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차버린 소꿉친구와 전 여친이 같은 반이라 곤란하다-55화 (55/201)

〈 55화 〉 우연한 인연 (7)

* * *

#13

“스텔라는?”

“안 먹겠대. 다이어트 중인가봐.”

……그냥 와서 같이 얘기만 해도 되는데. 1층 중앙 로비 소파에 앉은 루비아가 문득 생각했다.

“사실 아까까지 공부하고 있었대. 그럼 피곤할 만도 했지. 나중에 같이 먹자구 했어.”

“……그렇구나.”

“응.”

권유는 거절당했다. 손가락 끝에 걸린 봉투를 부스럭거리며 돌아온 유리가 루비아의 옆 공간에 폭­ 하는 소리를 내며 착석했다.

물기가 다 마르지 않은 탓에 찰랑거리던 금빛 머리칼이 소파 위로 부채처럼 흐드러졌다. 끈이 풀린 유리의 머리 길이는 꽤나 상당했던지라, 전부 말리는 데까지 한참이나 걸렸다.

루비아는 잠시 뭔가 생각하는 듯 침묵하다가.

속으로 고개를 내젓곤 유리에게 물었다.

“머리 말려줄까?”

“우응­?”

봉투에서 꺼낸 사탕 하나를 입에 물고 있던 유리가 갸웃거렸다. 무슨 말인가 하니 자기가 마법으로 말려준다는 것 같았다.

유리는 비록 마법 전공을 선택하지 않았지만, 왕궁에서 어느 정도 배운 바는 있었기에 생활 마법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루비아가 지금 유리에게 해주려는 건 간단한 열풍이나 쏘아 내는 종류의 생활 마법이 아니었다.

정말 한순간에 물기를 싹 털어낼 수 있을 정도로 머릿결에 직접 손을 대어 수분을 증발시킨다.

그렇다고 모조리 증발시켜버리면 도리어 푸석해지기 때문에, 딱 보기 좋게 찰랑거릴 정도로만 말려준다. 유리는 일전에 한번 경험해 본 적이 있어서 그 놀라운 결과를 기억하고 있었다.

대체 얼만큼 세밀한 마력 조작을 거쳐야 그런 마법까지 펼칠 수 있는 걸까. 일단 유리 자신은 죽었다 깨어나도 못할 짓이었다.

“갠차나­. 이러고 있는 거 나름 조커든.”

조금 촉촉하긴 한데 목욕 후의 여운이 남아 있는 것 같아 썩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유리의 도리질에 고개를 끄덕인 루비아가 자신도 똑같이 봉투 안에서 빵 하나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

부드러운 빵 안에서 하얀 생크림이 눅진하게 터져 나오며 루비아의 혓바닥을 달콤한 맛으로 휘감았다.

유리는 그런 루비아를 힐긋 곁눈질했다.

이 늦은 밤에 저런 열량의 빵을 먹는다라…… 한 두번 해본 솜씨가 아닌 듯했다. 일전에도 선뜻 자신과 지금 같은 시각에 티타임을 가지자고 말했던 사람이 바로 루비아였다.

그런데도 루비아는 전혀 살이 찌지 않는 것 같았다. 군살 하나 없는 매끄러운 몸의 태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신기하네……’

왕궁에서의 길들여진 습관이 있던 탓일까.

야밤의 자그마한 일탈이라고 해봤자 지금처럼 사탕 하나 먹는 게 고작이었던 유리는, 새삼 대단함을 느끼며 루비아의 윤기 흐르는 머릿결로 시선을 옮겼다.

벚꽃잎의 색으로 물든 연분홍빛 실들이 가닥가닥을 이루어 길다란 비단처럼 흘러내리고 있다.

루비아를 처음 본 유리는 분명 그녀가 어디 유명한 귀족가의 영애가 아닌가, 같은 루비아에게 실례일 법한 생각을 해버렸다.

물론 평민과 귀족 사이에 선입견적인 차이를 둘 생각은 전혀 없었으나, 굳이 따지고 본다면 그쪽이 더 어울릴 것 같단 느낌이었다.

