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차버린 소꿉친구와 전 여친이 같은 반이라 곤란하다-67화 (67/201)

〈 67화 〉 말할 수 없는 비밀 (2)

* * *

#4

카각, 하고 짧은 마찰음이 났다.

“…아, 미안. 방해했나?”

뮤의 자세가 순간 흐트러졌지만.

어떠한 묘리로 꺾인 건지, 구부정한 궤적을 그리던 검이 마지막엔 절도 있는 점 하나를 찍으며 끝났다.

미약한 검풍이 일고, 주변의 먼지가 휘날렸다.

그 사이에서 슬며시 내게로 고개를 든 뮤의 얼굴은 땀방울에 푹 젖어 있었다.

수련에 한창 집중하던 모양인지, 잘 닦인 기세로 형형하게 물든 눈동자 역시 선명했다.

“아, 아냐. 방해는 무슨.”

뮤가 날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수련을 위해 한데 묶은 것으로 보이는 머리가 좌우로 살랑였다.

뮤는 심플한 라인의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었다. 땀을 많이 흘렸던 탓인지 자켓의 지퍼는 끝까지 내려 풀어 헤쳐진 채였다.

그 안으로는 새하얀 탱크탑이 보였다. 다부지게 잘록한 허리. 눈처럼 희고 고운 맨살이 땀으로 번들거려 되레 윤기가 흐르는 듯했다.

저렇게 가녀린 몸에서 어떻게 그 무지막지한 힘이 나오는 건지 도통 모르겠다. 이게 인체의 신비인지 뭔지 하는 건가……

—스르릉, 탁.

뮤는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슬슬 끝내려는 모양이다. 자기 말론 방해한 거 아니라곤 하긴 했는데, 왠지 나 때문에 그만두는 것 같아서 머쓱해졌다.

어쩐지 조용해진 연무장.

내가 뮤 쪽으로 다가가며 물었다.

“그래서, 너 말고 여기 누구 없었어?”

“어, 음……”

뮤는 손등으로 이마를 싹 훑더니, 고민하다 답했다.

“두 시간 전부터 나 혼자였을걸……?”

“뭐야. 진짜?”

나한테 거짓말을 한 건가. 걔네들.

아니지. 평소 저녁 시간 즈음 연무장에 있을 뿐이라고 했으니, 꼭 항상 여기 있으란 법은 없잖나.

그것보다 뮤는 두 시간 전부터 여기 있던 건가. 그때부터 계속 검을 휘두른 것일 테고. 대단하네. 밥은 먹고 수련하는 건지 의문이 든다.

“누구 찾아…?”

뮤가 나를 향해 조심스레 물어왔다. 그러면서 지이익­ 하고 은근슬쩍 자켓의 지퍼를 올린다. 얕게 상기된 얼굴에서는 한껏 달아오른 숨결이 간헐적으로 터져 나온다.

전에도 항상 그랬던 것 같지만, 이런 흐트러진 모습을 내게 보여주는 건 은근히 싫어했던 뮤다. 알게 모르게 부끄러워하고 있는 듯했다. 그 증거로, 내가 자기한테 더 가까이 다가가려 하자 뒤로 주춤거리며 조금씩 물러서지 않는가.

대충 뮤와 마주보고 얘기하기에 충분할 정도의 거리를 벌리곤 말했다.

“헥토르라고 우리 반 남학생 한 명 있는데. 걔한테 따로 할 말이 있었거든. 근데 없다니까 뭐……”

다른 데 가보는 수밖에 없긴 하겠다. 헥토르한테 내일 조별과제 모임 시간 알려줘야 하는데 말이지.

뮤는 내게서 정확한 이름까지 듣고서도 누굴 연상하지 못하는 듯했다. 고개만 갸웃거리며 의문을 표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은 웬만한 타인에게 관심을 잘 주질 않았지. 당장 사샤의 경우만 보아도 그 점은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원래도 친구를 사귀는 데에 있어 참 제멋대로인 성격이라 생각했는데, 여기 입학한 뒤로는 아예 5년간 혼자 지낼 것처럼 차가운 바람만 쌩쌩 휘날리며 다니고 있었다.

