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차버린 소꿉친구와 전 여친이 같은 반이라 곤란하다-73화 (73/201)

〈 73화 〉 마무리 (1)

* * *

#1

부스스한 새벽에 슬며시 눈을 떴다.

“……끄윽.”

꽤나 오랜만에 느껴보는 근육통이 내 전신을 가볍게 매만졌다. 쓸데없이 너무 열을 올렸나.

적당히 기분 좋을 정도의 아픔이라 딱히 신경 쓰진 않았다. 어차피 곧 괜찮아질 거니까. 이 몸뚱아리는 정말 놀라울 정도로 사기적이거든.

몸에 냉수를 끼얹고 나니 영 찌뿌둥했던 정신도 말끔하게 씻겨 내려갔다.

암막 커튼을 활짝 펼쳐 어스름한 새벽녘의 채광을 방 안에 드리우고, 곧바로 옷을 갈아입은 뒤 나갈 준비를 했다.

이른 시각부터 조별과제 모임에 나서는 건 아니었다. 아직 6시 20분밖에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가 무엇을 하려 하느냐……

트레이닝복의 지퍼를 끌어 올려 가슴께까지 잠그고, 현관에 쭈그려 앉아 운동화를 신은 다음 기숙사 문을 빠르게 열어젖혔다.

토요일. 주말의 새벽은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공기도 차갑디 서늘하다. 텅 빈 공원을 가벼운 러닝과 함께 가로지르면서, 3동으로 향했다.

승강기를 타고 5층에 도착한 뒤 내렸다. 이후 출구로 나가 새벽에 일어난 목적인 조깅 겸 러닝을 하기 위해 트랙으로 걸었다. 아니, 뛰었다.

시야가 위아래로 덜컹거리며 몸에 스근한 열기가 솔솔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썩 좋은 미소와 함께 트랙을 빙빙 돌았다.

그렇다. 새벽 운동하러 나온 거였다.

체력은 국력이다. 모든 일을 수행함에 있어 강한 체력이 뒷받침을 해줘야만 극상의 효율을 발휘할 수 있다. 딱히 뭘 하지 않아도 철인 같은 체력을 자랑하는 육체가 참 무섭기는 한데, 그렇다고 정말 아무런 자극도 주지 않은 채 손 놓고 있으면 되겠는가. 써먹을 수 있는 건 최대한으로 써먹어야지.

“헉… 허억, 헉…… 흐아아아.”

그렇게 대충 넓은 운동장 크기의 트랙을 열다섯 바퀴 정도 가볍게 뛰었다. 지쳐 쓰러질 정도까지 해버리면 이따 있을 모임 참석에 차질이 생기니, 적당히 페이스를 조절하면서 몸이 후끈하게 달궈질 정도로만. 그래도 다리가 좀 시큰거리긴 했다.

으음. 고작 열다섯 바퀴로 이 정도라니. 부족해도 한참 부족하다. 아무래도, 이 시간 이후론 매일 여기를 와야 할 듯했다……

더플백에 챙겨왔던 수건 한 장을 손에 들곤 이마 등을 닦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정신없이 뛰고 나니 일곱 시가 훌쩍 넘어가 있었다.

슬슬 돌아갈까. 씻고 나서 밥 먹어야지.

땀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칼을 수건으로 탈탈 털고, 기숙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1동 기숙사로 돌아와 복도에 들어선 순간.

“……응?”

나는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하고 말았다.

눈을 가늘이며 앞을 바라보니, 분명 내 방의 문 앞으로 추정되는 위치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똑, 똑.

프릴 달린 메이드복. 말총머리의 메이드는 자기 앞의 문을 짧게 노크한다. 그러더니 지금 나와 같은 반응을 보인다.

고개를 한참 기울이며 “안 계신가?” 같은 말을 중얼거리더니, 다시 한번 노크를 한다. 똑, 똑.

“저기, 누구……?”

그쯤에서 내가 나섰다.

메이드가 흠칫하며 나를 돌아봤다.

가슴팍에 달려 있는 뱃지의 문양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프론티어 본부 소속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었다.

메이드는 나의 인상착의를 확인하더니 묻는다.

