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차버린 소꿉친구와 전 여친이 같은 반이라 곤란하다-52화 (52/201)

〈 52화 〉 우연한 인연 (4)

* * *

#7

저녁을 먹고 기숙사로 복귀해 짐을 챙겼다.

짐이라고 해봐야 노트와 필기구 정도인가. 고작 하루 놓친 수업 분량 따라가기 위해 동급생에게 과외를 받는 것뿐인데, 달리 거창하게 준비할 필요까진 없었다.

샤워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내 머리칼 끝은 살짝 촉촉해진 채였다.

나름 깨끗하게 하고 다니는 편이라 생각하기에 몸에서 냄새 날 걱정 같은 건 딱히 안 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간단히 씻었다.

이거 괜히 의식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그래도 한 공간에 둘만 있는 건데, 상대방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라 생각한다.

무엇보다 지체 높은 공녀님이시만큼 냄새에도 민감할지 누가 알겠는가. 괜히 트집 잡힐 거 없도록 철저히 준비한 것뿐이다.

스텔라는 약속 시간이 다 되었을 때쯤 기숙사 방에 있겠다고 했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부터 여자 기숙사에 들어가서 내 발로 직접 스텔라의 방을 찾아가야만 하는 것이었다.

…근데 이게 정말 맞는 건가.

이래도 되는 거냐, 나.

듣기론 하루에도 남자 선배들이 몇 명씩 2동을 들락날락 거린다고 하니까, 내 존재에 대해 격한 의구심을 품진 않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게 있다면 내가 입학한 지 얼마 안 된 신입생이라는 점일까.

더군다나 의도치 않게 유명인이 되어버렸다. 에지오 크라닐이란 존재는 이미 에픽 클래스 내에서 장안의 화제가 되어버린 듯하다.

입학 일주일 차에 여자 기숙사로 당당히 출입하는 남자 신입생이라…… 반대로 생각해 보면 참 그렇고 그런 모양새긴 하네. 새삼 스텔라가 얼마나 대담한 선택지를 제시했었는지 깨달았다.

물론 내 쪽에서 정말 괜찮겠냐고 여러 번 물어보긴 했으나, 결국 이렇게 성사되어버렸다. 이제 와서 취소고 뭐고 없는 것이었다.

쫄지 말자. 이럴 때일수록 더 당당해져야 한다. 괜히 바짝 굳어서 수상한 기색으로 들어가 봤자 쓸데없는 의심만 살뿐이다.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내가 가방을 둘러멨다. 키를 주머니에 넣고, 그대로 문을 밀어젖혔다.

로비로 향하자.

그곳에서 누군가와 마주쳤다.

“어, 에지오.”

소파에 앉아 목에 수건을 두른 채 음료를 마시고 있던 가브리엘이었다.

밖을 향하려는 날 보며 묻는다.

“어디 가냐? 가방도 다 챙기고.”

“……”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고민했다.

사실대로 말하면 가브리엘의 성격상 날 가만 두지 않을 게 분명한데. 여러 가지로.

…여기선 대충 얼버무리자.

“공부하러.”

사실이었다.

“…므어? 공부? 운동이 아니고? 너 3일 쉬었잖아. 근손실 걱정 안 되냐?”

“안 되긴. 공부 끝나고 할 거야.”

가브리엘의 말처럼 나는 의식을 잃었던 3일간 뼈아픈 근손실을 겪었다.

불과 이틀 정도만 근육을 사용하지 않아도 큰일이 날 법한데, 나는 최소한의 영양 공급만 받으며 3일 동안 침대에 누워 있기만 했던 것이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이어왔던 루틴에 구멍이 생겨버리니 이것 참 이루 말할 수 없는 허탈함이 밀려오긴 한다.그래도 뭐 어쩌겠는가. 지금부터라도 다시 열심히 하는 수밖에……

그런 연유로, 운동도 운동이지만 스텔라와의 약속이 먼저였다.

“별일이구만…… 어디서 하는데?”

“…뭐 그렇게 궁금한 게 많냐?”

