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화 〉 같은 길, 다른 꿈 (8)
* * *
#15
한마디.
말의 진의(?)라는 것은 우습게도, 말에서 찾을 수 없다.
그 사람의 행동. 몸짓. 호흡. 동공. 그들을 둘러싼 배경. 대화의 흐름. 유리창 같은 눈동자에 비치는 나 자신. 누군가의 말에 담긴 속뜻을 헤아리는 데엔 직감이 필요하다. 그 직감은 아주 작고 많은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 인공이었다. 그러니 직감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면, 사소한 것들부터 하나씩 검토해 나가면 된다. 매우 신중하고 침착하게.
그게 될 리가 있나.
도저히 침착할 수가 없었다.
이건, 역시——
……
3년 전, 루비아는 내 고백을 거절했다.
다시 말해서 날 차버렸다.
그때 우리는 6년이란 시간을 같이 쌓아 올렸었다. 그것으로 충분할 줄 알았다. 글쎄. 아무래도 부족했던 것 같다. 그래서 고백했다.
이미 루비아와는 한 가족이나 다름이 없었음에도, 대체 무엇을 더 갈구했기에.
아니, 그런 것보다는 루비아를 다른 사람한테 빼앗기기 싫어서, 였다. 막 입학한 중등부 학생답게 치기 어린 생각이었다.
달리 말해 독점욕. 혹은 소유욕. 남들에 비해 한참이나 뒤떨어지던 나 자신. 그러니 끝도 없이 밀려오는 열등감.
나는 지금 그 모든 걸 극복한 상태였다.
열등감을 느낄 이유가 없었다.
물론.
내 앞의 루비아는 여전히 나보다 대단하다.
대륙 최고의 재능들만 모인다는 에픽 클래스라지만, 여기서의 내 위치는 끝 번호. 15번이다. 내 위로 14명이나 되는 동급생들이 나보다 높은 가치를 부여받았다.
그래.
14명이었다.
그런 내 아래로 수만 명에 달하는 프론티어 학생들이 있었다.
더 나아가, 프론티어에 입학하지 않고 평범한 아카데미 고등부에 진학했을 터인 학생들. 그들이 전부 내 아래에 있었다.
근본부터 철저히 뒤바뀐 나는 그토록 바라 마지않던 천재의 반열에 기어코 들어갈 수 있었다.
현재의 내게 열등감은 무엇 하나 존재하지 않는다. 일평생 이루지 못했던 것에 대한 끝없는 성취욕과, 내 앞을 가로막는 벽을 쳐부수고 싶을 뿐인 호승심. 그것을 기반으로 몸과 정신이 굴러가고 있었다.
빈틈없이 꽉꽉 들어찬 그곳에 열등감이란 쓸모없는 감정이 들어갈 공간 따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어쩌면.
사랑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뭘 묻고 싶은 거야?”
내 한마디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의 격류가 소용돌이친다. 루비아의 눈동자에 해일이 일어났다. 방금까지 몽롱한 눈의 루비아를 잠식하고 있던 모든 감정이 파도에 휩쓸리듯 수면 너머로 사라지고, 그 빈자리에는 마침내 되찾은 이성이 썰물처럼 밀려들었다.
“아, 아. 으응. 그게…”
형태 없는 비명이 메아리치는 듯했다. 자기가 대체 무슨 말을 한 건지도 이제야 자각한 게 분명했다.
그러나 나는 아직 의심 단계에 그쳐 있을 뿐이었다. 단지 루비아의 육신이 잔뜩 피폐해진 상태에서 내뱉은 헛소리, 그 정도로 치부하고 넘길 수 있는 기회가 당장은 존재했다.
아니면 그대로 밀고 나가도 좋았다.왜, 글쎄. 그럴 수도 있지. 우리는 무려 9년이란 시간을 함께한 소꿉친구였으니까. 정말 예전처럼 친하게 지내길 원한다면 그것은 평범한 친구 관계로선 절대로 불가능할 일이다.
