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차버린 소꿉친구와 전 여친이 같은 반이라 곤란하다-65화 (65/201)

〈 65화 〉 같은 길, 다른 꿈 (9)

* * *

#16

인간은 예로부터 날짐승과 구별되어 왔다. 날 적부터 내재된 본능에 따라 울부짖으며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그들과 우리는 다르다. 엄연한 이성이 존재한다. 만물과 어떤 현상에 대한 깊은 고찰과 생각이라는 걸 할 줄 안다는 소리다.

나는 짐승 새끼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머릿속을 싹 비우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용암처럼 들끓던 감정이 팍 식어서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지금 내 심정과 비교도 안 될 평화로운 새소리가 짹짹이며 들려온다. 이게 자연이고, 이게 평화였다.

좋네.

생각하기 위해 생각을 비운다. 텅 빈 창공은 높고 푸르다. 저만치 내 머릿속도 텅 비우고 싶었다만 영 쉽지 않았다. 단시간에 너무 많은 일들이, 영문 모를 대화가, 묵직한 감정의 교류가 있었다. 그 모든 걸 한번에 정리하기에는 내 뇌용량이 한계였다.

루비아도 그렇고.

나도 제정신은 아닌 것 같았다.

루비아가 나 때문에 힘들었다면, 그것에 나름의 책임감과 죄책감을 가지고서 대화를 나누려 했다. 루비아의 눈가에서 수심을 지워주고 싶었다.루비아는 항상 밝고 화사하며 예쁘게 웃는 얼굴이 잘 어울리던 아이였으니까.

곧 죽을 사람처럼 힘이 없어 비척거리는 주제에, 결국 남들에게 걱정을 사고 싶지 않아 필사적으로 괜찮은 척하는 그 꼴을 더 이상 보기가 싫어서. 그래서 여기로 불렀다.

근데 결과가 이 모양이네.

…대체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된 거지?

머리를 부여잡고 고민해 봐도 답은 나오지 않는다. 쉽게 나올 거였다면 애당초 고민할 일도 없었겠지.

머리 위에 얹었던 손은 스르륵 내려가 결국 내 얼굴을 감쌌다. 한숨과 함께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왜 그런 말을 한 거야. 루비아.

알고 있다. 루비아는 지금 정상이 아니라는 거. 금이 간 유리 바닥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상태였다. 대충 보아도 오래간 잠자리에 제대로 들지 못한 듯했다. 살도 많이 빠졌고. 입술은 부르텄으며 손톱은 뭐하다 그랬는지 잔뜩 물어뜯은 것 같았다.

무언가 때문에 미칠 것처럼 불안한 사람의 특징이었다. 혹은 두려워하고 있었다. 루비아는 스스로 그 정체를 실토했다.

나였다.

내가 없어지는 걸 무서워하고 있었다.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 재단할 수는 없으나, 그동안 적잖게 날 찾아다녔음이 분명했다.

그랬는데도 결국 보이지 않아서. 어디에서도 날 찾을 수 없어서. 내가 죽었거나, 날 영원히 잃어버렸을 거란 마음에, 그만 덜컥 겁을 먹곤 천천히 그 두려움에 좀먹히기 시작했던 것 같았다.

그러던 차에 나와 드디어 재회했다.

이제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으리라.

그런 생각을 했을 거다.

그렇게 나와 다시 만나고, 오랜 해후를 마침내 풀며, 나와의 추억이 고스란히 투영되는 장소에서 내게 용서 아닌 용서를 받자 갑작스레 둑 터진 듯 영문 모를 감정이 흘러나왔을 것이었다.

어디에도 가지 말아줬으면 좋겠다고 했지.

내가 보이지 않으면 불안했다고.

결국 저번에도 나는, 루비아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크게 다치고 말았다. 그 대가로 중요한 기억의 일부를 잃었다.

기억이라.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다.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게 되면.

나는 루비아를 어떻게 대해야만 하는 걸까.

그냥 친구 관계라면 괜찮았다. 애초에 그러려고 루비아를 여기까지 데려온 거였다.

기억을 되찾게 돼서 내 정신 속 공간에 더 이상 그녀들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고 하더라도. 결국 모든 걸 각오하고서 그 선택을 감행한 것은 누구도 아닌 나 본인이었기에. 한번 책임을 지기로 한 것은 반드시 져야만 했기에.

