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화 〉 마무리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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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아까 우리가 말했던 거 기억하고 있지? 관심 있으면 언제든 찾아와. 학생회관 3층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예, 예. 조심히 들어가세요……”
밥은 진작에 다 먹었는데, 날 놓아줄 생각을 절대 하질 않더라.
왼쪽에서는 강아지 쓰다듬는 것마냥 머리 만져대고, 오른쪽에서는 쉴 새 없이 조잘거리고. 다른 한 명은 레이린 선배 옆에서 수다 떨고. 레이린 선배는 말릴 생각도 없이 그저 싱글벙글. 자기가 불렀으니까 당연한 일이긴 한데.
내가 거기서 뭔 대화를 나눴는지도 잘 모르겠다. 고작 밥 한 끼 먹었다고 머리며 옷매무새며 거지꼴이 되는 게 맞는 건가? 정말 이게 맞는 건가……?
“죽겠네.”
녹초다. 완전히 나가 떨어졌다. 아침에 있던 회의보다도 더 진이 빠졌다.
차라리 레이린 혼자였으면 몰라. 그냥 잘 먹었다면서 일어날 순 있었겠지. 근데 여러 명이서 달라붙으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아주 죽을 맛이었다.
레이린 선배…… 후배를 챙겨주고 싶은 마음은 참 고맙고 감사한데. 역시, 역시 나랑은 태생적으로 좀 안 맞는 스타일이지 않나 싶다……
진짜 들어가 잠이나 자야지. 더 무슨 활동을 수행할 만한 기력이 없었다.
대략 한 시간 가량을 넘게 붙들려 있던 식당으로부터 빠져나와, 어깨와 목을 주무르며 1동 기숙사로 향하려는 순간.
“아.”
“어라.”
바로 옆길에서 걸어나온 누군가와 마주쳤다. 전보다는 낫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괜찮아 보이는 것도 아닌 상태의, 루비아였다.
미약한 당황이 스며든 눈동자.
나는 가볍게 인사했다.
“안녕.”
“아, 안녕. 에지오.”
루비아가 마주 손을 흔들었다.
“어디 가?”
“애들이랑 잠깐 산책……?”
이 시간에 루비아와 마주친다면 혼자가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눈웃음을 지으며 수줍게 고개를 꾸벅이는 스텔라도 있었고, 그 옆에 굉장히 질색하는 듯한 얼굴로 날 바라보는 유리도 있었다.
맞아. 오해 아닌 오해가 아직도 안 풀렸었지. 여기서 왈가불가할 만한 문제는 아니었는지라 구태여 먼저 언급하진 않았다.
아는 척이라도 할 겸 슬쩍 손만 들어 보였는데, 유리는 작은 고갯짓과 함께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그 정도냐?
“그렇구나.”
“으, 응.”
내가 물었다.
“그런데, 옆은?”
“……아.”
내가 시선을 돌린 쪽.
거기엔 뉴페이스가 있었다.
보통 루비아, 유리, 스텔라. 입학 초기에 친해진 이 셋이 붙어다니는 경우가 태반이었는데. 지금은 한 명이 더 늘었다. 합해서 네 명으로 구성된 무리. 신입 멤버로 보이는 여학생 쪽을 향해 눈길을 주며 그리 묻자, 루비아가 아차 하며 입을 열었다.
“이쪽은 우리 반 13번, 아이리스 폰 헤가르데. 엘든 왕국의 유서 깊은 기사 가문 따님이래.“
13번이면 나와 가브리엘 바로 위의 번호다.
아무렴 같은 반이니까 얼굴은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대화는 한 번도 나눠본 적이 없다. 사실, 얘가 말하는 것도 얼마 못 본 것 같다.
다만 초기 스텔라와는 살짝 차이가 있는 듯한 게, 수줍어서 함부로 말을 못 하고 다니는 게 아니라, 뭐랄지. 굳이 입을 열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달까.
“만나서 반갑다. 아이리스라고 부르면 된다.”
“……어, 그래. 나도 반가워. 에지오 크라닐이야.”
“알고 있다. 에지오. 잘 부탁한다.”
말투가 신기한 친구네.
서스럼없이 손을 내밀길래 마주 잡아주었다.
‘……!’
곧, 나는 조금 놀라고 말았다.
크기는 한참 작지만,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달리 단단함이 내 예상을 훨씬 웃돌았다. 느슨하게 잡은 것 같은데도 느껴지는 힘이 심상치 않다. 얘도 가브리엘처럼 육체파인 걸까. 기사 가문 따님이라더니, 말투도 그렇고 각 잡힌 자세도 그렇고, 경직되었다기보단 무척 절제되어 잘 벼려진 칼날 같은 느낌이다.
착 가라앉은 보랏빛의 길다란 생머리. 엄숙한 분위기마저 느껴지는 무표정한 얼굴을 보면 그녀의 출신에 대해 감히 한 치의 의문도 가지지 못하도록 하나, 어쩐지 불타는 전장과 같은 험한 전투의 한복판보단 한가로운 안뜰의 테라스가 더 어울릴 것만 같았다. 육중한 철문 같은 굳건함이 전신의 기백으로부터 내보여지고 있다.
