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차버린 소꿉친구와 전 여친이 같은 반이라 곤란하다-66화 (66/201)

〈 66화 〉 말할 수 없는 비밀 (1)

* * *

#1

마음 같아서는 그냥 이대로 밤까지 재워버릴까 싶었지만, 루비아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무단결석은 안 될 일이었다.

“하음……?”

3시를 조금 넘겼을 즈음, 비몽사몽한 얼굴로 깨어난 루비아는 그 앞에서 자길 바라보고 있던 날 발견하곤 잠시간 멍한 눈으로 있었다.

그리곤 몹시 곤란해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래. 나도 알아, 그 기분.

자기가 나한테 대체 무슨 말과 행동을 했는지 그제야 돌아볼 수 있게 된 것이었겠지. 이루 말할 수 없는 창피를 겪고 있을 것이었다.

그런 루비아한테 내가 해줄 수 있는 최고의 대우는, 그냥 가만히 있는 거였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루비아에게 다시 끓여준 차도 결국 다 못 마시고 남겨버렸다. 내 몫은 진즉 깔끔히 비워버린 지 오래였고. 그렇게 결국 같은 차만 네 잔째 들이킨 내가 더부룩한 속을 부여잡았다. 하필 꿀물이라 위장이 한층 더 니글니글한 것 같았다……

아무튼.

테이블 위를 싹 정리하고, 장작을 태우던 벽난로 속 불길도 픽 꺼버렸다. 내가 한 건 아니었다. 루비아가 바람 계열 마법으로 어떻게 처리한 모양이다.

참고로 루비아는 대중적으로 알려진 거의 모든 속성 마법을 사용할 줄 알았다.

공간 계열 마법에 특화되어 있을 뿐이지, 실질적으로 루비아의 강함은 공간계 마법이 아닌 그 외의 속성 마법에서 드러난다. 간단히 말하자면 난 죽었다 깨어나도 루비아를 마법으론 절대 못 이긴다. 아마 같은 반 애들도 마찬가지일걸.

“이제 가자, 루비아.”

“…으응.”

정리할 거 다 정리했고.

그동안 사람 한 명 찾아오지 않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어차피 누군가 안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음을 알리기 위해 문 밖에 팻말을 걸어놓긴 했다만. 혹시 모르는 일이었잖나.

아직 피곤이 다 가시진 않은 모양인지, 루비아의 눈가는 여전히 어두웠다.

그래도 그 속에 담긴 눈빛은 전보다 총명해 보였다. 내가 아는 루비아의 모습이 아주 조금이나마 돌아온 듯해서 다행이었다. 작은 비명과 함께 기지개까지 켜는 모습을 보니, 내 마음도 한결 편안해졌다.

루비아와 오두막을 나서기 전에.

“에지오.”

“응?”

문 손잡이를 잡았던 내가 뒤를 돌아봤다.

내가 태연하게 행동하고 있음을 자기도 아는지, 아니면 없었던 일로 해주겠단 내 말을 들어서 그랬는지.루비아는 잠깐 창피에 물들어 얼굴을 발갛게 물들였던 이후론 딱히 부자연스러운 행동을 취하진 않았다. 그게 지금 상황에 가장 이롭다는 걸 자기도 아는 모양이다.

예전이었다면 종일 같은 상태였을 텐데.

이것도 성장이라면 성장인가.

루비아가 날 보며 옅게 웃었다.

“고마워.”

“……”

뭐가 고맙다는 건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먼저 대화를 요해줘서, 자길 거짓으로나마 용서해줘서, 어릴 적 좋아했던 차를 끓여줘서, 자길 여전히 친구로 여겨줘서, 그리고 실언을 저질러버린 걸 없었던 일로 해줘서. 그중 어떠한 일도 입에 담지 않았다.

어차피 중요한 건 한 가지다.

진심.

루비아는 진심으로 내게 고마워하고 있었다.