그러니 조금 더 욕심을 내는 거다. 그냥 친구로 끝나는 게 아닌, 조금 더 밀접한 관계로. 어렸을 적부터 인연이 이어져 왔던 소꿉친구로서.
그렇게 생각한다면 별로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 나는 그냥… 아니, 내가 왜 이런 말을……? 그게, 있지. 에지오… 그게……”
루비아의 얼굴이 잘 익은 복숭아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심장박동 소리 너무 커. 여기까지 다 들린다. 빈말이 아니라 진짜로.
알고 있어.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그런 식의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걱정 마. 여기서 내가 제일 소중하게 생각하는 친구는 너 한 명뿐일 테니까.”
“……”
거짓 하나 없는 진심이노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우리반을 넘어서서 프론티어 전체. 그 밖의 공간. 내 주위의 인간관계 중 여전히 독보적인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루비아였다.
그만큼 소중하게 생각했기에, 불안한 미래를 감수하고서라도 어떻게든 그녀의 피폐해진 심신을 걱정하면서, 결국 이리 용서하기로 결정했잖는가.
다만 그것이 설령 거짓 용서라 할지라도, 때론 결과가 어찌 될지 알면서도 몸소 강행해야 할 상황이 찾아오는 법이다.
언젠가 후회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럼 나는 후회할 만한 결과가 절대 나오지 않도록 늘 그랬듯 노력할 뿐이다. 포기하지 않고 부딪힐 뿐이다. 결국 나로 인해 그녀들이 고통받지 않도록 만들어 보일 것이었다. 반드시. 어떻게든.
“친구… 응. 그렇지. 우린 친구… 니까.”
루비아는 애써 웃는 듯했다.널 예전처럼 여기겠단 말을 해줬는데도, 별로 만족하지 못하는 듯한 미소의 진의를 파악할 수 없다. 딱히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까닭이다.
문득 루비아의 얼굴에 수심이 깃들었다.
“…미안해. 에지오.”
왜 사과를 하는 걸까.
그러면 안 될 텐데.
태연히 되묻는다.
“…응? 왜? 그리고 미안해하지 말라니까. 고맙단 말이 더 듣기 좋아.”
“으응, 그게 아니라.”
루비아가 고개를 느릿하게 내저었다.
“……중등부 때, 널 혼자 놔둬서. 네가 날 불편히 여긴다고 생각해서, 내 멋대로 다가가지 않고… 너랑 이렇게 멀어져 버린 게, 전부 내 탓 같아. 그래서 미안해.”
“그건 네 탓이 아니야. 루비아.”
루비아가 사과할 부분은 없다.
애초에 내가 고백을 하지도 않았으면. 내 편의를 봐주려는 루비아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으면. 생애 첫 실연에 대한 허무와 상실감을 메꾸려 미친 듯 독서에 열중하지 않았다면—— 우리의 친구 관계는 지속될 수 있었겠지.
물론…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루비아에 대한 나의 마음을 공들여 깎아 나가며, 결국 이제서야 전부 치워낼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러기 전에는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들 루비아와 예전과 같은 관계를 다시 구축할 수 없었을 것이었다.
“뭣보다 멀어진 것도 아냐. 우리, 아직 친구잖아.”
“……”
공감을 원하며 어깨를 작게 으쓱였다.
그렇지만 루비아는 도리질을 했다.
“…사실, 나 조금 무서워.”
“뭐가?”
“에지오, 네가… 없어져 있는 동안, 되게, 되게 힘들었어. 너랑 같이 갔던 장소는 다 가봤어. 가족 여행을 갔던 곳도. 고향 마을도. 그런데, 어디에서도 널 찾을 수가 없어서…… 많이 힘들었어. 무서웠어. 네가 내 곁에서 영원히 떠나버린 것 같아서.”
“나는 여기 있어, 루비아.”
“응. 알아. 돌아와줘서 고마워, 에지오. …그치만, 네가 또 멀리 떠나버리면. 나 이제 정말 못 버틸 것 같아. 계속, 계속 내 옆에 있어줬으면 좋겠어. 어디에도 가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어디 가지 않아. 여기 있을 거야.”