그런 뮤의 교우 관계가 심히 걱정되는 나였지만. 솔직히 지금 내가 뮤를 걱정할 입장인지부터 생각해야 되기도 하고. 나도 여러모로 올바른 교우 관계에 있어 문제가 많았다. 개중에는 뮤에 관련한 문제 역시 섞여 있었다. 아마, 매우 큰 비중으로.

내가 찾던 인물이 여기 없다는 사실을 듣고선 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 나중에 보게 되면 말해줄게. 그럼……”

헥토르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고서 그런 말을 하는 건진 모르겠다.

땀에 젖은 채로 목 끝까지 올린 지퍼를 붙잡고 있던 뮤가, 내게서 시선을 돌린 뒤 얌전히 검집을 챙겨 걸음을 옮기려 했다. 방향은 연무장의 대문 쪽이었다.

“잠깐만, 뮤.”

“……”

나는 고개를 돌렸다. 뮤의 뒷모습이 보였다. 내가 불러세운 당시의 표정은 볼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잠깐 짧은 호흡을 거쳤던 뮤는 조심스레 뒤를 돌아 나를 바라봤다. 언뜻 초조함과 불안함이 어린 듯한 뮤의 자줏빛 눈동자와 마주쳤다.

“왜, 왜…?”

“그 친구한테도 용건이 있긴 했는데, 사실 너한테도 용건이 있긴 했거든. 언제 한 번 얘기하려고 했었어.”

“……아, 응. 그렇구나. 근데 나 지금 안 그래도 급한 일이 생겨서……”

“아니. 내가 더 급해.”

“……”

어차피 거짓말이다. 게다가 엄청 어설퍼. 얘는 정말 나한테 본인의 거짓말이 통할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런 거에 능숙하지 않은 녀석이란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아마 본인도 알고 있을 텐데.

그냥, 그거다. 뮤는 이 자리를 가급적 빨리 피하고 싶어 하는 것이었다.

내 단호한 말에 뮤가 입을 다물었다. 갈피를 못 잡던 시선이 결국 연무장 바닥을 향했다.

나는 다시금 뮤 쪽을 향해 걸었다.

한 걸음, 뮤가 뒤로 물러섰다.

그러면 나 역시 한 걸음 더 걷는다. 연이어 주춤거리지만 결국 뮤는 내게 따라 잡힌다.

꾸욱.

더 이상 도망가지 못하게, 뮤의 손목을 붙잡았다. 놀람으로 물든 뮤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그러나 곧 나와 시선을 맞대자,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대충 예상한 듯 금세 침잠해 버린다.

마음만 먹으면 내 손 따위 얼마든지 뿌리치고 갈 수 있을 테지만, 그러지 않았다. 잠자코 내 입이 열리는 순간을 기다린다.

“저번에 시간 비면 얘기해달라고 했었지.”

“……”

루비아가 그랬듯.

뮤와도 얘기를 나눠야만 했다.

하지만.

“그때부터 날 피하더라, 너.”

“……”

“사실 아무 일 없잖아. 나랑 얘기 좀 하자.”

“……”

저번에 나와 얘기하길 거절한 이후로, 뮤는 은근히 나를 피해다녔다.

전이라고 아예 그러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만. 같은 공간 내에서 생활하며 서로 마주칠 뻔한 적이 꽤 있었는데, 그럴 기회가 생길 때마다 뮤가 갑작스레 걷는 방향을 꺾거나 아니면 반대로 등을 돌린다거나­ 저 멀리서 누가 날 지켜보는 느낌이 들기라도 하면, 그건 대체로 뮤였던 경우가 숱했다.

혹시라도 길을 지나다 나와 우연히 맞닥뜨릴까봐 가능성을 원천부터 봉하려 한 것이 분명했다.

의도적으로 날 피하고 있었다. 이 녀석은.

“피, 피한 거 아냐…”

“아니긴 뭐가 아냐. 내가 그 정도도 눈치 못 채고 있었을 거 같아? 지금도 도망치려 하고 있잖아.”

“……”

붙잡은 손목에서 느껴지는 작은 저항감.

빨리 여길 벗어나고 싶어 하는 듯했다.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나랑 얘기 좀 해. 너한테 할 말도 있고, 듣고 싶은 말도 있어. 이대로 질질 끌면 너나 나나 전부 손해야.”