미안해하지 말란 내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럼, 이유야 뭐든 괜찮은 거 아닐까.

무엇보다.

거짓 없는 루비아의 웃는 얼굴을 보았다.

예쁜 미소였다.

나 역시 무심코 따라 웃을 정도로.

“…그래. 다음에 또 얘기하자.”

그걸로 된 거 아닐까.

#2

날이 저물고 저녁이 되었다.

식당으로 향하는 학생들의 무리가 몇 보이고, 나는 아마 가방도 놓을 겸 기숙사에 들렸다가 저 무리의 일부가 될 것이었다.

휴양지의 리조트 같은 에픽 클래스 부지의 멋진 풍경을 시야에 담고 있었지만, 정작 내 생각은 전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대화가 잘 풀릴질 모르겠네.’

어쩌겠어.

그래도 할 일은 해야지.

오늘 잠들기 전 반드시 마쳐야 할 일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공원을 가로지르던 사이에.

—툭.

날카로운 바람에 실려 뭔가 날라왔다.

“…어프픕.”

그것은 내 이마에 착 달라붙었다가, 곧 스르륵 펼쳐져서 내 얼굴을 전부 뒤덮어버렸다.

코와 입이 막혀 호흡을 제약당했다.

순간적으로 들이마신 숨이 턱 막히길래, 잠깐 콜록대고선 얼굴에 달라붙은 천을 급히 떼어냈다.

뭐야, 이거.

내가 인상을 쓰고 그걸 내려다봤다.

익숙한 모양의 자수. 직사각형의 천.

내 손수건이었다.

이게 자기 스스로 어딘가에서 날라와 우연찮게 내 이마로 착륙했을 리는 없을 테고. 물론 그럴 가능성이 아예 없진 않겠지만, 지금 손수건이 날아왔던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려보았을 때.

그리고 어쩐지 세찬 바람이 불지도 않았는데, 이 손수건이 타고 날아온 바람줄기만 유독 거칠고 세찼던 것을 보았을 때.

이건 저기 저 새초롬한 얼굴의 금발 꼬맹이가 나한테 준 선물이 분명했다.

“……”

아무래도 염동력으로 띄워 보낸 모양.

좀 평범히 돌려주면 안 되나.

내 얼굴을 덮은 건 분명 고의였음이 분명하다.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저 가로등 아래 유리를 꼬나보자, 뭐 어쨌다는 얼굴로 되받아친다. 마치 돌려줬으면 된 거 아니냐는 매우 아니꼬운 음성이 여기까지 들리는 듯하다.

……뭐, 그래.

친절하게 깨끗이 빨아서 내게 수줍은 얼굴로 고이 접은 손수건을 건네주는 모습은, 네 이미지랑 전혀 안 맞긴 하지. 이게 더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볼 때마다 아래로 쭉 잡아당겨 보고 싶은 머리칼을 살랑거리며, 유리는 2동 기숙사 쪽으로 걸어갔다.

근데 진짜 잡아당기면 어떻게 되려나.

문득 궁금해졌다.

고양이 하악질처럼 굉장히 흥미로운 반응을 보일 것 같긴 한데. 실제로 행동에 옮기면 여러모로 대참사가 나겠지. 이른바 책임 없는 쾌락이라는 것이었다……

그래도 썩 재밌는 모습일 것 같아 무심결에 피식거리자니, 들고 있던 손수건에서 피어오른 향기가 내 콧잔등을 간지럽혔다.

아까 코에 달라붙었을 때도 잠깐 느꼈던 거지만, 몇 번이고 다시 맡아보고 싶을 만큼 향긋한 내음이었던 것 같은데.

“…킁.”

미간을 좁히며 손수건의 냄새를 맡아봤다.

보드랍고 상큼한 레몬향.

매우 좋은 향기가 났다.

원래 내 손수건에서 나지 않던 향기다.

