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 같은 길, 다른 꿈 (6)
* * *
#12
“이거 참… 교수로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가 없군요. 제 강의 수강생의 안전을 다른 수강생이 지키도록 만들다니…… 하지만, 그와 별개로 매우 신속한 조치였습니다, 에지오 군. 아주 대단했어요. 루비아 양을 무사히 보호해준 당신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겠습니다.”
항상 침착하고 냉정하게만 보였던 교수가 날 지긋이 바라보다가, 예의 바르게 허리를 숙였다.
스윽.
다시 얼굴을 든 교수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나저나, 루비아 양의 마법이 파괴되기엔 충분하지 않은 마력량이었습니다. 중간 과정에서 특수한 무언가가 개입한 듯하더군요. 그것은 에지오 군이 의도한 결과인가요?”
뭐야, 어떻게 알았지.
과연 에픽 클래스 교수인가. 아주 짧은 순간 내 능력이 발현되었다는 걸 정확히 캐치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러자 교수가 흥미로운 기색을 드러낸다.
“한 명의 학자로서 호기심이 생기네요. 여유가 된다면 에지오 군의 능력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들어보고 싶지만……”
교수의 시선은 곧 어딘가를 향했다.
내 앞에 마주 서 있던 루비아였다.
우리가 동시에 자기를 돌아보자, 한쪽 어깨를 끌어안듯 매만지며 힘겨운 미소를 지어 보인다.
“…오늘은 날이 아닌 듯하군요.”
부정은 하지 않았다.
“…그럼. 다음 수업 시간 때 보도록 하죠, 에지오 군. 루비아 양. 스텔라 양.”
우리들 한 명을 저마다 돌아보며 그리 말하던 교수는, 나와 그녀들을 강의실에 남겨둔 채로 문을 열어 나섰다.
다시금 찾아온 정적.
그것을 깨뜨린 건 스텔라였다.
“루, 루비아… 괜찮으세요?”
가장 먼저 비명을 질렀던 스텔라다. 돌발상황에 자기도 어지간히 놀랐는지 손끝이 아직도 작게 진동하는 채였다. 잔뜩 걱정스러운 눈길로 우리를 향해 재빨리 다가온다.
스텔라를 바라본 루비아가 잠시간 말을 아꼈다.
그러더니 별안간 내 앞에서 지었던 미소와 같은 웃음을 머금는다.
“응, 괜찮아. 잠깐 현기증 때문에 조작이 흐트러졌나봐.”
“하지만……”
“진짜 괜찮대두. 봐, 멀쩡하잖아?”
퍽이나 그러시겠다.
자긴 팔팔하다는 듯 팔까지 빙빙 돌리기 시작한 루비아를 보면서,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차오르던 한숨을 푹 내쉬려 했을 때.
“맞아. 공부는 잘 했어?”
루비아가 문득 우릴 향해 물었다.
내 쪽에서 짧게 반문했다.
“……공부?”
“응. 저번에 스텔라가 에지오한테 지난 수업 분량 가르쳐주기로 했잖아. 둘이 잘 하구 왔나 해서.”
그 말에 속으로 뜨끔했다. 이유는 모른다.
나는 잠깐 말없이 스텔라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때 당시의 일이 떠오른 모양인지 입을 다물곤 내 눈을 살살 피한다. 루비아가 그런 우리를 갸웃거리며 바라보던 와중, 내 쪽에서 태연히 대답했다.
“어, 어. 스텔라가 교수님보다 더 잘 가르쳐주더라. 덕분에 보충할 부분도 없이 깔끔하게 빨리 끝났어. ……그렇지, 스텔라?“
“으, 응. …아니, 네.”
언제 어디서 같이 공부를 했는지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었다. 그걸 루비아에게 들키면 여러모로 곤란한 상황이었으니까.
…근데 내가 이걸 왜 숨기듯 말해야 하는 거지? 나는 정정당당히 허락을 받고서 스텔라의 기숙사에 들어간 것뿐인데 라고 생각은 하지만, 그 사실을 여기서 곧이곧대로 말할 수 있을 리가 있나.
