텔라가 내 앞에만 서면 쭈그러 들어서 못 한 거겠지만, 어쨌거나 우리가 서로에 대해 알고 있는 거라곤 이름과 나이 정도라는 것밖에 딱히 내세울 게 없다는 점은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래도 좀 그렇지 않나, 싶다.

야밤에 이성이 살고 있는 기숙사로 출입한다니. 내 안의 수위 신호가 경종을 울리고 있다.

물론, 달리 불순한 의도로 들어가는 게 절대 결사코 단언컨대 아니었으나, 과연 우리가 정말 순수히 학문적 교류를 나눌 뿐이라고 해서 주변인들도 그렇게 생각할진 의문이다.

까놓고 스텔라의 방에 내가 당당히 들어서는 모습을 누가 보기라도 한다면…… 여긴 학생 수도 적은 만큼 소문이 전부 퍼지기까지 삼일이면 족했다.

어쩌면 그보다 더 빠를 수도 있고.

소문을 들은 가브리엘의 어이를 상실한 웃음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는 듯했다.

…그래서 왜 하필 스텔라의 방이냐.

그것은 전적으로 나의 의지가 아니었다.

만난 지 얼마 안 되는 타인의, 그리고 엄연한 이성의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에 발을 들인다는 행위는 일단 내 선에서부터 아웃이었다.

그럼 누구의 제안이자 의지였느냐.

내가 아니면 누구일까. 다른 누군가 끼어들어서 그냥 방에서 공부하면 되지 않냐, 라는 식으로 툭 던지고 간 것도 아니었음에.

소거법으로 남은 사람은 한 명이다.

당연히 스텔라다.

지난 수업 내용을 알려주는 것도 알려주는 건데, 스텔라는 과외 장소를 자기 방으로 추천한 뒤 부끄러운 듯 한참 말을 아끼다가, 슬며시 눈을 들어 내게 그리 말해왔었다.

나한테 따로 할 말도, 보여주고 싶은 것도 있다고. 그러니 자기 방에 잠깐 들려서 공부도 할겸 같이 얘기를 나누고 싶다고.

그게 뭔지 나는 아직 모른다.

다만 입학 초기부터 유독 내게만 이상한 반응을 보여왔던 스텔라가, 어쩌면 오늘에서야 그 의문스러운 행동의 이유에 대해 진솔히 말해줄 것 같단 강한 예감이 들었다.

그게 좋은 예감인지, 나쁜 예감인지.

그것 역시 아무것도 모른다.

“……”

더불어.

딱히 뭔가를 기대하지도 않았다. 가슴 두근거리는 설렘이 나와 스텔라 사이에서 피어날 거란 일말의 생각조차도, 하지 않았다.

그러기엔 무엇 하나도 정리되지 않았던 까닭이다.

이미 놓쳐버린 강의 내용보다도.

훨씬 중요한 게 있었다.

……지금 이렇게 흐지부지하게 넘어가서는 안 될, 그렇기에 더욱 내가 먼저 다가가 선뜻 대화를 요청해야만 했다.

내 기억과 현재 심리 사이의 이질적인 괴리감.

침대에 가만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는 지금, 내 마음속 한구석 어딘가가 텅 비어버린 듯한 허무감.

의원으로부터 들었고, 대답 없는 뮤로부터 얻어낸 대답을 통해 비로소 알아차려, 원래 있었던 것을 잃어버리고 말았다는 사실로부터 발아한 상실감.

여태 하던 대로 살갑게 대해보려 해봐도, 어째서인지 행동하기 전에 잠깐 주춤거리게 된다.

곰곰이 생각해 봤을 때 내 의지는 명백히 아니었다. 아마 현재의 내가 아닌, 과거의 내가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끼는 걸 거다. 기억 속의 나는 그녀들을 회피하고 있었으니까.

내가 그럼으로써 그녀들은 울었다.나를 불편히 여겼고, 진심을 터놓은 채 대화를 나누고 싶어했으며, 내게 사죄하고자 했다.

그러나 어떤 절절한 표현과 사죄의 말도 나에게는 닿지 않은 듯했다. 철저히 선을 그었고, 그 이상으로 넘어오지 못하도록 벽을 단단히 세워 두었다.

그랬던 거다. 비록 공감은 하지 못하더라도, 다른 누구도 아닌 나였기에 당시의 심리를 이해하고 예측할 수 있었다.

……입맛이 씁쓸했다.

매끈한 손을 내려다본다.

아무것도 장식되지 않은 손.

정말로 모든 일이 순탄히 흘러갔다면 나의 약지 손가락에 끼어져 있어야 할 실버링은 보이지 않았다. 그게 정말로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결국.

…뮤와의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던 거구나.

