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차버린 소꿉친구와 전 여친이 같은 반이라 곤란하다-63화 (63/201)

〈 63화 〉 같은 길, 다른 꿈 (7)

* * *

#14

“자, 여기.”

“고마워.”

받침 접시 위에 올려진 찻잔.

능숙한 손길로 그것을 루비아에게 건넸다.

뜨거운 표면을 후후 불던 루비아. 기력이 없는 건지 찻잔 안에 담긴 액체가 불안정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접시로 지탱하고는 있지만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덜컥 쏟아버릴 듯했다.

—흐룹.

그럼에도 마침내, 입술을 촉촉히 적신다.

내가 물었다.

“어때?”

“……따뜻해.”

“그건 당연한 거고.”

“에헤헤…”

루비아가 슬며시 웃었다.

“따뜻하고… 달아. 굉장히, 맛있어.”

“다행이네.”

진심이었다.

내 손에 들린 찻잔 안에도 루비아가 방금 마셨던 차와 동일한 것이 담겨 있었다. 접시를 들고선 루비아의 맞은편으로 향했다. 흔들의자가 아닌 작은 소파. 그곳에 착석해 차 한 잔의 여유를 즐겼다.

뜨거운 액체가 흐름에 혓바닥이 놀랐다. 감미로운 향과 달큰한 맛을 음미하고 있자니, 미적지근한 상태가 되어 목구멍 너머로 유연히 내려간다. 차츰 하복부가 따스해졌다.

마실 거 외에 집어먹을 거라도 준비되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아직 리필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 뒤로 두어 번쯤 차를 음미한 다음 접시와 함께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째깍. 째깍.

고요한 오두막 안에서 우리는 편안히 있었다.

지금은 봄철이고, 무릎 담요도 없고, 벽난로는 꺼져 있는 상태였지만. 시간이 흐르고 흘러 눈 내리는 겨울날, 여기를 찾아온다면 썩 좋은 운치를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설한과 한기에 꽁꽁 얼어붙었던 몸이든, 마음이든. 전부 물처럼 녹아 사라져 버릴 듯했으니까.

“편안하네.”

“응.”

그 이상의 감상은 필요 없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던 까닭이다.

왠지 그리운 듯한 느낌이 밀려오는 오두막. 아주 잠깐일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지금의 우리는 보다 어려져 있을 터였다. 뿐만 아니라, 옆에는 서로의 부모님이 계실 테고. 딱딱한 쿠키보다는 귤을 까먹었겠지. 그러다 어느 순간 잠에 들어 있을 것이었다.

“…에지오.”

바람을 맞이한 촛불처럼 흔들리던 내 정신을 일깨운 건, 루비아의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눈을 깜빡였다. 루비아가 묻는다.

“그쪽으로… 가도 돼?”

“……”

나는 잠시 내 옆을 돌아보았다.

작은 소파다. 나 하나 앉은 것으로 공간의 2/3 정도를 차지하고 있었다. 앉으면 분명 좁을 텐데. 루비아의 체형을 생각해 보면 아예 불가능한 일도 아니겠지만, 필연적으로 답답하게 부대낄 수밖에 없는 형태였다.

그런 점에서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좁아. 안 돼.”

내 거절에 루비아가 시무룩해졌다.

“…예전에는 그런 거 신경 안 썼는데.”

“……”

그 말대로다. 좁은 소파에 누가 먼저 앉아 있든 말든, 같이 앉고 싶으면 그냥 걸어가서 폭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어린 루비아를 내 허벅지 위에 두고선 같이 잠에 빠져든 적도 있었다. 중간에 피가 안 통했던 나머지 루비아를 도로 깨우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예전의 일이다.

우리의 몸과 정신은 성장했고,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다. 소파가 좁은 것도 있긴 하나, 우리는 친구였으니까. 평범한 친구 사이라면 정도 이상으로 몸을 밀착시켜 앉는다거나 그러지 않을 터다.

…그렇다고 소꿉친구인 우리가 평범한 친구 사이냐, 하고 누군가 내게 그리 묻는다면, 나는 감히 긍정의 대답을 내놓을 것이었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지금.

어쩌면 그 평범한 친구 사이보다 못할지 모르는 관계가 바로 우리들이었다.

여기까지 온 목표를 떠올리자 머릿속이 차분해졌다. 휴식할 장소가 필요하긴 했지만 오로지 휴식만 해서는 안 되었다.

오두막으로 향하던 길목에서부터 생각해 두었던 말들을 하나씩 꺼내기 전에, 나는 가장 중요한 정보 하나를 입에 담았다.

“루비아.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이제 시작이라는 걸 깨달은 것일까. 루비아가 찻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나를 바라본다.