“아니, 그냥 물어보는 거지 뭐. 필기 공부하는 거면 방에서 혼자 해도 되는 거잖아. 굳이 이 시간에 밖에 나가서 공부하겠다길래 도서관 같은 데서 하나, 싶었지.”

“원래 방에서 하면 집중 잘 안 돼. 나처럼 밖에서 각잡고 공부해야 효율이 더 잘 나오는 사람도 있는 법이야.”

“그러냐? 난 잘 모르겠네. 책 같은 거랑은 평생 담쌓고 지낸지라.”

가브리엘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아무튼 열심히 해라. 빡세게 공부해서 나중에 나 과제 좀 도와주고. 여기 교수들 하나같이 뭐라고 하는지 잘 모르겠더라.”

“싫어, 임마. 네가 선택한 에픽 클래스잖아. 악으로 깡으로 버텨.”

“…맞는 말이긴 한데 묘하게 기분이 더럽네. 그러지 말고 좀 도와줘 새꺄. 친구 좋다는 게 뭐냐?”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야지, 물고기만 잡아다 주면 뭔 소용이겠어. 계속 남의 도움 받으면서 공부할 수는 없잖냐. 게다가 딱 봐도 그냥 홀랑 베껴다 쓸 생각인 거 같던데, 그거 잘못 걸리면 나까지 싸잡아서 0점 먹일걸? 유감이지만 난 살아야겠다, 가브리엘.”

“……스벌, 너무하네. 이기적인 놈.”

똥 씹은 표정이 된 가브리엘을 보며 낄낄거리던 내가, 재차 기숙사 문밖을 향해 걸어가려던 때.

“아­ 맞어. 에지오. 잠만.”

“응?”

가브리엘이 날 불러 세웠다.

“지금은 모르겠는데, 아까 누가 너 찾던데?”

“……날? 누가?”

날 찾을 만한 사람이 누구지.

스텔라인가?

심드렁한 얼굴의 가브리엘이 말했다.

“그 있잖어, 네 동창. 분홍 머리 걔 말이야. 포근하게 생긴 예쁜 애.”

“……루비아?”

가브리엘이 손가락을 딱­ 튕겼다.

“어어, 걔. 저녁 먹기 전쯤에 나보고 에지오 지금 어딨냐면서 묻더니, 모르겠다고 하니까 알았다며 그냥 돌아가더라? 뭐 대신 전달해 줄 거 있나 싶었더니 그것도 아닌가 봐.”

“……”

문앞에 멈춰 서서 잠시 고민했다.

루비아가 날 왜 찾았을까.

본인이 아니고서야 알 수 없을 노릇이다.

오늘 마법 전공 시간의 일이 떠올랐으나, 글쎄. 그때 루비아의 행동거지는 좀 이상하긴 했지만 그것과 관련 있진 않을 듯했다. 아마 나한테 따로 무슨 할 말이 있어서 날 찾았겠지.

그런 생각을 하던 때.

가브리엘이 불쑥 물어왔다.

“근데, 나중에 또 물어보면 걔한테 뭐라고 해줘야 되냐? 너 어디서 공부한다고 했지? 도서관이었나?”

“……”

정확히 어디라곤 말하지 않았다.

자리한 곳에서 한 걸음 앞으로 내딛자, 내 움직임을 감지한 기숙사 문이 양옆으로 스르륵 열린다.

“그냥 아까처럼 모르겠다고 해.”

“…어?”

등을 돌린 채라 가브리엘의 표정은 보이지 않아도, 대충 얼빠진 얼굴이지 않을까 싶었다.

—위이이잉.

열린 문밖으로 빠르게 걸어 나갔다.

“후우.”

서늘한 밤공기가 내 폐부를 깊숙이 찌르고, 맞은편 저 멀리에 위치한 2동 기숙사가 보였다.

스텔라의 방에 찾아간단 사실을 말하지 않은 건 가브리엘이 내게 쓸데없는 호기심을 보일까봐 그랬던 거다. 루비아랑은 아무 관계 없었다.

……내 대답을 가브리엘이 어떻게 받아들일진 모르겠으나, 평소부터 분명 나와 루비아, 그리고 뮤 사이의 관계를 의심하고 있던 모양이니 그 정도가 더욱 깊어지긴 하겠지.

