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화 〉 말할 수 없는 비밀 (3)
* * *
#5
뮤는 수도 없이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에지오에게 진실을 말해줄 수 있을지. 사실 깊게 고민할 것도 없는 일인데. 그냥 말하면 되는 거였다. 뮤 자신이 아는 모든 것들을 하나부터 열까지 나열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렇게 쉽고 간단한 걸.
어째서 해내지 못하는 걸까.
에지오의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게 만들어줘야만 할 텐데. 저대로 모든 걸 잊은 채 살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잖는가. 그러면, 말해야 할 거 아니야.
뮤,
네가 저지른 모든 잘못을 인정해야지.
곧이곧대로…… 전부 실토해야지.
에지오의 무구한 노력을 멋대로 폄하하고. 나락까지 깎아내리고. 이미 에지오의 가슴 깊숙이 새겨져 있던 상처를 더욱 후벼파고.
진심으로 사랑하는 에지오를 마치 하찮은 존재마냥 비하했으며, 악을 질렀다. 소리를 쳤다. 입매를 비틀며 조롱하듯 비아냥거렸다. 더없이 이기적으로 굴었다. 주제넘게 본인이 원해서 내어준 사랑을 하나의 권리처럼 여겼다. 무리한 보답을 바랐다.
그때 당시의 자기 자신은 너무나 역겹고 추한 사람이었다. 가히 짐승과 비견될 만했다.
생일날 자신을 바람맞힌 에지오가 미워서.
정작 그때 에지오의 상태가 어땠는지도 모르면서.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면서……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절뚝거리며 먼 길을 걸어온, 검붉은 핏물로 범벅이 된 에지오를 앞에 두고.
뮤는 제 연인이었던 사람에게 평생 지우지 못할 상처를 주었다.
…그랬을 텐데.
지워져 버렸다.
그 순간을 기억하는 건, 자신뿐이었다.
에지오는 전부 잊어버렸다. 뮤를 아직까지 좋게 생각해주고 있었다.
그게 매우 작은 한편으로는 기쁜데.
전혀 기쁘지 않았다.
에지오가 받았을 거대한 상처가 말끔히 지워졌다는 것은 분명 희소식이다. 그가 덜 아플 테니까. 그러나 진실은 가려지지 않는다.
언젠가는 말해야만 했다.
당신의 연인 되는 이가 누구보다 사랑하는 당신에게 대체 어떤 폭언을 퍼부었는지.
비록 자극적인 욕설 하나 들어가지 않았으나, 그 얼마나 날카로운 비수였는가. 대못이었는가. 뾰족한 송곳이었는가. 게다가 마지막에는, 에지오에게 직접적으로 욕설을 할 뻔하지 않았는가.
그의 옆에 다시 설 자격이 없었다.
정말로 용서를 받으려면, 에지오가 모든 걸 기억하고 있는 상태에서 뮤를 용서해야만 했다.
다만 그건 이루어지기 요원한 일이었다. 당연하게도, 에지오는 전부 잊어버렸으니까.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였다. 뮤 본인이 그날 있었던 모든 일들에 대해서 당사자인 에지오에게 차근차근 설명해주는 방법밖에 없었다.
10시간의 기다림이 어쨌고. 기념할 만한 생일이 어쨌고. 다 필요 없었다.
뮤가 에지오에게 공들여 설명해야 하는 부분은 딱 하나였다.
본인이 대체 어떤 잘못을 저질렀기에.
이토록 슬피 우는 건지.
누군가를 더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은 늘 갑이 아닌 을이 된다. 뮤는 그런 중대한 일이 있었음에도, 분수에 맞지 않게 에지오를 아직 사랑하고 있었다.
그를 보면 여전히 가슴이 설레인다. 얼굴을 맞대면 자기도 모르게 입을 맞추고 싶어진다. 항상 예쁜 모습만 보여주고 싶고, 같은 침대 위에서 잠자리에 들고 싶었다. 한창때의 아리따운 소녀는 한 번 반했던 남자에게 아직도 마음 가득 연심을 품고 있었다.
그렇게나 사랑하는 사람한테 다시 한번 차가운 비수를 꽂아야만 했다.제 죄를 낱낱이 고백해야만 했다.분명…상처받을 거야. 무엇보다, 나한테 크게 실망할 거야. 뮤에게 있어서는 그 모든 미래가 너무나 두렵고 무서울 뿐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상처 입히고 싶지 않았고, 사랑하는 사람한테 미움받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런데도 에지오는 말하라고 한다.
지금 여기서, 당장.