“……응. 뭔데?”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저번 사고로 기억의 일부를 잃었어. 그래서 아마, 네가 나한테 가장 궁금해할 부분에 대해선 대답해 줄 수 없을 거야. 자퇴 이후 나한테 무슨 일이 있던 건지, 네가 날 찾아다녔다고 했을 때 나는 어디에 있었는지…… 전부, 잊어버렸어.”

“……”

내 말에 루비아는 한동안 벙쪄 있었다.

잠시 뒤 힘겹게 말했다.

“그게… 정말이야?”

“그래.”

내가 덤덤히 머리를 끄덕이자.

왠지 두려운 눈길로 다시금 묻는다.

“어디, 어디까지… 잃어버린 건데? 서, 설마 어렸을 때도 잊어버렸어? 나, 나랑……”

“그건 아니야. 그랬으면 네가 너한테 아까 이슬차 좋아하냐고 묻지도 않았겠지. 거긴 아직 멀쩡해. 내가 잊어버린 건 방금 말했던 것들이랑, 사고를 당했을 때의 기억. 그리고……”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할까.

“네가 날 찾아다닌 이유. 그때 연회장에서 네가 나한테 사과했던 일. 거기에 관련된 것도 아마, 전부 잃어버린 것 같아.”

“……!”

루비아가 몸을 움찔거렸다. 저 반응을 보면, 나와 달리 루비아는 뭔가 알고 있겠지.

“…그래서 난 네가 나한테 죄책감을 가진 이유를 몰라. 대체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이러는 건지도. 지금 나를 어렵게 여기는 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사고를 당하기 전 내 태도가 워낙 차가웠기도 했고, 무엇보다… 과거의 일도 있었으니까.”

세세하게 언급하진 않았다.

직후, 나는 조심히 물었다.

“나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어?”

“……”

루비아는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찻잔이 올려진 테이블을 보고 있었다.

대답이 늦는다.

무엇을 그리 고민하는 건지, 격한 파문이 일어나기 시작한 눈동자. 입술까지 열렸다 닫혔다를 계속하여 반복했다. 속이 바싹 타들어 가는 모습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한참을 그러다 루비아의 입에서 나온 말은.

“…에지오 너는… 나를, 구해줬어.”

“……뭐?”

전혀 예상도 못한 이야기였다.

내가 루비아를 구해주다니?처음 듣는 소리다.

기억을 잃었으니 당연한 거겠지만, 동시에 나는 새로운 의문 하나를 떠올리고 말았다.

…정말로 내가 루비아를 구해줬다면.

그건 루비아가 내게 감사해야할 일이지,

이렇게 미안해할 일이 아니었다.

“나도, 나도 잘은 몰라. 졸업 전 마법부 합숙 날이었어. 그때 조교 자격으로 졸업부 선배님이 오셨었거든. 그 선배님이랑 점심 식사 재료를 사러 상점가로 가던 길에…… 내가 마족한테 납치 당했었나봐. 당시 기억이 나한테 없어서…… 그렇게 들은 거지만 아마 맞을 거야.”

납치. 마족.

흉흉한 단어들에 내 표정이 심각해졌다.

루비아가 슬그머니 시선을 올린다. 무언가에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수면 위에 작은 돌이 던져진 듯, 파문이 일렁거리는 녹빛 눈동자가 촉촉한 물기를 더해가기 시작한다. 한마디씩 끝마칠 때마다, 루비아의 얼굴이 죄악감으로 물들어가는 듯했다.

“…거기에 에지오 너도 휘말렸던 것 같아. 그래서, 그래서 네가 날 구해줬어. 마족들한테 엄청 심하게 당하면서까지, 구해줬대. 날 구해줬던 건 같이 있던 선배님이 아니라… 에지오, 너였대.”

그때의 기억을 어렵사리 떠올리는 듯한 루비아를 바라보던 내 가슴속에서, 무언가 꿈틀거렸다. 정체는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난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목숨을 걸어 날 구해줬던 너한테, 너를, 배신해버렸어. 네가 아닌 선배님이라고 착각해서… 네가, 거기 있었을 리 없다고. 멋대로 판단해서… 고맙단 말을 몇 번이고 전해도 모자랐을 텐데… 그 반대의 상처를 줘버린 거야. 네가 나를 구했단 사실을 알아주지도 못하고… 그대로 사라지게 놔두고… 그제서야, 너를 찾기 시작했던 거야. …나는, 진짜 나쁜 년이야. 쓰레기야. 나는 평생, 에지오 너한테……”

“……진정해, 루비아.”

점차 감정이 격해지는가 싶더니 결국 자학까지 이어졌다. 그것도 아주 거칠고 강한 세기의 자학이었다. 루비아의 입에서 쓰레기란 직설적인 단어가 나올 줄은 몰랐다. 루비아가 입술을 꾹 다물고선 은구슬 같은 눈물을 또르르 흘려댔다.

