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차버린 소꿉친구와 전 여친이 같은 반이라 곤란하다-79화 (79/201)

〈 79화 〉 마무리 (7)

* * *

#14

내 어깨가 흠칫 떨렸다.

엘레나에게 뭘 먼저 요구한 적은 없다. 그럴 입장도 상황도 아니었거니와, 아직 확신을 가지지 못했던 까닭이다.

하지만 엘레나는 마치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그리 물어왔다. 나는 당황했으나 엘레나는 그렇지 않았다. 어떤 동요도 없이 나를 빤히 바라볼 뿐.

“…알고 계셨습니까?”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

애초에, 기억을 잃었다고 말한 적도 없다. 어떻게 알았나 싶지만 엘레나 정도라면 특정 환자의 입원 중 기록이야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을 것 같다고, 자연히 납득해 버렸다.

“궁금한 게 많을 거야. 지난주 토요일 밤에 네 상태가 어땠는지. 너는 어째서 기억을 잃어버렸는지. 기억을 잃어버린 정확한 이유가 도대체 뭔지. 무엇보다 잃으면 잃는 건데, 하필이면 왜 큼지막한 덩어리도 아니고 부분부분만 슝 하고 날아가 버린 건지.”

“……꽤 자세하게 알고 계시는 것 같네요.”

답답하도록 끊긴 기억의 단면에 대해선 뮤와 루비아를 제하고서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었다.

엘레나가 음? 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야, 네 이마에 그렇게 적혀 있으니까. 누구 짓인지 몰라도 검은 먹으로다가 곱게도 칠해 놨네.”

“……예?”

“구라야. 나도 말해놓고 좀 병신 같다 싶었는데, 너는 뭘 또 진지하게 받아들이냐? 신기한 놈일세 이거.”

이마에 슬쩍 손을 가져가던 날 보며 낄낄 웃는다.

“대충 예측해 본 거다. 근데 정곡이었나 보네. 물론 아예 근거 없는 추측은 아니었고,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라는 정도로만 알아둬라. 지금 너한테 중요한 건 그게 아닐 테니까.”

거기서 더 말해줄 것 같진 않아 보였다.

“그래서, 대답은?”

“……”

자욱한 연기 속에서 엘레나의 얼굴은 흐릿하다.

한참 말을 굴리던 내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당연히, 되찾고 싶습니다.”

“그렇겠지.”

짧은 말이었다.

“내가 지금 정상이었으면 네가 어디서 굴러먹다 온 놈인지까지 차근차근 알아봤을 텐데…… 이제 좀 힘들다. 담배를 존나게 태워도 몸이 안 망가지는 건 좋은데, 씨팔, 과로로 쓰러지지도 않네. 대가리 아프다. 내가 지금 몇 시간 째 깨어 있는지 아냐, 후배야?”

“저, 저야 모르죠…?”

“사흘이다. 사흘. 지금 거기서 실시간으로 추가되는 중이고. 이럴 땐 그냥 처 자야 되는데 눈깔을 너무 써서 잠들지도 못해. 존나, 존나 짜증나. 너는 제때 꼬박꼬박 자라. 한창 클 때니까. 거기서 더 크면 징그러울 것 같긴 한데. 어.”

쿵. 엘레나가 쓰러지듯 테이블 위에 이마를 처박았다. 그러더니 고개를 퍼뜩 든다. 나름 정신 차리려고 한 행동인 듯하다. 인상 구기듯 잔뜩 찡그린 이마가 벌게져 있었다.

“…여하튼, 원래라면 선후배 간의 화기애애한 질답 시간을 가졌어야 했다, 이 말이야. 그런데 상황이 상황이니까 일단 내 쪽에서 뭘 하고 자시고 전혀 안 될 거 같고. 네 결백함은 내가 알아서 증명할 테니, 지금부턴 네가 궁금해하는 부분에 대해서만 딱 알려주마. 두 번 말하기 힘드니까 귀 바짝 열고 잘 들어라. 후배.”

꿀꺽. 고개를 끄덕인 내가 침을 삼켰다.

엘레나는 손가락 하나를 들었다.

“첫 번째로 토요일 날 있었던 사건에 대해 말해주자면, 넌 악마한테 습격받았다. 그 새끼 마족이었어.”

“……! 마, 마족이요?”

전혀 몰랐던 사실이다.

“그래. 임마. 프론티어 외부로 절대 유출되면 안 될 대외비인데, 어차피 넌 전부 알게 될 테니까 그냥 깠다. 그렇다고 어디 함부로 떠벌리고 다니면 뒈져. 네가 널 조지는 게 아니라 프론티어에서 널 조질 거다. 물론 그러기 전에 내가 먼저 손을 쓰겠지만.”

쓰읍, 후우…… 연기를 뿜더니.

엘레나가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인다.