스텔라와의 비밀스럽고 우연한 만남은 우리 둘만의 비밀로 남게 될 것이다. 아마, 우리 둘 중 한 명이 까발리지 않는 이상 영원히.
“그렇구나…… 다행이네. 진도, 놓치지 않고 따라갈 수 있어서.”
루비아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무언가 부자연스러운 흐름을 분명 느꼈을 텐데도, 나를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어쩐지 가슴 한켠이 영문 모를 죄책감으로 쿡쿡 찔리는 듯했다.
묘한 기류에 감싸인 분위기를 환기하듯.
루비아가 슬며시 입을 열었다.
“…이제 돌아갈까? 좀 있으면 점심 시간이잖아. 어제는 몰라도 오늘은 너희랑 같이 밥……”
그쯤.
“스텔라, 미안한데.”
루비아가 말하는 사이에 내가 불쑥 끼어들었다.
갑작스레 손을 위로 들자 내게로 의문 섞인 시선이 모인다. 수업이 끝난 뒤 챙기던 가방끈을 어깨에 둘러멘 상태에서, 루비아를 흘기듯 돌아본다.
“너 오늘은 유리랑 둘이서 먹어야겠다.”
“……응? 왜, 요…?”
한 글자로 반문하려던 스텔라는 황급히 뒷말을 덧붙인다. 저럴 거면 그냥 말 놔도 되는데.
아무튼 내가 답했다.
“얘랑 따로 할 얘기가 있거든.”
“…어? 나?”
루비아가 바보처럼 의문을 흘렸다.
다음 교양 강의까지는 시간이 꽤 남았다.
루비아도 마찬가지.
그 공백 속에서 나는 루비아와 아주 많고 많은 질답을 나누어야만 했다. 그것을 루비아 본인이 원치 않더라도, 어떻게든.
루비아의 상태는 날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더 큰 사고 하나 칠 거 같다. 오랜 경험과 직감으로 확신하건대, 그리 멀지 않은 미래였다.
“에, 에지오? 나 괜찮아. 진짜 괜찮은데……”
루비아의 영롱한 녹빛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파랗게 질린 얼굴에 떠오른 건 당혹감이었다.
그래도 어쩌겠나. 한 번 그러하기로 결정한 이상 내 쪽에서 굽힐 수는 없었다.
다그치듯 냉정한 눈길과 함께 말한다.
“헛소리하지 마, 루비아. 내가 널 몰라?”
“……”
내 질책 아닌 질책에 루비아는 멍하니 침묵했다. 뭔가 하려던 말을 도로 삼키곤, 시계추처럼 흔들리던 시선을 슬그머니 아래로 내렸다.
…사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참 우스운 일이긴 하다. 내가 널 모르냐니. 충분히 모르고도 남지 않는가. 중등부 시절 루비아와 내가 떨어져 있던 기간은 생각보다 길었으니까.
어릴 적 하루의 시작과 끝을 늘 함께했던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같은 길에서 다른 꿈을 꾸게 되었다.
그러니, 서로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게 되었다. 항상 공유하던 일상이 각자 다른 방향으로 어긋나기 시작했다.
로르센 아카데미라는 특정한 공간에 분명 같이 존재했음에도, 나와 루비아는 어쩌면 친구 미만이었을 불안정한 관계를 졸업 직전까지 유지했다.
아니, 지금도 딱히 달라진 건 없었다.
오히려 더 복잡해진 상태지.
남은 5년을 루비아와 이렇게 씁쓸히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오늘을 기점으로 천천히 풀어보려고 한다. 미처 풀어내지 못한, 우리 사이에 얽혀 꼬여버린 매듭을. 될지 안 될지 몰라도 일단 시도 자체는 해봐야만 하는 것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지금처럼 누군가에게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고민을 끌어안고 있을 때, 곧장 내게 마음 편히 털어놓았을 텐데. 루비아는 현재 그러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당연했다.
