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 우연한 인연 (6)
* * *
#12
나는 지금 마치 소설의 한 장면 속에 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니까, 등장인물이 뭔가 중요한 말을 하려는 순간에 타이밍 좋게 외부의 압력이 들이닥치는 그런 거.
이건 뭐 똥 싸다 끊긴…… 스텔라랑 같이 있는 상황엔 비유가 좀 그런가. 아무튼 영 찝찝한 전개였다.
딱히 큰 소리도 아니었는데 우리 둘의 움직임이 한순간에 뚝 멎었다.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리는 스텔라의 동공.
똑, 똑.
다시 한번 노크 소리가 울린다.
결국 내가 먼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확인하고 올래?”
“아, 응…”
느닷없는 적막에 휘감긴 가운데, 살짝 놀란 듯 보였던 스텔라가 옅은 딸꾹질을 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늘씬한 다리가 대리석 바닥 위를 거닐었다. 그러더니 문득 날 돌아본다. 안에 내가 있는 걸 들키기라도 하면 어쩌지, 하는 눈빛이었다.
스텔라의 방 문을 두드릴 만한 인물이 누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지금까지 스텔라의 인맥을 보았을 때 특정 가능한 사람이 몇 떠오르긴 한다.
이거 큰일…… 인가?
일단 되는 대로 스텔라를 향해 ‘숨어 있을게’ 라는 입모양을 취한 뒤, 슬그머니 일어나 구석진 곳으로 조심스레 향했다.
벽 뒤에 빈민촌 거지처럼 쪼그려 앉았다. 이러면 혹시나 문이 활짝 열리더라도 밖에서 내 모습이 보이지는 않을 터.
……이게 대체 뭔 상황이야.
당사자들은 잔뜩 긴장한 채인데, 객관적으로 보면 참 웃기고 희한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야밤에 같은 반 이성 친구 기숙사에 들어가 아주 건전히 공부를 하다가 그 꼴을 들키게 생겼다.
사정을 설명할 수는 있었지만 그걸 과연 자연스럽게 납득시킬 수 있을지가 최대의 관건이었다.
어차피 무턱대고 안으로 들어오려 하진 않겠지.
그냥 볼일이 있었던 거면 나중에 얘기해도 되는 거고, 간단한 용무라면 문 앞에서 대화를 나눠도 될 일이다.
똑, 똑, 똑.
이번엔 세 번.
……끼이익.
스텔라가 결심한 모양인지 문을 천천히 여는 소리가 들렸다.
— 누, 누구세요……?
나는 입을 잠그고 조용히 침묵했다.
잠시 뒤.
멀리서 앙칼진 음성이 의문을 표한다.
— 어라, 자는 거 아니었어? 문 안 열어주길래 그냥 돌아가려고 했는데.
익숙한 목소리였다.
불과 한 시간 반 전에도 들었던 목소리.
‘……유리?’
유리 폰 아르티나. 금발 꼬맹이. 지금 그냥 귀여운 여동생쯤 되는 친구 중 한 명. 본인은 자길 애처럼 보는 걸 싫어하지만, 하는 행동 하나하나 볼 때면 그저 흐뭇한 미소가 절로 나온다.
여하튼 이 늦은 밤에 무슨 용건일까.
— 아, 아녜요. 공부에 집중해서 소리를 못 들었나 봐요. 무슨 일이세요?
— 앗, 공부하고 있었다고? 괜히 방해한 거 아냐…?
유리가 당황한 기색이 여기까지 느껴진다.
그나저나 스텔라는 나한테 반말하기로 했으면서, 아직 자기가 먼저 유리한테 말을 놓진 않았다.
하긴 유리 입장에서도 스텔라가 갑자기 존댓말을 안 쓰기 시작하면 살짝 이상함을 느끼겠지. 둘이서 어련히 잘 할 거라고 믿는다.
— 바, 방금 다 끝났거든요. 괜찮아요.
— ……그래? 그럼 다행이구.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재차 들려오는 음성.
