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화 〉 우연한 인연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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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그래서 지금은, 날 거두어주신 양부님께 감사하고 있어. 그분 덕분에 평생 누려보지 못했던 호의호식을 원 없이 가질 수 있게 되었으니까. 물론, 그럴 수 있을 때까지 정말 많은 교육을 받아야 했지만 말야.”
10년도 전의 인연. 우연한 재회. 숨겨진 진실. 그 모든 것에 대한 해답을 매듭 풀듯 서서히 알아가기 시작한 나는, 아까와 같이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스텔라의 얘기를 가만 듣고 있었다.
어느 정도 혼란이 진정되었다. 도무지 내 기억 속 알프렌과 이 스텔라 데 펠트라인 공녀님의 이미지가 매치가 안 되어서 그런지, 현실을 받아들이기까지 대략 5분도 넘게 걸렸나.
뭐야, 이렇게 보니 별로 안 걸렸다.
체감상 거의 한 시간은 지난 거 같았는데. 아찔한 정신에 현기증이 일었던 탓일까. 아직도 관자놀이가 지끈거리는 듯하다.
돌연 스텔라를 향해 내가 물었다.
“그럼, 알프렌으로 지낸 시간보다 스텔라 데 펠트라인으로 지낸 시간이 더 많은 거겠네, 지금은?”
“으응. 그렇지 않을까……?”
스텔라는 펠트라인 공작가의 양녀였다.
제국의 권위 높은 공작 가문이 순혈 아닌 수양딸을 들이다니. 무언가 뒷사정이 얽혀 있는 게 틀림없었지만, 스텔라 쪽에서 아직 말해줄 생각이 없는 듯하니 나 또한 캐묻듯 말을 꺼내진 않았다.
“출세했네, 알프렌.”
나는 픽 웃었다.
예전에는 어린아이답게 어른들이 들으면 마냥 코웃음 칠 법한 포부와 허황된 꿈을 가지고 있던 녀석이었는데, 공작가 공녀 정도면 나름 성공한 인생이 아닐까 싶다.
아닌 게 아니라 이쯤이면 확실하지. 수양딸이라 해서 가문 내에서의 대접도 그다지 박한 건 아닌 듯하고……
잠시 생긋 웃던 스텔라가 입을 연다.
“에지오 네 얘기도 루비아한테서 많이 들었어. 처음엔 이름만 같지 다른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조금 있었는데, 그때 식당에서라든지…… 너와 루비아의 얘기를 듣고 나서야 확신할 수 있었어.”
루비아. 그 이름이 여기서 나오자 내 몸이 일순간 굳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장난스레 말을 던진다.
“그럼 내 가문이 몰락한 것도 알고 있겠구나?”
“아, 어? 그, 나, 나는……”
“농담이야. 나도 신경 안 써. 한참 전의 일이기도 하고. 그냥, 그때랑은 상황이 참 다르다 싶어서.”
그러곤 쓰러지듯 상체를 뒤로 눕혔다.
푹신한 침대 위에 파묻히듯 하자, 스텔라의 향인 듯한 내음들이 더욱 짙어진 채 내 코를 찌르며 은근히 자극시켰다.
그런 나를 스텔라는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알프렌이란 정체성보단 이제 스텔라 데 펠트라인의 정체성이 더 강하겠지만, 그럼에도 스텔라가 실은 알프렌이었단 얘기를 듣자 왠지 모르게 긴장되었던 마음이 느슨해졌다.
알고 보니 여자였다, 라는 사실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음, 이건 아직 무리인가.
스텔라도 나와 과거에 있었던 일을 굳이 세세하게 언급하지 않으려 하는 걸 보면, 이게 좀, 둘만 있는 상황에선 여러모로 걸리는 부분이 꽤 많단 말이지.
이런 형태로, 각자 다른 모습이 되어서, 같은 반에 모일 줄이야. 소설로 엮어 내면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아니지 않냐 같은 개연성 지적을 응당 받을 법한 일이었다.
지금 에픽 클래스 신입생 중에 나와 안면이 있는 사람들만 해도 벌써 3명이다. 루비아, 뮤, 그리고 내 옆의 스텔라까지.
……그러고 보니, 어째 남자는 한 명도 없네.
알프렌이 있었지만 이젠 없다. 솔직히 말해서 아직도 안 믿긴다. 그렇다고 내가 어떻게 달리 확인할 방법도 없잖은가.