예전만큼은 못하더라도, 친구로 지내기로 결심했다면 나는 비로소 실천해 보일 것이었다.

그런데, 네가 여기서 그런 말을 해버리면.

나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

정상이 아닌 상태에서 얼치기처럼 내지른 말이라는 걸 알고 있다. 루비아에겐 휴식이 필요했다. 몸뿐만 아니라 마음의 휴식도.

루비아는 실수한 거다.

실수는 잘못이 아니었다. 고의성이 있냐 없냐의 차이였다. 그러니 루비아에겐 악의가 없을 터였다.

3년 전 내 고백을 거절했던 이유가 뭐든 간에.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멀어져 있었던지 간에. 나를 잃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은 감정이 뭐든 간에——

날 정말 소중히 생각한다면.

절대 해서는 안 될 그 말을 해버린 것도, 딱 한 번은 실수로 치부하고 넘어가 줄 수 있었다.

우리는 너무 어렸다. 지금도 그렇다.

그때 루비아에게 고백했을 당시에도, 내 심정은 지금의 루비아처럼 그녀를 잃어버리고 싶지 않다­ 혹은, 누군가에게 뺏기고 싶지 않다. 즉 나 혼자서 루비아를 독점하고 싶다. 뱀처럼 꿈틀거리는 어둡고 음습한 감정이 대부분이었을 거다.

불안했던 거다. 루비아가 나를 두고 떠나버릴까봐. 루비아는 내 전부나 다름이 없었는데, 그녀가 없는 인생에서 대체 무슨 가치를 찾을 수 있을지 정말 눈앞이 캄캄하기만 했어서.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때의 나처럼, 루비아는 실수하고 있었다.

아니지.

실수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냥 늦어버린 거다. 많이.

어쩌면 우리는 처음부터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걸지도 모른다. 그것을 표현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에서 차이가 생겼던 걸까.

나는 루비아가 아니었고, 루비아도 내가 아니었다. 사실 오래된 소꿉친구라 한들 서로의 생각 깊숙한 부분까지 알 수는 없었다. 그게 됐으면 내가 뒤도 보지 않고 고백을 박았겠냐고.

결국 타인이었다.

내가 루비아의 생각을 알지 못하듯, 루비아 역시 나의 생각을 알지 못한다.

말을 하지 않으면 뭐든 알 수 없다. 사람에겐 생각할 수 있는 머리가 있고 그것을 밖으로 꺼낼 수 있는 입이 존재한다. 적극적으로 쓰라고 만든 걸 쓰지 않으면 어딘가 이상이 생기는 건 당연했다.

그러니 대화가 필요했다.

그래서 했다.

날 차버린 소꿉친구가, 날 사랑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인간에겐 이성이 있을 텐데. 아무렴 정상과 비정상을 판단할 만한 능력이 충분하고도 넘칠 텐데. 왜인지 나는 이성이 아닌 본능으로 그 말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무척 화가 났고, 주먹이 꽉 쥐어졌다.

누굴 향한 분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미처 밖으로 표출되지 못한 격노를 꾹 눌러담고선 오두막 밖으로 걸어나왔다.

뜨거운 표면이 식어 비로소 만져볼 수 있게 된 감정은, 놀랍도록 무기질적이면서, 동시에 허무처럼 텅텅 비어 있었다.

기쁨도 슬픔도 아니었다.

분노 역시, 아주 잠깐이었다.

루비아를 사랑했었다. 내 첫사랑. 첫 실연. 그때 그 열렬했던 감정은 부정할 것도 없이 순수한 나의 것이었다. 이제 떠올리면 웃을 수 있었다. 루비아와 함께한 시간들은 전부 행복했었다. 루비아를 사랑했던 과거의 나는 그 추억 속에 남았다.

잡았던 손의 온기, 마주했던 이마의 따스함. 나 혼자만 간직하고 있었을 작은 설레임.

전부 그 자리에 남았다.

지금 여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그렇구나.

나는 이제 누구도 사랑할 수 없겠구나.

안타까운 현실에 순응하는 내가 있었다.

