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차버린 소꿉친구와 전 여친이 같은 반이라 곤란하다-72화 (72/201)

〈 72화 〉 별 (4)

* * *

#8

준비할 건 별로 없다고 했다.

스텔라는 눈을 꼭 감은 채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는 듯했고, 나는 그 옆에서 별이 쏟아지는 풍경을 멀거니 구경하고만 있었다.

그래도 스텔라가 말했던 것처럼 장면을 놓치지 않기 위해 집중은 하고 있었다. 뭘 어떤 식으로 보여준다는 걸까. 살짝 기대가 되긴 했다.

그로부터 5분 정도가 지났을 즈음.

“……이상하다.”

내 손을 잡은 스텔라의 고개가 슬며시 기울었다.

“왜, 왜…… 안 들리지?”

고운 미간이 가운데로 좁혀졌다. 입술을 질근 깨물며 끄응, 하는 신음까지 낸다.

“무슨 문제 생겼어?”

“…그게, 응답이 없으셔.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분명, 내 목소리는 닿고 있는 것 같아. 하지만 대답이 없어. 틀림없이 너의 운명을 빌었는데……”

당사자가 아니라서 어떤 기분인지는 상상할 수 없다. 다만 일에 차질이 생겼다는 점은 확실히 알겠다. 스텔라가 잔뜩 곤란해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예상지도 못한 상황. 나는 차분하게 말을 아꼈다.

“기, 기다려 봐. 다시 한 번 말씀을 드려볼게.”

“천천히 해도 괜찮아.”

“으응…… 후우, 하아.”

얕은 심호흡과 함께 스텔라가 다시금 정신을 집중했다. 마주잡은 손에 실린 힘이 조금 더 강해진 듯했다.

아까와 똑같이 밤하늘의 하얀 점들을 시야에 담다가, 문득 스텔라가 눈을 감고 있길래 나도 같이 스르륵 눈꺼풀을 닫아 보았다. 아주 미약한 빛이 비쳐 들어오는 것 빼고는 완연한 어둠이 내 눈을 뒤덮었다. 온통 검은빛 일색의 사위. 내 정신도 자연스레 더 깊고 어두운 곳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때였다.

“……역시, 안 들려. 오늘 같은 날엔 가장 잘 보여야 할 텐데, 진짜 이상하다. 왜 이렇……”

두근.

심장이 한 번 크게 맥동한 순간.

“……에지오?”

모든 감각이 한순간에 차단되었다.

서늘한 흙바닥의 감촉도, 바로 옆에 앉은 스텔라의 목소리도. 내겐 무엇 하나 느껴지지 않았다. 너무 집중해서 그런 걸까. 아니다. 나는 지금 외딴 별세계에 홀로 자리하고 있었다. 나를 제외한 여느 타인 한 명 존재하지 않는 캄캄한 공간. 황급히 벗어나려 허우적거릴 수록 발을 헛디뎌 더욱 수렁 아래 빠져버리는, 흡사 개미지옥과도 같은 곳이었다.

살려달란 작은 외침조차 외부 세계로 전송되지 못했다. 정신이 차츰 함몰된다.

오감이 없어 내가 어디에 어떤 자세로 부유하고 있는 건지조차 알 수 없다. 볼 수 있는 건 단 하나뿐. 칠흑에 휩싸인 공간과 아득한 너머로부터 새어 들어오는 불그스름한 빛무리. 그것은 인공 파노라마처럼 좌우로 넓게 펼쳐지더니, 곧 나의 주변을 칭칭 감싸고 모든 공간을 새하얗게 물들였다.

눈이 부셨다.

찰팍. 물소리가 났다.

청각이 돌아온 건가. 아니면 소리라는 게 드디어 존재할 수 있게 된 걸까. 발목도 시렸다. 촉감도 돌아왔다. 같은 맥락이었다. 무릎을 꿇듯 자리에 넘어지니 첨벙거리며 내 몸이 반쯤 물에 잠겼다. 절망하는 듯한 자세로 엎드려 연신 쿨럭였다. 끝이 보이지 않을 법한 대해(大?)의 수심은 나의 종아리까지밖에 오지 않을 정도로 깊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순간적으로 기함할 수밖에 없었다.

수면에 비친 나의 얼굴은, 이제야 익숙해지기 시작한 에지오 크라닐의 새로운 얼굴이 아니라—— 그 예전, 키 작고 비실한 에지오 크라닐의 모습이었다.

살짝 붉은 빛깔이 도는 검은 머리칼.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한 푸른 눈동자의 소년이 수면 위에 고스란히 투영된다. 영문 모를 얼빠진 얼굴에 일시적으로 모든 사고회로가 정지한 것도 잠시, 저녁놀에 반짝거리는 바다 한가운데서 무언가 둥실 떠올랐다.