뮤는 말할 수 없었다.
아직… 아무런 준비도 되지 않았는데.
‘——선배는 정말……’
쓰레기예요.
아냐. 아니야……
그런 생각… 한 적 없어.
벼랑 끝 궁지에 몰렸다.단단히 붙잡힌 손목. 본능적인 뒷걸음질. 에지오가 힘을 더 세게 준다. 뿌리칠 수 없었다. 그러면 에지오가 다칠 테니까.
그래서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애원해야만 했다. 놔달라고. 지금은 아니니까. 나중에 다 말해줄 테니까, 제발 지금은 나를 놔달라고 그렇게 부탁했는데, 결국 들어주지 않았다.
“아니, 말해. 지금 여기서.”
그때부터 뮤는 착각에 빠졌다
숨을 헐떡거리던 피투성이 선배. 만신창이가 된 그의 앞에서 내뱉었던 말. 전부 잊지 않았다. 뇌리에 똑똑히 박힌 그 끔찍한 기억들이 수많은 거머리처럼 그득거리며 뮤의 심장을 옥죄었다.
“아, 안 돼. 진짜 안 돼. 미안해, 미안해 에지오.”
“말하라니까.”
안 돼.
말할 수 없어……
한순간에 허파가 틀어막혀 숨이 답답해졌다. 목이 가득 메었다. 울컥 솟아오른 부정적인 감정들이 뮤의 머릿속을 따갑게 찌르자, 찔린 곳에서 피가 새어 나오듯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미안해…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내가, 제가 잘못했어요… 선배…… 놔주세요, 제발……”
“나는 네 선배가 아니라고 했잖아.”
“아냐, 아니야… 선배, 제가 잘못했어요… 제 잘못이에요. 제발, 아, 미안해요. 그런 뜻이, 그런 말을 하려고 했던 게 아니었는데… 하윽, 미안, 미안해요… 선배… 미안해……”
“……너 왜 이래?”
그러게.
나, 나 왜 이러지. 이러면 안 되는데.
선배가 안 좋게 볼 텐데. 미친 사람 같잖아.
선배, 선배.
에지오의 그림자가 주욱 늘어진다. 한 사람이 두 명으로 보였다. 작은 선배와, 커다란 선배. 그것은 곧 하나로 합쳐졌다.
‘……미안해, 뮤.’
피투성이 모습이 겹쳐 보인다.
내뱉었던 모진 말. 그 뒤로 홀연히 사라진 선배. 모든 게 자신의 탓 같아서. 아. 그만. 그만해. 다리에 쭉 힘이 풀렸다. 주저앉는다. 뮤의 뇌리에서 끔찍한 기억들이 생생하게 재생되었다. 가장 최근의 일도 떠오른다.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버린 에지오의 모습. 내게 나지막이 속삭이던 그 상냥한 목소리. 더는 들리지 않아.
대신 다른 목소리가 들려온다.
뮤를 좀먹은 트라우마는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일까지 환상처럼 만들어 내는 지경에 이르렀다.
선배가 제 어깨를 잡아 흔든다. 악귀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벽력같은 호통을 친다. 전부 네 탓이라고. 네가 이렇게 만들었다고.
그러면…뮤는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선배……”
행복할 수 있었던 미래를 모두 망가뜨린 건.
자기 자신의 손이었다.
도무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을 다시금 자각해버리자, 그리고 벌어졌던 모든 일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본인의 입으로 말해줘야만 한다는 상황에 패닉을 일으켜, 뮤는 헤어나올 탈출구도 방법도 찾지 못한 채, 끝도 없이 이어지는 악몽 속에 덩그러니 갇혀버렸다.
“…괜찮아. 괜찮으니까, 진정해.”
“……하, 하으. 미안해요. 선배. 저… 제, 제 잘못……”
“괜찮아.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다 괜찮아. 내가 약속할게. 이번에는 반드시 지킬 테니까…… 진정해, 뮤.”
그런 시간이었다.
뮤는 자신이 만들어낸 지옥 한가운데서……오롯이 살아 있었다.
#6
한참을 끌어안고 다독였다.
괜찮을 거야.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네 잘못이 아니야. 너는 잘못한 거 없어. 주문처럼 되뇌었다. 나뭇가지 위에서 떨어진 아기새처럼 위축된 뮤를 내 품으로 감싸고, 서로의 어긋난 심장박동이 차차 균등해질 때까지 계속해서 뮤를 진정시켜 주었다.
토닥, 토닥.
효과가 있었는지 뮤의 울음도 어느덧 그쳤다.