그 처량한 모습이 썩 안쓰러웠나 보다.

나는 내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었다.

루비아를 포기한 건 결과적으로 잘된 일이라고. 나에겐 루비아 말고도 아직 해결해야 할 과제가 남아 있다고. 너는 이제 루비아의 잘못된 감정을 원래대로 돌려놓고, 네 할 일을 하면 되는 거라고. 이제라도 서로의 마음을 깨달았으니 그걸로 된 거라고.

루비아와는 제일 친한 친구처럼. 뮤와는…… 조금 더, 대화를 해봐야 알겠지.

복잡하네.

머리가 다 아프다.

역시 마음이니 감정이니 하는 것들은 사람을 피곤하게 만든다. 형태 없는 걸 형태 있는 것처럼 생각해야만 했으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 내 뜻대로 굴러가지 않는 것이기도 하고. 이러나저러나 부질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버린다.

머리를 텅 비운 채 운동이나 하고 싶었다. 오늘 저녁에는 어디를 조져야 할까. 오랜만에 가브리엘이나 불러서 내기나 한판 벌일까.

— 그러면, 그럼 나는…… 만약에, 내가, 지금, 에지오 너를… 사랑하고 있는 것 같다고 해도……

썩을.

내 머릿속에서 좀 나가주면 안 되겠니?

안 그래도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자꾸 생각나는 것 같은데, 일단 이 문제부터 어떻게 정리해야 할 듯했다.

밖으로 나오는 게 정답이었다. 머리도 차분해졌고, 심정은 고요해졌다. 오두막 문을 나서기 전까진 금방이라도 루비아에게 못할 말을 해버릴 것 같았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이대로 돌아가서 루비아를 어르고 달래며 진정시킬 수 있을 듯했다.

다행이네.

다행이긴 한데.

입맛은 여전히 씁쓸했다.

내가 방금 입안에 콸콸 들이붓고 온 건 분명 지나치게 달달한 꿀물이었을 텐데도, 혓바닥에 어린 쓴맛이 사라지질 않았다.

#17

별 꼴값을 다 떨었다.

비극 소설의 남주인공처럼 벤치에 덩그러니 앉아 궁상을 떨다가, 문득 우스운 기분이 들어 오두막으로 돌아왔다.

끼이이익……

루비아는 흔들의자에 웅크린 채였다.

훌쩍임은 멎었고, 무릎 사이에 고개를 파묻어 내게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근데 딱히 안 봐도 보여. 보나마나 퉁퉁 불어 있겠지. 그리고 방금 내가 문 열자마자 움찔거리는 모습 다 봤다.

“루비아.”

“……”

테이블 위 올려진 찻잔은 내 것만 비워져 있었다. 특별히 타줬던 건데 아쉽네. 결국 루비아는 한 모금 마시고 끝이었다.

“좀 어떻게, 진정했어?”

소파에 앉으며 물었다.

스으­ 하는 숨소리가 나는 것 같다가, 천천히 목소리가 흐른다. 격정적으로 운 나머지 첫마디가 메어서 삑이 난 듯했다.

“……모르겠어.”

“흠, 모르면 곤란한데.”

“……”

“농담이야. 아까보단 괜찮은 거지?”

“……”

말없이 고갤 끄덕인다. 그걸로 충분했다.

“다음 수업 몇 시에 있어?”

“……5시.”

한참 남았네.

나도 오후 4시 수업이 마지막이었다.

여기 오면서 서로 다음 수업까지 별 약속이 없는 것을 확인했고, 그럼 그동안은 자유 시간이었다. 점심 안 먹어서 배고플 텐데. 우리들한테는 딱히 배고픔을 느낄 정신머리도 없었던 것 같다.

오두막에 누가 오려나.

아마 안 올 거 같은데.

신입생들이면 몰라도 선배들은 생활에 익숙해진 나머지 그냥 호화로운 기숙사에서 쉬는 편을 더 선호하는 듯했다.

“차 다시 끓여줄게. 여기서 푹 쉬자.”

이미 식어버렸긴 해도 남은 차를 그냥 버리긴 아까워서, 오두막을 나서기 전 들이부었던 것처럼 루비아의 찻잔을 달그락거리며 입안에 쏟아부었다. 꿀떡거리며 넘기는 소리에 루비아가 슬며시 고개를 드는 것 같기도 했으나, 결국 끝까지 들진 않았다.