“아, 혹시 에지오 크라닐 님이십니까?”

“네, 맞는데요. 무슨 일이신지……?”

메이드의 정중한 물음에 내가 답하자, 메이드는 내게 우아한 인사와 함께 예의를 표하며 말했다.

“프론티어 본부에서 파견된 미티아 드 아르네스, 라고 합니다. 영광스러운 에픽 클래스 이번 기수 신입생이신 에지오 크라닐 님께 드릴 말씀과 전할 물건이 있어, 이른 시각부터 실례하게 되었습니다.”

확실히 좀 이르긴 한데. 프론티어 본부에서 나한테 무슨 용건일까. 고개를 끄덕인 나는 잠자코 메이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러다 보니 문득 그녀의 손에 들린 무언가에 자연히 눈길이 갔다. 무척 고급스러운 문양이 음각된 네모난 박스였다.

메이드가 문득 가슴에 한 손을 얹곤 나를 향해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뭐야, 갑자기 왜 이러세요. 내가 일순 당황하기도 잠시.

“본부는 일주일 전, 3월 19일 토요일 당일 에지오 크라닐 님께 벌어진 일련의 사건에 대해 뼈저린 책임을 통감하고 있습니다.”

대충 느낌이 왔다.

“명백한 본부의 부주의로 인해 입으셨을 피해의 정도를 결코 헤아릴 수 없으나, 본부는 자세한 보상안을 책정하기에 앞서 해당 사건의 최대 피해자이신 에지오 크라닐 님께 아주 약소한 보상금을 선지급 해드리려 합니다. 본부의 대응이 예상보다 지연된 까닭에 굉장히 송구스럽습니다.”

“보상, 이요……?”

“그렇습니다.”

낯빛 하나 바뀌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는 메이드. 덕분에 얼떨떨한 기분을 느끼는 건 여기서 나밖에 없는 듯했다.

보상인가. 딱히 생각도 못 하고 있었던 터라 갑작스럽긴 했다. 프론티어에서 직접 초청한 교수가 내게 몹쓸 짓을 했으니 그에 대한 책임이라는 걸까.

뭐든 좋았다. 보상금이란 말에 왠지 자다가 떡이 생긴 듯한 기분이었다.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어. 돈은 많을수록 좋다. 이건 여느 세상을 가든 변하지 않을 불변의 진리였다.

“에지오 크라닐 님 앞으로 전달되는 보상금 일체입니다. 제후국을 비롯한 국내외 제국 화폐 사용처의 어디든 지불 가능합니다.”

스윽.

메이드가 나에게 박스를 두 손으로 내밀었다. 검은색과 금빛으로 칠해진 무광 케이스. 혹시라도 놓칠까 조심스레 받아들었다.

무게는 매우 가벼웠다. 분명 보상금이라고 했는데, 안에 뭐가 들었길래. 열어볼까 했는데 지금은 말고, 메이드가 돌아가면 방에 들어가서 혼자 확인해보기로 했다.

“에지오 크라닐 님의 학생증 등록 정보를 토대로 신규 개설된 통장이며, 보상금이 입금된 입출금 계좌와 연동되어 있습니다. 일 출금 한도는 존재하지 않으나, 보상금의 자세한 액수는 공개적인 장소에서 말씀드리기가 어려운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통장이었나. 그럼 이 가벼운 무게도 이해가 간다.

어쩐지 기념일에 깜짝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 같은 기분이었다. 그도 그럴 게, 자세한 액수까지 언급하진 않았지만 무려 프론티어 본부에서 주는 보상금이다. 가슴이 살짝 떨리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무엇보다, 일평생 많고 많은 돈이란 것에서부터 멀찍이 떨어져 살아왔었기에. 나도 모르게 목울대가 꿀꺽 하며 고저를 그렸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본부로부터 추가 보상안이 책정되는 즉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메이드는 잠깐 말끝을 늘였다.

“보상금 전달이 완료되었으니, 에지오 크라닐 님께 드릴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이것은 사후처리의 일환입니다. 또한, 무척 송구스럽게도 정해진 일정을 꼭 지켜주셔야 합니다. 날짜 변경은 부득이하게 안 되오니 그점 참고하시길 바라며.”

