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화 〉 같은 길, 다른 꿈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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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프론티어 학생이라면 반드시 들어야 한다는 교양 강의가 몇 개 있다. 규모가 규모인 만큼 개설된 강의 숫자만 해도 무수하지만, 그중에서도 특히나 필수적으로 여겨지는 강의라고 할지.
이번에 우리가 조별과제를 통해 반강제로 협동하게 된 「마나통제학」이 바로 그런 부류였다.
마법을 가르치는 게 아니다. 마나(Mana)다.
이 거대하고 넓은 행성을 이루고 있는 근본 요소들 중 하나. 대자연 곳곳에 풍부히 흘러다니는 천연 자원.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도 마나는 우리의 곁을 잔잔한 물결처럼 유영하고 있다.
마법사라고 해서 그들만 마나를 사용하는 게 아니다.
마나를 다룰 줄만 안다면 일반인들도 얼마든지 마나를 통해 일상 속 편리를 도모할 수 있다.
또한, 마나를 통제함에 있어 일정 경지에 달한 기사들과 검사는, 본인만의 마력이 깃든 검기성강(??成?)과도 같은 성명절기를 펼칠 수 있다고 한다.
그 외에도 마력을 끌어올려 몸의 일부를 단단하게 한다든가. 무기를 쥐지 않더라도 극한까지 단련된 육체만으로 무장한 상대를 몇 명이고 상대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마나였다.
「마나통제학」은 그러한 맥락에서 응당 제국의 미래가 될 유망한 인재들이라면—이 세상 만물의 기본이 되는 마나를 제대로 통제할 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기에, 어느 무엇을 본인의 뜻대로 통제하기 위해선 그 대상에 관련하여 아주 폭넓은 이해가 요구되므로.
마나란 무엇인가— 란 기초의 기초부터 시작해서, 이번 조별과제의 메인 주제에 이르기까지. 프론티어 재학 기간인 5년 동안 단계적으로 마나를 통제하는 법에 대해 교육하는 것이었다.
……근데 말야.
솔직하게 말해서.
프론티어 필수 교양이라곤 하지만. 암묵적인 룰과 같은 거고. 실제로 무조건 들어야 한다, 이렇게 지정되어 있는 건 아니라서.
달리 말하자면.
태어날 때부터 응애 하며 우렁찬 외침과 함께 마나가 듬뿍 담긴 샤우팅을 토해내는 녀석들은, 이 수업을 들을 필요가 없다.
소위 신의 사랑을 받는 아이들.
재능의 총아(??).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스스로 답을 깨우치며, 범인들은 평생을 쏟아부어도 이뤄내지 못 하는 일을 단 하루만에 너무나도 간단히 해내 버려, 결국 그 이름을 후대에 길이 남기고야 마는 하늘 위의 존재들.
그들은 입학 때부터 이미 1학년 수준쯤은 아득히 넘어 있을 텐데, 기초 수업을 들어서 대체 뭘 더 얻어갈 수 있을까?
이론 지식?
이론보다 중요한 게 실전이고 경험이다.
물론 배워서 나쁠 거 없다지만, 마나가 굴러가는 기초 원리에 통달했을 터인 그들은 정말 기초 중의 기초를 처음부터 가르칠 뿐인 본 1단계 강의를 수강할 이유가 딱히 없단 얘기다.
그래서 살짝 의문이 들었던 거다.
루비아가 이 수업을 듣는 이유가 뭔지.
마나 감응. 마나 통제.
그 어느 분야에 있어서도 루비아는 일반적인 프론티어 학생들의 수준과는 궤를 달리한다.
초등부 때 가장 익히기 어렵다는 계열의 마법을 스스로 깨우쳤으니, 뭐.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거기서 끝나겠지……
수강 목적이 뭘까.
나같은 우민들을 학살하러 온 것인가?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왜 여기로 슬며시 눈길을 보내오는 건지도.