굳이 따지자면 유리의 체취와 가장 유사한 내음이었다. 세탁할 때 따로 쓰는 전용 비누가 있는 건가. 아니면 그냥 자기 씻을 때 쓰는 비누를 갖다가 거품칠을 한 건가. 굉장히 가치없고 쓸데없는 고찰을 하던 내가 곧 정신을 차리곤 그만두었다.

왠지 변태 같잖아. 그런 생각은 하나도 안 했지만.

…근데 진짜 뭘로 한 거지. 유리를 무시하는 건 아니어도 귀하신 왕녀란 건 그런 존재 아닌가.

아침에 일어날 때도 시녀. 씻을 때도 시녀. 옷 입을 때도 시녀. 윺리가 살면서 자기 손으로 세탁 같은 잡일을 해봤을까.

아닐 거 같은데.

제대로 빤 거 맞아 이거?

“쓰으읍……”

문득 그런 의문이 들어 다시 콧잔등에 손수건을 가만 갖다대고 숨을 들이마시자니.

—파악!

작고 가벼운 무언가가 날아와서 내 관자놀이를 후렸다. 덕분에 중심을 잃어 비틀거렸다가 겨우 밸런스를 유지했다.

인상이 절로 구겨졌다. 뭐야.

내 머리를 후려치고 바닥에 떨어진 그것을 향해 고개를 내려보니, 줄기가 꺾인 새하얀 꽃이었다. 날아오는 도중에 꽃잎이 빠진 건지 뭔지 여러모로 듬성듬성하다.

아니.

나 지금 꽃으로 맞은 건가?

기분이 묘했다.

누군 꽃으로 맞으면 아프진 않고 기분만 더럽다는데, 내 경우엔 둘 다였다. 좀 아픈데 진짜로.

어찌나 세찬 바람을 타고 날아왔는지 머리에 혹이라도 난 것 같았다. 화끈한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누르며 바람이 날아온 방향을 돌아보았다.

당연하지만 위대하신 대자연께서 갑자기 급발진을 해버린 나머지 날 꽃으로 후렸을 리는 없고. 그냥 그거였다. 아까랑 똑같았다.

유리가 저 멀리서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어깨를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여기서도 확연히 눈에 띌 만큼 얼굴이 벌게진 채로.

……돌아간 거 아니었어?

나는 내 손에 들린 손수건과 유리를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저 녀석 입장에서 내 모습이 어떻게 보였을지를 잠깐 상상했다.

……음. 그렇군.

몹시 진지한 표정이 되어 턱을 쓰다듬다가, 나는 이걸 뭐라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기도 전에 해명 아닌 해명을 하러 유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유리는 히이익— 하는 소리를 내며 기숙사로 냅다 뛰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스치듯 본 유리의 얼굴에는 진심으로 질색하는 듯한 기색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렇게 기숙사 문 너머로 사라진 유리.

“……”

말없이 침묵한 내가 손수건을 내려다봤다.

이거 세탁할 때 뭔 비누를 사용했고 자시고.

그냥 내가 돌려준 손수건을 유리가 킁킁거리며 쓰읍­ 하아­ 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면, 아무리 나라도 좀 깨긴 할 것 같네. 전혀 불순한 의도가 아니긴 했지만.

고이 접은 손수건을 품속에 집어넣으며 생각했다.

……나,

유리랑 제대로 친해질 수 있는 거 맞나?

안 그래도 나 싫어하고, 쟤도 나랑 굳이 막 친해질 마음까진 없어 보이는데. 이런 기묘한 악재가 계속 겹치는 것 같다, 왠지. 쟤랑 나랑은 인연이 아닌 건가.

일단 난 친해지고 싶긴 한데. 귀엽잖아. 가만 보기만 해도 그냥 흐뭇해진단 말이지.

좋아. 루비아나 스텔라한테 오해를 살 수 있을 법한 발언이 유리의 입에서 나오기 전에, 대가리를 박자.

…아니 잠깐만.

