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차버린 소꿉친구와 전 여친이 같은 반이라 곤란하다-60화 (60/201)

〈 60화 〉 같은 길, 다른 꿈 (4)

* * *

#7

내가 이리 직설적으로 말할 줄은 꿈에도 몰랐는지, 유스필은 그로부터 한참이나 멍을 때렸다.

내가 지금 잘못 들었나­ 싶은 표정으로 입만 살짝 벌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거,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기어코 으르렁거리며, 이빨을 드러낸다.

미래의 신관이 지을 표정이라곤 상상되지 않을 정도의 험악함. 유스필은 숫제 인생 최대의 모욕이라도 들었다는 듯, 머리카락까지 달달 떨면서 내게 그리 물어오고 있었다.

유스필의 거대한 분노를 마주함에도 나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그럼, 당연하지. 기본적인 약속도 제 성격 탓에 안 지키는 조원 따윈,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있는 것보다 없는 게 훨씬 낫지.”

이런 막무가내의 유스필을 우리 조에 계속 풀어놓는다면, 원래 잘 풀려야만 했던 일도 실타래처럼 꼬이게 되어버린다.

거뭇한 새싹이 보인다면 미리 쳐내야지.

이런 조원도 어떻게 잘 이끌어서 결국 조별과제에 제대로 임하게 만드는 것이 올바른 리더의 역할일진 모르겠다만.

난 리더랑은 역시 안 맞나 보다.

별로 특별한 사정도 없이 늦게 도착한 주제에 여유로운 태도 하며, 귀족의 자존심이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남지도 않았는지 너무나도 가벼운 사과 방식. 과제를 수행할 마음이 티끌만큼도 없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증명하고 있는 텅텅 비어버린 손.

얘는 글렀다.

유스필 데리아. 인정한다.같은 조별과제 조원으로서 기피해야 할 대상 1순위에 당당히 뽑힐 만하다.

물론 그녀의 말처럼 아예 말도 없이 빠진 것도 아니었으나, 이런 타입이 되레 모임의 분위기를 느슨하게 해치고 과제의 진행을 더디게 만드는 가장 큰 원흉이 될 수도 있었다.

“…하. 네가 무슨 권리로 날 꺼지라니 마니……”

유스필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어이가 없어서 기가 찬 웃음이 절로 나오는 모양이었다.

“임시라지만 조장은 나야. 조원들을 관리할 의무와 책임, 권리가 있어. 내가 조장이 되는 데엔 너도 동의했고.”

별로 하기 싫었지만. 본심만 말하자면 그냥 알프리스한테 조장 역할을 맡기고 싶었지만…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다.

아무래도 자유분방한 유스필과 헥토르를 통제하는 게 최우선 과제가 될 것 같아서, 아쉬운 대로 내가 선뜻 조장을 하기로 했었다. 유스필도 거기에 격한 동의를 내보였었다.

“……”

할 말이 없는지 유스필은 가만 나를 노려보다가.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뭐?”

“후회 안 할 자신 있냐고, 씨발. 꺼지라며. 그럼 다섯 명에서 네 명이 되는 거잖아. 꼴 보니까 에픽 클래스랍시고 점수 잘 받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내가 빠지면 최고점 받긴 어려울 텐데? 아냐?”

……이 새끼, 어떻게 알았지?

내가 A+에 미쳐 있다는 사실을.

…뭐.

아예 생각 안 해본 것도 아니다. 협동을 잘 하지 못했니 뭐니. 실제로 그럴 가능성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세상엔 정상참작이란 게 있고, 상황에 따른 융통성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이런 양아치 같은 행보를 보이는 조원 한 명 임의로 배제시켰다고 해서, 유스필을 포함한 조원 전체의 점수를 깎을 일은 아마 없을 거라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더군다나.

이런 생각하긴 싫지만, 에픽 클래스는 기본적으로 교수들의 상당한 신뢰와 호의를 받고 있다. 프론티어에 개설된 수많은 강의들 중에서 자기들 강의를 에픽 클래스가 선택했다는 사실의 증명 하나만으로도 수강신청 인기가 폭발한다나 뭐라나.

달리 말해 가까운 미래에 제국에서 한 자리 꿰찰 게 분명한 학생들이었으므로, 굳이 홀대할 이유가 어디에도 없는 것이었다.

유스필의 이름을 제외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설명하면 어지간해선 납득해 주시겠지.

다만, 교수의 평가 외적으로도 과제의 수행 난이도가 조금 올라간다는 단점이 있었으나, 애초에 유스필이 참여하면 더 난장판이 될 게 분명했으므로 이 편이 훨씬 나은 선택지였다.