나와 아주 찰나의 순간 눈이 마주친 것 같자, 입술을 꾹 다물곤 고개를 원위치로 돌려놓는다. 그러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조원들과 얘기를 나누기 시작한다. 방금 대화를 들은 걸까.
“왜 대답이 없어? 여친 있냐니까? 응?”
매끈한 다리의 끝은 하얀 양말로 감싸여 있다. 금방이라도 벗겨질 것처럼 대롱거리던 슬리퍼를 이용해 내 무릎을 툭툭 치기 시작한다. 입가에는 묘한 미소가 떠오른 채였다.
“내 말 무시해? 그냥 한마디만 해주면 되는 거잖아. 아니면 누구랑 비밀 연애라도 하는 거야? 밝히면 여러모로 곤란한가? 하긴, 나 같아도 그러겠——”
“유스필 데리아.”
나는 잠자코 그녀의 이름을 부르려 했다.
다만 행동하려는 것에 그쳤다는 건, 나 아닌 누군가가 유스필을 가만 멈춰 세웠다는 말이었다.
탁상 위로 손가락을 두드리던 헥토르였다.
“적당히 해라. 시끄럽게.”
차분하고 이지적이며 중압감 있는 목소리가 우리 사이의 공기를 압박한다.
헥토르가 유스필을 지긋이 주시하고 있었다.
그런 헥토르를 보며 유스필은 네가 뭐냐는 듯 헛웃음을 짓다가, 뭔가 할 말이라도 있는 것처럼 입을 열려던 찰나에.
“네 가문에는 아무래도 족보가 없는 모양이군. 그렇지 않고서야 추잡한 언사로 제 가문을 크게 욕보일 이유가 없지. 안 그런가?”
“……하?”
그 대담히 모욕적인 언사에는 꽤 놀라고 말았다.
나도, 유스필도.
헥토르의 말을 들은 나머지 조원들도.
한마디로 정통성이고 체통이고 역사고 뭣도 없는 간판뿐인 가문의 딸이니 이리 상스럽고 경박한 게 아니냐, 라는 말이었다. 귀족이란 고결한 존재의 뿌리가 되는 것을 원천부터 부정해버린 것.
유스필의 가문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다소 도를 넘은 모욕이 아닌가, 싶지만 사실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제 가문에 충분한 자부심이 있고 귀족 영애로서 체통을 지킬 줄 안다면 유스필이 이런 식으로 행동하진 않았을 테니까.
“내 말에 어폐가 있었나?”
헥토르가 비웃듯 되묻는다.
과연 효과가 있긴 했는지, 열이 뻗친 듯 얼굴이 붉어진 유스필이 고개를 뿌득 꺾으며 입매를 비튼다.
“하… 족제비처럼 생긴 게 존나 좆같이 구네. 넌 줘도 안 먹어, 씨발아. 쿨하게 말하면 좀 간지나 보일 줄 알았냐? 별 지랄은.”
“그래서 족보가 있나, 없나? 만에 하나 있다면 그대의 용기와 기개에 찬사를 보내지. 가문에 특별히 화환도 보내주겠다. 아, 배송지가 공동묘지만 아니었다면 좋겠군. 개인적 생각이다.”
“걍 느금마라고 해. 돌려 말하지 말고. 꼬추 달고 그 지랄 하면 안 부끄럽냐? 나 같으면 지금 여기서 가위로 잘랐다.”
가문을 모욕당했다고 곧바로 인신공격부터 쌍욕까지 들어가는 유스필이나, 상당한 수위의 귀족식 욕설을 담아 여유로운 태도와 함께 되돌려주는 헥토르나. 별로 다를 거 없지 않나 싶은데.
— 뭐야? 쟤네 싸워?
— 방금 뭐 이상한 말 들은 거 같은데……?
— 쟤 에지오 크라닐 아냐? 뭔 일이래?
말싸움 소리가 주변으로 퍼져 나간 탓인지, 이쪽으로 학생들의 시선이 꽤 몰려 있는 모습이 보인다.
…이런 시발. 나만 괜히 부끄럽잖아.