얼굴도 진지했고, 목소리도 진지했다.

그런 내 모습에 뮤는 작게 입을 벌렸다가, 도로 닫았다. 불안함에 잠긴 동공도 조금씩 흔들렸다. 숨결을 내뱉던 호흡은 좀 더 간격이 좁아지고, 붙잡은 손목의 저항감이 아주 조금 더 거세졌다.

이런 식으로 뮤에게 단호히 말했던 게 과연 마지막으로 언제였던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얘가 나한테 선을 넘는 장난 같은 건 스스로 자제하긴 했지만, 가끔 놀림당했을 때 답지 않게 삐져서 냉담하게 굴었던 것도 포함되긴 할까.

여하튼 얼마 없다. 뮤에게 있어선 지금 내 분위기는 완전히 생소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굳게 닫힌 내 입술은 열리지 않았다. 돌아올 뮤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우리 둘 사이에 영원 같은 적막이 흘렀다. 안 그래도 고요한 연무장 안에 더욱 싸늘한 공기가 감돌았다.

“아, 아……”

내 눈썹이 꿈틀거렸다.

불안정하게 흔들리던 뮤의 시선. 급격히 거칠어진 숨결 속에 영문 모를 말들이 섞여들었다.

겁에 질린 것 같았다.

…왜일까.

어느 무엇을 부정하고 싶은 건지 머리를 작게 내젓기까지 한다. 내가 아닌 다른 곳을 바라보며 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시, 싫어… 나, 나 갈래.”

뮤가 팔을 홱 들었다. 뿌리치려 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전에 나는 뮤의 손목을 더욱 단단히 붙들었다.

“가긴 어딜 가. 얘기 좀 하자니까?”

뭔데. 대체 무엇이기에 나와 이야기하는 걸 이렇게나 피하는 걸까. 도망쳐봐야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뮤도 그걸 모르진 않을 텐데. 여기서 도망가면 또 어디로 가버리는 건데. 결국 같은 악순환이 반복될 뿐이다.

“아, 아냐… 나중에, 나중에 하자. 응? 지, 지금은 안 된단 말야. 아직……”

“나중이 언제인데. 계속 이런 식으로 나 피해다닐 거잖아. 그럴 바엔 그냥 지금 얘기해. 질질 끌지 말고.”

“아, 안 피해. 안 피했어. 안 피했으니까… 응? 나중에 얘기하자. 제발. 제발, 부탁이야. 에지오.”

꾸우욱. 저항감이 곧 버틸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 그에 따라 뮤의 손목을 붙잡고 있던 내 힘도 거듭 세기를 더해갔다.

어느덧 뮤의 머리와 어깨는 얕은 떨림으로 진동하는 채였고, 안 그래도 가빴던 호흡이 더 짙고 뜨거운 숨결을 빠르게 토해내기 시작했다.

호수에 일은 파문처럼 흔들리던 눈망울에 울먹임이 차오른다. 항상 당돌했던 뮤의 이러한 모습은 여간 생소하기만 했다. 전혀 익숙해지지 않을 정도로.

“이게 뭔데 부탁까지 해. 그냥 얘기만 하는 거잖아.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닐 거 아냐. 왜 이러는 건데 대체?”

“아, 아냐. 어려워. 어려우니까……”

“너 나한테 뭐 잘못한 거 있어? 아니잖아. 루비아한테 다 들었어. 상황도 어느 정도 이해했고. 네 생일날 내가 약속 못 지켰던 거. 그럼 내 잘못인 거잖아. 내가 너한테 사과해야 할 일이야. 그거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거잖아. 네가 날 피하는 이유를 전혀 모르겠어.”

지금 다시 생각해도 내 마음만 저릿하다.

어디까지나 약속을 못 지킨 건 나였다. 뮤의 생일을 반드시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약속. 루비아를 내가 구했다고 하는 날에, 뮤는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일찍이 광장 분수대 앞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한참 지나도 오지 않는 나를 생각하며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이가 자연스레 악물어진다.

아무렴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고 해도 뮤가 받았을 상처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테니까.