지금의 스텔라는 천상 귀족 영애 그 자체였으니까, 굳이 사실 검증을 위한답시고 흔적도 안 남았을 남성성을 찾으려 드는 건 미친 짓에 가까웠다. 이 정도면 그냥 믿는 게 이롭다.
아무튼 예전부터 동성 친구가 많았어야 가능성이라도 좀 있지.
초등부 시절엔 루비아와 거의 둘이서만 붙어 다녔으니, 다른 또래 친구와의 접점은 별로 없었다.
중등부는 뭐……
음, 그랬지.
새삼 내 부실한 인맥에 감탄하게 된다.
괜찮아. 부족한 인맥은 여기서 보충하면 될 일이다. 누가 뭐라 해도 여긴 대륙 제일로 전도유망한 젊은 학생들이 한데 모이는 곳이 아니었던가.
당장 우리 반 라인업만 해도 각자 가진 혈통과 가문을 보면 그저 감탄의 연속일진데.
루비아와 뮤, 나는 제외라고 쳐도 우리 셋 다 어찌 보면 제국의 미래로 간택받은 학생들이다.
일반 클래스에 해당하는 프론티어 졸업생들이 사회에서 어떤 우대를 받는지에 대해 긴밀히 생각해 보면, 에픽 클래스인 우리들은 졸업 이후 유세한 귀족 그 이상의 권위를 가지게 될지도 몰랐다.
별안간 흘렀던 정적도 잠시.
“재밌었겠다, 에지오.”
“……응? 뭐가?”
갑자기 뭔 소리를 하는가 싶었더니.
“루비아랑 너 말이야. 어렸을 때 되게 재밌을 거 같았다구. 나랑은 얼마 안 되지만, 루비아랑은 거의 9년쯤 서로 옆에 있었던 거 아냐?”
“……”
순수한 얼굴로 그리 물어오니,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가만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적으로 따지면 우리 둘은 9년 동안 같은 공간 내에 있었던 건 사실이나, 그 언젠가 루비아와 둘도 없을 친구 사이로 지냈던 시간은 6년이라고 보는 편이 더 정확했던 까닭이다.
“그랬지.”
나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왜냐면, 사실이니까.
어릴 적 나와 루비아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감히 평가하자면, 단순히 재밌었단 표현으론 한참이나 부족하지 않을까 싶다.
차라리 행복이란 말이 더 어울릴 거다.
영원처럼 계속될 거라 믿었던 시간들. 기억의 구석구석까지 살펴봐도 웃음이 없었던 날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은 본디 좋은 일보단 나쁜 일을 더 선명히 기억한다고 하는데, 어째선지 초등부 시절의 내겐 좋은 일만 가득이었다. 그러니까 행복했던 시간들을 떠올리는 내 표정도 밝아야만 하겠지.
“……즐겁지 않았어?”
어쩐지 의뭉스러운 듯한 물음.
나는 누운 채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즐거웠어.”
……진심으로.
등교할 때도, 하교할 때도. 언제나 둘이서.
누가 늦잠이라도 자는가 싶으면, 어느 한쪽의 집으로 자연스럽게 들어가 퍼질러 자는 소꿉친구를 흔들어 깨우는 일상.
깊은 밤, 오두막 아래층에서 서로의 부모님이 얘기를 나누고 있으면, 우리는 위층에 올라가 그날 잡아온 개구리 같은 걸 몰래 풀어놓곤 재밌다며 구경하기도 했다.
밖에서 같이 놀다 누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다치기라도 하면, 그 작은 몸으로 낑낑거리며 업어들어, 집까지 겨우 데려가고.
등 뒤에서 울음을 그치지 않는 서로를 다독이나, 결국 어린아이답게 울음이 전염되어 저녁놀을 따라 걷던 와중 둘 다 엉엉 울면서 집으로 돌아갔던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지.
되돌아온 여름철엔 두 가족끼리 3박 4일 여행을 간다든가. 짠내 나는 바다에서 물놀이를 한다든가. 축축한 모래사장 한복판에 쫄딱 젖은 채로 누가 모래성을 더 크게 만드는지 경쟁을 한다든가.
