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화 〉 우연한 인연 (3)
* * *
#5
“…미안해. 괜히 방해한 걸까?”
“방해는 무슨. 타이밍 좋았어.”
시무룩해진 레이린이 자리를 떠난 이후.
나와 뮤는 잠시 멈춰 서 있었다.
‘……정말, 다음에 나랑 꼭 얘기해주는 거다?’
‘네, 지금이 아니라면 나중에 언제든요.’
‘응… 믿을게…… 다음에 또 봐, 에지오.’
왠지 모르게 흉흉한 기세를 마주하고선 레이린이 살짝 움츠리는가 싶었는데, 끝내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며 나와 중요한 얘기 중이니 방해 말라는 식으로 뮤에게 용감히 대항했으나—— 지금 말고 나중에 말 들어줄 테니 일단 가시라는 내 발언에 결국 어깨를 축 늘어뜨리곤 털레털레 무리로 복귀했다.
자기 편 안 들어줘서 속상하단 티를 팍팍 냈으나 유감스럽게도 그쪽에 신경 써줄 수는 없었다. 싫다는 사람 붙잡고 늘어진 건 사실이니까.
그 놀라울 정도로 무서운 친근감을 무기처럼 들이밀면, 나 같은 사람들은 반가움보다 피곤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
“……”
뮤와는 의료원에서 마주했던 뒤로 대화한 적이 없었다.
그녀와 나누었던 마지막 말도, 음, 갑자기 언급하면 분위기가 어색해지는 그런 종류의 말이었으니까.
그 때문에 할말이 뚝 끊겨버린 우리는 서로의 눈이 아닌 공원 한가운데의 분수대를 바라볼 뿐이었다.
별안간 물기를 담아 촉촉해진 뮤의 눈동자. 어딘가 먼 곳을 그리는 듯한 눈길이 곧이어 나를 향했다. 뮤는 다소곳이 미소를 지었다.
“……나는 가볼게. 밥 맛있게 먹어.”
—화악.
“잠깐만.”
“……어?”
등을 돌려 걸어가려는 뮤를 멈춰 세웠다.
팔소매를 잡았고, 깜짝 놀란 뮤가 뒤를 돌아본다.
져녁놀에 반짝이는 뮤의 얼굴이 정말 예뻤다.
……그때는 뮤가 먼저 날 불러 세웠다. 나는 선약이 있었다. 결국 약속을 잡긴 했지만, 우리가 카페 안에서 만나는 일은 없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뮤는 사건 현장에 있었다고 했다.
발생 시각이 대략 밤 11시쯤이라고 했으니까, 우리가 약속했던 당시로부터 거의 반나절 정도가 꼬박 지난 셈이었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도 될까?’
제 4학구 세리아 클래스의 정거장에서.
벤치에 앉아 날 올려다보며 환히 웃던 뮤의 모습을 기억한다.
나와 대화할 기회가 생겼다는 것에 순수히 기뻐하고 있었다. 그런 부푼 마음을 가지고 날 기다렸을 터다.
진작에 내가 오지 않음을 인지하고 있었으면서도, 사건이 발생했던 밤 11시까지, 제 4학구에 계속 남아 있던 것이었다.
장장 13시간을 족히 넘긴 기다림이었다.
나는 조심스레 입을 연다.
“토요일에… 카페 못 가서 미안했어.”
“……”
멍하니.
뮤는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전혀 예상지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 굳어버린 채였다. 한참을 그렇게 멍한 눈으로 서 있더니, 옅은 미소와 함께 눈을 감으며 머리를 느릿하게 저었다.
“미안하긴. 에지오가 그럴 필요는 전혀 없어. 오히려, 내가 사과해야 할 부분이야. 위험에 처했을 줄 알았다면 거기서 가만히 있지도 않았을 텐데……”
“……”
객관적으로 뮤가 선뜻 사과를 건네올 만한 일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나 역시, 철저히 객관적인 입장에서 뮤한테 사과할 필요도 없었다. 전부 그럴 만한 사유가 있었다. 우리 둘한테는.
다만, 감정의 교류는 상식과 이성으로만 흘러가는 게 아니다.
