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 우연한 인연 (5)
* * *
#10
“처, 청소한 지 얼마 안 돼서 지저분할 수도 있어요……”
쭈뼛거리며 들어선 스텔라의 방은 깔끔했다.
“먼지 하나 안 보이게 생겼구만 뭘.”
말은 저렇게 해도 급하게 치운 티가 전혀 나지 않는다. 아마 평소에도 이렇게 지내고 다녔을 거다. 애초에 입학한 지 이제야 일주일 차인데 방이 금세 더러워지고 뭐고 할 시간이 어디 있겠는가.
긴장된 마음을 절로 느슨하게 풀어주는 은은한 향기가 방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있었다. 스텔라에게서 풍기는 향긋한 내음과 꼭 닮은 향기였다. 과연 기존 인테리어를 제외하면 삭막하기 짝이 없는 내 방의 모습과 참으로 비교되는 풍경이었다.
“가, 가방은 여기 두세요.”
“…아, 응. 고마워.”
스텔라의 말을 따라 가방을 바닥에 놓은 뒤, 그 안에서 노트와 필기구를 꺼내어 손에 들었다.
1인용 기숙사였던 까닭에 탁상 앞에 배치된 의자는 하나뿐이었다.
거기서 공부할 건 아니었던 모양인지, 넓은 침대 바로 앞에 적당한 사이즈의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이미 준비를 마친 듯 테이블 위에 펼쳐진 노트. 스텔라가 먼저 침대 끄트머리에 다소곳이 앉아 나를 돌아봤다.
“여, 여기 앉으세요.”
“……어… 그래도 돼?”
내 물음에 스텔라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네? 네… 혹시 불편하신가요?”
“아니, 나 말고 스텔라 네가 불편할까봐.”
“그, 그럴 리가요. 불편했으면 처음부터 에지오 씨를 부르지도 못했을 거예요.”
수줍음은 타도 결국 이러나저러나 한 침대에서의 동석 아닌가. 그걸 아무렇지 않게 허락하는 모습에 괜히 나만 멋쩍어졌다.
……아니. 뭔가 보면 볼수록 신기한 애다.
나 솔직히 스텔라의 입장에선 처음 보는 외간 남성이나 다름없잖는가.
그리고 아무리 신분의 제약이 덜한 프론티어라지만, 스텔라의 신분이 신분인 만큼 이런 세세한 구석에 있어선 민감한 문제가 아닐 수가 없을 텐데.
나에겐 일말의 흑심조차 없다곤 하나, 만약 내가 아닌 다른 낯선 사람도 이렇게 쉬이 들인다면 언젠가 큰 문제가 생길 법도 하다.
이걸 주의를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뭐, 결국 나한테 뭔가 다른 볼일이 있어서 부른 것이기도 했으니, 그 이상 오지랖을 부릴 필요는 없다고 여겨 순순히 스텔라의 옆에 착석했다.
“실례할게.”
“네, 네에……”
침대가 아주 살짝 아래로 내려간다. 그러자 내 옆 가까이에 있는 스텔라의 몸이 순간적으로 움찔하는 것을 느꼈다.
…어깨가 바짝 굳어 있는 게 선명히 느껴질 정도인데. 이거 괜찮은 거 맞나.
어쨌거나 공부에 집중하다 보면 금세 적응되겠지. 여기선 나부터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편이 더 이로울 거다.
문 앞에서의 일 탓인지 더욱 오래 가는 듯한 침묵.
서로의 숨소리가 가장 크게 들림은 물론이고, 조금만 더 집중하면 터질 듯한 스텔라의 심장 소리마저 들리는 것 같았으나, 분위기를 환기할 겸 손가락을 들어 테이블 위를 톡톡 두드린 내가 입을 열었다.
“그럼 일단…… 시작할까?”
“아, 네, 네에.”
입술을 앙 다물고 있던 스텔라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까지 무슨 상념에 잠겨 있던 걸까. 달리 알 길은 없었다.
“큼, 흐으음.”
과연 설명이나 제대로 해줄 수 있을지 살짝 걱정했던 내 생각이 무척 우습도록, 잠시 머리카락을 정돈한 스텔라가 짧은 헛기침과 함께 목소리를 가다듬는 듯했다.