메이드가 다음 말을 이었다.

“에지오 크라닐 님께서는 이번 주 일요일, 제국의 눈­ 엘레나 크라이모어 님과의 개인 면담이 예정되어 계십니다.”

“……예?”

“혹여, 당일 중요한 약속이 있으시다면 부디 취소해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아니, 없긴 한데……”

“그러시다면 다행입니다.장소와 시간은 여기 적혀 있는 대로. 때에 맞추어 본부로 찾아와주시면, 저희가 면담 장소까지 곧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전달 사항은 이것으로 전부 끝입니다.”

메이드의 말에 나는 그만 벙찌고 말았다.

엘레나와의 개인 면담이라니.

엘레나가 과연 어떤 인물인가.

대체 어떤 분위기 속에서 돌아갈지 벌써부터 걱정이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외스러운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나는 진작에 엘레나를 한번 찾아가려고 했지 않는가. 그런데 이런 식으로 기회가 먼저 다가올 줄은 몰랐다. 오히려 잘 됐다고 해야 할지.

일단 알겠다며 고개를 가볍게 주억였다. 어찌 됐든 뭐라도 해봐야 하는 상황이었다.

메이드가 나한테 정중한 인사를 올렸다. 막 떠나려고 하는 순간, 복도 한켠의 문이 열리더니 “흐아암……?” 하면서 부스스한 모습의 가브리엘이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그리고 내 앞에 있던 말총머리의 메이드와 눈을 딱 마주쳤다.

눈곱 잔뜩 낀 채로 멈칫하며 딱딱하게 몸을 굳히더니, 이번에는 메이드 맞은편의 나를 돌아본다.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듯 “어…” 하는 소리만 흘리다가 문득 입매를 비틀어 비릿한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는 끼이익, 하면서 문을 도로 닫았다.

쿵. 복도에 육중한 문소리가 울렸다.

나와 메이드는 자리에 가만 서 있었는데, 메이드의 경우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 재차 나에게 인사를 올리고선 뚜벅거리며 기숙사를 나섰다.

복도에 덩그러니 남겨진 내가 생각했다. 쟤는 여자랑 관련만 되면 원래도 근육이었던 뇌의 주름이 일체 사라져 버리니까, 이젠 해명도 별로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그냥 들어가서 씻은 뒤 같이 밥이나 먹자고 해야겠다. 가브리엘을 냅둔 뒤 내 방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쏴아아아­ 이번에는 뜨뜻한 물로 샤워를 했다.

그나저나.

이번주 일요일이면.

……내일이잖아?

일주일의 마무리가 영 불안해 보였다.

여하튼. 그건 그거고.

보드랍게 뽀송뽀송해진 몸을 침대 위에 잠깐 눕힌 뒤, 아까 메이드가 내게 전달했던 박스를 가지고 이모저모 훑었다.

이대로 놔둬도 장식품으론 손색이 없을 만큼 깔끔하고 화려하다. 그래도 박스란 본디 내용물을 보관하기 위해 존재하는 물건이 아니었던가. 안의 것을 반드시 확인해줘야 예의였다.

다만 지금 내 상태는 딱히 어디 아픈 데 하나 없이 멀쩡하기만 하고, 의식을 3일 동안 잃었다곤 하나 결과적으론 상처 하나 남지 않았었기에 그다지 많은 액수가 들어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피해를 보상한다는 건 그런 개념이니까. 내가 입은 피해는 사실 별로 많지 않거든. 기억상실이라고 해봐야 PTSD 같은 게 도지지도 않았고. 얼마나 멀쩡했으면 보상금을 줄 거란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겠는가.

­스윽. 덜컥.

그런 생각과 함께 케이스를 열어 통장을 확인해 보았다. 음, 하면서 나는 턱을 쓰다듬었다. 내 예상은 틀린 거 하나 없었다.

그닥 많지 않은 액수였다.

[ 남은 금액 : 300,000,000 LAT ]

대신 존나 많은 액수였다.

“지리네.”

……참고로, 솔라 제국에 거주하는 평민 기준 4인 가족의 한 달 생활비는 400만 라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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