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차버린 소꿉친구와 전 여친이 같은 반이라 곤란하다-80화 (80/201)

〈 80화 〉 마무리 (8)

* * *

#15

“얼굴 보면 맞나 보네.”

“……”

왜 남의 연애사정까지 알고 계시는 거예요.

“왜 이런 것까지 알고 있냐고? 오해하지 마라. 내가 알아낸 게 아니라 그 1번이 나한테 직접 말해준 거니까.”

“……예? 직접 말해줬다니­”

“괴물새끼가 된 널 죽일지 살릴지 물어봤는데, 제발 죽이지 말아달라고 하더라. 엄청 필사적이길래 너랑 얼만큼 친하나 싶었지. 그런데 전 여자친구라고 하더라고. 갑자기 훅 들어와서 깜짝 놀랐다야.”

“……”

현장 주변에 뮤가 있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지?

혼란스러운 마음도 잠시, 엘레나가 묘한 눈으로 날 바라보며 말했다.

“물론 마음만 먹으면 너와 네 전 여자친구 되시는 분께서 과연 어디까지 사랑을 나누셨는지도 알아낼 수야 있겠다만. 지금은 피곤해서 무리다.”

“……피곤하지 않으셨어도 그러진 말아주세요. 선배님 앞에만 있으면 생각하는 것 하나하나 조심하게 될 것 같습니다.”

“그래. 그래. 나도 알어. 겉으로 티는 안 낼 거야. 나만 몰래 보고 쓱 모른 척하면 되는 거 아냐?”

전혀 안 됩니다. 선배님.

“근데 있잖아. 그런 거 은근 재밌다?”

“……?”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언제는 세인들 사이에 얼음꽃이라 불리는 깜찍한 여자애를 한번 만나본 적이 있었는데, 정말 소문대로 얼음 풀풀 날리게 생겼더라고. 2대 전부터 약조해 온 약혼마저 자기 쪽에서 멋대로 깨버리고, 자기는 누구와도 결혼할 생각이 없다는 거야. 이름에서 가문의 성씨를 뗄 각오까지 했는지 아주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던데.”

갑자기 외딴 이야기를 시작한 엘레나.

“아무리 봐도 남자를 모르는 얼굴은 아니었거든. 물론 내가 그런 쪽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왜, 그런 말도 있잖냐. 사람들 연애 상담이나 조언은 안 해본 놈이 더 잘 한다고.”

그 말씀은 곧 엘레나 선배님께선 연애 경험이…… 라는 생각을 잠깐 하려다가, 이것도 간파당할 것 같아서 단번에 그만뒀다. 왠지 좋은 꼴을 못 볼 것 같았던 까닭이다.

다행스럽게도 후폭풍은 찾아오지 않았다. 아지러지는 연기 속에서 엘레나가 웃음기를 담곤 말한다.

“난 범인들이 눈코 뜨고 살펴봐도 못 보는 걸 잘만 보니까, 얘가 식기 움직일 때. 의자에 앉아 있을 때. 누가 자길 부를 때. 정원 산책할 때. 지겹도록 들었을 혼사 얘기를 내 앞에서 또 듣고 있을 때. 그리고, 방으로 가면서 집사에게 뭘 시킬 때. 자기 부친을 포함한 저택의 모든 사람들마저 아무도 못 들이게 하는 방을, 집사만이 유일하게 드나드는 모습을 보았을 때. 매우 큰 실례라는 걸 알면서도 한번 체크해봤다.”

아직도 당시의 순간을 떠올리면 헛웃음이 절로 나오는지, 엘레나가 턱을 젖히곤 꼬나문 담배에 손을 가져갔다.

“알고 보니 집사랑 그렇고 그런 관계더라고. 참고로 전대 가주부터 쭉 섬겨 오던 놈이었다. 나이가 한 오십을 넘어가던가.”

“……”

“그런 거지. 사람은 겉만 봐선 아무것도 몰라. 누구한테 어떤 충격적인 비밀이 숨겨져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고.”

웃는 얼굴로 뒤에 칼을 숨기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진실로 믿었던 사람에게 잠자다 목을 베이는 일도 허다하다.

눈으로만 보이는 것이 꼭 진실은 아니다. 실체가 추악한 진실일수록 더 깊숙한 곳에 꽁꽁 숨겨져 있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태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도, 어쩌면 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다. 세상은 정해진 법칙에 의해 굴러가지만 늘 예외로 가득해. 네가 알던 상식이 전혀 통용되지 않는 순간도, 언젠가 반드시 온다. …아니, 너에게는 이미 왔을 테지.”

그리 말하며 다시 고개를 까딱한다.

“너는 이미 법칙에서 한 차례 벗어났다. 나도 마찬가지고. 방금 말했던 네 전 여자친구도 똑같아.”

진의를 알 수 없는 말이다. 한데 뮤는 여기서 왜 같이 언급되는 것일까. 언뜻 그녀가 해주었던 과거의 이야기가 허상처럼 떠오르는 듯하다.