사람이 항상 냉정한 사고를 유지하며 오로지 최고의 효율만 쫓아 산다면 그것은 인격체라기보단 하나의 마공학 기계에 가까웠다.
우리는 기계의 삶을 살고 있는 게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성적으론 미안할 필요 없는 일에 대해 사죄를 하고 있다.
이유야 어쨌든 간에 어떤 잘못을 저질렀다면. 상처입히고 싶지 않은 사람을 고의가 아니더라도 아프게 만들었다면. 구태여 갖지 않아도 될 죄스러움과 책임감을 가지게 되어버린다. 바로 지금처럼.
침묵 속의 흐름을 깨뜨렸다.
“그래서 말인데, 뮤.”
뮤가 눈을 살짝 동그랗게 떴다.
내가 말했다.
“그때 하지 못했던 얘기, 오늘 할 수 있을까?”
“……”
다시 한번, 멍하니.
이번에는 좀 더 짧았다.
재차 옅은 미소를 짓는다.
“……미안해. 나중에 하자. 오늘은… 다른 일이 있어.”
“……그렇구나.”
“……응.”
설마 거절당할 줄은 몰랐다. 그래도, 개인적인 일이 있다니까. 어쩔 수 없는 거다. 나는 고개를 담담히 끄덕였다.
“그럼 나중에 보자. 시간 남으면 말해줘.”
“…응, 알았어. 밥 맛있게 먹어.”
뮤는 밥을 먹지 않는 것 같았다.
일이 있는 까닭이다.
……타박, 타박.
짤막한 인사를 나눈 뒤 우리는 서로 등을 돌렸다.
나는 식당 쪽으로, 뮤는 기숙사 쪽으로.
그렇게 각자 다른 길을 걸어갔지만.
……여전히 거짓말을 잘 못 한다는 점을 봤을 때, 우리는 아마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었다.
#6
사방이 까마득하게 어두웠다.
3동 1학년 연무장의 불은 전부 꺼져 있었다. 암막에 모든 빛이 차단되어 새까맣게 물든 광활한 공간.
홰액—
흡사 그림자 마물이라도 자연적으로 생성될 법한 연무장 한구석에서, 짧은 파공음이 일어남과 동시에 희끄무레한 푸른 잔상이 은은한 빛을 흩뿌렸다.
순간적으로 그 주변이 밝아진다.
날카로운 검신을 타고 흐르며 불빛을 방사하던 마력의 흐름이 뚝 그친다.
연무장은 다시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잠겼다.
일정한 텀을 두고서 곧바로, 홰액. 방금보다 조금 더 거세진 소음이 공기를 가르며 울린다.
다시 한번 검면의 주변이 은은하게 빛난다. 그러자 심플한 라인의 트레이닝복이 드러났다.
오로지 검격을 내지르는 순간에만 마력을 담는다. 쓸데없는 마력 낭비를 줄이기 위한 일종의 훈련이었다.
다만 매우 세밀하고 정교한 마나 감응력과 그에 상응하는 초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기술이었으므로, 이 기술을 훈련할 때에는 검 하나에 일념을 담고서 상념 하나 없는 무아에 빠져든다.
일찍이 한 시간 전부터 제 검을 계속하여 휘두르고 있던 뮤에게 있어선, 그 어느 때보다도 이 훈련이 필요했다.
존재하지 않는 목표를 수도 없이 베었다. 훈련용 인형 같은 건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다. 때문에 언제부터인가 뮤의 훈련 상대는 뮤 자신이 되었다.
마땅한 대련 상대를 에픽 클래스 내부에서 찾을 수도 없었다. 제국 칠검(七?) 중 삼검(三?)이라는 아벨 라이오너가 증언하길, 뮤의 호적수가 될 수 있을 만한 검사는 신입생 중에 전무했다.
적어도 검에 특수한 재능을 지닌 에픽 클래스 3학년쯤은 되어야 어떻게 붙어볼 만하다는 듯했다.
그마저도 뮤의 승률을 높게 점친다 하였으니, 지금 당장은 혼자서 수련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홰액—— 탁!
휘둘러진 검격 끝에 무언가 닿았다.
연무장의 바닥이었다.
푸른 잔상은 곧 안개처럼 허공에 스며들었다.