멈춰 이 자식들아.
“꼬우면——”
“그만, 그만해. 둘 다.”
“……”
“……”
이 이상 싸우면 위험하다.
어.
내 점수가 위험하다고.
가볍게 말하면 절대 안 들을 것 같길래, 적당히 마력을 담아 입을 열며 그들의 말싸움을 제지했다.
“여친 있냐고 물어본 게 잘못이야?”
유스필이 내게 툴툴거렸다.
…그래, 유스필. 네가 만악의 근원이구나. 대충 예상하고 있었어. 이 자유분방한 녀석이 우리 조에 끼어 있는 이상, 조별과제가 순탄히 굴러갈 거라 보는 건 더 이상 힘들었다.
“말이랑 행동을 좀 더 예쁘게 할 순 있잖아.”
“왜? 너도 많이 좆같았어? 그럼 사과할게. 미안해.”
“……”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넙죽 손을 모으고 허리를 숙이는 유스필. 스커트 뒤쪽이 밀려 올라갈 법도 한데 아무 신경도 안 쓰는 것 같다.
그건 그렇고 이걸 사과라고 봐야 하나. 영 종잡을 수가 없는 캐릭터였다. 얌전히만 굴어주면 참 좋을 텐데……
다만 헥토르에겐 사과할 마음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학생들이 웅성거리는 와중 태연히 의자에 도로 착석한다. 그런 유스필을 보면서 착잡한 마음에 자꾸만 속으로 한숨이 나온다.
벌써부터 분열이 일어나면 어쩌자는 거야.
A+가 점점 내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일단 오늘 시간 되는 사람은 일과 끝나고 7시쯤에 제 3학구 오르도 클래스 정거장에서 만나자. 오늘 안 되면 내일이나 이틀 뒤에 시간 비는 친구는 언제 되는지 여기 적어주고.”
우리에게 주어진 기한은 그렇게 길지 않다. 전체적인 흐름과 노선을 잡으려면, 가급적 회의를 빠르게 진행해야 한다.
딱히 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는데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내가 리더가 되는 것도 같다.
…이거 느낌이 안 좋은데. 결국 중등부 때와 비슷한 엔딩을 맞이하게 되는 건 아니겠지?
뭐든 상관없다.
아쉬운 자가 항상 을이 되는 법이니까.
힘이 닿는 데까진 열심히 해봐야지.
—스극, 스극.
정작 자기들의 말싸움을 말린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날 불편한 눈으로 노려보고 있던 헥토르가 혀를 차며 종이 위에 펜을 놀렸다.
#4
원래는 목요일 오후에 검술 수업이 있었고, 그 다음에 초감각특론 수업이 예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저번 사건의 여파로 나디엘리 교수가 증발해 버렸으니, 당분간 초감각특론 강의는 폐강이었다. 언제 재개될지는 아직 정해진 게 없다고는 하는데. 아마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다.
아직도 안 믿기네. 내 손을 꽉 잡고서 부들부들 몸을 떨어댔던 모습이 엊그제 같은데.
…왜 이것만 기억에 남는 거지?
잡생각을 털고서 기숙사로 복귀하기 위해 트램을 기다리며 정거장에 서 있자니, 그런 내 옆으로 나와 같은 유니폼의 여학생 한 명이 보였다.
따사한 연분홍빛 머리칼이 길게 늘어진 소녀.
“루비아.”
“……아! 응?!”
얌전히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불에 데인 것처럼 화들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는 루비아.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건가.
“왜, 왜? 에지오?”
서류 가방처럼 생긴 그것을 두 손으로 붙잡은 채, 고개만 돌려 내게 간신히 미소를 지어 보인다. 다만 간신히, 라고 표현했듯 알겠지만 평소와 다르게 한참 인위적인 웃음이었다.
표정도 그렇게 좋지 않아 보였다. 무에 기분이 나쁘다기보단, 눈가가 다소 퀭하고 눈꼬리도 축 처진 채였다. 봄에 활짝 핀 꽃처럼 화사했던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조금 칙칙해진 것 같다.