그렇다면 뮤는 날 원망해야 했다. 나를 피하는 게 아니라 내가 꽁꽁 숨어도 찾아내서 내게 욕설을 퍼부어야만 했다.

나는 마땅히 그 모진 말들을 온전하게 받아낼 것이었다. 그것으로 뮤의 묵은 감정이 풀릴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물론 말 몇 마디론 턱도 없는 일이겠지만.

“왜 나랑 얘기 못 하겠다고 하는 거야?”

답답하다고 버럭 소리지르지 않는다.

더없이 차분하게 말했다.

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그럼에도 여전히 나와 시선을 마주할 생각조차 못 하고 있는 뮤를 끝까지 응시하면서. 나는 뮤가 내게 납득할만한 이유를 들려줄 때까지 기다렸다.

이쯤에서 뮤와 나는 거의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다. 뮤가 뒤로 물러서며 팔을 끌어당기고, 나는 뮤를 따라 앞으로 중심을 옮겨가며 손아귀에 힘을 더욱 꽉 쥐어잡는다.

뮤의 가느다란 손목은 부서질 듯 연약했으나, 정작 밀리는 것은 나였다. 뮤의 절대적인 근력은 나를 월등히 앞선다. 애초에 싸움이 될 수 없었다.

그런데도 나와 뮤의 힘겨루기가 이렇듯 길게 이어질 수 있는 건, 뮤 쪽에서 내가 혹시라도 다칠 걸 고려해 힘을 조절하고 있는 까닭일지도 몰랐다.

“말할… 말할 수 없어. 미안, 미안해. 에지오. 나, 그래도 지금은. 정말 아니야. 미안해. 미안해……”

이유 모를 두려움에 휩싸인 뮤의 머리가 파들파들 떨렸다. 파랗게 질린 입술 속에서 끊임없이 되뇌는 그 한마디——

미안해.

나는 그 말을 듣기가 싫었다. 그 말과 함께 점점 차오르는 눈물 또한 지독히도 보기가 싫었다.

왜, 왜… 나한테 다들 미안해하는 거야. 대체 무슨 잘못을 했다고. 너희들만 알지 말고 나한테도 좀 알려달라고. 뭔 일인지 알아야 내가 용서를 하든 말든 뭘 할 거 아니야. 계속 이대로 너희랑 어색한 사이로 지내는 건 싫단 말이야. 간단한 거잖아. 엄청 간단한 문제잖아. 잘못을 했으면 사과를 하면 돼. 그런데 이런 사과는 아니야. 당사자는 무슨 일인지도 모르는데 무작정 나한테 미안해하면, 나는? 괜찮다고 말해줘야 해? 괜찮다고 말해주면 다 끝나?

아닐 거다.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뮤는 내게 지금처럼 계속해서 사죄의 말을 고장난 것처럼 내뱉을 것이었다.

그러니 더욱 힘을 주어 말한다.

“아니, 말해. 지금 여기서.”

“아, 안 돼. 진짜 안 돼. 미안해, 미안해 에지오.”

“말하라니까.”

“미안해…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내가, 제가 잘못했어요… 선배…… 놔주세요, 제발……”

“나는 네 선배가 아니라고 했잖아.”

“아냐, 아니야… 선배, 제가 잘못했어요… 제 잘못이에요. 제발, 아, 미안해요. 그런 뜻이, 그런 말을 하려고 했던 게 아니었는데… 하윽, 미안, 미안해요… 선배… 미안해……”

“……너 왜 이래?”

격렬한 도리질이었다. 흐리멍덩한 눈으로 울먹이던 뮤의 상태가 갑작스레 이상해졌다.

힘겨루기의 주도권은 어느새 내가 잡게 되었다. 붙잡은 손목에 들어갔던 힘은 느슨하게 풀려버리고, 순식간에 쇠약해진 뮤의 몸은 비틀거리며 점차 무너지기 시작했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갈 거라고 예상은 전혀 못 했던 터라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선배……”

뮤의 무릎이 지면에 닿았다. 바닥에 주저앉은 뮤가 눈물을 뚝뚝 흘렸다. 달아올랐던 몸은 이미 차갑게 식어버린 듯, 격렬했던 운동 탓에 후끈하기만 할 텐데, 추위를 타는 것처럼 뮤가 제 어깨를 부여잡고 오들오들 떨었다.