한층 어두워진 눈가.
불안정한 시선.
눈에 띄게 홀쭉해진 몸.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치명적인 실수까지.
한때 루비아의 가장 친했던 친구로서,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예정인 사람으로서.
더 이상은 가만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러니까 오늘은 먼저 가줄래? 미안해.”
“……아, 아녜요.”
미안할 것까지는 없다는 듯, 고개를 휘휘 저었던 스텔라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우리를 지켜보다가.
꾸욱.
주먹을 쥔 양손을 몰래 들어 보이며, 루비아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나를 향해 무언의 응원을 보내오곤, 가방을 챙긴 뒤 강의실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
“……”
이제 널찍한 강의실 안에는 우리 둘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조용한 적막에 휘감기자 루비아의 표정이 슬쩍 바뀌었다. 나 말곤 볼 사람도 없어서 그런지, 종일 괜찮은 척하던 연기마저도 마침내 힘에 부친 듯했다. 결국 루비아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전혀 익숙하지 않은 분위기. 저런 식으로 축 늘어진 표정은 루비아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그 모든 원흉이 어쩌면 나한테 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하니, 괜시리 머리가 더 복잡해졌다.
“루비아.”
“…응.”
힘없는 대답.
내 눈을 피하는 루비아로부터 등을 돌렸다.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여기서 얘기하긴 좀 그러니까, 밖으로 나가자.”
#13
기분 좋은 산들바람이 분다.
봄철의 한낮은 따스했다. 내리쬐는 햇살에 녹아내리며, 싱그러운 잎내음을 풍기는 녹음(?)으로 사방이 뒤덮여 있었다.
루비아는 걸음이 느렸다.
기운이 없었으니 당연한가.
그런 루비아의 페이스에 맞추어 나 역시 천천히 걸었다. 나무와 잎사귀들 사이로 난 오솔길 위에서 우리는 대화 없이 걸음을 맞추었다.
요전번에 우연히 루비아와 마주쳤던 산책로.
이 끝에 있는 오두막 앞 벤치에서, 얇은 네글리제를 걸친 루비아와 짧지만 긴 대화를 나누었던 기억이 있다. 어릴 적의 추억을 잠시 회상하기도 했었지. 결말은 그리 좋지 않았던 것 같았지만.
가급적 사람이 적은 장소를 고르고 싶었다. 얘기가 길어질 수도 있었으니 앉아서 쉴 곳도 필요했고.
무엇보다 여긴 편안한 활력과 생기가 가득한 공간이었다. 잔뜩 지친 마음을 힐링하며 달래기엔 최고로 적절한 장소가 아닐까.
루비아도 마음을 정리할 필요가 있겠지. 그러니 나는 섣불리 말을 꺼내지 않았다. 물론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고민도 해야 했고.
—타박, 탁…
상념에 잠겨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다 보니, 어느새 산책로의 끝이자 목적지에 도착한 채였다.
거목들 아래 고스란히 안치된 쉼터가 보였다.
작은 오두막. 넝쿨진 벽면. 맑은 연못가와 수면 아래서 힘차게 헤엄치는 알록달록한 물고기들. 얼마 전 루비아가 앉아 있었던 벤치를 슬쩍 돌아본다. 잠시 뒤 그곳으로부터 시선을 거두었다.
“들어가자.”
내가 먼저 앞으로 향했다. 그로부터 잠깐의 텀을 두고 조용히 나를 뒤따르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끼 낀 석재 계단을 한 칸씩 오른다. 같은 행동을다섯 번쯤 반복했다. 얼마 걷지 않아 오두막 문의 손잡이를 잡을 수 있었다.
—끼이이익…
낡은 경첩이 삐걱거리며 울음을 토했다. 나를 뒤따르던 루비아가 들어오기 전까지 손잡이를 놓지 않고 있었다.