으슬으슬한 몸을 덥히기 위해 모닥불 옆에 둘러앉아, 그렇게 한참 얘기를 하다가 피곤한 나머지 스르르 잠에 들어, 눈을 감은 채 머리를 맞대고 새근새근한 숨소리만 내었다.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본 부모님들은, 어린 시절의 나와 루비아를 천막 안으로 데려가 조심스레 눕혔더니, 서로를 베개 삼아 제멋대로인 자세로 세상 모르도록 곤히 꿈나라에 빠져들었더랬다……
노을과 햇살의 색으로 물든 낙엽이 풀풀 떨어지던 여느 가을날에.
점점 추워지는 날씨에 감기에 걸리고 만 나를 찾아와, 우연찮게 집을 비운 부모님 대신 루비아가 아카데미에서 배운 기초 마법까지 써가며 열심히 간호해주기도 했다. 결국 자기도 옮아버렸지만.
유독 눈발이 늦게 찾아왔던 어느 겨울날, 첫눈이 내리는 풍경을 보자마자 누구 하나 먼저랄 것 없이 냅다 집 밖으로 뛰쳐나가, 두 팔을 벌리고 까르르 웃으며 점차 새하얗게 변해가는 들판 위에서 지치지도 않고 종일 뛰놀았다.
……그랬다.
그 시절, 나와 루비아는.
무채색의 내일을 우리의 색으로 물들였다.
아직 어느 무엇도 정해지지 않은 미래의 나날에, 반드시 서로가 서로의 곁에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날들이었다.
결과적으로 그 믿음은 현실이 된 셈이다.
지금도, 루비아는 저 문 밖에 있을 테니까.
그러니—— 어린 시절의 우리가 약속했던 평생의 믿음이란 근본적으로 아직 깨지지 않은 것이었다.
비록 예전 같은 순수함은 되찾지 못하더라도, 어긋나기 시작했던 우리의 관계 한가운데서, 완전히 틀어지지 않을 여지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나의 가장 소중했던 친구, 루비아.
잃어버린 나의 첫사랑.
그녀의 커다란 존재를 내 인생에서 영원히 빼놓는다는 건,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즐거웠구나.”
스텔라의 조용한 목소리가 들린다.
스텔라, 알프렌과도 내 안에 적잖은 추억이 쌓였을 거다. 석 달뿐인 기억이라지만 몇몇은 선명히 떠오르는 걸 보면, 분명히 알프렌이란 친구는 나에게 있어서도 정말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렇지만, 6년이다.
이제는 9년.
일수로 따지면 3천 번의 낮밤을 가뿐히 넘기는.
나와 루비아 사이의 기억 아닌 추억들.
이젠 부정할 수도 없겠지.
“글쎄, 그렇다니까.”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었으므로.
나는 그제야 작은 웃음기를 담을 수 있었다.
#16
스텔라와의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조금 더 긴 해후를 나눴어도 될 일이었겠지만, 일단 시간이 너무 늦었다. 머리를 많이 써서 그런지 스텔라도 좀 피곤해 보이기도 했고. 오늘 일은 여러모로 내 정신을 쏙 빼놓기에 충분했다.
때문에 스텔라가 내게 보여주기로 했던 것도 후일로 미뤄졌다.
오늘 공부한 분량이 담긴 노트와 필기구 등을 가방에 넣어 챙기곤, 그대로 어깨에 둘러멨다.
그때 내가 자기 방에서 어떻게 나가야 할지 곤란해하던 스텔라를 보며, 나는 손가락으로 말없이 창문 밖을 가리켰다.
당황한 표정이 된 스텔라에게 내일 보자는 한마디와 함께 커튼을 활짝 열어젖힌 뒤, 테라스 난간을 통해 수풀 사이로 뛰어내렸다.
다행히 날 발견한 사람은 없었다.
주변을 휙휙 둘러본 다음, 안도의 한숨과 함께 곧바로 3동을 향해 걸어갔다.
운동은 하고 자야지.
그렇게, 체력단련장에서 한참이나 땀을 쭉 뺀 뒤에야 기진맥진하여 털레털레 기숙사로 복귀했다.
개운하게 몸을 씻고 나서 침대에 풀썩 누우니, 오늘 있었던 일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할 새도 없이 깊은 수마에 잡아먹혀 버렸다.
다음 날.
오전의 교양 수업.
“에 오늘은 과제 수행에 앞서, 조를 짜겠습니다.”
나와 같은 조원이 된 사람을 확인하며.
한숨을 푸욱 내쉴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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