괜찮다.

그것 또한 아무 상관 없었다.

……지금의 우리는 정말, 아무 관계도 아니었으니까.

#8

에픽 클래스 기숙사는 통금이 없다.

기본적으로 억압받지 않는 자유로운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서도 있겠지만, 이제 성년에 가까운 나이가 되었으니 본인의 행동에 알아서 책임을 지라는 의미가 더 강했다.

에픽 클래스뿐만 아니라 프론티어 내부에 위치한 대부분의 기숙사가 이런 형태를 추구하고 있다.

그러니 기숙사 규칙 또한 널널한 편이고, 특히나 에픽 클래스의 경우 학생들 간의 건전한 연애를 장려하기까지 하니, 이런 생활에 익숙해진 에픽 클래스 학생들은 자기네들 기숙사에 이성이 출입하는 모습을 썩 자연스럽게 여긴다는 듯하다.

물론 그건 선배들 얘기였고.

신입생인 난 아니었다.

기숙사에 통금 같은 게 없을 뿐이지, 사감 비스무리한 존재는 있다.

기숙사 내에서 긴급하거나 위급 상황 같은 게 발생했을 때를 대비한 인력이랄까. 그뿐만이 아니더라도 잡다한 업무를 처리하거나 한다.

은밀하고 재빠르게 2동 기숙사 문 앞에 도착한 나는, 유리창 너머로 로비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곤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섰다.

—스윽.

데스크에 있던 사람이 문득 날 바라본다. 방금 언급했던 기숙사 사감 비스무리한 존재였다. 검은 머리를 위로 묶어 틀어 올린 젊은 여성이었다.

차마 눈을 마주치진 못하고 침만 삼켰다.

스텔라가 미리 동의를 구해놨다고 하던가.

사감 비스무리한 존재—— 대충 말해서 관리인은 내 얼굴을 슥 보더니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

생각보다 시크한 태도에 나름 안심했다. 계속 빤히 쳐다보고 있었으면 뭔가 좀 그럴 것 같았어……

매우 다행스럽게도 1층 로비, 그러니까 1학년 층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애당초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 들어온 거였으니까 당연했다. 제발 앞으로도 안 보였으면 좋겠다.

의외로 여자 기숙사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남자 기숙사와 별다를 게 없었다. 1동이랑 같은 양식과 구조로 지어진 까닭일까. 그래도 여학생들이 머물러 있던 곳이라 그런지 남자 기숙사 로비와는 사뭇 다른 향기가 감돌고 있는 듯했다.

뚜벅, 뚜벅……

스텔라의 방은 오른쪽 복도 중간쯤에 있다.

조용한 복도 위를 거닐며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었다. 차라리 당당하게 가슴을 내밀고자 했는데 막상 들어와 보니 자연스레 위축이 되어버린다. 뭐랄지, 역시 좀, 긴장되지 않나 싶다.

……스텔라는 나와 정말 무슨 얘기를 하고 싶어서 자기 방에까지 날 부른 걸까.

수줍음 많고 낯 많이 가리는 성격이면 이런 대담한 제안은 시도조차 못 했을 텐데, 대체 어느 중요한 무엇이 어마무시했을 터인 부끄러움을 꽉 짓누르고 그 위에 올라서버린 걸까.

머리를 가볍게 털었다. 잡념을 지우고 오직 하나의 목표를 떠올린다.

나는 지금 공부하러 온 거다. 여기서 집중하지 못하면 내 성적은 그대로 나가리가 된다. 번호도 가장 끝 번호인 15번인 주제에 성적도 나락으로 처박히면 상당히 보기 좋은 꼴이 될 거다……

그렇게 복도를 얼마나 걸었을까.

‘……여기쯤인가?’

103호라 적힌 문 앞에 똑바로 멈춰 섰다. 알려준 숫자는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으니 틀림없었다.

이 안에 스텔라가 있겠지.

나는 손가락을 들어 가볍게 노크했다.

—똑, 똑.

“스텔——”

그 순간.

—위이이잉.

“……?”

아주 가까운 곳에서.