— 별건 아니구, 우리 간식 사왔는데 스텔라 너도 나와서 같이 먹을까 싶었지.
……뭐야. 그런 거였나.
이른바 한밤중의 밀회라는 것이었다.
— 간식, 이요……?
— 응. 괜찮으면 나와서 같이 먹자. 밖에 루비아도 있어. 사실 오늘은 그냥 자려구 했는데, 루비아가 너랑도 같이 얘기하면서 놀고 싶대서. 아, 공부하느라 많이 피곤하면 쉬어도 돼.
— 아직 괜찮긴 한데……
스텔라는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지금 벽 뒤에 쪼그려 앉아 숨어 있는 내 존재를 의식한 까닭일 터다.
나한테 긴히 비밀스레 할 얘기가 있다고 여기까지 불러냈는데, 예상지도 못한 문제가 생겨버렸으니 썩 곤란한 상황이다.
유리와 스텔라의 대화를 듣고 있던 나는 문득 생각했다. 나와서 간식 같이 먹자고 했지. 그럼 어디서 밀회를 나누는 걸까.
어차피 같은 성별 기숙사인 만큼 그냥 한쪽 방에 들어가 셋이서 얘기를 나눠도 될 텐데, 굳이 나와서 먹자는 건 뭘까.
내 생각엔 하나밖에 없었다.
기숙사 1층 로비.
‘……로비?’
아뿔싸, 하는 감각과 함께 내가 이마를 손바닥으로 감쌌다.
거긴 안 되는데.
너네 지금 로비에서 모이면 안 되는데.
지금 스텔라가 유리의 제안을 거절한다고 해도, 절대 무시할 수 없는 가장 큰 문제가 생겨버린다.
……이러면 내가 못 돌아가지 않나?
혹시 나 좆된 건가?
— 그래? 그럼 조금 이따 로비로 나올래? 루비아한테도 너 오겠다고 말해둘게.
— ……! 아, 아, 그, 그게. 자, 잠시만요.
— 어, 응? 왜?
스텔라가 다급하게 대답을 보류한다.
지금 내 처분을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 것 같은데, 나도 나름대로 진중히 생각하는 중이다.
……일단 여기서 스텔라가 못 가겠다고 말해도, 어차피 유리와 루비아는 로비에 남아서 오래간 이야기꽃을 피울 거다.
가겠다고 말해도 별다를 거 없는 상황이 되겠지.
대신 스텔라는 나에게 하려던 얘기를 나중으로 미루게 될 테고, 그게 언제가 될진 몰라도 이번 같은 기회를 쉽게 잡을 순 없을 거다.
‘에지오, 난 너를——’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던가. 되게 중요한 얘기 같았는데 하필 타이밍을 놓쳐버려서 이게 참 애매한 상황이 됐다.
아무튼, 당장 여길 어떻게 빠져나가야 할지 생각을 해야 하는데. 잘 떠올려 보니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던 점이 있었다.
에픽 클래스 기숙사 건물은 1동과 3동, 2동이 ∩자로 연결되어 있는 형태다.
그러니까, 1동에선 오른쪽 복도를 통해 3동을 지나쳐 2동까지 들어갈 수 있고, 반대로 2동에선 왼쪽 복도를 통해 3동을 지나쳐 1동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스텔라의 방은 오른쪽 복도에 있다.
……이런 시발.
방법이 없네?
잘 하면 들키지 않고 건너갈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위치가 문제였다.
스텔라의 방이 있는 오른쪽 복도에서 왼쪽 복도로 향하려면 필연적으로 로비를 지나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틀렸어… 난 끝장이야…
결국 현실을 겸허히 받아들여야만 하는 건가.
안 그래도 저번 일 때문에 유리랑 살짝 어색해졌는데…… 아니, 내 잘못은 어디에도 없었지만, 아무튼 스텔라랑 한 방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적잖은 의심과 경멸의 눈초리를 내게 쏘아 보내지 않을까……
정작 먼저 권한 건 스텔라였는데 말이지.