그러더니 노트 위에 정갈히 그려진 그림과, 본인의 글씨체로 보이는 동글동글한 글자들을 가리키며 한층 달라진 눈빛으로 날 올려다본다.
“…에지오 씨가 놓쳤던 수업 내용은, 아마 이번 주차뿐만 아니라 다음 주차 과제랑도 연관성이 클 거예요. 새로 제시되는 이론의 베이스가 되는 부분이라…… 집중해서 잘 들으셔야 해요.”
그렇게, 스텔라 교수님이 집도하는.
야밤의 건전한 일대일 과외가 시작되었다.
#11
어느덧 고요해진 방 안.
사뭇 진지해진 스텔라가 조곤히 설명을 이어간다.
“——마법에도 무수한 분야와 계열이 존재한다는 건 알고 계시죠? 화염(火), 빙결(), 바람(風) 같은 자연 속성 계열 말고도 술식을 통해 구현된 마법이 어떠한 성질을 띠고 있냐에 따라 형태 계열이 나뉘어요. 예를 들어 공격형, 지속형, 방어형 등…… 술식의 연결성과 내구력 그리고 방향성 같은 다양한 요소에 입각하여 마법의 최종적인 형태가 결정돼요.”
“또한 계열 적성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어떤 마법 체계를 습득함에 있어 개개인마다 큰 차이가 생겨요.”
“가장 적성이 나타나기 힘들고 인위적으로 습득하기마저 힘든 속성 계열은 대표적으로 공간 계열이에요.”
“공간계 마법은 그 수요에 비해 공급이 매우 적은 계열이라고 알려져 있어요.”
“지금도 대륙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게이트들은 대부분이 공간 계열 대마법사 분들의 저력으로 만들어진 위대한 작품이죠.”
“뿐만 아니라 아공간 아티팩트 등 값비싸고 한정적인 물건들에 공간계 마법이 주로 사용되기 때문에, 유망하고 적성 있는 마법사가 나타났다 싶으면 주변에서 모셔가려고 안달이에요.”
“…하지만, 웬만한 아카데미나 교육 시설에서는 공간계 마법에 대해 잘 가르쳐주지 않아요. 멋 모르고 건드렸다간 큰일이 날 수도 있거든요.”
“공간계 마법은 세상의 근원 그 자체에 간섭하는 힘이나 다름이 없으니까요. 아카샤의 별이 그렇게나 공을 들여 연구하고 있는 분야임에도 아직 완전히 정복하지 못한 이유가 거기에 있죠.”
“…그러고 보니 루비아가 공간계 마법을 다룰 줄 안다고 들었던 것 같아요. 아, 에지오 씨는 이미 알고 계셨죠……?”
스텔라가 말하다 말고 날 힐긋 바라본다.
나는 떨떠름히 대답했다.
“그야, 그렇지. 친구… 니까.”
“그렇군요... 게다가 5위계라고 하던가요? 조금 있으면 6위계도 멀지 않아 보이던데…… 대단한 거 같아요. 루비아는.”
그러게 말이다.
나만 해도 이제야 고작 3위계 중간에 머물러 있는 수준이다. 내 옆의 스텔라는 아마 나보다 한 단계 높은 4위계였을 거다.
마법 위계가 한 단계씩 상승할수록 랭크업 난이도가 거의 곱절로 불어난다는 걸 생각하면, 정말이지 상식 밖의 존재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니 루비아는 사실상 에픽 클래스 1학년 내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올라서 있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새삼 경이로운 느낌이다.
별안간 나는 툭 던지듯 말했다.
“근데 있잖아, 스텔라.”
“네, 네?”
“왜 나만 에지오 씨라고 불러?”
“앗……”
스텔라가 입을 다물었다.
“편하게 해, 편하게. 우리 동급생이잖아.”
“네, 네에… 그럼…… 에, 에지오…?”
그렇게 말하고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가, 다시 설명에 들어서자 얼굴빛이 싹 바뀌는 모습이 꽤나 신기했다.
.
.
.
“…정말 극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인간은 체내에 마력 회로를 가지고 있어요. 그러나 마력 회로를 가진 인간 중에서도 제대로 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아요. 선천적으로 생산 및 흡수 가능한 마력랑과 회로의 강도 등이 전부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이에요. 말하자면 물을 끌어올릴 수 있는 우물은 이미 준비되어 있는데, 정작 우물 안에 물은 들어차 있지 않은 셈이죠.”