애당초 평민이랍시고 신분의 차이를 운운하며 차별했다면 유리는 처음부터 루비아와 친구가 되지도 못했을 것이었다.

차라리 유리에겐 괜히 유세 떨며 으스대는 기센 귀족가 자식들보단 루비아의 성품과 인품이 훨씬 더 마음에 들었다.

‘엄청 예쁘기도 하고.’

사실 그게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싶지만.

늘씬하게 쭉 뻗은 새하얀 다리라든지, 이 나이대 소녀란 느낌이 물씬 드는 성숙한 외모라든지.

그러면서 가끔 얼빠진 허당 같은 귀여운 모습도 보여준다는 점이라든지.

여러모로 자신과 반대되는 이미지인 것 같아서, 유리는 루비아에게 내심 동경 같은 감정도 품고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유리의 눈동자가 슬그머니 아래로 내려갔다.

스윽.

그러더니 비슷한 위치에 자리한 루비아의 그것을 돌아본다. 사탕을 가만 물고 있던 유리의 머릿속에 또 다른 의문이 피어올랐다.

……살이 다 저기로 가는 건가?

그렇다면 지금처럼 야밤에 크림빵을 먹는단 과감한 행위를 익숙하다는 듯 벌이는 이유도, 어렵지 않게 설명이 가능하다.

매우 타당하고 합리적인 추론이었음에 따라, 유리는 루비아란 친구에 대해 또 다른 경외심을 품게 되었다……

“그런데 있잖아, 루비아.”

“……응?”

물고 있던 사탕을 입안에서 빼낸 유리.

자신의 침으로 번들거리는 호박빛 사탕의 막대기를 손에 들고선 순수히 궁금하단 얼굴로 묻는다.

“요즘 무슨 일 있었어?”

“……”

유리의 말에.

루비아는 순간적으로 멈칫하고 말았다.

하지만 아주 짧은 시간 내에 표정을 새로이 고치곤, 본래의 화사한 미소와 함께 반문한다.

“……아니? 왜?”

“그냥, 요즘 많이 피곤해 보이는 거 같구. 아까 나 찾아왔을 때도 피곤해 보였구. 저번에도 잠 많이 못 잔다고 했잖아.”

사실 지금도 딱히 변하진 않은 거 같다. 유리가 돌아본 루비아의 눈가에는 거뭇한 다크서클이 아직도 드리워진 채였다.

겉으로 보이는 분위기와 달리, 아주 자세하게 루비아의 얼굴을 들여다보면 가끔 알 수 없는 수심이 깃들어 있었다.

아까 스텔라에게 말했던 것처럼 유리는 오늘 그냥 잘 생각이었다.

하지만 로비에서 헤어졌던 루비아가 별안간 자신의 방 문을 두드렸고, 그녀의 표정에 섞인 무언가를 읽은 뒤 알겠다며 쪼르르 로비로 따라 나온 것이었다.

“고민이 있으면 말해줘. 우리 친구잖아.”

말은 그렇게 덤덤히 하면서도.

정작 새로 생긴 친구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건 거의 처음이었던지라, 유리는 부끄러운 듯 슬슬 루비아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

허를 찔린 것처럼 가만 눈을 깜빡이던 루비아는.

친구를 생각해주는 유리의 마음씨가 참 고왔던 탓에 살짝 가슴이 뭉클해지고 말았지만.

그럼에도, 루비아는 유리에게 최근 자신의 상태가 왜 이런지에 대해 말해줄 수 없었다.

정말 그럴 수 없었다.

왜냐면, 자기 자신도 왜 이러는지 모르니까.

……그래.

가장 큰 문제는 이미 해결됐다고 생각했다.

에지오가 돌아온 걸 확인했잖아. 그는 멀쩡히 살아 있었고, 그렇다면 이제 에지오를 더 이상 찾지 않아도 괜찮았을 텐데.

……왜 아직도 잠에 쉬이 들지 못하는 걸까.