“……뭐, 그렇다는 거다. 나디엘리 할렌니아. 본명은 엘리고스(Eligos). 경계 밖으로부터 추방된 대악마 중 한 마리다.”

“대, 대악마……?”

“오냐. 꽤 오래전부터 인간 신분으로 위장해 학자로서 명성을 쌓았더군. 그간 행적을 보면 머리 좀 쓸 줄 아는 새끼였던 것 같은데, 결국 과욕을 부려 이번 일로 자멸했지. 널 습격하는 과정에서 영 좋지 못한 부분을 건드렸어. 너한테도, 그 자식한테도 매우 치명적인 트리거를 당긴 셈이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도 안 건드리면 오랫동안 잠잠히 안전했을 시한폭탄을 주먹으로 존나 세게 내리쳐서 터트렸단 얘기다. 병신이 따로 없지.”

“……”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제 안에 폭탄이 있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냥 폭탄도 아냐. 도시 하나 정돈 우습게 지울 수 있는 대형 폭탄이다. 절대 가볍게 볼 만한 게 아니었을 텐데. 도대체가, 얼마나 욕심을 부린 건지 원……”

고개를 설레설레 젓던 엘레나가 말했다.

“아무튼 그렇게 돼서 그 악마 자식은 뒈졌고, 너도 사실상 뒈졌었다. 그 결과 이지를 잃고 폭주하는 괴물이 되었지. 아, 물론 너로 인한 사상자는 한 명도 없으니 안심해라.”

괴물이 되었다니. 듣고도 믿지 못할 소리에 눈가를 파르르 떨자, 엘레나는 그리 말하며 날 안심시켰다.

“뭐, 사실 거기서 넌 죽었어야 하는 게 맞아. 원래대로 돌아가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봐야 했다. 근데 이상하네. 너는 지금 여기에 멀쩡한 상태로 나랑 얘기를 나누고 있고, 딱 하나 문제가 있다면 하나밖에 없지. 대가리에 구멍 뚫린 거.”

엘레나는 중간에 뭔가를 더 말하려다 말았다. 그게 무엇이었는지 물어볼 생각은 없었다. 지금 당장 머릿속에 들어오는 정보만 해도 상당히 어지러웠던 까닭이다.

“사건 후유증으로 넌 기억을 잃었겠지. 아마 지금의 너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데 있어 굉장히 큰 부분을 차지하던 것들이 상당수 없어졌을 거다. 물론 다른 것들도 있겠지만. 여튼기억을 잃기 전의 너와, 지금의 너는 겉으론 몰라도 자세히 파고들면 아주 큰 차이가 있을 거야. 그 차이는 아마 네가 누군가한테 네 잃어버린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고 해도, 영영 좁혀지진 않을 거다.”

“……어째서, 입니까?”

“네가 잃어버린 건 기억뿐만이 아닌 까닭이지.”

엘레나가 줄담배를 태우며 말을 잇는다.

“…아니, 잃어버렸단 말도 어불성설인가. 넌 기억을 전혀 잃지 않았어. 그냥 떠올리지 못 하고 있는 거다. 아무도 건드릴 수 없도록 무저갱의 깊은 지하로다가 처박아 버렸지.”

후우­ 잿빛 연기가 재차 뿜어진다.

“거기서 문제가 하나 생겼다.”

엘레나가 미간을 팍 좁히며 말했다.

“너무 깊숙한 곳에 처박아둬서, 나중에라도 끌어 올려지게 된다면 원래 그 자리에 있던 거랑 같이 인양되어 버린다는 거야. 아주 좆같은 상황이지. 그래서 네 기억을 되찾는 데에 있어 감수해야 하는 위험 부담이 꽤나 커졌다.”

내가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씀일까.

엘레나는 머리를 북북 긁다가, 테이블 위를 두드리던 손가락을 들어 숫자를 표시해 보였다.

“쉽게 말해서 네가 이번 사건으로 잃어버린 기억은 1차적인 기억이고, 그것보다 더 깊숙한 곳에 있는 게 2차적인 기억이다.”

“어……”

“모르면 그냥 들어. 쉽게 설명해 줄 테니까.”

잠자코 머리를 주억였다.

잠시 뒤.

“지금 네가 뭘 잃어버렸고 뭘 기억하고 있는진 구분하기 힘들 수도 있겠다만, 네가 이번에 기억을 새로이 잃기 전에도 원래부터 잊고 있었던 기억이 꽤 있을 거다. …음, 추정하건대 아마 네 대가리고 몸이고 싹 다 갈아엎었을 때의 기억이라든지. 그 뒤의 기억이라든지. 추정이 아니라 거의 확신하고 있긴 한데. 아무튼.”

“……!”

“그리 놀란 표정 짓지 마라. 예전이야 뭐 어땠든, 지금 보기 좋으면 되는 거 아니겠냐?”