나는 유스필의 이글거리는 눈을 직시하며 말했다.

“어. 그럴 일 없을 거다. 절대로.”

“……”

“계속 이딴 식으로 할 거면 그냥 돌아가. 앞으로 모임 안 나와도 되니까, 가서 너 좋아하는 목욕 실컷 해라.”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수치인가, 분노인가. 새하얗던 얼굴이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것처럼 붉어진 채였다.

알프리스는 우리 둘을 제지하기보단 가만히 지켜보는 쪽을 택했다. 팔짱을 낀 채 아니꼬운 표정으로 나 아닌 유스필을 바라본다. 아무래도 내 의견에 딱히 반대할 생각은 없는 듯했다.

싸늘하디 차가운 냉기를 풀풀 흩뿌리던 날 안절부절못하며 지켜보던 레니는, 곧 우리 사이에 까마득한 정적이 감돌자 자기도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그런 우리를 정거장의 사람들이 지나다니며 힐긋힐긋 돌아보았다. 원치 않게 시선이 집중되는 일 정도야 익숙했으니 괜찮았다. 이제 소문이 또 어떻게 날까 궁금하긴 하네. 빌어먹을.

—우우우웅……

유스필과 한참 실랑이를 벌이던 사이에, 다음 트램이 우웅거리며 정거장으로 서서히 진입하는 모습이 보였다.

제 2학구에 돌아가려면 여기서 반대편 트램을 타야 할 거다. 그러니 유스필은 나와 알프리스, 레니를 지나쳐 가야만 했다.

유스필은 아무 말도 없이 입술을 질근 깨물고 있었다. 내게 뭔 말을 하고 싶은 걸까. 나는 해볼 테면 해보라는 듯 우위를 점한 신장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유스필이 아까처럼 가볍고 경박한 사과가 아닌, 귀족 영애다운 격식과 거짓 없는 진심을 담아 앞으로 그러지 않겠다는 말을 건네온다면, 나 역시 한 번쯤은 용서해 줄 의향이 있었다.

그래놓고 또 이번 같은 일을 반복한다면 뒤도 안 돌아보고 매정하게 추방하겠지만. 말했듯 단 한 번의 기회를 줄 수도 있었다.

—탁, 탁, 탁.

유스필은 굳은 표정으로 나를 지나쳐 갔다.

“…좆같은 고자 새끼. 죽어.”

그게 유스필의 선택이었다.

찰랑거리는 유스필의 머리칼 끄트머리가 내 시야 구석에 잡힌다. 격한 감정을 담은 발소리가 무척이나 가까워졌다가, 다시 멀어지기 시작한다. 방향은 내 어깨 너머를 향해 있었다.

“유스필 데리아.”

유스필은 멈추지 않았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내 가문은 몰락했어. 징병을 거부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귀족 사회에서 영구히 제명당했다. 이제 귀족도 뭣도 아니지.”

가진 걸 모두 빼앗기듯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가문의 책임자였던 아버지는 도망 아닌 도망을 택하며 시골로 이사를 갔다.

정지한 트램에서 내린 학생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온다. 내 곁으로도 스쳐 지나가고, 유스필은 그 학생들 무리에 섞여 있을 터다.

여기저기서 밀려오는 수많은 말소리들에 묻혀 아스라질 법한 음성이 내 입에서 흘러나온다.

“잃을 게 없다고 해서 네 자신까지 잃지는 마라.”

아마, 씨알도 안 먹힐 소리겠지만.

…유스필 데리아.

몰락한 데리아 남작가의 일원. 입학한 지 얼마 안 되었음이 분명함에도 심히 껄렁거리는 태도. 그 의미가 옅고 너무나 가벼운 사과. 필경 오래전부터 그리 해왔던 것이리라.

한때 고결한 귀족이었던 존재로서, 어쩌면 한 인격체로서의 자존심을 모두 내려놓아야만 가능했던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훈계질 할 입장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 유스필의 상황은 아마 나와 많이 다를 테니까. 그녀에게는 내 어린 시절의 루비아 같은 사람이 곁에 없었던 걸지도 모를 테니까.

탁, 탁……

——탁.

세 걸음째에 날 돌아본다.

그리고.

알 수 없는 표정의 유스필은.

“좆 까. 병신아.”

당연하게도,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8

유스필이 제 2학구로 떠난 뒤 나와 알프리스, 레니는 공복을 해결하기 위해 먼저 가까운 식당으로 향했다.