나한테 그녀들이 울고불며 무릎을 꿇을 정도로 무언가 큰일이 있었다는 직감 정도는, 이미 머릿속 한구석에 담아두고 있었다.

그러나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거다.

지금의 내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 이런 몸이 되었던 건지, 나와 그녀들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나는 왜 진실된 사죄와 대화의 기회를 원했던 그녀들을 매몰차게 대했던 건지.

아무것도 떠올릴 수 없는 거다.

정도가 심하다 싶었다.

오해가 있다면 가급적 빨리 풀고, 앞으로 얼굴을 쭉 보게 된 이상 묵혔던 감정 따위 전부 정리해버렸다면 좋았을 텐데.

왜 그러지 못했던 걸까.

나에게 얼마나 큰 아픔이 있었기에.

근본적으로 나를 괴롭혀 왔던 재능의 부재, 부실한 육체, 환경, 그 모든 것을 극복하고 나서도 여전히, 그녀들을 똑바로 마주하지 못하고 혼자 웅크려 숨어버리고 만 것이었을까.

문득 내려다본 손이 얕게 떨리고 있었다.

……사실.

조금은 두려움을 느낀다.

만약 이 상실감이 도로 채워지는 순간이 온다면, 그때는 아마 지금과 같은 결심을 하지 못하게 될 것 같았다.

하여.

먼 훗날 후회하게 될 일이 없도록.

기회가 왔을 때 잡아야 했다.

……신이 아니라면.

없는 걸 만들어낼 수는 없다.

그러나, 때때로 할 수 없어도 해야만 하는 순간이 있었다. 중등부 시절 나의 매일은 그러한 순간들로 가득 채워졌다.

살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 어쩌면 그보다 더 추할지 모르는 발악.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그럴 필요도 없었던 휴짓조각 같은 무가치한 노력의 연속이었을 뿐인, 저열하고 하등하기 짝이 없던 몸과 정신.

그게 나 에지오 크라닐의 전부였다.

…그런 나를 사랑해주었던 한 사람이 있었다.

제 자신의 전부를 바쳐 마음 깊이 헌신했으나, 결국 보답받지 못한 사랑을 품고선 그대로 찬찬히 메말라 간 나의 전 연인이 있었다.

그녀는 지금 아주 가까이에 존재했다.

하지만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그러니 이대로.

더 멀어지기 전에.

더 돌이킬 수 없게 되어버리기 전에.

…나는 그녀들을 거짓으로라도 용서해야만 했다.

#4

짹— 짹—……

스텔라에게 과외를 받기 전에, 저녁을 먹을 겸 기숙사 밖으로 나섰다.

땅거미가 느릿하게 걸어오고 있던 이른 저녁. 선선해진 봄바람이 내 앞머리를 가볍게 쓸었다.

대낮부터 공원의 곳곳을 생생한 활기로 메우던 선배들은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새소리가 가장 크게 들릴 만큼 한적해진 공원에 들어서자 시끌벅적한 소음이 환청처럼 들려오는 듯했다.

다만 그것도 한순간에 싹 그쳤다.

아무도 없는 공원의 한복판을 거닐던 내 주변으로, 저 멀리 선배들의 시선이 슬금슬금 모여들었다.

아마 소문이 퍼진 탓이다.

트램에서 프론티어 학생들이 귓속말 하는 걸 기감을 끌어올려 엿들었더니, 거기에 나뿐만 아니라 엘레나 선배님도 같이 있었다는 듯했다.

사건 현장에 영웅처럼 나타나 화재가 난 건물 꼭대기에서 생존을 위해 뛰어내린 날 구했다고 한다. 역시나 기억은 없었다.

거기다가… 이게 솔직히 반신반의하는 심정이지만, 내가 무슨 땅과 하늘에 구멍을 뚫고선 빛나는 길쭉한 물건을 든 채 날 구해준 엘레나 선배님과 호각으로 싸움을 벌였다는, 무슨 별 미친 소리가 은연중에 싸돌아 다니고 있었다.

이게 뭔 개소리야.

근데 그걸 실제로 봤다는 학생들이 주변에 몇 존재한다는 모양이다. 도대체 왜 있는 건데.

역시나 믿지 않았다. 아무리 기억이 없다고 해도 그건 좀 아니지 않나……

일단 내가 아는 확실한 사실만 집어 보면, 그 테러 현장에 내가 있었던 건 맞는 듯하다. 정확히 몇 층인지는 모르겠으나 건물 높은 층에서 다이빙을 하듯 뛰어내린 것도 맞고.

게다가 나는 제 4학구에 나디엘리 교수를 만나러 갔던 것이었다. 본부에서 발표한 결과에 따르면 나디엘리 교수가 그 모든 사건의 원흉이라고 했다.