뮤가 입은 트레이닝복 안으로 상당한 양의 땀이 흐르고 있었다.
검끝을 바닥으로 향한 채 잠시 목 부근의 지퍼를 내리니, 후끈한 열기가 몽실 피어올랐다.
“……하아아.”
최대한 잡생각을 지우려고 했건만.
결국 실패해버렸다.
눈을 감은 채 앞머리를 쓸어넘긴다. 땀에 젖어 축축해진 귀밑머리 역시 귓가 뒤로 넘겨서 고정시켰다.
그러고는 잠시 흐트러졌던 호흡을 바르게 정돈한 뒤, 재차 훈련을 시작하고자 했으나.
‘그때 하지 못했던 얘기, 오늘 할 수 있을까?’
“……”
다잡았던 마음은 금세 원상태로 돌아가고 만다.
결국 검파를 손에서 놓았다.
채앵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진 뮤의 검.
이제 되었다는 듯 자세를 내려 연무장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은 뮤가, 살짝 풀었던 지퍼를 아예 끝까지 쭉 내렸다.
땀으로 흥건해진 하얀 나시티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났다. 더위를 잘 타는 뮤의 특성상 불쾌할 법도 했지만, 이 정도는 이미 익숙해진 참이었다.
고요 속에서 뮤는 조용히 생각한다.
사실 다른 일 같은 건 없었다.
거짓말을 한 셈이다.
그 사실을 에지오도, 아마 알고 있을 터다.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그의 모습에서 자신의 능숙하지 못한 거짓말이 들통났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에지오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공원 한가운데서 자연스레 헤어졌다.
뮤라고 해서 에지오와 얘기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니었다. 그랬으면 애초에 토요일날 세리아 클래스 정거장에서 먼저 말을 걸지도 않았을 거다.
하여 뮤에게 있어선 바라 마지않던 천금 같은 기회나 다름이 없었으나, 결국 거짓말로 거절하면서까지 이곳으로 도망쳐 왔다.
그와 대화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다.
……도저히, 용기가 나질 않았다.
작년 11월 19일의 그날부터 지금까지 마음속에 쭉 품어왔던 결심들은, 항거할 수 없는 거대한 두려움 앞에 모래성처럼 무너져버렸다.
스스로도 기가 찬 일이라고 생각한다. 네 결심은 고작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 거였나. 한심하고 나약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무서운 걸 어떡해.
에지오는 기억을 잃었다.11월 19일을 비롯하여 자신을 아프게 만들었던 기억들을 모조리 잃어버린 게 분명했다.
우리가 헤어진 거냐는 물음을 진지하게 건네왔을 정도였으니, 아마 자신에게 보내왔던 편지의 내용도 전부 잊어버린 상태였을 터다.
그래.
입학 이후의 일이 어찌 되었든, 지금의 에지오 크라닐은 뮤와 연인이었던 시절 속에 머물러 있었다.
……좋은 일, 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전혀,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저주에 가까웠다.
해주 방법이 영원히 소실되어버린 지독한 저주.
병실에서 정신을 차렸던 에지오가 그 언젠가 익숙한 말투로 자신의 손등을 쓰다듬어 주었을 때, 정말 한순간도 참지 못하고 울컥하며 목이 메었다. 눈물이 흐른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앞으론 영영 보지 못할 것만 같았던 사랑하는 선배의 모습이, 달라진 선배의 얼굴에서 보였다.
그만큼 죄책감이 들었다.
가슴이 찢어질 듯 욱신거렸다.
그런 아픈 기억들을 전부 잊어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에게 환히 웃어줄 수 있었다는 뼈아픈 사실이 너무나도 죄스럽고 슬프기만 했다.
선배가 나를 향해 웃어줘서 좋았다. 손등을 쓰다듬어 주었기에 행복했다. 다시는 느끼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설렘이, 멈춰 있던 심장을 거칠게 두드렸다.
희망을 보지 못했다면 거짓말이다.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선배가 나를 그 시절의 뮤로 기억해주고 있다는 벅찬 마음에, 멋대로 울면서 웃고 말았다.
다만……
그건 반드시 깨야만 하는 환상이었다.