“으응, 그것도 알아. 그래서 고맙고, 미안해.”
기껏 진정하나 싶었더니.
눈물이 눈꺼풀 아래서 방울지고 있었다.
울보였다. 언제나처럼.
다시금 손수건으로 스윽 닦아주자니, 이번에는 아까와 달리 적극적으로 내게 머리를 맡기는 듯했다.
손수건을 걷어내자 왠지 아쉬운 듯한 녹빛 눈동자가 슬며시 드러났다. 작은 한숨마저 토해낸다. 숨결 속에 어린 기묘한 열기. 좀 더, 무언가를 갈구하고 있는 듯한 눈빛이었다.
무엇을 씹지도 삼키지도 않았는데 씁쓸한 맛이 입안에서 감돌았다. 그런 거 아닐까. 누군가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다. 하지만 들어줄 수 없는 상황이다. 결국 찝찝하디 씁쓸할 뿐이었다.
“에지오.”
“응. 말해.”
“나, 무서운 거 하나 더 있어.”
“……뭔데?”
루비아는 진심이 표정에 잘 드러나는 편이었다. 본인은 감춘다고 감추는 것 같은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 눈은 못 속인다. 지금은 마치 어렸을 적 귀신 꿈이라도 꾼 것처럼 자그마한 겁에 질려 있었다. 말하자면 정말로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얼굴이었다.
“이대로 가면, 내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
“…그게 무슨 말이야?”
눈물도 다 닦아줬겠다.
손수건을 고이 접어서 품속에 넣어두려는데, 루비아가 제 얼굴을 쓰다듬던 내 손을 자기 손으로 얌전히 감쌌다.
어린아이처럼 떼를 쓰며, 놓지 말라는 듯.
문득 루비아의 새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 끝에서 불안정한 형태의 손톱을 발견했다. 그 부분만 지극히 짧고 둥글었던 터라, 화일을 사용한 티가 났다.
“요즘 나 이상해.”
“알고 있어.”
지금도 확실히 그랬으니까.
그러니 내가 루비아를 여기로 데려온 거다.
“어디가 아프면 좀 쉬어. 무리하지 말고.”
“그게, 아니야.”
“……그럼?”
무엇을 두려워하는 걸까.
“여태 계속 널 생각하긴 했지만, 지금은. 지금은 그냥… 에지오, 너밖에 생각이 안 나. 하루종일.”
“……”
“네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불안해. 너와 더 얘기하고 싶어. 자격도 없는 걸 알지만 너한테 용서를 받고 싶었고, 중등부 때 하지 못했던 얘기들. 시간들. 지금부터라도 다시 채워 나가고 싶어.”
“……하면 되지. 뭐가 문제야?”
예상 외로 루비아의 상태가 심각한 것 같긴 했다. 게다가 허울에 그칠 줄 알았던 예감마저 틀리지 않았다. 루비아가 이토록 힘들어하던 이유는, 오로지 나에게서 비롯되었던 것이었다.
그 기분은 무어라 설명하기가 힘들었다.
“나는 중등부 때의 너를 잘 몰라. 하지만… 그 친구는 아니더라.”
“……누구?”
루비아는 대답이 없었다.
나도 그걸 딱히 기대하진 않았다.
왜냐면 우리 둘 다 그게 누구인지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질답이 꼭 제대로 이루어질 필요까진 없었다. 루비아가 말하지도 않았는데 나는 잠자코 입을 연다.내가 묻고서, 내가 답한다.
“뮤구나.”
“응.”
지금은 나도 모르게 헤어져 버린.
나의 전 여자친구.
루비아도 어쩌다 뮤에게 들었는지, 나와 뮤가 사귀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밤의 산책로에서 내게 그리 말했었다. 다만 사실을 고했을 뿐이지, 그 이상의 대화는 나누지 않았다.