처음 들었을 땐 전혀 안 믿겼다.

……나디엘리 교수님이?

정말로?

나디엘리의 나긋한 미소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더군다나 그 유난히 도드라진…… 그런 것까지 기억할 필요는 없지만, 아무튼.

오리엔테이션 이후 첫 정규 수업 시간에도 굉장히 친절하고 부드러운 성품의 인격자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던 까닭에, 나디엘리가 범인이라는 사실을 쉬이 믿을 수 없었지만 상황과 결과가 오직 한 가지 답만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러니까, 정황만 따졌을 때 연구 협조를 명목으로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게 틀림없었다.

……뭐랄지.

세상 참 무서웠다.

이젠 새삼스럽지도 않긴 한데, 역시 마물 같은 것보다 더 무서운 건 같은 인간이었다.

여하튼 에픽 클래스에도 나에 대한 소문이 만연하게 퍼진 모양이다. 그래서 낮에 날 알아봤던 선배들이 꽤 있던 거였고.

봐라, 지금도 저 멀리 있다가 날 향해 급속도로 달려오고 있지 않은가.

……어, 달려온다고?

“후배야아아아!”

두 팔을 활짝 벌리며 여기로 뛰어온다. 언뜻 보이는 얼굴에 싱글벙글한 미소가 만연했다. 나는 잠시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튀어야 하나? 라고 생각했을 때.

과연 에픽 클래스라는 건지,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내 앞까지 당도했다. 달리 말해서 도망치는 것에 실패했단 뜻이었다.

유니폼 위에 걸친 분홍빛 가디건 끝자락이 바람에 나부꼈다. 적갈색을 띠는 장발 또한 바람의 정방향으로 신나게 흔들렸다.

헥헥거리며 달려온 선배는.

“나, 나 알지? 낮에 너한테 말 걸었었는데!”

한 손을 무릎 위에 얹은 채로 자신을 가리키며 헬렐레 웃었다.

이렇게까지 하는데 인사를 안 하기도 뭣하고.

“…안녕하세요, 레이린 선배님.”

가디건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가슴팍엔 아마도 별 세 개가 달려있을 것이었다.

에픽 클래스 3학년 레이린 아이오나.

낮에 나한테 서클 홍보를 명목으로 접근해 왔던 선배들 중 한 명이자, 패션 서클 「마스터피스」의 회장이었다.

“기억해 주는구나! 기쁘다. 이히히.”

후아­ 하고 한숨을 내쉰 레이린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지금 어디 가? 밥 먹으러 가? 우리랑 같이 먹을래? 아니, 나랑 따로 같이 먹을까?”

한 문장에 무려 네 개의 질문을 넣었다.

밥 먹으러 가요. 네. 아뇨. 그것도 아뇨. 라며 나 역시 네 번의 대답을 해야 공평했겠지만, 짧게 일축해버렸다.

“오늘은 혼자 먹을 생각이라서요. 죄송합니다.”

“엑……”

레이린이 충격받은 얼굴로 침음성을 흘렸다.

“혼자 먹는다구……? 외롭지 않아?”

“전혀요?”

오히려 그게 더 편할 때도 있다.

레이린처럼 활발한 사람들은 아마 평생 이해하지 못할 종류의 독특한 감성이란 거다……

“…그으래? 그래도 혼자보단 둘이 낫지 않을까? 나도 마침 밥 먹으러 가는 길이었거든. 응? 같이 먹자. 겸사겸사 서클 활동에 대한 얘기도 좀 하구.”

“아니, 왜 이러세요?”

레이린이 내 옆에 촐싹 붙더니.

그대로 내 팔과 허리춤 사이에 손을 넣어 밀착한 뒤 팔짱을 껴버렸다.

가디건의 재질이 워낙 부드러워서 그런지 폭신한 감촉이 선명하게 느껴진다.

고개를 비스듬히 아래로 내리면 그곳에 레이린의 얼굴이 코앞에 위치해 있었다. 계속 맡으면 기분이 나른해질 것 같은 향기가 콧잔등을 간질였다.

“너한테 관심 있어서 그래.”

“…네?”

내 의문을 묵살하고서 레이린이 사랑스러운 눈길로 내 팔을 쓰다듬었다.연한 검은빛 매니큐어가 칠해진 가늘고 길다란 손가락이 뱀처럼 내 팔을 휘감는다.

“너라면 우리 서클의 부회장이 될 자격이 있어. 이 단단한 팔뚝, 대나무 같은 신장, 유니폼만 입어도 선이 살아나는 옷태와 비율…… 나와 같이 제국 패션의 새로운 시대를 열자. 쓸데없이 번쩍거리기만 하는 구닥다리 복식 같은 건 집어던지고, 우리가 제국의 유행을 주도하는 거야. 너와 함께라면 반드시 가능해!”