쏴아아아. 물빛 기둥이 생겨나더니, 나풀거리는 천이 벗겨지듯 물줄기가 흘렀다.

그 사이로 드러난 팔과 다리에는 물방울 하나 묻어 있지 않았다. 그저 눈부실 뿐이다. 이글거리는 주홍빛 하늘에 오롯이 떠오른 빛덩이 하나.

「기억하라. 소년이여. 여(?)와의 계약을 기억하라. 그리하기 전까지는, 너의 필연(必?)이자 필멸(必?)을 그 아무도 엿볼 수 없으리라.」

그건——

마치 하나의 태양 같았다.

#9

“——에지오!”

다급한 누군가의 목소리와 함께, 나는 비로소 제정신을 차렸다.

“칵, 카학. 쿨럭… 하아, 하아……”

차단되었던 오감이 한순간에 일제히 밀려온다.

눈을 뜨자마자 흙바닥이 보였고, 물 한바가지를 쏟은 듯 축축한 머리칼 끝에서부터 땀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찝찝하도록 온몸이 식은땀에 절여져 있었다.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이 뭉클거리며 잔뜩 토해졌다.

“괘, 괜찮아!?”

뭐가 어떻게 된 걸까. 스텔라는 바닥에 엎드린 자세로 있던 내 등과 어깨를 꼭 붙잡은 채였다. 고개만 옆으로 돌려보니 은구슬 같은 눈물을 글썽거리고 있었다. 본의 아니게 걱정을 끼친 듯했다.

“……어, 괜찮아. 후우.”

“전혀 안 괜찮아 보이는데……”

“아냐, 진짜 멀쩡해. 괜찮으니까……”

호흡을 가지런히 고르며 현실감을 되찾던 내게, 불현듯 스텔라의 마법이 쏟아졌다.

땀에 절었던 옷가지와 머리칼이 본래대로 돌아왔다. 차갑도록 서늘해졌던 몸이 별안간 따스해졌다. 그 상태로 두어 번 깊은 숨을 토해내니, 쿵쾅거리며 맥동하던 심장도 편안한 리듬을 되찾았다.

“이, 일단 이거라도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아냐, 이걸로 충분해. 고마워.”

자세를 잡고 기울었던 상체를 일으켰다. 털썩, 하며 기운 빠진 채 앉아 옆을 돌아보았다. 걱정스러운 눈길을 한 스텔라.

“에지오…… 어떻게 된 거야?”

“오히려 내가 묻고 싶어.”

“나, 나는 갑자기 네가 정신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지길래, 깜짝 놀라서 계속 널 불렀는데도 반응이 없고…… 그 와중에 아직도 별님은 목소리를 들려주시지도 않고, 나, 나 정말 큰일 나는 줄 알았단 말야……”

도중에 의식을 잃은 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던 순간이 스텔라의 손을 잡은 채 눈을 감았던 찰나였다. 그 뒤로는 정말 끔찍한 감각의 연속이었다.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속이 대차게 울렁거린다. 계속 떠올리자니 오늘 먹었던 걸 전부 토해낼 수 있을 듯했다.

방금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밤하늘은 덧없이 평화로웠다. 왠지 신경질이 났다. 분명 어떠한 식으로든 연관이 있었을 텐데.

“…스텔라.”

“으, 응.”

“별은, 어떻게 생겼어?”

“……어떻게 생겼나니? 그건 왜… 설마?”

“아니, 아직 몰라. 그래서 물어보는 거야.”

말 꺼내기를 주저하던 스텔라가 조용히 대답했다.

“……그게, 나도 잘 몰라.”

“어, 모른다고?”

“응… 모습은 잘 보여주질 않으셔서…… 목소리만 아는 정도? 사실 그것도 잘은 표현할 수 없는 게, 매번 달라지셔서……”

“복잡하네.”

“응……”

알려줄 수 있는 게 딱히 없어 면목이 없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모르는 게 죄는 아니지. 아무튼 스텔라도 모른다고 했으니, 내가 봤던 것들의 정체를 무엇이라 단정지을 수는 없었다. 심오한 생각에 잠긴 내 표정을 보았는지, 스텔라가 조심스레 물어왔다.

“무슨 일…… 이었어?”

“아, 음.”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할까.

“…바다를 봤어.”

“바다?”

“어. 바다랑…… 저녁 하늘. 그리고 태양 같은 빛덩이 하나. 그게 나한테 말을 걸었어. 뭘 말하는진 모르겠지만 기억하라고 했어. 필연이니 뭐니 같은 말을 했던 것도 같은데, 나도 잘 몰라. 미안. 그냥 좀, 아직도 꿈을 꾼 것처럼 긴가민가해서……”

“아, 아냐. 그게 당연해. 응. 계속 말해봐.”