“…법칙을 벗어났다는 게, 무슨 말입니까?”

스윽.

엘레나가 문득 손가락을 위로 들었다.

“역천(??).”

“…예?”

“하늘을 거슬렀다는 말이다.”

힘없이 손을 내린 엘레나가 픽 웃는다.

“공교롭게도 거스를 기회를 제공하고, 반드시 그래야만 할 상황으로 우릴 이끌었으며, 그러길 허락해준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하늘이지. 그럼에도 하늘은 스스로 공평하길 자처하기에, 감히 하늘을 거스른 대가를 치르게 만든다.…참, 웃기지도 않아. 병 주고 약 주고란 말을 이런 데 써야 하는 게 아닌가 싶군.”

“……”

“이건 좀 다른 얘기인데. 시작부터 땅바닥을 기는 놈이 있는가 하면, 날개를 달고 저 멀리 하늘에 있는 놈이 있기도 하지. 누구보다도 공평한 신이 다스린다고 보기엔, 인세(人世)는 결코 공평하지 않다. 그야­ 그렇겠지. 불멸자인 신과 필멸자인 인간이 저울질하는 공평의 기준에는 매우 큰 차이가 있으니까.”

흘러가듯 말하는 엘레나.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이야기엔 나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 나만 해도 그렇다. 무쓸모한 재능이라도 찾아보기 위해 뼈를 깎았던 그 시절의 나날이 떠오른다.

그랬던 나였지만, 날 적부터 귀족으로 태어났다. 먹는 것, 입는 것, 전부 부족할 것 없이 자랐다. 그마저도 가지지 못하여 죽어 나가는 이들이 대륙 어딘가에는 반드시 존재한다.

“결국 그런 얘기다. 하늘의 관점에서 보자면 인간 한 명의 생(?) 따위야 어찌 되든 좋은 거다. 죽든, 살든. 슬퍼하든, 기뻐하든……세상이 정해진 대로 굴러가고 유지되기만 한다면­ 인간이 원하는 바가 진실로 무엇이든, 하등 신경 쓸 바 없이 운명을 점지한다. 그럼 우리는 입 꾹 닫고 따라야만 하는 거지. 하늘을 감히 거스를 수는 없으니까. 만일 거슬렀다면, 그 대가를 치러야만 하니까.”

어쩐지 자조적인 투였다.

엘레나가 이어 말한다.

“다만, 그 어느 법칙보다 절대적인 천리(?理)에게도 예외란 존재한다. 그러한 예외를 처리하기 위해 태어난 예외가 바로 우리들이고.”

의뭉스러운 부분에서 내가 물었다.

“……우리들, 이라니요?”

“너와 나. 네 전 여자친… 그래, 1번. 뮤. 그밖에도 지랄 맞은 하늘과의 계약으로 묶인 녀석들.”

——계약.

그 단어를 엘레나의 입에서 들으니, 불현듯 저번의 일이 떠오른다. 불타는 듯한 빛무리. 넓은 바다. 자신과의 계약을 기억하라는 말. 무언가 연관성이 있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상념에 빠져들던 그때.

“후배.”

“…예, 선배님.”

“너도 알겠지만 나는 10년 전 벌어진 전쟁에 참전했었다. 그 전쟁이 일어난 본질적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냐?”

아득한 옛날부터 대륙의 경계 밖에서 영역 싸움을 벌여오던 인류와 마족. 그 기나긴 전쟁의 역사는 뿌리 깊다. 가장 최근의 기록은 인류의 대대적인 승리로 끝났다.

“……마족이 인류의 적이기 때문, 아닙니까?”

적이기 때문에 싸운다. 목을 베고, 피를 흘린다. 악마는 인간의 피와 살점을 취하고, 인류는 그렇기에 명백한 인류의 적인 마족을 혐오하며, 종족의 존속을 위해 엄격히 처단하려 든다.

“적이라…… 그렇게도 볼 수 있겠지.”

엘레나는 시큰둥하게 턱을 괸다.

“종족 전쟁을 벌어야만 하는 이유가 어딘가엔 있을 거다. 중요한 건 바로 그거야.”

한층 무딘 얼굴로 그리 말을 잇는다.

“결국 싸워야 하기에 싸운다. 거기에 무슨 사정이 얽혀 있고, 자시고. 전부 상관없어. 인류와 마족의 전쟁은 일어나게 되어 있다.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져 있었으니, 끝도 없이 피를 흘리며 혈투를 벌인다. 어느 한쪽이 소멸할 때까지 계속.”

“……”

“여기까지 말해줄 생각은 없었는데…… 이 정도는 괜찮겠지. 네가 지금 전부 이해할 수 있을 만한 이야기가 아닐 테니까.”

엘레나가 그리 혼자 중얼거리다가.

날 슬쩍 보더니, 이어 말한다.