어째서, 달라진 에지오를 볼 때마다 가슴이 순간적으로 답답해지고, 그와 가까이에 있으면 심장이 날뛰듯 두근거리며.

——에지오가 유리나 스텔라 같은 친구들과 함께 있는 모습을 두 눈으로 봐버리면, 왜 마음이 불편해지는 걸까.

아직 에지오와 화해하지 못한 탓이었을까.

과연 그런 걸까.

루비아는 지난 산책로에서 있던 일을 떠올렸다.

날 싫어하게 됐냐는 물음에, 싫어하지도—— 그렇다고 좋아하지도 않는다고 했던 에지오의 말.

다만, 오늘처럼 자신에게 슬며시 다가와 평범한 친구처럼 편하게 말을 건네온 에지오의 태도.

그간의 일을 보았을 때 에지오는 그렇게까지 자신을 미워하고 있지도 않았으나, 한편으로는 그 이상으로 루비아란 소꿉친구를 예전처럼 소중히 여기지도 않는 것 같았다.

그게.

그것이, 아마 결정적인 원인이었을 터다.

두 사람이 원하는 관계가 어긋나며 완전히 불일치하고 있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한쪽의 의지는 순전히 제 욕심에 가까웠다.

이젠 그럴 마음도 없는 상대에게 의미 없는 용서를 빌며 다시 예전의 관계로 돌아가길 원한다니.

……절대로, 불가능하겠지.

그러니까, 처음부터 불가능한 미래 따위 꿈꾸지도 않고, 에지오가 스텔라와 언제 어느 장소에서 같이 공부를 하든 간에, 루비아 자신은 신경 써서도 안 되었고 그럴 자격도 없는 것이었다.

뭐하다 문을 그리 크게 닫았는지. 자기가 본 것은 무엇이었는지. 신발장에 신발은 몇 개 있었는지…… 그런 것들을 유리에게 하나하나 물어보고 싶어도, 꾹 눌러담고 참아야만 했던 거다.

그러니— 루비아는 애매하게 웃는다.

“음…… 사실, 무슨 일이 없는 건 아닌데, 나도 아직 정리가 잘 안 돼서 어떻게 말해줘야 할지 모르겠다고 할까… 에헤헤…”

유리에게 들통이 날 정도면 확실히 자신의 상태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얘기였다.

그걸 눈치채고서 본인을 걱정해주는 사람한테 아무것도 아니라며 넌 알 필요 없다는 듯 말하는 것보단, 사실대로 얘기해주는 편이 더 나을 터다.

“…미안해, 유리. 나도 누군가랑 상담하고 싶지만……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거 같아.”

“……”

잠시간의 정적이 일었다.

유리가 톡, 하고 루비아의 어깨에 머리를 얹었다.

얌전히 사탕을 도로 물면서, 조용히 말했다.

“미안할 거 하나도 없는걸.”

“……”

“대신, 오늘은 그런 고민 따위 잊어버려. 지금은 우리끼리 놀려고 나온 거잖아? 그치?”

“……”

“……그래도, 날 의지해주는 것 같아서 다행이야. 친구한테 도움이 되어주고 싶었거든. 항상. …그러니까, 언제라도 부담없이 나한테 고민을 털어놔도 돼. 루비아 너보단 똑똑하지 못해서 해결책을 제시해 줄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말야. 흐흣.”

유리의 입에서 가벼운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잠시 뒤.

“……응. 꼭 그럴게. 고마워, 유리.”

네가 친구라서 다행이라고, 그런 말도 덧붙였다.

나야말로. 유리는 작은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편안한 침묵이 흐르는 와중.

……어느 순간부터, 살포시 기대어 있는 루비아의 몸이 옅게 떨리는 것 같았으나.

유리는 더 묻지 않았다.

루비아가 왼손으로 덮은 오른손의 엄지 손톱이 삐뚤빼뚤하게 뜯겨 있는 것을 보았어도, 달리 마음에 담아두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게, 옳은 일인 것 같았으니까.

#14

정신 나갈 거 같아.

“잠깐, 잠깐만. 진짜 잠깐만.”