저항할 의지조차 잃어버린 모습에 내가 붙잡고 있던 뮤의 손목을 놓았다. 뮤는 날 바라보지 않은 채 계속하여 같은 말을 반복했다.

말투도 돌아왔다. 예전의 뮤로.

“아, 아아아… 아… 미안해요… 그런 게 아니었어요… 제, 제 잘못이에요…… 제가 전부 잘못했어요, 선배…… 아아……”

“……뮤?”

들리지 않는 것을 막으려는 듯 뮤가 자신의 귀를 손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고통에 겨운 신음과 함께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듣던 내 심장이 떨릴 정도로 처절한 울음이었는지라, 나는 무심코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한밤중의 고요한 연무장 안에서 뮤의 울음소리가 허공을 가득 채운다. 나는 급하게 자세를 낮추어 뮤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초점 없는 뮤의 눈동자가 허망히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신 차려. 너 왜 이래, 갑자기.”

갑자기 이러니 덩달아 심각해지는 건 나였다.

그냥 얘기 좀 하자고 했을 뿐인데. 대체 뭘 어떻게 하면 이게 이렇게 흘러가는가. 패닉에 빠져버렸다.

너무 심하게 몰아붙였나?

아냐. 정말 나랑 얘기하기 싫었다면 본능적으로 내 손을 뿌리쳤을 거다.

이건, 그거랑은 조금 다른 듯했다.

내가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뮤가 날 피하고 있는 이유랑 관련되어 있는 듯한. 지금으로선 절대로 내게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는 것 같았다. 그건 내가 꼭 알아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상태로는 더 캐물을 수가 없잖아……

막연히 생각했었다.

나와 뮤 사이에 무언가 있었겠거니.

우리가 헤어진 이유에, 조금은 복잡한 사정이 얽혀 있었겠거니. 그러니까 대화로 풀면 될 일이라고. 서로 오해한 게 있었다면 풀고, 잘못한 게 있었다면 사과하고. 그러면 전부 끝날 줄 알았다.

아니었다.

완전히 패닉에 빠진 뮤를 내려다본다. 어깨를 흔들어도 반응이 없고,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은 채 오로지 같은 말들만 반복한다.

미안해요. 잘못했어요. 제 잘못이에요. 선배. 그리고, 미안해요. 잘못했어요. 제 잘못이에요. 듣던 내 전신에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뮤의 어깨를 흔들다 말고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래도 반응이 없었다.

어느 순간 뮤는 잠깐 나를 멍하니 보는 듯하다가, 다시금 눈물을 터트렸다.

“미안해요, 선배……”

“……”

나는 차라리 미칠 것 같은 심정이었다.

대체 뭔 일이 있었길래.

그 활달하던 아이가 이렇게 되어버린 건가.

이를 악물었다.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았다.

여기서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나뿐이었다.

“…괜찮아. 괜찮으니까, 진정해.”

“……하, 하으. 미안해요. 선배. 저… 제, 제 잘못……”

“괜찮아.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다 괜찮아. 내가 약속할게. 이번에는 반드시 지킬 테니까…… 진정해, 뮤.”

자세를 낮추어 뮤를 끌어안았다. 뜨거운 열기. 차가운 땀. 뮤의 어깨 위에 머리를 놓고 얌전히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귀를 막고 있던 손을 잡아들어 아래로 내려놓으니, 힘없이 늘어져 바닥을 짚었다.

내 왼쪽 어깨가 축축한 눈물로 적셔졌다. 바로 옆에서는 뮤의 나지막한 신음 소리가 들려온다.

미안해. 괜찮아. 그런 말들이 동시에 섞이고 합쳐졌다. 잔뜩 뒤엉킨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그럼에도 차분히 호흡하며 뮤의 등을 가만 쓸어주었다. 그 옛날 내 쪽에서 억지로 품에 안길 때가 많았던 뮤의 몸은, 이렇게나 작디작은 것이었다.

구태여 얘기를 나누지 않아도.

한 가지는 명확해 보였다.

뮤는…… 심각하게 망가져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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