간헐적인 숨결만이 내 가슴팍에 토해질 뿐.
‘……깜짝 놀랐네, 진짜.’
무엇을 잘못했다고 이러는 건지 몰라도.
이 정도로 크게 신음하며 아파하고, 내게 죽도록 미안해한다면, 그만 용서해줘도 되는 게 아닐까.
얼마나 큰 잘못을 했든 간에, 나를 선배라 부르던 내 기억 속의 뮤가 이런 식으로 망가져버린 모습을 더 이상 보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아무 이유 없이 이럴 애가 아니지 않는가.
분명 우리 사이에 뭔가 있었을 거다.
하지만 난 그런 거 모른단 말야.
사람이 이렇게나 고통스러워 하고 있다. 경기를 일으킬 정도다. 제정신이 틀어박힌 사람이라면 여기서 뮤를 더 압박하진 않을 것이었다.
‘어쩔 수 없지…’
얘기는 나중으로 미뤄야겠다.
이번은 내 실수였다.
기회가 오늘만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무언가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면 그때까지 기다려주는 게 맞을 터다. 더 재촉하지 않기로 했다.
가급적 빨리 해결하면 좋겠지만, 우리에겐 아직 많은 시간이 남았으니까. 아무렴 누가 일부러 떼놓지 않는 이상 계속 볼 사이니까.
군데군데가 비어버린 기억을 되찾고자 하는 마음에 너무 성급했던 것 같기도 했다. 뮤에게 따로 이야기를 듣는다면 잊어버렸던 대부분의 일은 알아낼 수 있을 듯했던 까닭이다.
하지만 곧 그것도 어렵게 되었다.
뮤가 내게 이토록 얘기해주는 것을 두려워하니, 웬만하면 잃어버린 기억에 대한 걸 잊고 살거나 아니면 다른 방법을 찾아보는 수밖에 없겠지.
다른 방법이라……
알만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
아니, 누군가 꼭 얘기를 들려주는 게 아니라.
그냥 온전히 나의 기억을 회복할 방법이.
분명 어딘가에 있지는 않을까.
그때.
얼마 전의 일이 떠올랐다.
— 네가 에지오 크라닐이지? 제 4학구에서 그 엘레나님과 호각으로 싸움을 벌였다던! 이야, 같은 조가 될 줄은 몰랐네!
‘……엘레나 선배님.’
여기저기서 들려오던 소문.
정확한 사실만 간추리자면, 그 자리에 엘레나 크라이모어가 있었던 건 확실하다. 우리들의 대선배. 남부 마계 대원정의 주역……
어느 무엇을 근거로 그리 생각하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 현장에 있었던 그녀라면 내 상태에 대해 뭔가 알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막연히 추측할 뿐이다. 확신하는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도.
엘레나는 내가 만나고 싶다고 해서 곧바로 만날 수 있는 위치의 사람이 아닌데…… 어떻게 하지.
그러고 보니, 제 4학구 사건의 여파로 각 프론티어 교수진들에게 엘레나와의 면담이 예정되어 있다고 했었나.
그렇다면 그게 전부 끝날 때까지 엘레나는 적어도 프론티어 안에 남아 있을 거란 얘기였다.
기회는 의외로 가까이에 있었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다. 방법을 찾지 못해도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해 조언을 얻을 수만 있다면 크나큰 수확이었다. 엘레나는 대선배이자 한 명의 강인한 어른이었으니까. 뭔가 보는 것만으로도 의지가 된다고 해야 할지. 그런 느낌이다.
잠시간 고민에 빠져든 사이.
가까스로 안정된 것 같았던 뮤의 심장박동이 어느 순간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뭐지.
그런데 몸은 전처럼 떨지 않았다. 오히려 빳빳하게 굳어 있는 것 같았다. 혹시 또 시작됐나 싶어서, 가만 뮤의 등을 상냥히 쓸어내렸다.
“괜찮아, 뮤. 이제……”
“…괜찮아.”
“그래, 괜찮……?”
속삭이듯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나는 말하다 말고 도중에 말을 끊었다.
“…나, 나. 괜찮아졌어.”
그렇다는 모양이다.
뮤를 안아주고서 시간이 조금 지났을 즈음, 바닥에 늘어져 있던 뮤의 팔도 스르르 올라가 내 등허리를 감쌌었다.
그렇게 서로 껴안고 있는 모습이 되었다.
여전히 뮤의 손은 내 등 위에 올려진 채였는데, 내가 입은 카디건을 꾹 쥔 손은 어쩐지 놓일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정말?”