“으응?”

인지부조화가 오고 있다.

내 품에 안겨 있었던 스텔라를 조심스레 떼어냈다. 확실히 부끄러운 짓을 했다는 자각은 있는 듯, 얼굴이 발갛게 붉어진 채였다.

아무렴 10년 전쯤에 만난 적이 있다곤 해도, 그건 서술 그대로 10년 전의 만남이었다. 이렇게 서로 자라버린 상태에서 반갑다며 껴안고 그러는 게 마냥 자연스러운 행위는 아니겠지.

“네가…… 알프렌이라고?”

내 기억 속의 알프렌이 지금 이 자리에 스텔라 데 펠트라인이라는 이름으로, 무엇보다 어엿한 숙녀이자 여성으로 나타나선 안 되는 게 아닌가—싶은 혼란스러움이 가장 거대했다.

이러면 못 알아보는 게 당연하지.

이름도, 가문도, 모습도 전혀 달랐다. 지금의 스텔라에게서 알프렌의 흔적이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지 않는가.

애초에 알프렌은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였고, 사내대장부란 말이 누구보다 걸맞았던 씩씩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얼굴은 그때도 곱상했던 것 같지만…… 하는 행동이나 말투나, 태생적 귀족 그 자체인 스텔라와 비교해 느껴지는 거리감이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 둘이 동일인물이란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으, 응. 역시…… 많이 달라졌나?”

붉게 물들인 스텔라의 어여쁜 얼굴.

한데 묶어 내린 백은발 말고, 미처 쓸어넘기지 못한 귀밑머리를 손가락으로 뭉쳐 꼬면서 그리 말하지만.

……지금 뭐라고 했냐?

뭐? 많이?

절대 그 수준이 아닌데?

당신 누구야.

정말 알프렌 맞아?

“아니, 뭔, 허, 이게, 어……”

차라리 거짓이라고 믿고 싶은 스텔라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는 가정하에, 날 굳이 자신의 방까지 불러낸 이유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비밀이라면 비밀이다. 아주 큰 비밀. 고아한 귀족 영애 그 자체인 스텔라의 숨겨진 과거라곤 상상도 못 할 일이라고나 할까.

그래, 그야 그렇겠지.

과거에 자신이 남자였다는 그 청천벽력 같은 비밀을, 대체 나 아닌 누구한테 이실직고한단 말인가!

“내가, 내가 지금 이해가 안 돼서 그런데.”

“……응.”

“일단, 알프렌이 맞다고?”

“응. 나야, 에지오. 설마 기억해 줄 줄은 몰랐어.”

나도 몰랐어.

잊고 있다가 갑자기 생각난 거거든.

“하지만, 눈동자 색이랑 머리색이 전혀 다른데?”

“……일이 있었어.”

“뭔 일?”

“그건… 나중에 알려줄게.”

뭘까. 뭔 일이 있었을까.

……혹시 그때 성전환이라도 당한 건가?

아니, 그것보단.

나는 일단 스텔라에게 확인차 물었다.

“원래 무슨 색이었는데?”

“둘 다 검은색, 이었지 않나……?”

1단계 테스트는 통과.

다음으로 넘어간다.

“……우리가 올라갔던 산의 이름은?”

“어… 그런 것까지 기억하고 있었어? 감동이야. 당연히 ‘그냥 마을 뒷산’이지. 우리가 그렇게 불렀잖아.”

함정에 걸리지도 않는군. 2단계 통과.

“그때 우리가 처음 만났던 계절이랑, 네가 나한테 처음 설명해줬던 별자리는?”

“여름. 그리고, 베가­데네브­알타이르. 「여름의 대삼각형」이야. 이것도 기억해주고 있었구나.”

“……”

마지막 3단계도 통과.

이쯤이면 확실한 거 같긴 한데.

알프렌에겐 형제자매가 없었다.

어쩌면 알프렌의 숨겨진 여동생일지도 모르는 스텔라가, 살짝 놀랍다는 기색으로 내게 말한다.