달콤한 꿈이 보여주는 환각에 점차 빠지면 빠질수록, 꿈에서 깨어났을 때 닥쳐올 상실감과 허무함은 배가 되어버린다.
그러니 뮤는 섣부르게 행동하지 않았다.
모든 일을 없던 걸로 하고서 에지오의 품에 웃으며 뛰어들고 싶다고 해도, 그건 절대로 이루어져선 안 되는 일이었다.
언젠가는 에지오도 진실을 다시 깨닫게 될 터다. 그때가 되면, 더욱 돌이킬 수 없게 되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래서였다.
에지오가 진실을 깨닫게 되는 미래가.
…너무나 두려웠다.
에지오와 대화하게 되면, 말해줘야 했으니까.
모든 걸.
뮤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일들의 내막을…… 글자 하나 틀리지 않고 또박또박, 전부 말해줘야만 했다.
그래도 되는 걸까. 이대로 말해줘버려도 되는 걸까. 그리하면, 에지오는 나를 용서해 줄까.
전에는 용서를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사죄하고자 하는 마음이 더 컸다.
사랑하는 선배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겨버렸으니까. 대체 어떤 자격으로 용서를 구가하고자 하는가. 그런 심정이었다.
지금의 에지오는…… 모르겠다.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상할 수 없다.
그것 또한 두려운 점이었다.
하지만, 정말 만에 하나 지금의 에지오가 모든 진실을 털어놓은 자신을 용서한다고 한들, 그것은 어디까지나 거짓 용서에 불과했다.
이제 와서 내가 그한테 진심으로 사죄한다고 한들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자신은 반드시 용서를 구해야만 하는데, 용서를 구할 대상이 허무하게 사라져버렸다.
결국 남은 건 허상뿐이었다.
지독한 신세다. 뮤가 입매를 비틀었다.
나는 에지오를 사랑할 자격도 아예 없다고 생각한다. 그날부터 쭉 변함없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방금 전의 일처럼, 에지오의 곁에 다른 여성이 붙어 있는 모습을 보면 여전히 손이 옅게 떨리고 가슴이 답답하도록 미어지기만 한데, 그럼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 자신이 밉고 미웠다.
그때 에지오가 정말 곤란해 하는 것 같지 않았다면 사이에 끼어들 여지조차 찾지 못했을 거다.
달리 말해, 에지오가 진정으로 원해서 이루어진 관계에는 자신이 끼어들 틈 따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젠 내세울 것도 뭣도 없는…… 그냥 같은 반 친구가 되어버렸으니까.
메마른 마음을 콕 찌르는 따가운 느낌에 뮤가 입술을 짓깨물었다. 아랫입술에 작은 핏방울이 맺혔다.
……슬픔도 기쁨도 전부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럴 리가. 에지오를 보면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서 웃음이 나온다. 뮤는 에지오와 재회한 뒤로 본래의 자신을 비로소 되찾을 수 있었다.
기억을 잃은 에지오가 날 바라봐주는 시선. 적의와 무감정보단 호의와 안타까움이 섞인 따스한 눈빛. 거부할 수 없을 만큼 중독적이었다.
한때 격렬히, 아니, 지금은 한번 상실을 겪었기에 더욱 갈구하고야 마는 사랑이란 감정은 뮤에게 욕심이란 걸 선사했다.
염치없고, 이기적이고, 그랬기에 결국 선배에게 상처를 주고 말았으나, 솔직한 심정으론… 그와 다시 잘 지내보고 싶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거다.
절망과 비탄으로 가득 찬 줄만 알았던 상황에서 어긋난 희망이라도 생겨버리니, 그것에 관심을 줄 수밖에 없는 거였다.
비록 언젠가는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릴 꿈과 헛된 망상에 불과할지라도, 그러기 전에 한 번 쯤은 에지오와———
뮤는 고개를 푹 떨군 채 스스로를 조소했다.
……미련하기 짝이 없고, 한결같이 병신 같은 년이다. 세상에 자신처럼 이기적인 사람은 다신 없을 듯했다.
정말 그런 짓을 해놓고도?
그게 될 거 같아? 정말로?
진짜 그렇게 생각한다면 차라리 나가 죽지 그래. 지금 이 자리에서 칼로 목을 베어버려. 역겨운 년. 쓰레기 같은 년.