“어. 그리고…… 과거가 없다면 미래도 없다면서, 나한테 뭘 보여줬던 것 같아. 이것도 잘은 모르겠는데……”

나는 그리 말하며 문득 나의 손과 발을 내려다보았다. 멀쩡했다. 손으로 얼굴을 슬쩍 매만져 보기도 했다. 일전의 에지오 크라닐이 아닌, 새로운 몸.

다행이다. 돌아가지 않았다. 왠지 모를 안도의 한숨이 쉬어졌다. 일련의 내 행동을 스텔라는 갸웃거리며 지켜보고 있었다.

“아무튼, 거기서 내 미래의 운명을 본 것 같진 않아. 그 반대면 모르겠다. 무엇보다 네가 말하던 별도 아닌 것 같았어.”

“그럼, 뭐야……?”

“난들 알겠니. 일단 누구나 못할 신기한 경험을 했단 건 확실해. 네 덕분이야, 스텔라. 고마워.”

“아, 응? 천만에……?”

뭐가 됐든 스텔라의 능력이 내게 영향을 끼친 사실만큼은 틀림이 없겠지. 정작 본인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던 것 같지만.

잠시 뒤 스텔라는 내 옆에서 흐트러진 카디건 등의 옷매무새를 정리하더니, 다시금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이번에는 내 손을 잡지 않고 자신의 두 손을 꼭 마주 잡은 채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스텔라가 눈을 도로 떴다.

“…에지오, 별은 아닌 것 같다고 했지?”

“어.”

신(?)이라면 몰라도.

그런 직감이 들었다.

“무슨 문제야?”

“그게, 별이 아니라면 대체 뭐였을까 싶어서. 지금 내 목소리가 전혀 닿지 않고 있어. 이건 내가 이미 별에게 목소리를 전할 기회를 다 써버렸다는 뜻이야.”

“……뭐? 진짜?”

“응. 확실해. 그리고 원래라면 나도 같이 너의 운명을 보아야 했어. 내가 먼저 목소리를 듣고, 그걸 남한테 전달해주는 거라서. 그런데 이번에는 너 혼자서만 뭔가를 본 거야. 이런 적은 정말 처음이야.”

그리 말하던 스텔라의 얼굴에 서린 기색은 당황스러움이 태반이었지만, 약간의 흥미로움 또한 깃들어 있는 듯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정신을 못 차리던 날 걱정하며 울먹이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비로소 옅은 미소를 되찾은 스텔라가 날 돌아보며 입술을 달싹인다.

“너는 특별한 사람이구나, 에지오.”

특별하다, 라.

……그것도 그런가.

갈수록 남에게 함부로 말하기 힘든 비밀만 많아지는 것 같아서, 나는 왠지 모르게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10

야심한 밤.

프론티어 본부 지하 2층의 어딘가.

철판 바닥이 쭉 깔린 좁은 복도 위, 발광하는 형광등 아래 서늘하디 차가운 철제 의자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가장 왼쪽 끝자리에 앉은 교수 부임 2년차의 한 남성이 본인의 넥타이를 점검하고 있었다. 잘 다려져 각이 잡힌 양복은 전날 부리나케 고급 양복점에서 새로 사온 것이다.

손목에 찬 아날로그 손목시계도 꼼꼼히 점검한다. 일순 고민하던 남성은 시계의 움직임을 일시정지 시켰다. 혹시라도 초침 흐르는 소리가 문 너머에 있을 사람의 신경을 거슬리게 할까봐, 라는 괴이한 맥락에서였다.

“후우, 후.”

바짝 긴장한 듯 가슴에 손을 얹고 차분하게 심호흡까지 한다. 마음속으로 꾸준히 뭔가를 되뇌는 듯하다가.

끼이이익.

본인 바로 옆의 문이 열리자 올 것이 왔다는 듯 주먹을 꾹 쥔다. 열린 문으로부터 탈진한 모양새의 사내가 좀비처럼 비척거리며 걸어나온다.

의자에 앉아 있던 남성을 힐긋 보지도 않고 반대편 출입구를 향해 무뎐히 발걸음을 옮긴다. 분명 자기 앞의 차례였던 것 같은데, 들어갔다 나온 뒤로 최소 십 년은 늙어 보였다.

“마지막 분, 들어오세요.”

드디어 호출되었다. 눈을 꾹 감았던 남성이 덜컹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관절인형 혹은 장난감 병정처럼 몸을 부자연스레 움직인다.

자리에 어울리지 않게 메이드복을 차려입은 여성이 안내하는 대로 성큼성큼 문 안의 복도를 걷는다.

그리고, 어느 문 앞에 멈춰 섰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네, 냅.”

혀까지 씹었다. 비릿한 피맛이 느껴졌지만 그것에 신경 쓸 여유 따위 존재하지 않았다. 남성이 둥그런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차가웠다. 그대로 돌려 열으니, 훅­ 하면서 매캐한 담배 연기가 남성의 콧속으로 끼쳐 들어왔다.