추가로.
가방의 손잡이를 붙들고 있는 그녀의 손끝이 미세하게 진동하는 것을 시야 한켠으로 힐긋 보면서, 평범히 입을 열었다.
“아니, 너 나랑 같은 수업 듣길래. 이번 조별과제 할 만한가 싶어서.”
“아, 아아… 조별과제… 응……”
“조원들은 좀 어때? 상태 괜찮아 보여?”
“으응… 다 좋은 친구들인걸? 전부 착해 보이구, 열심히 수업 듣는 아이들 같아서 마음에 들어.”
물론, 그야 그렇겠지. 네 눈에 처음부터 좋게 보이지 않는 사람이 이 세상 어디에 있겠냐만은.
“…혹시 뭐 애들이 너 에픽 클래스랍시고 네가 조장하는 게 좋겠다거나, 널 막 리더로 추대하거나 그러진 않았지?”
리더 역할을 맡는 게 엄청 큰 문제는 아니다. 루비아는 능력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실력과는 별개로 조원들을 이끄는 점에 있어선 조금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분명 루비아의 모나지 않고 둥근 성품을 이용해 먹으려는 녀석이 한 둘쯤 있을 테니까.
“아직 정해진 건 없는데…… 왜?”
루비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긴.
나는 저 멀리서 보이기 시작하는 트램의 머리를 돌아봤다가, 다시 루비아를 향해 눈길을 주곤 말했다.
“리더는 여러모로 고생해야 하니까. 괜히 무리하지 말라고. 요즘 많이 피곤해 보이는 것 같아서.”
“……”
루비아의 눈이 순간 멍해진 듯했다.
아 그러고 보니. 루비아한테 말한 적이 있었나. 내 머릿속의 기억이 일부 없어졌단 사실을.
아마 없을 거다.
하면, 내 기억 속의 루비아가 로르센 아카데미를 자퇴한 날 오래간 찾아다녔단 말을 울면서 했었는데, 그렇다면 일전의 활기와 생기가 다소 시들어버린 이유도 거기에 있을 터.
결국 루비아가 지금 알게 모르게 내외적으로 힘들어 보이는 건, 근본적으로 내 탓이라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 아닐까.
중등부 졸업을 앞두었을 터인 루비아를 심히 걱정하게 만들고, 프론티어 입학 이후 루비아를 쌀쌀맞게 대했던 내 태도까지 전부 살펴봤을 때, 과연 나는 루비아의 심상치 않은 상태를 걱정하며 방금 같은 한마디를 건네도 되는 것이었을까.
트램이 정거장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벤치에 앉아 있던 학생들이 하나 둘씩 일어서고, 곧이어 치이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덜컹거리며 트램에 탑승한다. 다만 나와 루비아는 아직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채였다.
“……걱정해줘서 고마워, 에지오.”
부드럽게 감긴 한쪽 눈꺼풀을 손가락으로 훑으면서, 루비아가 조용히 다음 말을 이었다.
“괜찮아. 피곤하지 않아. 아직, 멀쩡해.”
그렇구나.
비로소 본연의 싱그러운 미소를 내게 지어주는 루비아에게, 나로선 딱히 해줄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우리는 트램을 향해 걷는다.
트램 칸에 들어선 뒤 루비아가 먼저 앉았고, 나는 루비아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내가 앉은 자리를 본 루비아가 순간 힘없는 미소를 지은 것도 같았다. 아직 날 불편하게 여긴다 생각해 배려 차원에서 그랬을 뿐인데, 루비아의 생각은 조금 다른 모양이었다.
—우우우웅……
하얀 유니폼을 입은 우리를 향하던 관심 어린 시선들의 무리도, 정거장을 하나씩 거침에 따라 차츰 거두어져 갈 즈음.
피곤하지 않다. 괜찮다. 그리 말하며 내게 웃어 보인 루비아는, 정말 어느 순간부터 구석진 자리에서 고개를 꾸벅이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