널 보고 있던 에지오의 망가진 눈을 생각해 봐. 단순한 친구로도 대하기 힘들어진 관계를 생각해 보라고.
다 누구 탓인 거 같아? 그 모든 게 온전히 너의 업보야, 뮤……
입술을 더욱 세게 짓깨물었다. 비릿한 핏물이 혓바닥을 촉촉하게 적셨다.
역겹고 이기적이게 에지오를 속여 넘긴 상태에서, 에지오가 만에 하나 기억을 되찾게 되면, 다시 그 상태로 돌아가게 되는 거다.
눈빛에 스며들었던 따스함은 사라지고 겨울서리처럼 무미건조한 냉정함만이 남는다.
그리고 깊숙한 곳에 기묘한 열기가 서리게 될 거다. 예상컨대 그것은 아마 분노라는 감정일 터였다.
에지오를 속일 생각 따위…… 진심으로 들지도 않았고, 해서도 안 될 불가침의 영역이나 다름이 없었다.
말은 때때로 그 어느 날카로운 무기보다도 가장 묵직하고 차가우며 단단한 칼날이 된다.
몸이 아닌 사람의 기억과 마음에 영원토록 틀어박힌 채 절대로 뽑히지 않는다.
자신은 그런 끔찍한 무기를 누구보다 사랑하는 선배에게 몇 번이고 비틀어 쑤셔 넣었다.
정말,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해선 안 될 짓임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뮤 자신은.
인간이 아닌 마물이라도 되는 것일까.
“……”
같잖은 생각에 피식하던 뮤는, 별안간 품속을 뒤적거렸다. 뭔가를 꺼내어 제 손에 쥐었다. 그러곤 손바닥을 쫙 펼쳐 그 위에 올려진 것을 어둠 속에서 내려다보았다.
동을 섞은 정은(丁?)으로 세밀하게 가공되어, 작은 원형의 모양새를 갖춘 실버링 두 개가 희미하게 반짝였다.
시간이 지나 아주 조금 녹이 슬었다. 가까이서 봐도 별로 티가 안 날 만큼의 미세한 흠이었으나, 뮤는 그 흠을 언제나 의식하고 있었다.
……참으로 추한 일이다. 왜 아직도 이걸 가지고 있는 건지. 나름의 부적이라고 보기엔 그 의미가 썩 좋지 않다. 그렇다면 왜 밖에 나설 때마다 이 반지를 품속에 넣고 다니는가 하면은.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서였다.
이 반지에 무슨 사연이 얽혀 있는지. 그날 네가 이 반지의 주인이 되었을 사람에게 어떠한 짓을 했는지.기억하고 또 기억하기 위해, 뮤는 반지를 항상 몸 어딘가에 지니고 다녔다.
울고 울어서 쩍쩍 갈라진 대지처럼 메마른 마음은 더 이상 눈물을 토해내지 못한다. 그러니 얕게 떨리는 숨결만이 자리에 남았다.
뮤는 에지오와의 깊은 인연을 상징하는 증표였던 실버링을 손으로 꽉 쥐었다.
이미 깨진 관계이니만큼 볼 때마다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매일같이 제자리에 돌아오고야 마는 반지.
이것을 보면 언제나 떠오르고 만다.
그날 선배에게 쏟아부었던 무수한 폭언들이 생생히 들려온다. 귀를 틀어막아도 유령의 속삭임처럼 손등을 뚫고서 머릿속을 진탕 헤집는다. 뮤의 뜨거운 숨결이 점차 거칠어졌다.
그렇게 떨리는 고개를 겨우 들면, 피투성이 선배가 힘겨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달싹이는 것이었다.
———미안해, 라고.
그날의 환영은 악몽처럼 뇌리에 스며든다.
“아, 아아……”
“……아녜요.”
“모두, 모두…… 제 잘못이에요.”
“제가…… 잘못했어요. 선배……”
불 꺼진 연무장의 한복판에서.
덩그러니 웅크려 앉은 뮤가 나지막이 중얼거리던 사죄의 말은, 그로부터 한참이나 반복되며 무엇도 없는 허공을 떠돌아 다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