그러면 내 행동이 다분히 의도적이었단 걸 인정하는 셈이 되는 거 아닌가? 오히려 호감도가 더 깎일 것 같은데? 이거 맞아?

“여, 에지오. 여기서 뭐 하냐?”

“……”

남이 빨아준 손수건 냄새 한 번 맡았다고 천천히 굴러가기 시작한 눈덩이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갈 즈음.

가브리엘이 손을 흔들며 나타났다.

그쪽을 보고 있지 않던 내가 문득 중얼거렸다.

“그래도 너보다는 내가 친하지 않을까?”

“뭐? 갑자기?”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운 가브리엘.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냐. 밥 먹었냐? 안 먹었으면 먹으러 가자.”

“어? 안 먹었긴 한데……”

가방은 그냥 들고 가기로 했다. 뭐 어때.

의문을 표하면서도 날 따라오는 가브리엘과 함께 식당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참고로……

여자친구를 만들러 제국까지 유학을 왔다는 가브리엘은 지금까지 0명의 여학우를 사귀었다.

그 모습이 불쌍해서 뭐라도 해줄까 싶었다만.

생각해 보니 나라고 해서 누굴 소개시켜줄 입장이 아니었다.

정말 친하다고 해봐야 지금 당장은 루비아가 고작 아닐까. 나머지랑은 마음 놓고 완전히 편하게 대화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나마 스텔라 정도가 가능성 있었겠지만, 글쎄.

인연이란 건.

스스로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해.

것보단, 사실 이 녀석한테 내 친구를 소개해줬다가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아직 모르겠어서 그런 게 가장 컸지만은.

딱히 가브리엘을 신뢰할 수 없단 얘긴 아니었고.

……아니, 맞나?

별 시답잖은 마침표를 찍을 줄 알았던 생각이, 문득 예상지도 못하게 진지한 사고로 빠져들었다.

나는, 가브리엘을 신뢰하고 있나?

아마 아닐걸.

내 안의 작은 목소리가 속삭였다.

그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유대감을 키울 수 있을 만한 일도 많이 없었고. 남에게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속얘기를 털어놓지도 않았고.

친한 친구냐고 묻는다면 그렇단 대답을 내놓겠지만, 나는 왜 그 친한 친구를 내심 신뢰하지 못하고 있단 생각이 드는 걸까.

그건 가브리엘에게 예의가 아닐 텐데.

그런 것보다도.

애초에 친구란 뭐야.

얼마 전, 나는 루비아한테 친구로 지내주겠냐고 물었다. 루비아는 내 친구였으니까. 그때 그 관계로 돌아가자고. 그런 의미에서 나는 루비아를 받아들이고, 친구로 지내겠노라 약조했다.

그래서 정확히 어떤 관계인가. 내가 말한 친구라는 건.

루비아도, 가브리엘도.

전부 나의 친한 친구라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루비아와 가브리엘의 차이점은.

친한 정도의 차이일 뿐일까?

그럼, 친하다는 게 뭔데?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 생각이, 궁극적으로 나는 그들과 과연 무엇을 함께하고 싶은지에 대한 의문으로까지 번졌다.

나는, 루비아와 대체 뭘 하고 싶은 거지?

‘…모르겠어.’

알 수 없다.

지금은 아무것도.

대충 결론이 지어졌다.

나는 옆을 돌아보곤 주먹을 쥐며 말했다.

“힘내라, 가브리엘.”

“……너 설마 내 욕하는 거냐? 응? 아까부터 묘하게 얼굴이 꼬운데?”

“……”

“왜 대답이 없어, 새꺄. 맞을래?”

“야.”

“…?”

“우리 친구지?”

“……너 뭐 진짜 잘못 먹었냐? 아님 우린 친구니까 욕해도 상관없다 이거냐? 전자야 후자야 딱 말해.”

“아무튼 친구라는 거 아냐?”

“…서로 싸움질 한 판 했으면 친구지 뭐. 그래서 왜 물어보냐고. 뭔데 스벌. 께름칙하게.”