…루비아의 말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 속에 담긴 감정만큼은 절절하게 전달되었다.

겉으로 흐르는 눈물의 의미보다 훨씬 짙고 어두운 죄책감. 죄악감. 뒤엉킨 고마움. 결국 시간 내에 해결하지 못해 묵히고 묵혀서 가슴 깊숙이 고여버린 감정들.

내가 루비아를 구해줬다는 건가.

역시 기억은 없다.

종합하자면 마법부 합숙 당일 루비아가 마족한테 납치를 당했고, 마침 그 주변에 있던 내가 휘말렸다가, 루비아를 마족으로부터 구출했단 걸까.

솔직히 루비아 쪽에서 뭘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허무맹랑한 이야기였는지라, 나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적어도 루비아는 그 얘기를 사실로 믿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건 이후 홀연히 사라졌을 나를 찾아다녔고, 그 과정에서 몸이든 마음이든 고생을 적잖게 했을 것이며, 결과는 지금 루비아의 모습으로부터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었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과거의 기억에서 마지막으로 끊긴 부분은 거기다.

뮤의 생일 전날.

아마도, 11월 18일.

그 이후의 기억이 내겐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때 루비아가 말한 일이 벌어진 게 아닐까. 상점가로 향하던 길이라고 했지. 뮤의 생일이었다면, 나는 예약해 두었던 반지를 찾아가기 위해 상점가에 있었을 거다. 점심 식사 재료를 사러 간다 했으니 대낮이었을 테고. 뮤와의 약속 시간은…… 1시, 였을 테니까. 그 이전에 일이 벌어졌다면——

나는 잠시 침묵하고 말았다.

뮤의 생일. 지금은 보이지 않는 반지. 생일날의 약속. 그 이전에 벌어진 사건.

막연한 의심이 현실로 변해가고 있었다.

…정말로.

약속을 못 지켰구나.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또 다른 의문이 생겨난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 이유는 오로지 나한테 있었을 텐데. 왜, 글쎄. 내가 사건에 휘말렸다면. 그 이후 홀연히 사라졌다면. 뮤는 말도 없이 떠나간 나를 원망해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니, 잠깐만.

그게 있었다. 편지.

아무래도 과거의 나는 뮤에게 편지라는 걸 써서 전달한 모양이었다.

…왜? 어째서?

잘못할 일을 저지른 건 내가 아닌가.

나름의 사정이, 오해가 있었다고 해도.

일평생 단 한 번밖에 존재하지 않을 시간을 망쳐버려서, 결국 크게 상처 입었을 뮤의 마음은 그대로이지 않는가.

빌어먹을. 머리가 너무 혼란스러웠다.

일단 여기선 루비아와 담판을 짓는 것이 목적이었다. 잃어버린 기억들에 대해선 이로 말미암아 뮤와 대화를 나눔으로써, 대부분 알아낼 수 있겠지. 다만 내가 직접 경험한 게 아닌지라, 그걸 현실이라 받아들이는 데까진 시간이 꽤 걸릴 테지만.

미안해, 라는 말을 자꾸 토해내는 루비아에게 다가갔다. 안 그래도 좋지 않은 상태였다. 루비아가 여기서 더 부정적인 감정에 잡아먹혀 버리면, 썩 어두운 미래가 펼쳐질 것 같았다.

아직 유리에게 돌려받지 못한 손수건. 그것 대신 새로운 손수건을 품속에서 하나 꺼냈다.

“울지 말고. 고개 들어봐.”

유리와는 다르다.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었다. 하지만 루비아는 머리를 느릿하게 내젓는다. 한숨과 함께 다리와 허리를 굽혔다.

울먹이던 루비아의 눈동자를 마주한다.

길게 늘어진 루비아의 연분홍빛 머리칼을 옆으로 쓸어내리면서, 나는 손을 뻗어 루비아의 눈물자국을 스윽 닦아내기 시작했다.

루비아가 내 손수건을 빼앗아 들어 자기가 닦으려 하는 듯했지만, 나는 다른 손으로 루비아의 팔을 잡고 그 행동을 제지했다.

“내가 널 구한 게 사실이라면 나는 기쁠 거야. 결국 넌 이렇게 살아 있고, 나도 이렇게 살아 있으니까.”

정말 가녀린 팔목이었다. 조금이라도 힘을 세게 주면 부러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연약했다.

“그러니 나한테 미안해하지 마. 고마워해야지.”

“……”

“솔직히 나는 아직 이해가 잘 안 돼. 기억을 잃기 전의 내가 너를 정도 이상으로 불편하고 차갑게 대한 것 같아서. 아마, 나한테 무슨 큰일이 있었던 건 확실하겠지만. 그건 지금의 내가 아니야.”