저녁 시간이 애매하게 지난지라 사람이 별로 없어 조용했는데, 오히려 좋았다. 잘 익힌 고기를 몇 점 집어먹으며 조별과제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마나를 통제함에 있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능력들. 마나의 가변성. 마나의 다양한 속성. 개인의 내재된 저장소에서 생성되는 마나가 아닌, 자연지기 속에서 흡수한 마나를 정제하고 방출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특수성. 지금껏 마나를 어떠한 형태로 써왔냐에 따라 각자 다른 특성을 띠는 회로의 구조. 마법 전공인 알프리스와 검술 전공인 레니, 그리고 둘 다 전공하고 있던 나. 이 셋으로부터 방출된 마나가 서로 충돌하면 생기는 일.

우리는 「마나통제학 I」에서 배웠던 내용들을 하나씩 짚어가며, 올바른 과제 해결에 대해 열띤 논의를 진행했다.

식사 이후 마지막 트램이 도착하기 전 카페에 들려 오늘 나눴던 얘기들을 정리하고, 각자 나중에 비는 시간을 노트 위에 남긴 뒤 매우 늦은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알프리스는 아르티나 왕국의 유학생이었다. 체블루프 백작가의 차남. 그리고 아르티나 왕국은 유리의 고향이었다. 다시 말해서 알프리스가 살던 나라의 왕녀가 나랑 같은 에픽 클래스였다.

그 사실을 알프리스는 당연히 알고 있던 모양인지, 나라에서 단지 소문으로만 전해지던 왕녀의 모습이 어떻게 생겼냐며 그제야 내게 잔뜩 호기심을 보인 채 물어오기 시작했다.

이걸 뭐라고 대답해줘야 할지 참 난감했지만, 금발에 붉은 눈, 과연 왕녀와 공주란 직함이 어울리는 고아한 얼굴을 가졌다고 얘기해줬다.

그러자 나랑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언제 한번 유리와 같이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하길래, 아마 안 될 거 같은데­ 란 말은 목구멍 너머로 삼키고 생각은 해보겠단 말로 대신했다.

다음으로 소개를 시작한 레니는 평민이었다. 외딴 마을에서 기대를 받는 어린 검술 영재였으나, 하도 호들갑이 심해서 매번 부담스러웠다고 한다.

그 호들갑은 날이 갈수록 기세를 더해갔던 탓에, 아예 중등부를 졸업하게 되면 프론티어 입학 시험을 치러보는 게 어떻겠냐는 말을 듣고선 절대 안 한다며 손사래를 저었다고 한다.

결국 마을 사람들에게 질질 끌려가 억지로 프론티어 입학 시험을 치렀다.

레니는 지금 우리들 눈앞에 있었다.

마을은 레니를 구국의 영웅급으로 성대히 축하해 주었고, 역시 믿고 있었다는 말과 함께 마을 전체에서 아득바득 성금을 모아 프론티어 입학비를 대주었다. 덕분에 마을 반 년 치 예산이 통째로 날아간 듯했으나 마을 사람들은 그냥 기뻐할 뿐이랬다.

……그러고 보니 에픽 클래스는 전원 전액 장학금이었던가. 레니의 앞에서 그 사실을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었다.

아무튼 그 부담감 때문에 여러모로 고생 중이라고. 여기 와보니까 전부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들뿐인 거 같아서, 자길 믿어준 마을 사람들한테 너무 죄송하다고 그랬다.

그쯤 거의 울려고 하길래 손수건을 꺼내어 주었더니 감사하단 말과 함께 이리 덧붙였다. “혹시, 입학 당일… 기억 안 나세요…?” 라며 나를 슬그머니 올려다보았다.

뭔가 했더니 나와 입학 당일 만난 적이 있다는 모양이었다. 정말 미안하게도 기억이 전혀 안 나서 한참 고민했다가, 불현듯 떠오르는 장면에 이마를 탁 치고 말았다.

입학식에 참여하기 위해 프론티어에 열차를 타고 도착했던 순간, 객실을 나오며 복도에서 마주쳤던 한 명의 신입생. 그녀는 지금의 레니와 똑같은 적갈색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근데 정말 찰나의 만남이었는지라 거의 까먹고 있는 채였다. 그런 나에 반해 레니는 날 용케도 기억한다 싶었다.

워낙 수가 적은 에픽 클래스였기도 하고, 여러모로 바짝 긴장한 상태에서 날 마주쳤을 테니 인상 깊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 뒤로 우리는 커피를 마시며 시답잖은 학교 생활 얘기를 나눴다. 알프리스와 레니의 관심사는 주로 에픽 클래스인 내가 어떤 생활을 하는지, 대체로 그런 쪽이었다.