한마디로 중등부 시절의 내 얘기였다.
“또한 마력량이 충분하더라도 체내에 흐르는 마력을 회로가 감당할 수 없다면 과열되어 시전이 강제로 중단되거나, 거기서 더 무리한다면 폭주하고 역류하여 결국 회로가 망가져버리고 말아요.”
그거 참 무서운 일이었다.
“더군다나 회로를 보유한 인체가 연약하다면 회로가 망가짐과 동시에 아주 끔찍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죠. 그래서 요즘 마법사들은 유사시에 대비하여 꾸준한 운동을 한다네요. ……제가 보기에 에지오 씨… 아니, 에지오는 그렇게까지 걱정하진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잠깐만, 스텔라.”
“……네, 네?”
“이름은 편하게 부르는데 왜 말투는 계속 존댓말이야? 이거 뭔가 듣다 보니 어색한데.”
“그, 그런가요…?”
“편하게 반말해, 반말. 우리 다 동급생이라니까? 그렇게 자꾸 격식 차리면 거리감만 더 늘어난다고.”
우물쭈물하던 스텔라는 알겠다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뒤로 존대와 반말을 섞어가며 괴이한 설명을 이어간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
.
.
“……그렇게 사람마다 다른 계열 적성을 정확히 찾아내고, 그 효율을 극대화 시키기 위한 전문 커리큘럼인 거예… 거야. 뿐만 아니라 기존의 제반 이론들에 익숙해져 있을 저희… 우, 우리의 수준에 맞춰서 앞으로 차츰 심화 이론들을 가르쳐 주실 예정이라고 하셨는데…… 왜, 왜 그렇게 보세, 봐?”
“응? 아니, 계속해. 집중해서 그런 거니까.”
장장 한 시간 반에 이르는 시간 동안.
우리는 아주 건전히 공부만 했다.
아주 바람직한 일이었다.
스텔라가 말했던 것처럼 보기 쉽게 일부 도식화된 노트의 부분부분을 손가락으로 콕 찝어가며, 어떨 때는 유연하게 제스처를 섞어 설명해주기도 하고, 카페 같은 공공장소에선 하기 힘든 마법 시연까지 직접 보여주면서 내게 지난 수업 내용을 공들여 가르쳐 주었다.
……솔직히 놀랐다.
매우 잘 가르쳐서.
워낙 조곤하고 듣기 좋은 음색이라 그런지 귀에도 쏙쏙 잘 들어왔고, 교수가 설명해주지 않은 부분에 대해선 자신의 해석을 덧붙여 추가적인 설명을 보충했다.
나 역시 그에 호응하며 집중도를 최대한 높여서, 스텔라가 알려주는 내용을 노트에 받아적고 그대로 머리에 팍팍 쑤셔넣었다.
중간중간 내가 이해하고 있는 게 맞는지 확인차 몇 번 질문을 던졌었는데, 스텔라가 왠지 놀라워하며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서, 설명은 이걸로 전부 끝… 이야.”
노트 속에서 빠져나오자 금세 수줍어지는 스텔라. 게다가 나에게 반말을 하기로 한 것이 영 익숙지 않은 듯 말끝을 계속 흐린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말은 편히 해야지. 5년 동안 나를 비롯한 같은 반 친구들에게 존댓말만 하고 살 게 아니라면 지금부터 연습하는 편이 좋을 터다.
스텔라는 내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냐, 뭔가 따로 궁금한 점이 있냐는 질문을 구태여 해오지 않았다.
“에지오는… 되게 똑똑하구나.”
“응?”
“한 번 말하면 전부 알아듣고, 가끔 던졌던 질문이 내가 생각도 못해본 거였어서…… 좀 놀랐어.”
그리 말하며 스텔라는 머리칼 끝을 빙빙 꼬았다.
갑작스러운 칭찬에 무안해지기도 잠시.
“아니, 그 반대지. 이해하기 쉽게 가르쳐주는 네가 대단한 거야. 웬만한 교수보다 설명 잘 하는 것 같던데? 그냥 네가 교수해도 되겠다, 스텔라.”