어쩔 수 없는 거다. 내겐 경험이 없으니까. 루비아와 가급적 빠른 시일 내에 대화를 나누기로 한 것도 이래서였다.

……혹시라도 기억을 되찾게 되면, 나는 루비아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게 되어버릴 것만 같았으니까.

“하나만 말할게. 네가 요즘 힘든 이유가 혹시 나 때문이라면, 그건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

“내가 널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다고 했었지. 아냐. 싫어하지 않아. 좋아하는 편이지. 누가 뭐래도 너는 내 친구잖아. 벌써 9년 된 친구. 어린 시절을 함께한 소꿉친구니까.”

그래.

이게 맞는 거다.

우리는 언제까지고 친구였다. 어느 무엇도 아닌 친구였기에, 서로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가 될 수 있었다. 그런 인연과 추억들을 중등부 때의 나는 함부로 깨뜨리려 했다. 그렇게, 결국 깨져버렸다. 처음부터 따지고 들어가자면, 지금 루비아와 내가 이렇듯 멀어지게 된 것은 오로지 나의 탓이었다.

천천히 부드러운 손길로 루비아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여전히 글썽거리고 있는 눈동자에선 언제라도 금방 물방울을 흘려댈 듯했지만, 내가 울지 말라고 했기에 가까스로 참는 모습이 보였다. 대견했다.

한층 수그러든 울먹임.

내가 입을 열었다.

“루비아.”

“……응. 에지오.”

물기가 어린 목소리였다.

조용히 말을 이었다.

“중등부 때, 널 무시해서 미안했어.”

“……”

“너무 늦긴 했지만… 그때 약속을 못 지켜서 미안해. 너랑 계속 친구로 지내주겠다고 했는데. 안 될 거였다면 그러겠다고 말하지도 말 걸 그랬나봐.”

“……”

“루비아, 내가 너를 좋아했던 건 사실이야. 좋아하는 걸 넘어서서­ 사랑하기도 했지. 결국 그것 때문에 우리가 멀어져 버렸지만. 그것도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이제는 담담히 말할 수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사랑이란 말을 입에 담으며 부끄러워 했을지도 모르나, 지금은 아니었다.

그래. 시간이 많이 흘렀다. 나도, 루비아도. 많이 변했다. 성장했다.

또 다른 소중한 인연을 만나고, 결국 또 한 번의 실수를 저지르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어른이 되어가는 계단 위에 발을 올릴 수 있었다.

루비아가 나를 본다. 나도 루비아를 본다. 거리는 가까웠다. 어린 시절에는 이보다 더 가까웠던 적도 있었다. 많았다. 그러나 우리는 성장했다. 그래도 친구였다. 어디까지나 친구이기에, 얼만큼 소중하다고 해도. 더 이상 선을 넘지 않는다.

어차피 루비아도 나를 친구로 생각한다. 그렇다면 거리낄 것 없었다. 손수건을 그녀의 얼굴에 가져다 댄 채로 지긋이 바라보았다. 서로의 숨결마저 섞여들 거리. 정말, 우습게도. 예전에는 저 연분홍색 입술을 바라보며 아주 강렬한 충동을 느꼈었다.

아니었다. 지금은.

“이제는 지킬 수 있어.”

왠지 안도하기도 했다.

드디어, 완전히 떨쳐낸 것 같아서.

루비아가 원하던 그 친구 관계를.

마침내 이뤄줄 수 있게 된 것만 같아서.

그런 말을 꺼냈다.

“나랑, 계속 친구로 지내줄래?”

“……”

우리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멍하니, 루비아가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

나는 루비아의 반응을 어렴풋이 예상했지만.

……그것은 결국, 빗나가고 말았다.

현재 루비아는 심신이 매우 미약한 상태였다. 건강도 좋지 않았고, 오늘은 실수로 죽을 뻔한 사고까지 있었다. 그걸 구해준 건 나였다. 어쩌면 루비아를 두 번, 아니, 세 번씩이나 죽음으로부터 구해주었다. 영원토록 기록될 사실이었다.

그간 육신에 쌓이고 쌓인 피로. 케케묵은 감정. 옛 추억이 떠오르는 오두막. 비로소 나와 진심으로 마주할 수 있게 된 상황. 오랜 시간 동안 만나지 못했던 우리들. 그 어느 때보다 가까워진 거리에서 느껴지는 반가움, 그리움, 혹은——

짧은 물음이었다.

“…그냥, 친구야?”

반쯤 감긴 눈꺼풀.

몽롱한 목소리가 흐른다.

루비아는, 이내 알 수 없는 말을 한다.

“친구로…… 끝인 거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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