근데 딱히 별다를 거 없지 않나. 수업 듣고 먹고 훈련하고 먹고 수업 듣고 훈련하고 자고…… 아무래도 그들은 내 기숙사 환경이 궁금한 것 같았다.

사실대로 말해주니 부러워하긴 했다. 일반 클래스 기숙사 방도 크긴 하지만 에픽 클래스 정도는 아닌 듯하고. 무엇보다 알프리스와 레니는 에픽 클래스 기숙사 부지 내에 설치된 호화로운 편의 시설들을 가장 동경했다. 자기들은 수영장 같은 데 가려면 트램 타고 이동하거나 그래야 한다나 뭐라나.

“맞아. 에지오, 나 궁금한 게 있는데.”

슬슬 각자 돌아갈 시간이 다 되었을 즈음엔, 알프리스가 문득 내게 물어왔다.

에픽 클래스는 대륙 최고의 재능들만 모이는 최정예 집단. 내가 에픽 클래스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가 뭔지, 아마도 그걸 처음부터 내게 묻고 싶었던 것 같다.

나는 고민하다가 알프리스의 전공이 마법(??)이라는 걸 깨닫곤, 여기서 3위계 정도의 화염 계열 마법을 써볼 수 있겠냐 물었다.

알프리스는 “별로 어렵진 않긴 한데… 왜?” 라는 질문을 해왔다.

그에 나는 말없이 어깨를 으쓱였고, 알프리스는 내 말을 따라 반신반의하면서도 순순히 마법을 시전했다.

집중력을 높이기 위한 짧은 영창 이후, 알프리스의 손바닥 위로 붉은 빛을 머금은 소형 마법진이 떠올랐다.

—3위계 화염 계열 마법, 플레어(Flare).

소환된 불꽃이 술자의 의지를 따라 일렁거리며 춤추던 와중, 내 머릿속에 섬광이 불똥 튀는 것과 동시에 오른손을 뻗었다.

알프리스가 몹시 당황했고.

갸웃거리며 지켜보던 레니가 기겁했다.

제자리에 고정시켜 두고 있어서 조금이나마 안전할 뿐이지, 3위계 마법인 플레어의 파괴력은 인간의 연약한 손바닥 정도는 가볍게 익혀버릴 수 있었으니까. 그나저나 조작 솜씨가 대단하다. 방사(??)가 기본인 화염 계열 마법을 저리 쉽게 고정시키다니……

나는 마력 회로를 쓰지도 않았다. 그것을 그들도 보았을 것이다. 그냥 손을 뻗었고, 알프리스가 시전한 마법을 꽉 쥐었다.

—슈우우욱.

불길이 내 손에 닿는 순간.

마치 시간이라도 감긴 듯 급격하게 수축하며, 결국은 눈 깜짝할 새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리 쉽게 소멸하는 걸 보면, 아무래도 알프리스는 세기의 천재까진 아닌 모양이었다.

간단한 손짓만으로 3위계 마법을 말끔히 소멸시켰다는 사실에 멍하니 굳어 있던 그들이었으나.

곧 내가 입은 백(白)과 금()의 유니폼을 보더니, 속에서 무슨 납득의 과정을 거쳤는지 작은 감탄과 함께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뭐.

그래봐야 마지막 번호인 15번이지만.

#9

알프리스, 레니와 헤어진 뒤.

때마침 찾아온 트램에 재빨리 탑승해 에픽 클래스 기숙사로 돌아왔다.

“오늘은 어디를 조질까……”

서늘한 밤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시며, 이러저러 피곤한 몸을 마지막으로 불태우기 위해 3동으로 향하려던 찰나.

저 왼편의 타일 깔린 가도로부터 총총거리며 걸어오는 인영이 시야 한구석에 잡혔다.

거의 밤 11시에 달하는 늦은 밤이었는지라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주홍빛 가로등에 반짝이는 순금의 머리칼은 확실히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유리였다.

언제나처럼 수풀 뒤에 숨어 있다가 불쑥 놀래켜줄까 싶었으나, 한 번만 더 장난치면 묻지도 않고 싸대기를 갈겨버리겠다 고했던 유리였기에 그냥 심플하게 인사만 하기로 했다.

산책로를 거닐고 왔던 것인지, 그쪽 방향으로부터 돌아오는 유리의 맞은편에서 천천히 걸어갔다.

—타박, 타박…

자기 아닌 발소리가 들릴 텐데도 계속 아래만 쳐다본다. 이대로 가면 그냥 부딪힐 것 같길래, 세 발자국쯤 떨어진 거리에서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안녕.”

“——!?”