“기사 가문 출신이라면… 검술을 배우지 않나?”
“보통은.”
“근데 나는 왜 너를 검술 강의에서 못 봤었지?”
그 말대로다. 아벨 라이오너 교수가 가르치는 강의에서, 아이리스를 봤던 기억이 하나도 없었다.
“……아직은, 미숙한 실력이다. 남에게 보일 만한 것이 못 돼. 기사 되는 자가 부끄러워해서 될 일이 아니라 생각하긴 한다만.”
생각보다 검을 잘 다루지는 못하는 건가.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의문이다.
“그럴수록 더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거 아냐? 연무장 같은 데서 혼자 연습하는 것보다야 훨씬 나을……”
아이리스가 머리를 짧게 내저었다.
“아니. 가문의 비전을 온전히 전수받기 전까지는, 이 몸에 다른 검술을 들일 순 없다. 여태 해왔던 노력이 전부 허사가 되어 버려. 그러니 최소한 2학년 과정에 진급하기 이전 검의 결(?)을 완성하고, 비로소 내게도 새로운 배움의 기회가 찾아왔을 때 가르침을 청할 예정이다.”
무슨 말이진 잘 모르겠지만, 가문 고유의 유파(?)가 있다는 말일까. 기사란 존재들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어 그러려니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구나, 하는 마음에 가만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루비아가 문득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내왔다.
“안색이 별로 안 좋네. 에지오. 되게 피곤해 보여. 무슨 일 있었어?”
정작 자기 혈색도 그리 좋은 편은 아닌 주제에. 그래도 전보단 훨씬 나아진 것 같아서 내 마음이야 좀 편해졌긴 하다.
“그냥, 좀. 조별과제도 있고. 아까 식당에서 잠깐 선배들이랑 얘기하느라 기운 빠졌던 것도 있고. 안 그래도 들어가서 잠이나 자려고 했었어.”
“선배들…?”
“응. 나 서클 가입하라고 홍보 왔던 선배들 중 한 명인데, 좋은 분이셔. 그 선배가 자기 친구들까지 데려와서 나랑 같은 테이블에 앉히는 바람에 좀…… 여러 가지로 피곤하네. 씁.”
“그, 그랬구나……”
뭔가 더 물어보고 싶은 기색이었지만 입을 다문다.
“그러고 보니, 너네는 서클 가입했어? 일단 나는 안 했는데.”
홍보는 나만 받은 게 아니었을 테니까. 먼저 대답한 건 루비아였다.
“나도 아직이야. 하고는 싶은데, 아직 정해진 게 없어서. 만약 하게 되면 아마 마법 분야로 하지 않을까… 싶어.”
서클 활동은 좀 취미로 해도 괜찮을 텐데. 어디까지 성실해지려는 건지 원.
“저, 저는… 그게, 선배님들도 물론 좋지만… 아는 친구가 같이 있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저도 아직 없어요. 부, 분야도 딱히 상관 없지만… 사실 천체 관측 같은 게 하고 싶어서… 그런데 같이 들어가주실 만한 분은 안 계신 것 같고……”
스텔라의 말이었다. 천체 관측이라. 스텔라답다. 누구랑 같이 들어가고 싶은 건가. 그러면서 은근슬쩍 나를 올려다보는 것 같은데, 미안하지만 지금은 아무 생각이 없단다.
내 떨떠름한 반응에 따른 대답을 어렴풋이 눈치챈 건지 눈에 띄게 시무룩해진다. 아니, 뭐. 별 같이 보는 건 따로 해도 되잖냐. 저번에 했던 것처럼.
내가 시작한 질문은 자연스러운 흐름을 타고 유리한테까지 이어졌다. 내 앞에서 한마디도 열 생각이 없어 보였던 유리는, 절대 나한테 말하는 게 아니라는 듯 내가 아닌 루비아와 스텔라, 그리고 아이리스 쪽을 돌아본 채 조잘거리며 말한다.
“…여행 서클이 있다는 거 같은데. 방학이나 그럴 때 게이트 타고 대륙 여기저기 여행 다니는 서클이라 해서, 그쪽으로 생각 중이야. 그때 할 수 있으면 너희들도 같이 데려가고 싶거든. 다들 본가 다녀와서 할 일 없으면 같이 멀리 여행도 가고 그러자. 날도 길게 잡아서 놀구. 엄청 재밌을 것 같아.”
“그렇네. 재밌겠다. 그거 나도 끼워주는 거지?”
“무, 뭐? 미쳤어? 여자들 모임에 네가 왜 끼어들어!”
“농담이야, 임마. 설마 진짜 가겠어?”
“노, 농담으로도 그런 소리 하지 마…… 진짜 극혐이야. 누가 저질 아니랄까봐……”
말이 심하네. 이 꼬맹이 녀석.