로비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타박, 타박.

— 봐봐, 이런 거야. 마법이랑은 다르다구.

— 정말이네… 회로를 아예 안 쓰는구나?

— 응. 신기하지? 나도 신기해. 근데 초능력 쓸 때는 마법이랑 동시에 못 쓰나봐. 그래서 일단 초능력 훈련에만 집중하려구.

익숙한 목소리 둘.

‘……설마?’

내 등줄기에 소름이 우수수 돋았다.

섬찟한 불안감으로 동공이 사납게 흔들리기 시작하고, 나는 다급한 마음에 재차 손을 들어 스텔라의 방문을 빠르게 노크했다.

똑, 똑.

…반응이 없다. 제기랄.

— 루비아 너는 벌써 5위계라면서? 대단하다­. 난 솔직히 마법 너무 지루한 거 같아… 술식 계산이니 뭐니 머리도 아프구……

— 응응, 그 마음 이해해… 나도 복잡한 술식 보면 괜히 한숨만 푹푹 나오구 그러거든.

틀림없다.

……루비아와 유리였다.

너희가 왜 거기서 나와?

방금 로비 문을 열고 들어왔으니, 이제 조금만 앞으로 걸어가서 고개를 꺾으면 꺾으면 복도 한가운데 내 모습이 보일 거다.

……좆됐다.

해명, 완벽한 해명을 할 수 있었으나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이 모습을 보인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차라리 대화 한 번 안 나눠본 애들이면 모르겠는데, 하필이면 저번 일로 살짝 어색해진 유리와 그 루비아였다.

절대 좋은 꼴은 못 볼 테지.

스텔라. 안에서 뭐 하는 거니.

제발 문 열어주렴……

나는 아예 복도 끝으로 튈 준비까지 마친 상태에서, 온 신경계가 중앙으로 모인 와중 다시 한번 노크를 반복했다.

­똑똑똑똑똑.

제발 열어달라는 필사적인 신호.

그때.

……끼이익.

마치 기적처럼 문이 스르륵 열리고.

“아, 에지오 씨——”

틈새 사이로 스텔라의 얼굴이 보인 순간.

화악­.

스텔라의 눈이 크게 떠졌다.

— 그래도 어려운 문제 하나 풀 때마다 성취감이 드는 것처럼 마법도……?

쿵.

0.5초 정도 걸렸을까.

곁눈질로 살펴본 로비의 중앙에서, 루비아와 유리의 발끝이 막 보이기 시작했을 찰나에—— 문을 빠르게 열어젖힌 뒤 뛰어들듯 그 안에 들어가, 다시 손잡이를 잡아당겨 문을 쾅 닫았다.

“……에, 저, 에, 에지오, 씨…?”

두근, 두근.

흥분한 맹수처럼 거칠게 날뛰며 폭주하던 심장이 곧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성공했나?

……안 들켰겠지?

문 닫히는 소리는 분명 들었을 텐데. 아직 밖에선 아무 말도 없는 것 같았다.

“하아……”

문에 두 손바닥을 바짝 갖다 댄 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쫄려야 했던 건지. 아니, 쫄리는 게 당연하긴 한 거 같은데. 아무튼 결과적으로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들어오는 데 성공한 듯했다.

……그리고.

위기 상황에서 벗어나 마침내 주변을 제대로 둘러볼 여유가 생겼을 때, 나는 비로소 고개를 내려 스텔라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아, 으……”

반짝이는 백은빛 눈동자. 잘 익은 복숭아처럼 불그스름하게 물든 볼. 유니폼 셔츠와 치마만 입은 채 윗단추를 두 개 정도 풀었다.

그 사이로 드러난 쇄골의 선명한 라인 위로, 스텔라가 히끅거리며 두 손을 겹쳐 모으고 있었다.

워낙 급하게 들어오다 보니.

……스텔라를 문에다 밀친 채 가둔 듯한 자세가 되어버렸다.

묘한 기류 속에서 스텔라가 고개를 살짝 들어 날 조심스레 올려다본다. 서로 코앞이라 할 수 있을 만큼 가까워진 거리를 훌쩍 벌리며, 나는 목석처럼 얼어붙은 스텔라에게서 재빨리 떨어졌다.

