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차버린 소꿉친구와 전 여친이 같은 반이라 곤란하다-57화 (57/201)

〈 57화 〉 같은 길, 다른 꿈 (1)

* * *

#1

프론티어에 입학하기 전.

달라진 몸에 적응하기 위해 매일같이 근육을 빠릿하게 태우며 운동하면서도, 나는 오로지 단 하나의 목표만을 상기했던 것 같다.

왜 같다­ 라고 뭉뚱그려 말하냐면, 기억이 제대로 나지 않으니까.

내가 어디서 뭘 어떻게 몸과 정신을 갈고 닦았는지, 알 도리가 있어야 떠올리든 말든 할 거 아닌가.

아무렴 기적처럼 내게 찾아온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까닭일까.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내 몸을 혹독하게 굴렸을 거다.

근력이며 지구력이며 단순 육체 단련뿐만이 아니라, 그간 조건의 한계에 부딪혀 진도를 아주 조금조차 나아갈 수 없었던 검술, 그리고 마법 훈련까지.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은 아마 다 해봤을 터. 나라면 반드시 그랬을 거다.

그 덕분에, 나는 그간 써먹지 못하고 있던 지식들을 활용해 대번에 3위계에 달하는 마법 수준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검술은, 뭐. 아직 한참 부족한 것 같지만.

꾸준히 노력하면 될 일이라고 생각한다.

더 이상 재능의 벽에 가로막히지 않아도 되고, 발전 가능성이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는 상태니까.

성취라는 건 정말 마약 같은 것이었다.

뭔 짓을 해도 절대 뚫리지 않았던 벽이 너무나 쉽게 무너진다. 그날 하루치 마력을 전부 쏟아부어야 간신히 타올랐던 불빛이, 이제는 손가락만 가볍게 튕겨도 현상계에 구현되는 수준에 이른다.

아직 이 몸으로 한계까지 마력 회로를 태워본 적은 없으나, 과연 어디까지 마력을 끌어올릴 수 있으며 또한 내 강인해진 육체가 그 화산처럼 들끓는 마력의 격류를 얼마나 수용하여 감당할 수 있을지, 정말로 궁금했다.

검이라는 건 이리도 쉬이 휘둘러지는 물건이었던가. 교관의 말을 그대로 듣고 따라 움직이면 될 뿐인 쉬운 일이었을진데. 어째서 과거의 나는 처절한 몸짓 하나하나로 이루어진 신박한 유형의 검세로 같은 반 아이들의 웃음만 자아냈을까.

지금은 온전히 내 뜻대로 검신이 쭉 뻗어 나아가고, 목표를 정확히 찌르기도 하며, 때론 내가 의식하지 못한 순간에 척수반사적으로 상대의 공격을 예측하여 방어해내기도 한다.

그것은 본능과 재능의 영역이었다.

고작 반년도 채 되지 않는 사이에 무재능의 극치였던 나는 그럭저럭 쓸만한 재능을 가지게 되었다.

아니, 그냥 쓸만한 수준도 아니지.

프론티어 입학 사정관이 나의 잠재력을 아주 빡빡한 기준 아래 평가하여, 결국 이처럼 에픽 클래스 입학이란 판결을 땅땅 내려 주었으니까.

그렇다. 에픽 클래스­.

제국을 넘어 알티마 대륙 최고의 재능들이 모인다는 황금과 꿈의 도시, 황립 프론티어 아카데미.

그 온갖 재능의 화신들이 모이고 모인 구역에서도 유독 밤하늘의 별처럼 빛이 나는 존재들의 집단.

나는 그러한 집단의 구성원이 된 것이었다.

내게 주어진 단 하나의 목표.

프론티어에 정정당당히 실력으로 입학해서, 내 손으로 졸업장을 얻어낸다. 일평생 이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반드시 나의 가치를 증명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뼈와 살을 깎는 노력을 단 하루도 거르지 않았을 거다.

그리하여 결국 프론티어에 들어온 것도 모자라, 비록 끝 번호를 부여받았으나 에픽 클래스 학생임을 상징하는 황금빛 문장을 가슴팍에 내걸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쾌거였다.