나와 같이 여행을 가는 상상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는 듯 어깨를 감싸는 유리를 향해 피식 웃어 보였다. 얘랑 저번 불미스러운 일에 대해서 오해를 풀긴 해야 하는데, 그래도 막 나와 말 한마디 붙이지 않을 정도로 질색하진 않은 것 같다. 생각보다 풀기 쉬울지도 모르겠다.
그때 누군가 중얼거렸다.
“음, 나는… 괜찮은데…?”
“……?”
조심스레 입을 연 루비아였다.
“머, 뭐어?”
“여, 여행 정도는 어릴 때도 에지오랑 많이 가봤구… 방만 따로 쓰면 괜찮지 않을까?……”
“그런 문제가 아니잖… 됐다, 그래. 루비아 너는 예외로 쳐. 하지만 나는 너희들이랑만 가고 싶은 거라구. 얘가 아니라!”
유리가 날 향해 삿대질을 하며 바락 외쳤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루비아는 에헤헤, 하면서 볼만 긁적일 뿐이다.
“그리고 말야. 루비아 혼자만 괜찮다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니잖아. 지금 당장 스텔라만 해도……”
“……저, 저도 괜찮을 것 같은데… 요?”
“……?”
“?”
모기만한. 그러나 우리들에겐 확실하게 들릴 정도로 또렷한 목소리가 스텔라의 입매에서 흘러나오자, 유리는 입을 떡 벌리며 내가 지금 잘못 들었나, 싶은 표정을 했다.
더군다나 갑작스러운 스텔라의 오케이 선언에 놀란 건 유리뿐만이 아닌지, 루비아마저 어라, 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더니 느릿한 움직임으로 나를 스윽 돌아본다. 뭔가 멍한 얼굴이었다.
“지, 진짜로…? 아니, 농담이지?”
“……”
“미, 믿을 수 없어… 너희들, 정말 이 녀석이랑 같은 지붕 아래서 자는 게 괜찮다는 거야……?”
나는 유감스럽다는 듯 설레설레 도리질을 했다.
“저런… 네 편이 전부 사라졌구나, 유리.”
“넌 조용해!”
빼액.
“어, 어쩌다 이렇게… 아니, 스텔라 너는 왜…?”
“친한 사람이 일행에 많으면 많을수록 여행이 더 즐거운 건 당연한 거 아닐까요…?”
“아니, 그거야 맞겠지만. 얘는 남자라구? 그리고 안 친해! 스텔라 너도 얘랑 친한 사이는 아니지 않아…?”
왜 그렇게 간절한 얼굴인데.
스텔라가 어설프게 미소 지었다.
“에지오 씨는 저한테 되게 잘해주셨는걸요…?”
“……”
아직 사실을 말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유리가 스텔라와 나 사이의 사정을 알지 못해서 벌어지는 일이었다.
거나한 충격을 받아 제자리에서 돌처럼 굳어버린 유리. 믿었던 친구들에게 배신당한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정도냐고.
근데 말야.
가만 듣다 보니 살짝 마음이 아프네.
“나 여기 있다. 이 녀석아. 대놓고 그런 말을 하면 아무리 나라도 상처를 받아. 혹시 나만 너랑 친구라고 생각했던 거냐?”
“……시, 시끄러워. 지금 그런 문제가 아니라니까?”
대답을 회피한 유리가 입술을 질근 깨문다.
“그, 그래. 아이리스도 나중에 여행 가면 우리랑 같이 가게 될 거야. 아이리스는……”
이쯤에서 가볍게 질문했던 초기의 의도 따위 어디에도 없는, 유리의 자기 편 찾기가 되어버린 애절한 질문 공세가 남은 한 명인 아이리스에게 들어갔다.
“……”
눈을 한 차례 감았다 뜬 아이리스가 말했다.
“…가끔은 숨을 돌릴 시간도 필요한 법이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의 내게는 불가능한 계획인 듯하군. 언제가 될 진 모르겠으나, 여행은 너희들끼리 가라. 미안하게 되었다.”
“그, 그런……”
애초에 여행 갈 생각이 없었다.
갈 곳을 잃은 허망한 유리의 눈동자가 굴러굴러 나를 향했다. 팔짱을 낀 채 씨익 웃어 보이자, 어깨를 부들부들 떨던 유리가 곧 무언가를 결심하는 듯 주먹을 꾹 쥐었다. 뭘 하려고?
“너, 너희 말야. 너희가 뭘 몰라서 그러는 것 같은데. 속으면 안 돼. 그러면 안 된다구. 얘, 얘가 저번에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 내가 빨아준 손수건—— 읍! 으으으으읍!”
“오케이. 거기까지.”
본능적으로 유리의 입을 틀어막아 되도 않는 유언비어가 퍼지려는 걸 봉쇄했다.
선 넘네. 그건 아니지.
“으으으으으읍—!”
“미안. 잠깐 얘 좀 데려갈게. 너희들 일 봐.”
사실만 딱 말하면 내 쪽에선 부정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는지라, 어떻게든 입을 열기 위해 발버둥치는 유리를 제압한 내가 조용히 한쪽 손을 들어 정중한 인사를 건네고선, 그대로 유리를 길목 구석진 곳까지 질질 끌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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