“미안. 밖에 사람들이 오길래 나도 모르게……”

정말 본능적인 흐름이었다.

잠깐 시간이라도 멈춘 듯 그 자리에 가만 정지해 있던 스텔라가, 벙긋거리던 입에서 겨우 자그마한 목소리를 토해냈다.

“…아, 아뇨오… 제, 제가 늦게 열어드려서…… 죄, 죄송해요. 처음 노크 소리를 못 들어가지구……”

그러더니 빨개진 볼을 양 손바닥으로 감싸곤, 신발장 끝에 멈춰 선 나를 졸래졸래 지나쳐 방 안으로 들어선다.

직후 나를 뒤돌아보며, 어설픈 손동작으로 안내하듯 말한다.

“이, 일단… 들어오실래요?”

#9

“그래도 어려운 문제 하나 풀 때마다 성취감이 드는 것처럼 마법도……?”

쿵.

“흐약­!”

“……”

로비 중앙에서 유리가 새된 비명을 질렀다.

꽤 큰 소리였다. 어디서 무거운 물건이라도 떨어진 줄 알았는데, 자세히 듣고 보니 문이 닫히는 소리였다. 그것도 엄청 세게.

“…뭐, 뭐야? 방금?”

유리와 루비아는 방금 소리가 난 곳으로 추정되는 오른쪽 복도를 돌아보았다.

“누가 문 닫고 방에 들어갔나봐.”

“저렇게 세게…? 깜짝 놀랐네, 진짜.”

루비아를 올려다보고 있던 유리는 모르겠지만, 루비아는 유리와 대화를 나누던 순간에 오른쪽 복도에서 희끗한 뭔가를 본 것 같기도 했다. 당연히 사람의 실루엣일 것이었다.

그런데 크기가 좀 컸다고 해야 하나. 우리반에 저렇게 키가 큰 여학생이 있었나. 뭘까……

자기가 본 것을 확신하지 못할 만큼 짧은 순간이었기에, 루비아도 반신반의하면서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그냥 착각한 거겠지.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유리에게 인사를 했다.

“들어가서 쉬어, 유리. 오늘 수고했어.”

“응응, 루비아도. 잘 자­.”

“응, 잘 자.”

유리의 방은 왼쪽 복도 한가운데에 있었다.

타박, 타박……

마주 손을 흔들고 헤어진 그들은 서로의 방으로 향했다. 루비아의 경우 방금 큰 소리가 울렸던 오른쪽 복도 끝쯤에 위치해 있었으므로, 그곳으로 걸어가며 잠시 어딘가에 눈길을 주었다.

[ 103 ]

에픽 클래스 1학년 여학생의 수는 적다. 애당초 정원부터가 열다섯이었다. 같은 반 친구들이 몇 호에 사는지 정도는 어렵지 않게 외울 수 있었다. 하물며, 어느 정도 친해진 친구라면 당연히.

103호는 스텔라 데 펠트라인의 방이었다.

“……역시, 좀 그렇지?”

아무도 없는 복도에서 루비아가 중얼거렸다. 애매한 웃음까지 지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럴 리가 없지.

설마. 말도 안 돼. 아니, 아예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역시 좀 그렇잖아. 스텔라는 낯 많이 가리는 성격인걸. 공부 가르쳐 주는 정도는 먼저 말을 꺼낼 수 있다고 생각해. 하지만 그거랑 이거랑은 차원이 다른 문제가 아닐까, 응.

그냥 자신이 잘못 본 거고, 따라서 굳이 스텔라를 찾아가 뭔가를 확인할 필요도 없는 거였다.

타박, 타박.

스스로 납득하길 완료한 루비아가, 묘한 미소와 함께 스텔라의 방이 위치한 곳을 지나쳐 자신의 방까지 걸어갔으나——

끼이익. 덜컥.

“……아니겠, 지.”

……까득.

최종적으로 키를 사용해 문의 손잡이를 열고 안에 들어설 즈음엔, 자기도 모르게 침잠한 눈빛으로 손톱을 깨물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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