뜨거운 김이 폴폴 풍기는 찻물을 새로운 찻잔에 따르고, 꿀통을 열어 스푼으로 덜어낸 뒤 그것을 찻물에 풀면서 입을 열었다.

“…네가 뭘 무서워하는 건지 알아. 그치만 난 여길 벗어날 생각이 없어. 뭔 대형사고를 치지 않는 이상 에픽 클래스에서 퇴학당할 일도 없겠지. 난 여기서 5년 동안 사고 하나 안 치고 무사히 졸업하는 게 목적이야.”

“……”

“난 네 옆에 있을 거야. 루비아. 어디에도 가지 않아. 내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불안해할 필요는 이제 없어.”

너의 가장 친한 친구로서.

“그러니까 너무 성급하게 생각하지 마.”

“……”

많이 혼란스러웠겠지. 나도 그랬다. 푹 쉬고 나서, 다시 말끔해진 정신으로 찬찬히 생각해 보면. 내재된 불안이 해소되고 나면. 날 소중한 친구로 여겨주었던 예전의 루비아가 돌아올 것이었다.

그렇게 믿는 편이 좋았다.

내 분량의 찻잔을 손에 들었다. 한 모금 홀짝이니 아까와 똑같은 맛이 났다. 다도(茶?)같은 걸 딱히 배운 건 아니라서 차의 품질이 어떤진 모르겠지만, 이 정도면 나름 합격점 아닐까.

물론 마공학 기계가 워낙 좋은 물건이긴 했다. 뭐 어쩌라고. 도구를 잘 다루는 것도 하나의 기술인걸.

“자, 여기.”

그리 말하며 테이블 위에 찻잔을 내려놓는다.

금방 들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맞은편 소파에 앉아 차를 음미했다.

길게 늘어진 루비아의 연분홍빛 머리칼. 정수리가 비스듬히 보였다. 웅크리고 있던 탓인지 얇은 종아리와 그 뒤의 허벅지가 여실히 드러난다. 말도 안 되게 새하얀 빛깔이었다. 어째 루비아의 피부는 옛적부터 햇볕에 타지를 않는 것 같다.

세 모금째 말없이 홀짝이고 있자니, 루비아의 다리가 아래로 스륵 내려갔다.

아까 쥐여주었던 손수건이 축축해 보였다. 그걸로 눈물은 전부 다 닦아낸 모양이다.

그래도 펑펑 울고 난 뒤의 얼굴은 역시나 부끄러운 건지, 내게 최대한 보여주려 하진 않는 채로 찻잔 손잡이에 조심히 손을 가져간다.

작은 입김을 불면서 표면을 식히고, 한 모금.

그 모습을 본 내가 물었다.

“어때?”

“……따뜻해.”’

“그건 당연한 거고.”

“……”

아까는 에헤헤, 하면서 웃었는데.

말이 없자 나도 구태여 말을 걸진 않았다.

루비아가 이 시간을 가급적 편안하게 느꼈으면 하는 게 목적이었다. 괜히 몇 마디 더 해서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고 싶진 않았다. 세상엔 말하지 않으면 모르는 것도 있지만, 말하지 않음으로써 느낄 수 있는 것도 있었다.

시계 초침이 무심하게 흘러갔다.

나는 찻잔을 거의 다 비웠고, 루비아는 절반 정도. 아예 세 모금 내지 두 모금 입에 대고 말 줄 알았는데, 의외로 많이 마셨다. 속이 뜨끈해지니 나른하게 긴장도 풀리고, 점점 잠도 오는 모양이다. 흔들의자 위에서 루비아의 몽롱한 눈이 보였다. 눈시울은 여전히 붉었다. 한동안은 저 상태 그대로일 것이었다.

오두막 창틀 사이에서 바람이 불어온다. 벚꽃철이었다면 어딘가에서 벚꽃잎이 실려 들어왔을 텐데. 어쩐지 쌀쌀한 바람만 불어올 뿐이었다.