대체 어디까지 알고 계시는 걸까. 살짝 무서워졌다. 예상지도 못 한 곳에서 기습이 들어온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다만 엘레나는 정말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히 입을 열었다.

“여하튼, 그걸 2단계 봉인이라고 부르고, 네가 이번 사건으로 잃어버린 기억을 1단계 봉인이라 부르자고. 넌 저번 주 토요일 전까진 2단계 봉인만 가해진 상태였다. 내가 아까 말했던 시한폭탄이 바로 그거다. 말하자면 2단계 봉인마저 풀리는 순간 넌 괴물이 되는 거지.”

“……”

“지금의 너로선, 한 번은 몰라도 두 번은 절대 안 돼. 다음은 진짜 완전한 죽음밖에 없다. 그때가 되면 내 손으로 직접 해결해야 할 거야.”

“……”

“그럴 일 절대 없도록 할 테니 인상 펴라. 안 그래도 더러운 꿈자리 더 사나워지면 내가 더 좆같을 것 같거든.”

슬슬 말하는 것도 지치는지, 엘레나가 별안간 켈록거렸다. 목을 가다듬으려는 듯 몇 번 헛기침을 해보지만 딱히 효과는 없었다. 테이블 위 아무렇게나 가로로 눕혀진 생수통을 벌컥벌컥 들이마시곤, 번들거리는 입가를 손등으로 대충 훔친 뒤 말을 잇는다.

“…그 2단계 봉인이 있던 자리에, 1단계 봉인이 깊숙하게 눌러앉아 합쳐져 버렸다. 그러니까, 네가 지금 잃어버린 기억을 회복하려면 필수적으로 2단계 봉인을 같이 풀어야 한다는, 매우 좆같은 딜레마가 왔단 소리다. 이런 경우는 참 곤란하게 됐지. 자칫 손 하나 삐끗하면 내 후배를 내 손으로 죽여야 되는 상황이 바로 와버리니까.”

엘레나는 두 번 말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집중은 하는데, 제법 살벌한 소리가 왔다갔다 한다.

엘레나의 서슬퍼런 금안은 날 똑바로 직시하고 있었다. 조금은, 안쓰러운 듯한 기색이 스며들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뿐만이 아니야. 만에 하나 어찌저찌 2단계 봉인을 풀지 않고 무사히 넘어가는 데 성공하더라도, 잃어버렸던 기억이 되돌아온 너는 아마 그리 좋은 상태가 아닐 거다. 내가 보기엔 이대로 평생 잊고 사는 게 더 좋을 수도 있어. 고통스러운 기억이 전부 생생하게 돌아온다는 건, 이미 경험해 본 입장에서 썩 달가운 일이 아니거든.”

그건……

각오하고 있다.

내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그래도,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흐음. 그렇게 말할 줄은 알았다만.”

엘레나가 날 빤히 바라본다.

“…단순히 기억만 돌아오는 게 아냐. 엉망진창인 기억을 되찾음으로써 네 망가진 인격 역시 원상복구되는 거다.”

“……망가졌다는 표현까지 쓸 정도입니까?”

“그래, 새끼야. 겉만 멀쩡하지 속은 살아있는 시체나 다름 없더만.”

헛웃음 소리가 울리다가, 한순간 멎었다.

“네 나이가 아직 열일곱이던가?”

“……예.”

“청춘이네, 청춘이야. 한창 파릇파릇하게 지내야 할 때에 혼자 세상 풍파 다 처맞고 궁상 떨어서야 되겠냐?”

“……”

“내가 널 입학식에서 처음 봤을 때 무슨 생각을 했냐면. 그냥, 그냥 불쌍했어. 내가 보기론 너희 반에 워낙 불쌍한 새끼들이 좀 많은데, 그중에서도 네가 제일 안쓰러웠다 이거야. 알아?”

“……”

“네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는 별개로, 너한테 공감하고 있는 요소가 꽤 있다고. 이 불쌍한 후배야. 그래서 더 잘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다만. …켈록, 켈록.”

다시금 생수통을 벌컥벌컥 목구멍에 들이붓곤, 물 한 방울까지 깔끔히 비운 그것을 바닥에 대충 던져놓는다. 텅­.

“씨팔, 죽겠네. 목 아프다. 빡빡이한테 전음(?音) 배워둘걸. 갑자기 존나 후회되네……”

엘레나가 고개를 아래로 내린다. 쿵­. 그녀의 이마가 테이블에 닿았다. 조용히 중얼거리듯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하나만 묻자. 드러운 기억 찾아서 뭐 하게?”

“그건……”

나는 말끝을 흐렸다.

테이블 위에 널브러진 엘레나가 슬쩍 고개를 들어, 사나운 눈매로 날 올려다보는 채 입술만 달싹인다.

“혹시, 걔 때문이냐?”

“……?”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걔라니?

“전 여자친구인가 뭔가 하는 애. 1번.”

“?”

아니……

이건 진짜 어떻게 알았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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