스텔라는 착하니까. 사실을 말한다고 한들 오해를 풀 때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릴 듯했다. 애당초 유리는 나 같은 거보다 같은 여성인 스텔라를 훨씬 신뢰하고 있을 테고.
더군다나 유리뿐만이 아니었다.
밖에 루비아도 있다고 했지.
‘……’
……루비아, 루비아라.
음……
별로 괜찮지 않나?
유리 때와는 사뭇 다른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게, 유리와는 거의 초면에 가깝지만 루비아랑은 이미 친구 사이지 않는가.
……물론, 예전에 비해선 많이 멀어졌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아직 내가 함부로 거짓말을 하지는 않는다는 점은 알고 있을 터다. 여기서 스텔라와 함께 내 편이 되어줄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런 생각을 하자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남은 건 유리인데, 뭐. 어떻게 잘 풀리겠지. 이러나저러나 금색 고양이처럼 앙칼지긴 해도 나쁜 녀석은 아니었으니까.
멍하니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보았다.
창문을 가린 보랏빛 커튼이 보인다.
창문.
……아.
그래.
창문이 있었지.
커튼 뒤에 가려져 미처 생각을 못 하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에픽 클래스 기숙사엔 야외 테라스가 준비되어 있는 만큼, 여기서 창문을 열고 난간을 밟은 뒤 그대로 뛰어내리면 되는 것이었다.
밖에 있는 누군가가 지나가면서 내 모습을 볼 수도 있었지만, 그거야 그때 생각하면 될 일이다.
안 들키면 가장 좋고. 일단 유리와 루비아한테 직접적으로 내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였다.
좋아. 탈출 루트는 확보했다.
심신의 안정을 되찾았다.
이제 나는 신경 쓰지 말고 나가서 애들이랑 놀아도 돼, 라는 말을 스텔라에게 해주고 싶은데 아직도 유리랑 대화 중인 듯했다.
— ……네, 네. 죄송해요. 다음에 꼭 같이 먹어요.
— 응응, 그러자. 잘 자, 스텔라.
— 네에… 유리도 조, 좋은 밤 되세요.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느라 중간 대화를 못 들었다. 일이 어떻게 흘러간 거지? 자문할 새도 없이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시끌거렸던 방 내부가 다시 적막에 잠겼다.
하아. 스텔라의 나지막한 한숨 소리가 공기 중에 미세히 번진다. 아무래도 유리의 기습에 적잖게 당황했었나 보다.
타박, 타박.
“에지오? 어디 있……”
방 안쪽까지 걸어온 스텔라는 침대 위에 보이지 않는 나를 찾으려 두리번거리다가.
“안녕.”
“……”
구석 벽면에 쭈글한 상태로 앉아 있는 내 모습을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뜸과 동시에,
“…푸흐. 왜 그러고 있어?”
재밌다는 듯 눈꼬리를 휘며 살포시 웃었다.
그 자연스러운 모습이 내가 처음 봤던 스텔라와는 정말 다른 인물인 듯해서, 나는 속으로 의외스러운 놀라움을 느끼고 말았다.
부정적인 의미는 전혀 아니었다.
왠지, 저쪽의 스텔라가 더 매력 있었다.
“들킬까봐 나름 숨는다고 숨었지.”
내가 생각해도 좀 비루한 모양새긴 하다. 구부렸던 무릎을 펴면서 허리를 동시에 뿌득 꺾었고, 스텔라를 보며 마주 웃었다.
“유리가 밖에서 놀자고 했던 거 같은데, 맞아?”
스텔라가 슬그머니 고개를 끄덕였다.
“……으, 으응. 유리인 건 어떻게 알았어?”
“워낙 목소리가 기억에 잘 남아야지. 그래도 나랑 있을 때보다 훨씬 부드러운 말투여서 못 알아볼 뻔하긴 했다.”
사람 차별 너무하네. 그래도 내 사정은 우리 반 남학생들 중에서 가장 나은 편이다.