“……응.”
작은 대답이 돌아왔다.
이성이 돌아오긴 한 건가. 다행이네.
진심으로 안도했다.
솔직히 좀… 무서웠거든. 당황스럽기도 했고.
“그럼 일단 이거 좀 놓고……”
“……안 돼.”
꾸욱.
내 옷자락을 쥔 뮤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뮤의 몸집은 그리 작은 편이 아니었다. 신장으로 따지자면 164cm 정도. 마지막으로 나한테 정확한 수치를 알려줬던 게 대략 1년이 다 되어 가는 즈음이었으니까, 지금은 조금 더 컸으려나. 모르겠다. 겉으로 봐선 변화가 거의 없었다. 아무튼 평균보단 조금 더 길쭉하단 말이었다.
그런데도 이리 작았다. 나한테는.
완전히 나한테 폭 안긴 모양새가 되어, 그로부터 느껴지는 심장박동 소리가 미약히 들려올 정도였다.
터질 듯 크게 뛰고 있었다. 겹쳐진 내 심장도 덩달아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잔뜩 땀을 흘려서 그런지 더 짙게 느껴지는 뮤의 체취가 유난히도 내 기분을 오묘하게 만들었다.
“들어가서 쉬는 게 좋을 텐데…”
“…안 돼.”
“…왜?”
“……얼굴 못 보겠어.”
“……”
“……부끄러워…”
그러면서 꾸욱 더 힘을 주었다.
나는 별달리 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입을 다물고 있자 뮤가 속삭인다.
“……이상한 모습 보여줘서 미안해.”
“……아냐, 뭘. 그럴 수도 있지.”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저런 일도 생기는 법이다.
나는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전혀 이상하다고 생각 안 했어. 걱정했지. 네가 이대로 어떻게 되어버리는 줄 알고. 지금 괜찮아졌으면 그걸로 됐어.”
“……”
“당분간은… 아무것도 묻지 않을게. 네 마음이 편할 때. 네가 내킬 때 나한테 얘기해주면 돼. 그리고… 나는 아직 네가 나한테 왜 이러는 건지 잘 몰라. 내가 너한테 썼다는 편지의 내용도…… 기억나는 거 하나 없어. 중요한 거였다면 정말 미안해. 기억 못 해서.”
“…에지오가 미안할 게 아냐.”
포니테일로 묶은 뮤의 머리가 양옆으로 흔들렸다. 뮤는 자신의 얼굴을 내 가슴팍에 더 깊숙이 묻었다.
“미안해야 하는 건…… 나야.”
“……”
자조하듯 중얼거리는 뮤의 목소리에.
나는 그렇지 않다는 듯, 말없이 뮤의 뒷머리에 살포시 손을 얹었다.
순간적으로 움찔거리는 작은 몸. 의외로 처음 하는 행동은 아니었다. 그녀의 등을 쓸어주었던 것처럼 조심스레 손을 움직인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뮤가 속삭였다.
“…에지오.”
“응.”
“…나한테, 상냥하게 대해주지 않는 게 좋아.”
“……무슨 말이야?”
내가 되묻자.
뮤는 조용히 말끝을 흐린다.
“네가 계속 그러면……”
꾸욱.
“내가 더 아파져……”
“……”
무슨 말이냐고 물었지만.
구태여 답을 들으려 하진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다.
뮤는 지금 날 원하고 있었다. 자기를 상냥하게 대해주지 말란 말과는 전혀 상반되는 태도였다.
나를 더 강하게 끌어안고, 주저앉은 몸을 온전히 내게 맡겼다. 그러면 나는 뮤의 말대로 하지 않고 나지막이 입을 열 뿐이었다.
“…아파해도 돼. 내가 옆에 있잖아.”
나 때문에 아프다는 사람에게 할 소린가 싶지만.
참으로 모순적이게도 그렇기 때문에 오직 나만이 해결해줄 수 있는 문제였다.
뮤는 한참 대답이 없다가.
“그러지 말라니까……”
날 원망하듯 그리 중얼거리고는.
더욱 세게, 내 옷자락을 쥐었다.
#6
뮤는 기숙사로 돌아갔다.
도저히 내게 엉망진창이 된 얼굴을 못 보여주겠다고 해서, 거의 뭐 코까지 덮어버릴 정도로 트레이닝 자켓을 올려 입었다. 그러고는 땅에 떨어진 검집을 챙긴 뒤 도망치듯 3동을 떠나갔다.
‘…왠지 피곤하네.’