그러므로 나는 결심했다. 부러져 꺾일 것 같았던 내게 기적처럼 찾아온 새로운 기회. 두 번째 인생의 스타트 라인. 내 손에 들어온 이 기회를 두 번 다시 놓치지 않으리라.

그 원대한 과업을 이루기 위한 헤아릴 수 없는 과정들 중, 나는 무슨 이유에서든 모든 수업에서 최선을 다해 「A+」에 해당하는 점수를 받아내야만 했다.

최고점인 「A+」미만은 절대 취급하지 않는다. 나는 가장 우수한 학생이 되어야만 했다.

내게는 그럴 가능성이 있고, 충분히 할 수 있었음에도 이뤄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나의 탓이었던 까닭이다.

자.

목표를 이뤄낼 역량이 충분하다 못해 넘쳐나며, 그 목표는 내게서 멀리 도망가거나 하지 않는다. 이런 경우 뺀질하게 허구헌날 시간만 낭비하지 않는다면 무조건 달성할 수 있을 거다.

온 세상이 나를 두 팔 벌려 환영한다.

그저 평탄하게 잘 깎인 가도를 뒷짐 지고 성실히 걸어가기만 하면 될 일!

……하지만.

여기서 암살자가 난입한다면 어떨까?

“에­ 이번 조 편성은 교수인 저의 임의로 구성했습니다. 각자 소속된 팀원들을 확인하시고, 마감 기한은 다음 주 목요일까지.”

희끗한 회백색 머리칼 사이로 드러나는 이맛살의 깊이만큼이나 힘없이 늘어지는 말머리.

— 와, 우리 같은 조다.

— 걔는? 걔는 어디 조야? 잠깐만 비켜봐.

— 아­ 1조면 발표 첫 번째 순서 아냐? 쓰읍……

곧 다가올 어두운 미래조차 예감하지 못한 채, 마냥 들뜬 얼굴로 자신이 속한 조를 찾아보는 신입생들.

새싹처럼 싱그럽고 연약한 저들을 보니 나는 그만 한숨을 쉬고 싶어졌다.

——간과하고 있었다.

세상은 더불어 살아가는 곳이라는 걸.

혼자 사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 있던 탓일까. 그냥 나 혼자 묵묵히 잘 해내면 될 일의 연속이라고 생각했다.

오산의 오산이었다.

프론티어 입학 이후 첫 번째로 맞이하는 조별과제 타임. 피해갈 수 없는 가혹한 운명.

어떤 현명한 자가 이르길.

한 명이면 족할 일을 둘이 해선 안 되고, 셋 이상이서 하면 아예 일이 성사되질 않는다 했던가.

그 말이 정론인 듯하다.

개인 과제가 대부분이었던 중등부 시절, 딱 두 번 정도 프론티어의 조별과제 시스템과 비슷한 경험을 해봤던 적이 있었는데.

그중 한 번은.

주어진 주제에 맞추어 적절한 자료를 수집하고 꼼꼼하게 보고서를 작성하고 기한이 되면 발표하고 끝인…… 정말 단순한 과제였다.

친하지도 않은 같은 반 녀석들이랑 같은 조가 되긴 했지만, 분담한 역할을 맡은 개인만 잘 성실하게 수행하면 점수는 홀랑 거저먹는 셈이나 다름이 없었지.

그 정도로 쉬운 주제였고, 자료 수집이라고 해봐야 시간 날 때마다 틈틈이 도서관에 들리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랬는데, 시발.

어째서 각자 자료 수집한 것들을 풀어놓기로 한 날짜에, 약속 장소엔 한 명이 급한 사정이 있다며 전날 밤 갑자기 빠져버리고.

다른 한 명은 말도 없이 나오지도 않고, 결국 남은 세 명만 어디 카페에 겨우 모이게 되었는데, 제대로 된 자료 조사를 해온 건 왜 나와 다른 한 명뿐이었을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대충 관련 서적에서 검토도 없이 통째로 베껴 써온 게 분명한 문서를 덜컥 테이블 위에 내밀고선.