“나도 널 못 알아볼 뻔했어. 그때랑은 너무 달라졌더라. 나랑 비슷한 검은 머리색이었던 거 같은데…… 눈동자는 변하지 않았네. 거기다 이렇게 엄청 훌륭히 자라선, 날 내려다볼 정도까지 되었고. 이름이 아니었다면 눈치채지도 못했을 거야.”

스텔라가 조심히 까치발을 든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와 눈높이는 맞지 않아서, 계속 힘겹게 목을 들어 날 올려다봐야만 했다.

“잘 자랐구나, 에지오. 정말 많이 컸네.”

“……”

너도, 라는 말을 해줘야 할지 고민했다.

이게 잘 자란 건지. 옳은 방향으로 자란 게 맞는 건지. 평민이었지만 내심 알프렌이 크게 되길 바랐던 입장으로선, 제국의 공작가 가문 소속이 된 게 참으로 축하할 일이긴 한데.

그게, 하지만. 음.

“알프렌은……”

“……응?”

“알프렌은, 남자…… 였잖아?”

“……”

내 말에 스텔라가 까치발을 도로 내렸다.

그렇다. 알프렌은 남자였다.

머리도 바짝 짧았고, 나보다 키도 컸으며, 성격은 씩씩한 데다가 호쾌하기 짝이 없어서, 두 달에서 석 달 남짓한 시간 동안 알프렌과 이런저런 장난을 하며 아주 재밌게 놀았던 기억이 있다.

당연히, 같은 남자였기에 편히 대했기도 했고.

그때는 물론 여자 남자 구분 없이 놀 수 있었던 나이라곤 하지만, 엄연히, 그…같은 성별이 아니었다면 하지 않았을 행동이라든가, 어, 여러 가지로 뭔가 많았던 거 같은데.

아­. 하는 소리와 함께 스텔라가 내 눈을 피한다.

그리고.

“나 너한테 거짓말 한 적은…… 없다?”

“……어?”

스텔라의 말에 나는 잠시 굳었다.

거짓말, 거짓말이라.

나는 무심코 생각했다.

……알프렌이 나한테 자기가 남자라는 말을 한 적이 있던가?

아니, 그렇지 않다.

우린 그냥 아주 자연스럽게 놀았을 뿐이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아는 사실에 대해 물을 게 뭐가 있겠는가. 불이 뜨겁다는 걸 꼭 만져봐야 아나.

나는 당연히 알프렌을 남자로 여겼고, 그렇게 행동했으며, 알프렌은 언급했듯 사내대장부 그 자체였으므로, 우리 둘 사이는 거리낄 것 하나 없었다.

내 뇌리에 섬광이 스친다.

……설마.

……처음부터, 여자였다고?

나는 멍하니 스텔라의 얼굴을 내려다본다.

“딱히 속인 건 아닌데… 으응……”

내 시선을 피하던 스텔라는, 아니, 알프렌은.

그 언젠가 날 처음 마주했을 때처럼, 양 볼을 손바닥으로 감싸고 귓불까지 발갛게 물들였다.

“크면서, 여러 가지 알게 되니까…… 너, 널 보면 좀… 응… 옛날 생각이 갑자기 떠오르니까……”

“……”

날 마주한 스텔라가 얼굴을 붉혔던 이유.

왠지 모를 호의.

마냥 수줍다고 보기엔 은근히 대담했던 태도.

그 모든 퍼즐이 딱딱 맞춰지기 시작한다.

‘돌겠네. 진짜.’

……어쩐지. 나랑 목욕할 때마다 수건으로 아래를 가리고 오더라.

심지어 몇 번 같이 하지도 못했다.

만난 기간도 그리 길지 않았고, 무엇보다 나중엔 서로 타이밍이 잘 안 맞았거든.

그랬는데.

그냥 들킬까봐 대충 둘러댄 거였구나.

하하­.

‘……내 학교 생활에 무슨 마가 끼었나?’

몰아치는 대혼란의 폭풍 속에서, 나는 그만 정신이 아찔해지고 말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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