어, 이런 격한 반응은 예상 못 했는데.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던 유리가 기겁을 했다. 밤길에 귀신이라도 마주한 모양새라, 빠르게 뒤로 물러나는 듯싶었으나.

—미끌.

“히야아악?!”

한 발자국 뒤로 옮긴 그 자리에 있었던 돌을 밟곤 아크로바틱한 곡선을 그리며, 성대히 넘어질 준비를 시작했다.

어어, 저대로 넘어지면 대가리 깨진다.

그렇게 둘 순 없었다.

—탁.

키가 부쩍 커지면서 보폭도 넓어지고, 리치도 굉장히 길어졌다. 단숨에 걸음을 옮겨 유리의 손목을 꽉 붙잡았다. 그대로 끌어당기니, 가볍고 작은 유리의 몸체가 힘없이 날아들었다.

얌전히 고개를 내려 유리와 시선을 맞추었다.

“놀래키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미안하다.”

“……”

반사적으로 등과 허리를 감쌌다.

차가운 땀으로 젖은 머리칼이 유리의 살짝 상기된 볼에 몇 가닥 달라붙어 있었다. 다만 유리의 얼굴이 붉은 것은 내가 한 행동 때문이 아니라, 그냥 원래부터 좀 붉어져 있던 상태였다.

왠지 익숙한 데자뷰를 느끼고 있자니, 요전 의료원에서 유리를 감쌌을 때 끼쳐왔던 향기보다 조금 더 짙은 색의 살내음. 에픽 클래스 유니폼이 아닌 사복 차림. 지퍼 열린 바람막이와, 그 안의 새하얀 라운드 티셔츠. 등을 받치고 있는 내 손에 의해 비스듬한 각도로 서 있는 다리가 트레이닝 레깅스로 감싸여 있었다.

운동하고 오는 길이었구나. 의외였다.

“……”

“……”

잠시간의 정적이 일었다.

불그스름하게 물든 귓불보다도 더 붉은 눈동자가, 두어 번 깜빡거리며 나와 눈을 마주했다.

그러던 직후.

유리를 일으켜 세워주려던 차에.

“…저, 저리 가아아아아앗­!”

……아.

싸대기 날라온다.

—턱.

“도와준 건데 이런 걸 맞으면 섭하지.”

“이, 이게……!”

허무하게 잡혀버린 유리의 손목.

그대로 힘겨루기를 하다가 나한테 싸움이 안 된다는 걸 알았는지, 내가 놓아주자마자 펄쩍 뛰면서 뒤로 슬금슬금 물러섰다.

“으, 으으, 으으으으으……”

왠지 모르겠지만 가슴을 가리듯 양 팔을 교차한 상태로 어깨를 감싼다. 비에 쫄딱 젖은 고양이 같은 모양새가 마치 강제로 추행당한 사람의 그것이라서, 나는 괜스레 머쓱해져 말했다.

“…알겠지만, 일부러 그런 거 아니다?”

다 걸고 진짜로.

유리는 내 말이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너, 너, 너 진짜, 말, 말도, 말도 안 돼… 두, 두 번이나… 진짜, 하, 하으…”

“…아니, 잠깐만. 야. 설마 울어?”

“너, 너 진짜 싫어어어어……”

…이게 눈물까지 글썽거릴 정도인가?

……잠시.

이성적이고 냉철한 사고에 입각하여.

유리 같은 민감한 여자아이의 마음으로 이해해 보자면, 음. 평소 남자랑 몸 닿는 거 싫어하고. 깜짝 놀라는 거에 유약하고.

지금은 운동을 하고 온 뒤라서 몸에 땀내음이 가득 번져 있을뿐더러, 유리의 고귀한 신분을 생각해 보면 그런 상태에서 나 같은 남성에게 안기듯 당해봤던 전적이 있을까, 싶긴 하다.

이로 말미암아, 도를 넘은 수치가 유리의 눈가에 물방울을 생산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한마디로 몹시 곤란한 상황이었다.

“히윽, 히끅… 흐으윽……”

“야, 야… 미안하다. 울지 마. 내가 잘못했어.”

“저리 가… 너 싫어 진짜……”

“미, 미안하다니까……”

그냥 쪼그려 앉아 울기 시작했다. 미치겠네.

뻘쭘하며 조심히 다가가서 등이라도 토닥여 주려 했는데, 힘없는 손길로 날 뿌리친다.

……큰일 났네.

기껏 친해지나 싶었더니 다시 멀어질라 하길래, 대화라도 좀 해볼까 하는 생각으로 말을 걸었더니.

어째 더 멀어지게 생겼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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