일시적 해결이라면 해결인가……
뮤의 상태는 당분간 지속적으로 지켜봐야겠다.
헥토르를 찾으러 왔다가 예상도 못 한 일이 벌어진 셈이다. 결국 여길 찾아왔던 소기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한 채였다. 어쩌지. 곧 가브리엘이랑 약속했던 시간이 다 되어가는 참인데. 그냥 쌩깔까. 물론 헥토르 말고 가브리엘 말이다.
뮤가 떠나간 문 쪽을 돌아보던 내가.
하는 수 없이 헥토르가 거주하고 있을 기숙사로 찾아가려던 때였다.
“킁, 킁.”
“……?”
바로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전혀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어느샌가 내 뒤를 점령한 것이었다. 일순 돋아오른 소름이 등줄기를 내달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냄새가 난다구. 냄새가. 완전 배어버렸잖아? 킁, 평소보다 엄청 강하네. 나 이거 주면 안 돼? 응?”
흠칫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너, 너 뭐야.”
“뭐라니. 사샤라구. 뭐가 아니라!”
언제부터 여기에 있던 건지.
허리에 양 손을 얹은 사샤가 당당히 외쳤다.
네가 왜 여기서 나와?
“아니, 어. 그래. 사샤. 무슨 일이니?”
“으음… 그게 있지이.”
말끝을 늘이던 사샤는 까치발을 들더니, 제자리에서 핑글핑글 돌았다. 하늘빛 트윈테일이 바람개비처럼 원을 그리며 휘날린다.
“사샤는 사실 다~ 봤다구. 그래도 눈치 있었지? 막 함부로 막 응? 방해 안 했다? 완전 잘했지?”
까르르 웃다가 어느 순간 빙글 도는 것을 멈췄다. 어지럽지도 않은지, 내 옆에서 연신 폴짝거리며 귓가를 시끄럽게 만들었다.
살면서 몇 번 보지도 못한 사촌동생이 별안간 사샤의 모습에 겹쳐 보였다.정말 시도 때도 없이 내 모든 말에 ‘왜에?’ 라는 의문을 덧붙이며 날 괴롭혔던 지독한 녀석이었지……
잠깐의 어지럼증이 돌았던 찰나.
사샤가 말하고 있는 게 무엇인지 알아차린 나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사샤의 옆을 지나치며 입을 열었다.
“…너랑 관련 없는 일이야.”
“아닌데? 완전 관련 있는데? 내 친구랑 혹시 그렇고 그런 관계야? 사샤랑 다르게 어른이라는 걸까나 꺄악! 꺄악! 부끄러워!”
양 볼에 손을 얹고선 몸을 배배 꼰다.
무척 과장스러운 리액션에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아니, 딱히 대답할 거리를 찾지 못했다. 아무래도 이젠 아니었지만, 그렇고 그런 관계는 맞았으니까.
순간적으로 말문이 턱 막혀서 잠깐 멈칫거렸다가, 딱히 얽히기 싫었을 정도로 귀찮은 친구가 내게 들러붙은 곤란한 상황을 어떻게 빠져나가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저기저기, 무슨 일이 있던 거야? 사샤한테도 알려줘. 궁금하단 말야. 그리구 혹시 둘이 친하면”
“글쎄, 너랑 관련 없다니까.”
“……”
냉담한 내 말에 사샤가 볼을 부풀렸다.
“……치사해. 매정해. 사샤도 뮤랑 친해지고 싶은데. 왜 사샤가 아니라 너만 먼저 친해지는 거야. 불공평해애애애애.”
그렇구나아아아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복도를 거닐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내 옆에서 폴짝폴짝 뛰던 사샤가 발을 멈추더니, 타박거리며 걷다가 내 카디건의 옷자락을 손으로 얕게 쥐었다. 직후 급격히 침울해진 목소리로 자그맣게 중얼거린다.
“그리구, 뮤한테 사과도 해야 하는데…… 뮤는 나랑 얘기 전혀 안 해준단 말야.”
“……”
별안간 사샤의 눈동자가 글썽거렸다.
아무래도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아 보여서, 그 말에는 자연히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야,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사샤가 뮤의 주변을 계속 알짱거리다 실수라도 한 거 아닐까. 하지만 그렇다곤 해도 뮤랑 친해지고 싶은 마음은 최소한 진심으로 보이긴 했다.
여기서 이럴 시간 없긴 한데.
무슨 일인지 얘기는 들어보려던 찰나.
—위이이잉…
복도를 지나던 우리 앞의 승강기 문이 열리고.
“……어.”
그 안에서 내가 찾던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