평소 애연가인 남성조차 인상을 역겹게 찌푸릴 정도였다. 그 정도로 연기는 매우 독했다. 하지만 절대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무심하게 열고 들어온 문을 닫더니, 쿵 하는 소리가 났다. 그러자 작은 단칸방 사이즈의 구조가 눈에 들어왔다.

푸르스름한 빛이 벽면에 스며든 방. 중앙에 길다란 테이블이 놓여 있고, 두 개의 의자가 각 맞은편에 설치되어 있었다. 남자로부터 먼 쪽의 의자에 앉은 누군가의 다리가 테이블에 꼬아진 채로 턱 걸쳐져 있었다. 무척이나 길쭉한 다리였다.

꿀꺽.

남자가 침을 삼키며 의자에 다가가 앉으려던 순간.

“동작 그만. 누가 앉으라고 했냐?”

남자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뻑뻑거리며 줄담배를 태우던 누군가는 입에 꼬나문 그것을 테이블 위 재떨이에 거칠도록 비벼 껐다. 정확히는 재떨이 위 죽은 담배들의 잔해로 이루어진 무덤에다 대충 던진 것에 가까웠다. 두 달 내지 한 달 분량을 오늘 하루만에 다 소비해 버린 것이었다. 세상에. 남자가 속으로 기겁했다.

그런 생각을 하든 말든 여전히 맞은편의 누군가는 굉장히 꼬와 하고 있었다. 남자가 곧바로 허리를 직각에 가깝도록 숙였다.

“죄송합니다, 엘레나 님.”

“어.”

더 대답하기도 귀찮은 듯 손사래를 젓는다.

원래는 엘레나도 이런 양아치 같은 태도까진 아니었다. 프론티어 본부로부터 특별히 부탁을 받았다곤 하나, 이들도 엄연한 프론티어의 인재이자 귀중한 인적 자원이었다.

엘레나의 통상적 위상이 어지간한 왕족을 쌈싸먹는다 해도 구태여 그들을 깔볼 필요는 없었다. 그 때문에 엘레나도 처음에는 존대를 했다. 처음에만.

이 빌어먹게 큰 도시는 교수의 숫자도 존나 많았다. 엘레나는 그날 이후부터 이곳에 거의 갇혀 살다시피 하고 있었다. 다 끝내기 전까지는 절대 못 나간다. 좆같아서 중간에 때려칠까 싶은 생각을 수도 없이 했는데, 약속한 게 있던 까닭에 그럴 수도 없었다. 의욕이랄 게 사라진 지 어느덧 이틀이 지났다. 엘레나는 비뚤어졌다.

기름진 검은 머리칼이 허공에서 흐물거렸다. 단단한 상체에 쫙 달라붙은 검은 탱크탑과 품 넓은 트레이닝 바지. 담배 연기와 찌든 때에 잔뜩 썩어버린 인상의 얼굴은 늙고 병든 야수를 연상시켰다.

그렇다. 늙고 병들어도 야수는 야수였다. 날카로이 찢어진 눈빛만은 찬란한 금색으로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앉으라고 했냐고.”

“……네?”

타이밍을 봐서 슬며시 착석하려던 남성은 얼떨결에 우뚝 섰다. 엘레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말없이 손에 걸리듯 들고 있던 서류들을 팔팔거리며 쭉 넘기더니, 마지막 장을 아주 빠르게 훑었다.

남자의 이름과 인적 사항들을 쭉 읊는다. 항목을 차례로 확인한다. 맞다고 한다. 그럼 거의 끝났다. 여기까진 형식적인 질답이었다.

엘레나가 턱을 젖혔다.

“거기 그대로 서 있어. 넌 말할 필요 없으니까.”

“예, 예?”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엘레나가 왼쪽 눈을 감싼 안대를 젖혔다. 아니, 풀었다. 남자는 본능적으로 몸을 빳빳하게 굳혔다. 그보다 더 돌 같을 수 없을 정도였다.

“내가 알아서 모든 사실관계를 확인한다. 너는 내 앞에서 거짓 하나 고할 수 없을 거다. 만약 이 순간 이후로 나에게 무엇 하나 숨기는 게 하나라도 보인다면, 너는 여기서 죽는다. 알아들었나?”

비로소 드러난 엘레나의 왼 눈동자는 뻥 뚫려 있었다. 정확히는 그렇게 보일 정도로 칠흑같은 어둠에 잠긴 채였다. 그 무기질적인 눈이 자신을 똑바로 직시하니, 평생 느껴본 적 없는 두려움이 남성의 전신과 세포 하나하나를 옥죄이며 휘감았다.

남자가 덜덜거리던 고개를 미친 듯 끄덕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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