지금의 유리는 그들을 공기 이하의 존재로 취급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나를 제외한 남학생들에게 철저히 적대적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나한텐 호의적이란 말도 아니었지만은.
“그래서 뭐, 나가기로 한 거야?”
“……”
내 물음에 스텔라가 잠시 멈칫하다가.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어, 왜? 그냥 가서 놀아도 되는데. 나 가르쳐 주느라 힘들었을 거 아냐. 애들이랑 같이 놀면서 좀 쉬지 그랬어.”
“으응, 괜찮아. 에, 에지오랑 먼저 약속한 게 있기도 했고……”
저런… 얘기는 나중에 해도 되는 건데 말야.
난 창문으로 나갈 테니 지금이라도 가서 놀라고 할까. 뭔지 모르겠는데 괜히 나 때문에 거절한 것 같아 좀 그랬다.
머쓱한 마음에 방금 했던 생각을 그대로 입에 옮기려던 찰나.
“난——”
“아, 아까 하던 얘기.”
“……?”
스텔라가 지근거리에서 날 올려다보며 말했다.
“마, 마저… 해야지.”
“……”
결국 나와 얘기할 생각으로 거절한 셈이었다.
이렇게까지 하는데 어쩔 수 없지.
두 손을 공손히 가슴 위로 모은 스텔라가 다시금 묘한 기류를 형성했다.
“……”
“……”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마른침이 삼켜진다.
스텔라는 가만히 침묵하고 있던 날 빤히 보다가 별안간 탁상 쪽으로 걸어간다.
스윽. 탁상 위에 놓여 있던 머리끈을 집어 든 스텔라가 그것을 다섯 손가락에 걸치곤 쫙 펼쳤다.
연분홍빛으로 예쁘게 물든 입술에 머리끈을 물고는, 은하수가 흐르는 듯한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차분히 머리를 묶기 시작했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스텔라의 손으로부터 머리끈이 놓였다. 과연,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정갈한 단아함을 품고 있었다.
고운 중단발이 짧은 포니테일로 묶였다.
창백하리만치 눈꽃처럼 새하얗지만 되레 반짝이는 생기가 감도는 듯한 스텔라의 피부결. 미려한 곡선을 그리며 휘어진 목선에 은빛 머리카락 몇 올이 달라붙어 있었다.
……뭐지, 갑자기?
확실히 고아함과 기품 섞인 아름다움이 눈부시도록 장난 아니긴 한데, 갑자기 머리를 묶은 이유를 예상하기가 힘들었다.
귀밑머리까지 정돈을 마친 스텔라가 천천히 내 앞으로 다가왔다.
고개를 들어 날 올려다보긴 하지만 유리만큼은 아니었다. 나는 머리 한 개 정도 아래의 위치에서 스텔라와 마주보았다.
조심스레, 그녀의 입술이 열린다.
“여기까지 불러서 미안해. …하지만, 정말 에지오 너 이외엔 아무한테도 알리고 싶지 않았어.”
무슨 말을 하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스텔라는 전부 이해한다는 듯한 기색이었다.
“그때랑은 가문도, 이름도 다르지만……”
스텔라의 가녀린 어깨를 부드럽게 스치던 중단발은 이제 보이지 않는다. 정면에서 날 똑바로 직시하는 모양새였으니, 언뜻 나와 비슷한 머리 길이를 가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슬며시, 재차 자연스러운 미소가 떠오른다.
고개조차 제대로 들지 못하던 수줍음에 가려진 어여쁜 미소.
지금까지 보았던 스텔라의 이미지에선 눈곱만큼도 찾아보기 힘들었던, 어쩌면 사뭇 장난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는 웃음.
수줍은 공녀님은 더 이상 이 자리에 없었다.
그 우아한 면모 또한 스텔라의 일부분이었음이 확실했을 테지만,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은 펠트라인 공작가의 공녀 스텔라 데 펠트라인이 아니라, 그 안에 숨겨져 있던 또 다른 자신의 일부를 여실히 내보이고 있었다.