“아까 천리(?理)에게도 예외가 있다고 했지. 그게 바로 마족이다. 천리(?理)를 정면으로 반하는 존재. 더 이상 하늘이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버린 혹 같은 그 녀석들을, 하늘로부터 선택받은 우리들이 앞장서서 처리해야만 하는 거다. 싫다고 거부해도 어쩔 수 없어. 그게 운명이니까.”

“여하튼. 그렇다면 마족들을 왜 예외라 부르는 걸까. 이 빌어먹을 세상을 창조한 건 분명 하늘일진데, 왜 하늘이 직접 처리하지 않고 그 아랫것들에게 대신 맡기는 것일까.”

“하지만 말이다. 경계 밖의 하늘은 그저 새까맣다. 인세의 하늘과는 본질적으로 기분 나쁜 다름이 존재하지. 언제나 거뭇하고, 그 위엔 태양이 아닌 달이 떠 있다. 우리에게도 하늘이 존재하듯, 마족에게도 하늘이 존재한다. 녀석들만의 하늘이 있다고.”

“그게 바로­ 태초의 역천자(??者). 지금으로선 마신(??)이라 불리는 녀석이다.”

꽤 비범한 단어가 나왔다.

마신.

이름으로 보아 마족들의 신 같은 개념인 듯했다.

글쎄, 마족들의 역사 같은 건 수업에서 배운 적이 있었으나 마신에 대한 얘기까진 들어보지 못했었다. 엘레나는 지금 아무래도 썩 비밀스러운 말을 내게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쉽게 말해서 최초로 하늘을 배신한 간 큰 새끼라는 거지. 지금 경계 밖에 존재하는 악마들은 마신에 의해 탄생했다. 마신은 그렇게 탄생한 악마와 함께 천리를 거스르려 드는 거고.”

엘레나가 담배 연기를 한 차례 뿜어냈다.

“…전쟁은 비록 인류의 승리로 끝났지만, 마신은 아직 죽지 않았다. 인류와 마족의 전쟁은 마신이 죽기 전까진 절대로 끝나지 않아. 겉으론 종전된 것처럼 보여도, 결국 또 다시 같은 역사가 반복될 거다. 그게 언제가 될진 아무도 알 수 없겠지만, 곧 때가 올 거다. 반드시. 그렇지 않고서야 역천의 운명을 새로 부여할 리 없으니까.”

“……”

말을 끝마치며 날 물끄러미 바라본다.

“이해 안 되냐?”

“……예, 조금.”

“안 되라고 하긴 한 거다만. 자세한 용어 설명까지 지금 당장 해줄 순 없으니까. 더군다나 이렇게 말로만 들어선 아무것도 와닿지 않을 테지.”

이해한다는 듯 엘레나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그거다. 즐길 수 있을 때 즐겨 놓으라고.”

“……”

“인간의 시간은 유한하니까. 이미 지나간 때를 되돌릴 순 없어. 그러니 뭔가를 하기 전에 후회하겠다 싶으면 걍 하지 마. 중요한 선택의 기회는 언제나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고, 그 선택에 따른 결과를 책임지는 건 전적으로 본인의 몫이다.”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턱을 괸다.

“네가 정말 기억을 되찾고 싶어한다면, 나는 최대한 협력해 줄 생각이다. 다만 이게 될지 안 될지 정확히는 나도 몰라. 그리고 나는 아마, 널 도와주게 된다면 작든 크든 백 퍼센트로 후회할 거다. 그리 좋은 선택이라 보고 있진 않거든.”

“……”

“잘 생각해보란 얘기다. 기억을 되찾아서 얻을 게 더 많은지, 잃을 게 더 많은지.”

그러곤 끼익­ 의자 등받이를 뒤로 꺾는다. 엘레나가 말하는 동안 중간에 리필한 담배 개수는 헤아릴 수조차 없다. 테이블 위에 다리를 홱 걸쳐 올린다. 이미 자욱한 잿빛 연기 속에서 새로운 연기가 후욱­ 하고 피어오른다.

이 또한 선택이다. 엘레나의 말처럼, 내가 기억을 되찾게 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직 모른다. 득보다 실이 많은지. 실보다 득이 많은지. 직접 경험해보기 전까진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나, 뮤가 몸을 떨었다. 내 앞에서 주저앉아 울었다. 꺽꺽거릴 정도로 쉰 목소리에서 미안하다는 목소리가 끊임없이 울렸다. 도대체 너와 나 사이에 무슨 일이 있던 건지, 나한테 도저히 얘기하지 못하겠다고 했다.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게 망가져 있던 뮤를 보았다. 참혹하디 끔찍한 기분이었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말하지 않으면 모르는데, 말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럼,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나였다.

아무것도 모른다. 확실하지 않다.

다만­

한 가지만큼은 안다.

이대로면 안 된다는 것.

나는 결연히 고개를 들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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