“그, 그건 너무 간 칭찬 아닐까……?”
“응? 전혀? 완전 진심인데? 너한테 수업 듣길 잘했어. 덕분에 과제도 무리 없이 수행할 수 있을 것 같아. 진짜 고마워.”
“아, 으……”
단언컨대 한 치의 거짓도 없다는 듯 눈을 깜빡이며 스텔라를 마주보자, 내 시선을 슬슬 회피하던 스텔라가 미약한 미소를 지었다. 부드럽게 휘어진 눈꼬리가 마치 반짝이는 듯했다.
“나, 나야말로 잘 들어줘서 고마워… 여, 여기까지 직접 찾아도 와줬고……”
그런 말을 하며 처음 여기 들어왔을 때의 일이 생각났는지, 잠시 입을 다물곤 귓볼을 발갛게 물들였던 스텔라가 연이어 말했다.
“에지오, 혹시…… 내가 했던 말 기억해?”
스텔라 교수님의 수업은 전부 끝났다.
이제는 다음 차례로 넘어가야 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인 내가 답했다.
“나한테 따로 할 얘기가 있다는 거? …아, 보여주고 싶은 것도 있다고 했었나?”
“……으, 응.”
스텔라가 수줍게 긍정했다.
날 굳이 자신의 방까지 부른 이유. 물론 마땅한 장소가 없어서 그런 것도 있었겠지만, 정작 스텔라는 개인 과외 말고도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여기로 날 부른 듯했다.
“다른 데서 얘기하기엔… 좀 그렇구… 누가 들으면 조금… 많이 부끄럽기도 하고 그런 얘기라……”
노트는 이미 덮였다.
우리 둘은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서로 가까이 붙어 있는 채였고, 불을 끄면 금세 어둠에 휩싸일 법한 짙은 밤그늘이 창틀 밖으로 만연했다. 시간도 늦은 밤 10시를 향해 걸어가는 참이었다.
스텔라는 입술을 달싹이며 고개를 푹 숙인다. 내 옆에서 허벅지 위에 다소곳이 올려놓은 손을 가만 두질 못하고 있었다.
……뭐지.
분위기가 왠지 묘해졌다.
하나의 가정이 떠오른다. 몇 년 전에 이미 쓰레기통에 갖다 버렸던 생각이지만, 아주 얕게나마 머리를 들고 슬며시 일어난다.
입학식 이후로 꾸준히 날 볼 때마다 얼굴을 붉히던 스텔라. 남학생을 피한다기엔, 가브리엘의 말은 철저히 무시하는 것 같으면서도 꼭 내게만 말을 걸던 모습. 같은 강의를 듣기 위해 강의실에 들어설 때마다 반가워하며 작게 손을 흔들어주던 이유……
더군다나 중요한 할 말이 있다며 날 자신의 방에 직접 초대한 일까지. 이게 아마 가장 결정적인 부분이 아닐까 싶은데. 애당초 그런 쪽으로 생각이 갈 수밖에 없는 거 아닌가. 하지만 이게 또 긍정적인 흐름으로 가기엔 내 의식 상태가 문제였다.
스텔라가 누구냐. 지체 높은 제국의 공녀님이시다. 얼굴이며 스펙이며 성격이며, 어디 하나 빠질 데 없는 완벽한 사람이다.
……그래.
최종적으로 이런 수준 높은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내게 깊은 이성적 호감을 가질 리가 없다—— 라는 정직한 사상이 아직도 내 뇌리에 틀어박혀 있던 것이었다.
그럼에도 뭔가 지울 수 없는 불안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내 옆의 스텔라 역시 고개를 숙인 채 말을 하지 않으니 정적이 감돌았고, 그것을 불시에 깨뜨린 건 잠시 뒤의 스텔라였다.
스윽.
날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하는 듯 가슴 위에 차분히 손을 얹는다.
후우 뜨겁고 얕은 한숨이 퍼져 나온다.
……곧이어, 마침내.
“……존대가 더 익숙해질진 나도 몰랐어.”
고개를 든 스텔라의 눈동자는 어딘가 결연한 의지로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에지오, 난 너를——”
똑, 똑.
조용한 노크 소리가 우리 둘 사이에 내리꽂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