담요도, 외투도 없다. 루비아의 연분홍색 머리칼이 잔잔하게 흔들렸다. 찬바람을 맞이하는 내 어깨가 으슬으슬하게 떨렸다. 루비아도 매한가지였다. 다만 무얼 그리 생각하는지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기에, 나는 벽난로 안에 장작이 충분히 있는 것을 확인한 뒤 곧바로 마력을 끌어올렸다.

화르륵.

벽난로가 성을 내며 뜨거운 불을 피운다.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따스했다.

“마법은 아직도 어렵더라.”

그래도 재밌었다. 배우면 배울수록 신기했다.마력의 활용이라는 건, 나는 대체로 구경만 하는 쪽이었지 사용하는 쪽이 아니었던 까닭이다.

이를테면 현실에 존재하는 판타지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 마법을 조금이나마 쓸 줄 알게 되니까, 어쩐지 어린아이처럼 신이 났다.

“사실 마법만 어려운 것도 아니야. 전부 어렵더라. 난 검술이고 마법이고 연금술이고 하나도 다룰 줄 몰랐으니까. 머리론 알고 있어도 이게 몸이 따라주질 않으니 뭘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 그래서 허구헌날 아카데미 도서관에서 책이나 주야장천 읽었지.”

루비아가 달리 묻지도 않았는데, 나는 어느샌가 중등부 때의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냥 내가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결국 루비아가 궁금해했던 나의 중등부 시절 이야기는, 지독하게도 시시하고 재미없었다. 고작 그 정도라는 걸 알려주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이런 심심한 부분들을 전부 빼고 나면, 졸다 하품할 지경인 내 과거에 남는 건 하나뿐이었다.

“나는 그냥 책만 읽고 싶었는데, 누가 자꾸 방해를 하더라고.”

“……”

그게 아마.

루비아가 가장 듣고 싶었던 얘기였을 터다.

은은한 불길이 우리 몸을 따스히 덥힌다. 타닥거리며 일렁이는 불길을 보고 있자니 문득 벽난로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어서 하려던 말도 까마득하게 잊어버린 채 루비아와 같이 벽난로 속 불길을 응시한다.

정말일까.

할 말을 잊어버린 건지.

잊고 싶었던 건지.

루비아의 말은 진심이 아니었다는 걸, 그렇게 믿고 있음에도, 왜 그 말을 꺼내기가 갑작스레 어려워졌던 건지. 한번 얘기하기 시작하면, 너무나 많은 시간이 필요해져서. 결국 5시가 되기 전에 돌아가야 하는 루비아에게 그건 너무 큰 부담인 듯해서.

뭔가 더 말하려다 말고, 입을 닫아버렸다.

루비아도 내게 더 묻지 않았다.

물을 수 없었다.

고개를 돌려보면, 루비아는 동화 속 공주님처럼 눈을 감고 잠에 곤히 빠져들어 있었다. 그 미약한 생명이 움츠리는 숨결을 간헐적으로 토해내면서, 가슴을 작게 들썩였다.

소파 팔걸이에 팔꿈치를 올려놓고, 턱을 괸 채로 루비아의 자는 모습을 가만 바라보았다.

혹시라도 깜빡 결석해버리면 큰일이니까.

나는 깨어 있는 상태여야만 했다.

루비아가 깊은 잠에 든 모습을 본 것만으로도 목표의 절반쯤은 이미 달성한 셈이었다. 그걸로 만족했다. 루비아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건 어느 무엇보다도 충분한 휴식이었던 까닭이다.

“……”

자꾸 머릿속에서 맴도는 그 말을 떨쳐냈다.

정정의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결국 정확하게 단정짓지 않았으니까. 다만 그런 것 같다고­ 추상적인 표현을 했을 뿐이다.

솔직히 믿지도 않아.

어차피 일시적이고 충동적인 감정일 거다.

모든 상황이 마땅찮게 맞물려.

우연히 벌어졌을 뿐인 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래야만 했다.

“……”

하지만 그게 만약 진심이었다면.

아니, 진심이고 자시고.

사실은 어떤 가능성의 조각조차 있어선 안 되는데.

정말로 루비아가 날 그렇게 보고 있다면.

나는 오늘, 친구 한 명을 잃어버린 거다.

그것도… 제일 소중한.

­흐룹.

찻물이 더 쓰게 느껴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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