자기는 한 시간 뒤에 가봐야 한답시고 빨리 회의 끝내자며 닦달하던 여학우의 모습에 그만 정신이 아찔해지고 말았었다.

폭풍 속에 잠든 혼돈과 파멸.

예정된 엔딩은 불 보듯 뻔했다.

서 있는 건 분명 네 명인데.

처음부터 끝까지 발표하는 건 나 혼자였다.

그나마 과제에 진심으로 임할 마음이 있던 나머지 한 명. 걔는, 그거였다. 열심히는 하지만 결과물이 그만큼 나오지 않는 애.

그 마음은 십분 백분 이해하고 있어서, 그냥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너는 쉬어도 좋다고 그랬다.

조원이었던 애들이 멍청한 게 아니다. 로르센 아카데미는 명문이었다. 조원들의 필기 성적도 나에 비해 그리 후달리는 편이 아니었다.

말인즉 철저히 의도적인 계산으로 이루어진 행동이었고, 무지했던 나는 그 악의의 총체를 맨몸으로 고스란히 받아냈던 것이었다.

인정한다. 그때의 내가 호구였다.

반에서 겉도는 주제에 필기 성적만큼은 꾸준하게 잘 나오고 있던 사실을 분명 알고 있었겠지.

처음부터 그냥 나한테 모든 권한을 일임할 셈이었다. 말 그대로 전부 다.

느닷없이 반에서 존재감도 없던 날 조장으로 추대해주길래 머쓱하며 속으로 작게 기뻐했던 내가 병신이었다. 미친 새끼.

다시 생각해 보니 몹시도 화가 나네.

같은 실수를 두 번 반복하진 않으리.

이번 조별과제는, 나를 위해 살겠다……

하지만 지금의 내게 성적이라는 인질이 잡혀 있는 와중, 나는 감히 함부로 행동할 수 없었다. 어울리지도 않게 훌륭한 리더를 자처할 생각은 없었으나, 아직 믿고 있는 구석이 있긴 했다.

여긴 프론티어니까. 정상인 비율이 높겠지.

그리고 나 역시 예전만큼 무시할 만한 인물이 못 되었다. 적어도 내가 모든 일을 덤탱이 써가며 수행할 필요까진 없을 터.

물론 내가 원하는 건 오로지 최고점이었던 까닭에, 그 점수를 온전히 받아내려면 가급적 팀원들의 적극적인 협조가 필요했다.

얘네들도 설렁설렁 공부하려고 프론티어에 들어온 건 아닐 거 아냐, 설마. 게다가 신입생인데 좋은 점수에 대한 열정은 조금이라도 있겠지. 성실히만 임해주면 된다. 성실히만. 다른 거 하나도 안 바라니까, 그냥 약속한 거만 지켜주면 된다고.

“수고하셨습니다, 학생 여러분. 다음 강의 시간에 뵙겠습니다­.”

교수가 강의 종료를 알린 뒤.

평소처럼 우르르 강의실을 썰물처럼 빠져나가지 않고, 자리에 남아서 같은 조원을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학생들.

나 역시 방금까지 교수가 자리했던 공간에 둥둥 띄워진 글씨들을 보면서, 내가 소속된 조를 빠르게 확인했다.

곧이어.

“……이런.”

작은 탄식이 일었다.

[ 6조 ]

1. 에지오 크라닐 (제 2학구 에픽 클래스 1학년 / 자율전공)

2. 알프리스 폰 체블루프 (제 5학구 그라치아 클래스 1학년 / 마법전공)

3. 헥토르 드 알칸트라 (제 2학구 에픽 클래스 1학년 / 자율전공)

4. 레니 (제 3학구 오르도 클래스 1학년 / 검술전공)

5. 유스필 데리아 (제 2학구 로시오 클래스 1학년 / 신성술전공)

음……

전부 1학년인 거야, 애초에 이 교양 강의가 1학년 신입생 대상이었으니 그렇다 치고.

내가 턱을 쓰다듬다가 한숨을 내쉰 이유는, 아직 일면식도 없는 세 명의 조원들 때문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남은 건 한 명밖에 없지.