이윽고 루비아의 발이 문턱을 넘어서자, 나는 오두막의 문을 닫고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째깍. 째깍.
벽면에 걸린 시계의 초침 소리가 들린다.
붉은 융단이 깔린 거실. 그 위에 자리한 건 흔들의자였다. 무척 푹신해 보이는 방석이 깔려 있다.
누군가 관리를 하는 모양인지, 먼지는 의외로 쌓이지 않은 채였다. 그건 다른 구조물도 마찬가지였다.
벽면에 놓인 작은 소파. 그 옆의 벽난로. 버드나무 테이블. 쟁반 위에 올려진 아기자기한 찻잔들과 주전자. 이곳을 찾은 학생들을 위한 찻잎들. 찻물을 우려낼 수 있는 마공학 기계. 저 뒤에 누워서 쉴 수 있는 침대도 보인다. 이불은 곱게 개어져 있었다.
“여기 앉아 있어. 차라도 내올 테니까.”
“……응.”
루비아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루비아는 흔들의자와 소파 사이에서 고민하는 듯하더니, 결국 흔들의자에 착석했다.
곧이어 얌전히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로 등받이에 몸을 기댄다. 이전까지는 왠지 모르게 긴장한 모양새였는데, 이곳의 편안하고 조용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는지 살짝 느슨해진 듯했다.
끼익, 끼익… 흔들의자가 앞뒤로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그 규칙적인 소리를 배경 삼아 나는 엽차로 우려낼 찻잎을 신중히 물색했다.
문득 입을 열었다.
“루비아.”
“……?”
내 부름에 루비아가 머리를 옆으로 돌렸다. 서서히 밀려오기 시작한 피곤에 젖은 듯 나른해진 그녀의 눈빛을 마주하면서.
“이슬차에 꿀 좀 타려는데, 어때?”
그리 말하자.
루비아는 조용히 되물었다.
“……어떠냐니?”
말뜻을 이해 못 한 것 같았다.
“네가 좋아하던 거잖아. 아직도 좋아하나 싶어서.”
“……”
딱히 뭘 첨가하지 않아도 단맛을 내는 이슬차에 꿀까지 타서 마셨다.그런 루비아의 입맛을 따라 달달한 차를 마시다 보니, 나 역시 어느샌가 단 음식을 좋아하게 되었다.
적잖은 시간이 흐르며 예전만큼 선호하진 않게 되었으나, 가끔 생각날 때 초콜렛을 입에 물곤 한다.
루비아는 한참 대답이 없었다.
그래서, 기다렸다.
식기 거치대에서 두 개의 찻잔을 꺼내었다. 깨끗해 보여도 혹시 모른다. 간단한 클린 마법으로 해결했다. 달그락거리며 차를 우려낼 준비를 하는데, 여전히 들려오지 않는 대답에 나는 잠시 루비아가 앉아 있을 흔들의자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반쯤 닫힌 눈꺼풀 사이로 보이는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나를 멍하니 주시하고 있었다. 무척 흐리멍텅한 빛깔이었는지라, 금방이라도 스르르 감긴 눈꺼풀에 감싸여 잠에 빠져버릴 듯했다.
벽난로 안에는 불이 붙어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에겐 마치 타닥거리며 따스한 불길이 타오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작은 오두막은 다락방이 없는 것을 제외하면, 그때 그 시절의 내 집과 지극히 유사했던 탓에, 흔들의자에 앉은 루비아를 통해 과거의 환영을 불현듯 겹쳐보고 말았던 것이었다.
나는 꿀 탄 이슬차를 아직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루비아의 입술이 살짝 벌려졌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응. 좋아해. 그때부터 지금까지, 쭉.”
……아마.
옛날 옛적에 자주 마셨던 차를 지금도 좋아한다는 말이었겠지만.
차를 끓이는 동안 한순간도 끊기지 않고 내게 머물러 있던 루비아의 눈길은, 어쩐지 그 의미를 조금 불투명하게 물들이는 듯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