“내가 모르는 너를……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았어. 네가 사라졌을 때도, 그때 네가 처했던 상황에 대해서도… 나는 몰랐던 걸, 그 친구는 알고 있었어.”
그랬을 거다. 편지를 주었으니까. 안에 무슨 내용이 적혀 있던 건지는 뮤에게 묻기 전까진 아무것도 모르지만.
“당연한 일이잖아. 너의 연인이었대. 그냥 친한 후배인 줄만 알았었는데, 알고 보니 에지오 너의 소중한 사람이었다는 거야. 그럼 내가 모르는 너를 많이 알고 있는 것도 당연해.”
당연하단 말을 하는 루비아의 얼굴은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나는 있지.”
잠깐의 침묵.
“그 친구를 조금 부럽다고 느껴버렸어.”
“……어떤 걸?”
“그냥, 전부 다.”
두루뭉술한 답변이었다.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럼에도 묵묵히 들었다.
이윽고,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 편치 않다는 듯, 한결 조심스러운 눈길로 내게 물어왔다.
“그 친구랑, 지금은…… 아닌 거지?”
“……응. 그렇지.”
여기까지 와서 뮤 생각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내 씁쓸한 웃음을 보았는지, 루비아가 입을 다물곤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잠시 뒤.
“…그래서였어.”
“……뭐가?”
“결국 끝나버린 거잖아. 나는 그런 결말이 무서웠어. 내가 널 거절했던 이유 중에는 아마 그런 두려움이…… 대부분이었을 거야. 나는 가족 같았던 널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아직… 아무것도 몰랐으니까.”
“……”
“그런데 다 부질없더라. 에지오 너랑은 멀어지고, 결국 네가 가장 힘들었을 때 옆에 있어주지도 못했어. 이래선 무슨 소용이야. 네가 없는 동안 나는…… 항상 외로웠는걸. 어떤 형태로든 네가 내 곁에 있어준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야만 했는데. 나 혼자 이기적인 욕심을 내다가, 도리어 모든 걸 망쳐버린 거야.”
마땅한 대답을 찾을 수 없었다. 자책하지 않아도 될 일을 자책하는 루비아에게 지금 필요한 건 뭘까. 마음의 지지대처럼 가만히 감싸고 있는 나의 손을 움직이지 않은 채 그대로 두는 것일까.
“에지오.”
오늘만 해도 수 번째 부르는 나의 이름.
“응.”
“그 친구를… 사랑했어?”
“……”
왜 그런 질문을 하는 걸까.
별로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하면 떠오르고 마는 거다.
내가 뮤를 온전히 사랑할 수 있게 되기까지의 많은 시간들이. 이미 잿빛으로 물들어 지나간 추억으로 남겨졌지만, 그럼에도 되새길 때마다 눈앞의 연분홍빛 소녀를 내가 얼마나 소중히 여겼었는지, 불현듯 깨닫고 만다.
“그래. 사랑했어.”
지금도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흔들림 없는 눈으로 말했다. 내 눈을 마주한 루비아의 몸이 아주 작게 움찔거렸다.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기도 했다.
“……그렇구나.”
뭘 그리 고민하던 건지.
한동안 말이 없던 루비아가 마침내 입을 연다.
“그러면, 에지오.”
이걸로 몇 번째일까——
“너는 나를 지금도… 사랑하고 있어?”
그 말은.
적잖게 당황스러웠다.
……루비아는 착했다. 달리 말하면 순수했다.
그러나 가끔은 지나치게 유약했다.
주로 안 좋은 의미에서.
순수한 루비아를 다루는 방법을 누군가 확실히 깨닫는다면, 어렵지 않게 그녀를 제맘대로 조종할 수 있을 것이었다. 정제되지 않은 순수만큼 타락하기 쉬운 것이 없었다.
네게도, 나에게도.
그 질문은 전혀 이롭지 않았다.
나한테서 무슨 대답이 나올지, 어쩌면 본인도 알고 있었을 텐데. 알면서도 물어보는 거다.