같은 에픽 클래스인 헥토르 드 알칸트라.

입학 첫날부터 나를 영 미덥잖은 눈빛으로 노려보며, 결속된 것처럼 꾸준히 뭉쳐 다니던 녀석들.

에픽 클래스 8번 헥토르 드 알칸트라, 10번 하티 유레시안, 11번 자스칼 폰 매그나스.

그중 고고한 눈빛으로 팔짱을 끼며 여느 때처럼 날 주시하고 있던 헥토르가, 같은 조원이 된 것이었다.

— 1조! 1조인 사람?

— 3조 친구들 여기로 모여봐!

— 8조? 8조 더 없냐?

— 5조 한 명이 비는데…… 넥스? 넥스 베르타? 지금 여기 없니?

강의와 다음 강의 사이의 공백 기간 동안 같은 조원을 애타게 찾는 목소리가 사방에서 울린다.

왜인지 날 향해 슬금슬금 꽂히는 시선들은 이제 그러려니 한다.

원래부터 어지간히 주목받았고, 프론티어 전체에 나에 관한 소문이 어느 정도 퍼진 탓이다. 다만 본인은 기억도 못 하는 일로 자꾸 피곤한 일이 생기는 건 꽤나 괴로운 경험이었다……

뭐, 내 사정은 되었다.

일단 조원들을 모아야 한다. 오늘 개개인의 일정을 전부 파악하고, 되는 대로 빠른 시일 내에 모임 약속을 잡을 거다.

나는 손을 들곤 주변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6조 친구들­? 있으면 여기로 모여볼래­?”

#2

결과적으로, 어떻게든 모이긴 했다. 자기 조를 확인한 6조 조원들이 날 보고 알아서 찾아왔으니까. 원치 않은 유명세가 나름 도움이 된 셈이다.

그렇게 해서 한자리에 모인 5명.

헥토르도 말없이 내 주변에 앉았다.

날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것 같길래 좀 고생하나 싶었더니, 생각보다 괜찮을지도 모르겠다.

아닌가. 고작 모여달란 말 하나 들어줬다고 과제 수행에 협조적일 거란 생각은 너무 앞서갔나.

“잠깐 이름 좀 부를게. 본인 이름이라면 손들어줘.”

다섯이 전부 모인 걸 확인하고.

차례차례 이름을 불렀다.

“헥토르 드 알칸트라?”

“……”

나는 헥토르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다리를 꼰 채로 턱짓을 하는 헥토르의 눈빛으로부터 그 뜻을 읽을 수 있었다. 어차피 알고 있을 텐데 굳이 손을 들 필요까진 없지 않느냐. 뭐 그런 거 같았다.

……그래. 이 정도는 괜찮다. 양호하다.

다음.

“알프리스 폰 체블루프?”

“어! 그거 나야!”

번쩍, 하고 알프리스가 손을 들었다. 반반한 얼굴에 여유 가득한 미소가 버무려져 있는 것을 보아, 활동적인 미남이었다. 리더는 저 녀석이 하면 되겠군. 알프리스, 네겐 리더가 더 어울려……

그때 알프리스가 내게 흥미를 보였다.

“네가 에지오 크라닐이지? 제 4학구에서 그 엘레나님과 호각으로 싸움을 벌였다던! 이야, 같은 조가 될 줄은 몰랐네!”

하하하­ 신난다는 듯 웃음을 터트린다.

나는 어이가 없어 반문했다.

“……설마 그 헛소문을 믿는 거야?”

이거 좀 심각한데. 상상 속의 내가 점점 괴물 그 이상의 존재가 되어가고 있잖아.

“그럼! 소문이 괜히 생겼겠어? 좀 과장됐다고 해도 네가 엘레나님과 한판 붙었다는 건 적어도 사실일 거 아냐? 그런데 넌 지금 여기 살아 있고. 그걸로도 엄청 대단한 거지!”

또 다시, 하하하­.

나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적 없으니까, 소문은 잊어버려. 다음.”