“싸움질? 언제 했…… 아, 그때 연무장에서?”

“아까부터 내 말 개무시한다 너?”

“그게 왜 친구의 조건인데?”

“……”

나한테서 대답을 얻어내길 포기한 건지, 기가 찬 웃음으로 날 바라보던 가브리엘이 답했다.

“우리 부족이 친구를 만드는 방법은 대체로 그랬으니까. 겸사겸사 술도 같이 좀 퍼마시고. …아, 여긴 아직 음주 안 되나? 씁, 그건 좀 아쉬운데. 내 예상에 너랑은 어림잡아 한사바리면 지금까지 네 아랫도리에 몇 명의 여자가 들락날락했는지 알 수 있을 텐……”

대충 닥치라는 얼굴을 하자 알아서 닥쳤다.

거, 다시금 깨달은 건데.

역시 얘한테는 내 친구 못 준다. 어.

그러면서 동시에 깨달았다.

그렇구나.

친구란 존재의 의의는, 딱 정해진 게 아니었다.

그것의 가치는 개인마다 다르다.

조건도 각자 다르다.

누굴 친구로 여기고자 하면 여기는 거고, 아니라면 아닌 거고. 어떤 친구한테 얼만큼의 신뢰를 줄지도, 결국 내 마음 따라가는 거였다. 마음도 그러하듯 형태 없는 관계란 것을 객관적으로 구분 지으려 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친구 사이에 넘지 말아야 할 선이란 것도.

결국 확실하게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으음. 아냐.

이건 좀 다른 문제인가?

그런 생각이 불쑥 들던 차에.

“가브리엘.”

“왜 또 뭐 왜.”

“밥 먹고 오랜만에 운동이나 같이 조질까? 오늘은 공짜 음료수가 좀 마시고 싶은데.”

가브리엘은 흔쾌히 목을 뿌득였다.

안 그래도 좁은 실눈을 더욱 가늘이며 웃는다.

“…하, 드디어 리벤치 매치의 시간이 왔나?”

자신만만한 기세였다.

저번에 아슬아슬한 차이로 졌으니 그럴 만도 했다. 물론 져줄 생각은 없었다. 한계까지 근섬유를 태워가며 최선을 다해 맞서 싸울 예정이다. 오늘은 좀 힘을 쓰고 싶은 날이었다.

식당으로 가면서,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그래도.

하나 확실한 건 있었다.

이 녀석이 언젠가 제 짝을 찾고 진심으로 행복해한다면, 곁에서 지켜보던 나도 행복할 것 같았다.

뭐.

친구란 게 그런 거 아니겠어?

…아님 말고.

#3

“끅. 너무 많이 먹었나…?’

어마무시한 학비가 전혀 아깝지 않을 호화로운 식사였다. 매일 먹다 보니 이것도 익숙해지는 내 자신이 무서울 따름이었다.

물론 에픽 클래스 전교생은 전액 장학생이라서, 왠지 죄를 짓는 기분이었지만은…… 사람은 역시 적응의 동물이란 모양인지, 어느샌가 이러한 혜택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내 자신이 있었다.

그래도 매일 감사하는 기분으로 살아가는 중이다. 받는 만큼 더 열심히 해야지.

저녁을 먹으며 가브리엘과 이따 늦은 밤에 체력단련실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은 다음, 기숙사로 돌아와 따뜻한 물로 씻었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내가 테이블 위에서 들여다보고 있던 서적을 턱­ 하고 덮었다.

책의 제목은 「마나통제학 I」.

벌써 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조별과제가 한창 진행 중인 과목의 교과서였다.

「마나통제학」과목의 2주차 조별과제는 기본 5인 1조로 진행된다.

또한 웬만하면 조원들의 전공이 겹치는 일이 없도록 조를 배정했다곤 하는데, 거기엔 이유가 다 있었다.

이번 조별과제의 주제가 바로—— ‘고유 마나의 이해’였던 까닭이다.