그렇군요.

굉장히 곤란한 타입의 사람이었다.

낮에도 떼어내느라 고생 좀 했는데, 여기서 또 이러니 여간 곤란하기 짝이 없었다.

“저, 그게 사실 별로 관심이 없……”

“괜찮아! 일단 밥부터 같이 먹으면서 생각해 보자! 아직 너는 네 가능성을 모르고 있어. 내가 하나부터 열까지 천천히 알려줄게. 그때 거절해도 좋으니까, 조금만 시간 내주면 안 돼? 응? 응응응?”

“아니…… 그, 일행도 계신 거 같은데.”

아까 레이린이 ‘우리랑 밥 먹을래?’ 라고 했었나.

아니나 다를까, 레이린은 나를 발견하자마자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내게 같이 밥을 먹자며 신나게 외쳐대고 있던 것이었다.

반면 레이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뭔가 문제야? 너랑 둘이 먹겠다고 하면 되잖아.”

그게 그렇게 되나.

뭔가 실례인 행동이 아닌가 싶었지만, 이 사람한테는 별로 문제될 거 하나 없는 일인 듯했다. 원래 안보다 밖에서 나도는 사람들은 다 이런가… 그렇다면 나는 아직 한참이나 부족한 것이었을까……

똘망똘망한 눈이 나를 올려다본다. 저녁놀과 비슷한 색깔로 물든 예쁜 눈동자. 부담스러운 시선이 나를 직선으로 향함과 동시에, 내 팔을 꾸욱 감싸 조이는 레이린의 힘이 더 강해졌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레이린이 멋대로 껴온 팔짱을 풀기 위해 손을 들었고, 나는 그녀의 팔을 밀면서 슬그머니 옆으로 물러났다.

“아뇨, 오늘은 일행 분들이랑 같이 드셔주세요. 그리고 정말 죄송하지만 앞으로 이런 행동은 부담스러우니 자제해 주셨으면……”

“너 자꾸 그럴 거야?”

“…예?”

꾸욱.

팔짱을 푸는 걸 절대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아예 전신을 밀착시킬 기세로 내 옆에 달라붙어 물기 젖은 목소리로 말한다.

“이러면 나 진짜 속상해. 완전 진심으로 하는 말이거든. 우리 서클, 신입 부원이 매번 들어와도 금방 나가버려서 폐부 위기란 말야. 다들 옷에는 관심 하나도 없구, 놀 생각만 가득하구…… 부원도 나 포함하면 세 명밖에 없어. 그래도, 네가 들어와주면 나 정말 행복할 거 같아. 폐부도 안 해도 될 거고, 에지오 너랑 함께라면 매일매일 활동하는 맛도 날 거구. 꿈을 포기하지 않아도 될 거구……”

곤란함 수치가 하늘을 뚫고 있었다.

도대체 왜 내 주변 여성 분들께선 이리도 쉬이 울음을 내보이는 것일까. 단순한 훌쩍임을 넘어 울먹이기까지 한다.골때리네. 정말……

이만한 애정을 보인다는 건 그만큼 절실하단 소리였겠으나, 안타깝게도 아닌 건 아닌 거였다.

세간에서 여자의 눈물을 믿는 행위는 알고 마시는 독약과 같다고 그랬다. 특히나 본인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았을 때 흘리는 눈물은 더욱 위험하단다.

……그렇긴 한데. 나도 잘 알고 있지만.

알면서도 함부로 뿌리치지 못하는 내가 밉다.

“저, 레이린 선배님. 그게……”

물론 끝내 거절할 생각이긴 했다.

일단 얘기라도 한 번 들어본 다음에 거절해도 좋다 했으니, 오늘은 아니더라도 나중에 조금 정도는 시간을 내주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던 찰나.

“그만 놔주세요, 선배님.”

타박. 탁.

짧은 발소리가 울렸다.

곧이어, 나와 레이린 사이에 얽힌 팔의 연결고리가 느닷없이 나타난 두 손에 의해 강제로 풀려 나갔다.

“어, 어?”

우리 둘은 동시에 앞으로 고개를 들었다.

팔을 쫙 벌려 우리 사이의 간격을 넓힌 검은 장발의 아리따운 소녀가, 부드러운 웃음과 함께 조곤히 입을 열었다.

“제 친구가 곤란해 하고 있지 않나요.”

싱긋.

대놓고 싸늘하게 말하면 싸가지 없어 보일 테니까, 괜히 정색하지 말고 차라리 웃자. 유한 미소와 함께 말하는 거다. 그런 식의 속마음이 들려오는 듯했지만……

내 눈에는 그게 더 무서워 보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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