알프리스의 옆에서 가만 손을 모으고 앉아 있던 조그마한 여학생. 그녀의 이름으로 추정되는 단어를 입안에서 꺼낸다.

“레니?”

“—네, 넵.”

얌전히 손을 든다. 근데 왜 존댓말 쓰니.

첫인상은 뭐랄지…시골 소녀? 풋풋한 인상이 물씬 드는 평범한 얼굴의 갈색 머리 여자애였다.

그래도 저런 타입이 낫지. 맡은 역할은 제대로 할 테니까. 차라리 다행이었다.

이제 마지막인가.

조원들 얼굴은 전부 확인했고, 이름도 기억했다. 남은 건 한 명뿐이지만 기왕 부른 거 끝까지 부르기로 했다.

“유스필 데……”

“와­.”

“……?”

탁상 위에 팔꿈치를 걸친 채 턱을 괴고 있던 유스필이, 입만 살짝 벌려 기계적인 감탄사를 토해낸다.

유리가 정말 화사하고 밝은 금발이라면, 유스필은 그보다 조금 칙칙한 갈빛이 섞인 금발에 가까웠다.

긴 장발도 아무렇게나 풀어 헤친 모양새였다. 그렇다고 막 빗자루처럼 푸석푸석한 게 아니라, 허리 부근에서 삐뚤빼뚤하게 찰랑거린다.

유니폼 자켓은 어디로 뒀는지 셔츠 한 장과 스커트만 입은 채였다.

셔츠의 윗단추는 몇 개 풀려 쇄골 부근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유스필의 스커트는 정말 이상하게도 다른 여학생들보다 유난히 짧은 것도 같았다.

뭐지, 대체.

…왜 있지도 않은 PTSD가 오는 거지?

유스필 데리아. 이름 참 예쁘고, 생긴 것도 예쁘게 생겼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도 예뻤으면 참 좋았으련만.

“너 존나 잘생겼다. 씨발.”

초면에 걸쭉한 욕설을 뱉어주신다.

분명 뜻을 풀어보면 칭찬의 의도로 말한 것 같은데, 어째서인지 내 어깨는 바짝 굳어야만 했다.

유스필이 히죽 웃는다.

“좀 당황했어? 귀엽네. 은근 순진한 타입인가?”

“……”

아니, 얘는.

성씨도 붙어 있는 거 보면 귀족 영애 아닌가?

어쩌면 나처럼 몰락 귀족이었을 수도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좀, 어…… 그렇지 않나……

게다가 전공이 뭐?

……신성술?

훗날 신관이 되어 교단의 신자가 고해성사라도 하면, 주신님 대신 너 시발 왜 그랬냐며 시원하게 쌍욕 한바가지 부어줄 셈인가?

“난 너 같은 타입이 좋더라. 큰 개새끼. 존나 좋아 진짜. …넌 나 어때? 막 골빈 년 같아 보여? 솔직히 그렇게 봐도 할 말 없긴 한데­.”

아무래도 잘못 걸린 거 같다.

나는 잠시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곤.

“다 모였으면 일단 각자 비는 날짜랑 시간을……”

“왜 내 말 씹어, 친구야. 뒤질래?”

“……”

“장난이야. 나도 지켜야 할 선을 아는 년이거든. 어차피 몸으로 덤벼봤자 뒤지는 건 나일 거 같고. 응항항항!”

내 안의 빌런 감지 센서가 작동했다.

얘구나.

우리 조를 혼돈과 파멸로 이끌 악의 씨앗이……

“맞다. 나 하나만 더 물어보고 싶은데.”

속으로 개탄을 금치 못하고 있을 때.

“혹시 여친 있니?”

“—뭐?”

“지금 사귀는 여자 있냐고. 아, 없는 게 더 편하려나? 흐흫.”

자기 혼자만 아는 농담을 하는 것처럼 유스필이 까르르 웃던 순간.

내 눈길이 기척을 감지하고 어딘가를 향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조원들과 얘기를 나누는 듯하던 루비아의 영롱한 녹빛 눈동자가, 분명하게 이곳을 보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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