마력 회로를 보유한 사람마다, 그리고 마력을 어떠한 방식으로 사용해왔는지에 따라 개별적으로 다르게 나타나는 마나의 특수한 성질.

그것을 보다 깊이 이해하기 위한 과제였다.

말하자면 본인이 아닌 다른 개체에 길들여진 마나를 통제하는 방법에 관하여, 일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마나를 다차원적으로 다루기 위한 필수 과정이라고도 들었던 듯하다.

기본적으로 자연의 마나는 푸른 빛을 띠지만, 흡수­정제­방출의 순환을 거친 마나는 조금 다른 빛깔을 지닌다. 어떤 개체의 내부서부터 형성된 마나 역시 동일한 특성을 지닌다고 한다.

이 역시도 겉으론 푸른 빛을 띠나, 겉모습만 그럴 뿐이다. 어떠한 마도구를 사용하거나 조건을 충족하면 본질의 색을 알아낼 수 있다.

또한 마나의 색이 변하는 건 속성 마법을 사용할 때도 매한가지인데, 이를테면 화염 계열 마법을 사용할 때는 붉은 빛을 머금은 마법진이 떠오른다.

정확히는 고유 마나 그 자체의 색이 변하는 게 아닌 술식을 구현하는 과정에서 고유 마나의 색이 속성의 색으로 물드는 것이겠지만…… 자세한 것까진 아직 수업에서 다루지 않았다.

이런 정보에 관해선 나보다 루비아가 훨씬 잘 알고 있을 터였다. 루비아가 속한 조는 일단 A+가 확정이나 다름없지 않을까. 그렇다고 루비아 혼자 전부 도맡아 해서도 안 되겠지만은.

일단 그렇단 얘기고.

문제가 하나 있었다.

저번 사건으로 유스필 데리아의 협조가 거의 불가능해졌음에 따라, 조별과제 수행에 아주 작은 차질이 빚어졌다.

그래도 뭐…

있는 것보다 없는 게 훨씬 나았으니까.

결과적으론 옳은 선택이었다.

—우우우웅……

손가락 끝에 모인 동그란 빛을 빙글빙글 돌렸다. 저번 모임에서 회의했던 부분을 다시금 상기했다. 한 번으로 끝날 모임이 아니었으므로, 다음 예정도 속히 잡아야만 했다.

내일은 주말.

아침부터 자유로운 시간이었다.

수업이 없는 동안 웬만하면 다들 널널할 테고.

서클 활동만 아니라면, 뭐……

……서클 하니까 레이린 선배가 생각났다.

언제 한번 밥 같이 먹어주기로 했는데.

필요하면 알아서 찾아오겠지.

안타깝지만 난 레이린 선배가 운영하는 서클에 정말 관심이 없었던 터라…… 딱히 별다른 수확이 없을 터였다. 시무룩해진 레이린 선배의 모습이 떠오른 나머지 안쓰러워지긴 했다.

패션에 진심으로 보이긴 했지. 굳이 따지자면 응원하고 싶은 쪽이다. 응원만.

아무튼.

지금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드르륵.

의자를 뒤로 끌고 잿빛 카디건을 걸쳤다.

카드키를 챙긴 뒤, 밖으로 나섰다.

어두컴컴한 밤.

내가 향한 곳은 3동 1층의 연무장이었다.

듣기론 평소 여기 있다고 했었으니까.

연무장의 문을 여니.

광활한 대지 위에서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던 남학생의 뒷모습이 보였……

아니 얘 어디 갔어.

그 2인조가 연무장에 있다고 했는데?

남학생이 아니라 여학생이 있었다.

갑작스레 문이 열렸는데도 관심 하나 주지 않아, 결국 내 쪽에서 먼저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뮤. 혹시 여기서 다른 사람 본 적 없어?”

“……어, 응? 꺄앗­”

—부웅! 탁!

심혈을 기울여 내리그은 뮤의 검격이 휘청거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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