이유가 뭘까. 무언가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인가. 단념인가, 희망인가. 나 자신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를 만큼 루비아의 물음은 무척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그 모든 생각을 정리하는 데에 있어선.
한마디면 충분했다.
“미안해.”
“……”
루비아가 아마도 바라고 있는 것.
나는 그걸 이루어 줄 수 없기에, 미안했다.
……정적이었고 적막이었다.
시간은 거기서 멈추었다.
한참 나와 눈을 마주하던 루비아가 문득 손을 움찔거렸다. 굳어 있던 시간이 다시금 움직인다. 나는 내 손을 그녀의 손으로부터 조심스레 빼내었다.
손수건은 집어넣지 않았다.
아직 쓸모가 있었으니까.
불시에, 루비아가 천천히 입을 틀어막았다. 내게 보이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꼴사납게 우는 얼굴을, 표정을. 입가에서 새어나오는 울음소리를.
그건 의외로 잘한 행동이었다.
나 역시 루비아의 우는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으므로. 그녀가 왜 내 앞에서 갑작스레 울음을 터트리는 건지, 별로 이해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아마도.
최초이자 마지막일 그런 진심을.
몸과 마음이 벼랑 끝에 몰리고 몰려, 평소라면 하지 못했을 말들마저 전부 아낌없이 토해내고 난 뒤에야——루비아는 비로소 모든 걸 깨달은 채 울먹이며 힘겨운 목소리를 낸다.
“그러면, 그럼 나는…… 만약에, 내가, 지금, 에지오 너를… 사랑하고 있는 것 같다고 해도……”
“……”
“우린, 우린… 친구니까. 우리가 그래선 안 되는 거잖아. 그렇지, 에지오…? 내 말이 맞지……?”
“……”
내 머릿속이 싸늘하게 식었다.
…말의 진의라는 것은.
정말 우습게도.
말에서 찾을 수 없다.
부정의 동의를 원하는데.
그렇게 간절하고 애절한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다면—— 나는 대체 어떤 대답을 내놓아야 하는 걸까.
……정말로 오랜 시간이었다.
그간 정처없이 방황했던 우리는 돌고 돌아서 결국 다시 만나게 되었다.
루비아가 그동안의 나를 몰랐듯, 나 역시 루비아에게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것도 모른다.
자세한 얘기를 나누기 전까진 무엇도 알 수 없다. 얘기를 나눈다고 해도 여전히 모르는 건 많을 거다. 우리는 그때 서로의 곁에 있지 않았었으니까.
이제부터 알게 될 테지만.
아마 서로의 모든 것을 알아갈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것은 명백히 선을 넘는 행위였으니까.
“…응. 네 말이 맞아, 루비아.”
스윽.
앉았던 자세에서 조금 뒤로 물러났다.
루비아가 우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눈을 감으면, 환청처럼 귓가에 나지막이 들려온다.
— 미안해. 미안해, 에지오… 하지만 나, 에지오랑 멀어지기 싫어… 계속, 계속 에지오가 내 소중한 친구로 남아줬으면 하는 건… 내 욕심이겠지? 나 완전 나쁜 사람 되는 거겠지? 그치?……
— 아냐, 나쁜 건 나였지. 잘 알았어. 네 말대로, 우리는 앞으로도 친한 친구일 거야.
“우리는 앞으로도 친한 친구일 거야.”
— …정말? 정말 나랑… 계속 친구로 지내주는 거야? 우리, 예전처럼 같이 얘기할 수 있는 거야?
“너와 계속 친구로 지내줄 거야. 예전처럼 같이 얘기할 수 있을 거야. 그건 약속할게. 반드시.”
루비아가 아주 작게 도리질을 한다.
그게 아니라는 것처럼.
루비아의 고개가 차츰 아래로 꺾인다. 뚝, 뚝. 붉은 융단 위에 거뭇한 원이 하나둘씩 찍힌다. 울음소리가 격정적으로 커졌다가, 작아지는 것을 반복했다. 나는 아무런 위로도 해줄 수 없었다.