태생적으로 완벽한 귀족이라 생각했던 스텔라가 천천히 무너져 간다.
……아니었다.
내가 완전히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스텔라가 선천적으로 낯부끄러워하는 성격이란 성급한 추정도, 전부 틀렸다.
모든 가정에 차츰 X자 표시가 그어진다.
이유 모를 소름이 전신 곳곳에 피어오른다.
스텔라가 이어 예상에도 없던 말을 내뱉는다.
“에지오, 너는 몰라도, 나는 너를———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뭐?”
그 한마디에.
나는 감히 헛된 되물음조차 내뱉지 못하고, 단단한 석상처럼 쩍쩍 굳어버린 채로, 이어지는 스텔라의 말을 그저 듣기만 했다.
“날 기억하지 못해도 괜찮아.”
충분히 그럴 만한 시간이 흘렀는걸. 라며, 고개를 느릿하게 내저었던 스텔라가 나지막이 덧붙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너를 기억하고 있으니까.”
……
그녀의 말이 맞다.
내 머릿속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내가 알고 있는 스텔라의 정보를 하나씩 빠르게 검토해 보아도, 결국 스텔라의 말과 꼭 들어맞는 명쾌한 해답은 찾을 수 없었다. 때문에 나는 상황을 머리가 따라가지 못하는 혼란 상태였다.
“네가 사고에 휘말려 의식을 잃었다고 했을 땐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당장이라도 찾아가고 싶었지만, 하필이면 그때 급한 일이 생겨서…… 미안해.”
스텔라가 고개를 꾸벅 숙인다.
잠시 뒤.
다시 머리를 든 스텔라의 얼굴에는, 방금 전의 악동 같은 미소보단 옅은 홍조를 띤 수줍은 미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젠 이러는 게 부끄러운 일이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나는 지금 스텔라 데 펠트라인이 아니라——”
“……!”
—와락.
스텔라가 갑작스럽게 팔을 벌려 나를 껴안았다.
당황스러움에 주춤거려 넘어질 뻔한 자세를 겨우 붙잡던 와중, 그녀의 조곤한 목소리가 내 귓가를 휘감는다.
“……너의 친구, 알프렌으로서 하는 행동이니까. 그러니, 걱정한 만큼 멀쩡히 돌아와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대신 전할게.”
——알프렌.
그 이름을 들은 순간.
구불구불한 뇌리를 섬광 한 줄기가 꿰뚫는다.
내 가문이 몰락하기 전, 크라닐 남작가가 그나마 귀족가란 모양새 정도는 갖추고 있던 시절.
루비아를 만나기도 전인 더 오랜 옛날에.
별이 떨어지던 산등성이 끝자락에서, 내게 작은 은하를 보여주던 한 친구의 모습이 불현듯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름을 듣기 전까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스텔라가 말하는 게 누군지 알 것도 같았다. 무려 10년도 더 전의 기억이라 여전히 가물가물하기 짝이 없지만, 알프렌이 내게 보여주었던 환상적인 풍경만은 뇌리에 각인되어 있었다.
지루한 사교회장을 몰래 빠져나온 나. 보여줄 게 있다는 알프렌을 따라 힘겹게 오른 동산 위에서 비로소 마주한 건, 끝도 없이 펼쳐진 묵빛 비단 위에 촘촘히 박힌 형형색색의 별자리.
——문득 돌아본 알프렌의 눈동자는, 분명 그때의 나와 같이 무수한 별들이 발하는 백은빛으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 스스로 자신을 알프렌이라 칭했다.
과거 나와 알프렌이라는 사람이 만났다는 사실을 알고, 나의 친구를 자처하며 이렇게 비밀을 털어놓듯 얘기할 이유가 달리 없다.
스텔라는 정말로 알프렌인 것이었다.
다만.
우연히 재회한 인연에 대한 반가움, 혹은 사무치던 그리움, 그런 감정보다는.
황당함이 먼저였다.
그도 그럴 게.
……알프렌은, 분명 남자였는데?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