들고 있던 손수건을 건넸다.
받지 않고 가만히 있길래, 손에 쥐어주었다.
루비아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무언가를 잡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손을 쥐락펴락하다가, 그대로 두었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은 더 이상 뜨거운 김을 내지 않았다.
마실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
……후회하고 있는 걸까.
그러기엔.
“지금 그 말은…… 너무 늦었어, 루비아.”
루비아는 지금 내 말을 듣고 있을까.
그랬을 거다.
들었으니까, 더 크게 울었을 거다.
“에지, 에지오, 나… 나……”
“이러지 말자. 우리.”
예전에, 이미 일어난 일을 없었던 걸로 해달라는 어느 후배의 말도 안 되는 부탁이 불현듯 떠올랐다. 결국 그 부탁은 현실로 이루어졌다.
“방금은…… 못 들은 걸로 해줄게.”
루비아도 정상인 상태는 아니었다. 제대로 된 판단이 잘 안 서겠지. 그녀답지 않은 소유욕과 집착욕이 섞인 충동적인 감정일 수 있었다. 모두, 이해하고 있다. 딱 한 번 정도는. 그녀의 실수를 눈 감아 줄 수 있었다. 그게 맞는 일이었다. 푹 쉬고 나서 다시 생각해 보면, 자기가 대체 무슨 말과 행동을 하고 있는 건지 찬찬히 되짚어 볼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니까, 보여주지 않는다.
본인도 모르는 나의 표정을. 살갗을 손톱이 파고들 정도로 꽉 쥔 주먹을. 그녀를 포기하기 위해 내려놓아야만 했던 많은 것들의 무게를. 차마 떠나지 못한 그것들이 오롯하게 담겨 있는 내 눈동자를.
…네가, 이제 와서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루비아.
네 바람을 이루어주기 위해 내가 얼마나……
뜨거운 한숨을 목구멍 너머로 삼켰다. 가급적 침착하려고 했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흔들의자가 연신 삐걱거렸다. 그 위에서 웅크린 루비아가 새된 울음을 쏟아내고 있었다. 어떤 마음일지 예측하기가 힘들었다.
그게 정말 루비아의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인지조차,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지금 당장은.
…이러려고 루비아를 데려온 게 아니었는데.
어지러웠다. 현기증이 날 것 같았다.
잠시 뜨겁게 달아오른 머리를 식히기 위해서, 나는 자리로부터 벗어났다. 이미 식은 찻잔을 들어 그 안의 액체를 단번에 들이키고, 다시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뒤, 오두막의 문을 향해 걸었다.
다소 힘이 들어간 발걸음이었을지 모른다. 오두막 내부가 쿵쿵 울리는 듯했다. 루비아는 내 뒤편에서 울고 있었고, 그 모습으로부터 등을 돌린 내가 작은 한숨과 함께 조용히 말했다.
“…진정하고 있어. 조금 이따 다시 얘기하자.”
—끼이이익…… 쿵.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그대로 한참 가만히 서 있었다.
푸른 하늘은 더럽게 맑았다.
……타박, 타박.
연못 주변 벤치로 걸어가 힘없이 걸터앉았다.
“……”
눈을 감았다.
깊고 어두운 장막이 시야에 덮어 씌워졌다.
물 흐르는 소리. 풀벌레 소리. 바람결에 잎사귀가 흔들리는 소리. 전부 편안했다.
방금까지 루비아와 같은 공간에 자리하며 터질 것처럼 복잡했던 머릿속이, 맑은 폭포수처럼 한순간에 싹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무심코 헛웃음이 나왔다.
우스운 일이었던 까닭이다.
같이 있으면 불편한 관계가, 정상은 아니잖아.
— 히끅, 흐윽… 에지오……
“……”
굳게 닫힌 오두막 문을 사이에 둔 채로.
루비아는 고개 숙여 울었고, 나는 태평히 흘러가는 구름과 하늘을 말없이 올려다볼 뿐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