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차버린 소꿉친구와 전 여친이 같은 반이라 곤란하다-81화 (81/201)

〈 81화 〉 마무리 (9)

* * *

#16

“선배님의 말씀은 잘 귀담아 들었습니다. 솔직히, 전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제가 이런 몸이 되어버린 것은 오로지 신의 뜻이라, 라는 걸로 해석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 계약이란 게 정말이라면 말입니다.”

“뭐, 그런 셈이지. 계약서에 뭐가 어떻게 적혀 있는지까진 말해줄 수 없지만. 지금의 너에겐 별로 신경 쓸 거 없다. 그냥 그런 게 있다, 정도로만 알고 살어. 때가 언제 올진 아무도 모르니까. 그렇기 때문에 너한테 미리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고.”

뭉뚱그려 두루뭉술하게 말하긴 했다. 내겐 아직 이르다는 듯, 명쾌한 설명을 해주진 않았다. 아니, 그렇다기보단 뭐랄까. 무언갈 내게 얘기해주고 말고의 선택권이 엘레나 본인에게 없는 것 같단 느낌을 받았다. 어느 정도의 한계선이 존재한다는 듯. 조금 더 크고 오면 알려주마, 애송이. 같은 뉘앙스를 취하곤 있으나 어쩐지 이질적인 분위기였다.

침착한 눈빛으로 엘레나를 바라보자, 날 향해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을 짓는다.

“……하나 더 언질을 주자면, 네가 워낙 이질적인 놈이라 마족들이 네게 눈독을 들인다는 거다. 물론 저번 사건처럼 위기에 처했을 때 대책 정도야 구비되어 있을 테지만. 한동안 네 주변의 마(?)들은 내가 대신 처리하고 다닐 테니 마음 놓고 다니면 돼.”

그러고 보니 과욕을 부렸다고 했었나. 나디엘리는 처음부터 날 노릴 생각이었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처음 날 보며 오묘한 미소를 지었던 나디엘리의 모습이 뇌리에 깜빡 스친다.

그건 맛 좋은 먹잇감을 발견해 입맛을 다시는 것과 동일한 행동이었을까. 영문 모를 닭살이 우수수 돋는다. 다만 엘레나의 장담 같은 말을 들으니 한편으론 자그맣게 안심도 되었다. 넙죽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그래, 짜샤. 보람이라도 있어야지. 원체 무보수 노동인데 열정페이까지 받으면 섭하잖냐.”

엘레나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누군 내가 지난 삼 년간 어디 짱박혀서 딩가딩가 놀고 있었다는데, 좀 억울한 감이 없지 않아 있더라고. 정작 내가 어디 경치 좋은 해변가 벤치에서 코코넛이나 빨고 있었으면, 그런 이야기를 시답잖게 떠벌릴 입도 존재하지 않았을 텐데 말야……”

그리 중얼거리며 내가 아닌 먼 곳을 보았다.자욱한 연기 사이로 엘레나의 금안이 스산한 빛을 흩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엘레나가 날 향해 무심히 머리를 돌린다.

“이제 해봐.”

“……예?”

“아까 하려던 말. 해보라고.”

아…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주억였다.

결심은 이미 섰다.

후회할 일을 만들지 말라고 했지.

사실, 어느 쪽으로 가든 나는 후회하게 될지 모른다.기억을 잃은 이 상태 그대로 모든 일의 전말을 잊고서 살아가든. 비로소 기억을 되찾아, 엘레나가 말했던 것처럼 망가진 인격을 안고서 살아가든. 나는 종래에 후회하게 될 것임이 틀림없다.

차라리 찾지 말걸.

차라리 찾을걸.

어차피 그렇게 될 거라면, 나는 최악이 아닌 차악을 택하고. 결국 그 선택을 최선으로 바꿔 보일 것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굳게 닫혔던 입을 단번에 열었다.

“기억, 되찾겠습니다.”

고개를 숙였다.

“부디 협력해주세요. 선배님.”

엘레나는 한참 말이 없다가.

아주 짧은 반응을 내보일 뿐이었다.

“오냐.”

#17

촤아아악. 시체가 된 담배들의 무덤이 옆으로 쭉 밀려난다. 그 주변에 자리하던 서류더미들도 뭉텅이로 죄다 밀어젖힌다. 기세가 대단했다.

테이블 위에 묻은 먼지들까지 싹 털어버리자 겉면이 제법 깔끔해졌다.

걸치듯 올렸던 다리를 내리고 목을 뚜둑, 꺾는다. 어으­ 하는 시원한 신음까지 골골 흘렸다.

엘레나가 문득 손을 들었다. 쫙 펼친 손바닥이 불시에 웅크려진다. 주먹 쥔 손 안에서 거대한 압력이 휘몰아치듯, 푸르스름하게 어두운 방을 가득 채웠던 잿빛 연기가 소용돌이치며 빨려 들어간다.

뭘 어떻게 한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흐렸던 시야가 선명해졌다. 그리하여 연기를 모두 제거한 엘레나가 가볍게 손을 털었다. 이제 좀 쾌적하냐는 듯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진작 이렇게 해주실 수 있었던 게……”

“힘들어. 귀찮아. 그리고 은근 반응 보는 거 재밌거든.”

악동처럼 낄낄 웃는다. 그리고는 품 안을 뒤적거리더니, 새로운 담뱃갑을 하나 꺼내 들었다. 치익. 불을 붙이고 다시 연기를 내뿜는다.

……아니, 대체 몇 갑을 피우시는 거예요. 결국 담배 찌든 내는 없어지지 않게 되었다. 이거 이대로 돌아갈 수나 있을런지 모르겠다. 트램 안에서 다른 의미로 주목받게 될 것 같은데.

“잠깐 있어봐. 줄 거 있으니까.”

손을 뻗어 방금 치워두었던 서류더미를 이모저모 뒤적거린다. 쓸만한 걸 찾았는지 부욱 찢어 적당한 크기로 잘라 가져온다.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던 펜을 들곤 종이 위에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사각, 사각.

오랜 밤샘 탓에 눈이 침침한지 자꾸 부비적거린다. 별안간 날 슬쩍 흘겨보더니 “…늙어서 이러는 거 아냐.” 라는 중얼거림을 뱉고선 다시 펜을 놀렸다.

탁. 엘레나가 펜을 내려놓았다. 잠깐 고민하는가 싶더니 엄지 손가락을 콱 깨문다. 검붉은 핏방울이 송골거리며 작게 맺혔다.

주륵 흘러내리려는 그것을 종이에 갖다 대기 직전, 푸른 빛이 일었다. 일종의 마법적 처리를 가하는 모양이다. 피를 매개로 하는 마법이라니. 과연 무엇이었을까.

엘레나는 완성된 그걸 쪽지처럼 몇 번 접더니, 어쩐지 퀭한 얼굴로 내게 슥 내밀었다.

“받아라.”

“……이게 뭐죠?”

“협박 편지.”

“예?”

“이거 가지고 목에 죽일 듯 들이밀면, 생판 남인 네 부탁이라도 하나 정돈 들어줄 거다.”

“……”

일단 주니까 받긴 받았는데.

영 떨떠름한 반응이자 엘레나가 말한다.

“아카샤의 별이라고 들어봤냐?”

“……예, 제국 시민이라면 당연히…”

세상 모든 인간은 대륙 위에 산다. 대륙을 지배하는 것은 제국이다. 제국의 권위 높은 마법사와 학자들을 규합하는 건 아카샤의 별이다. 그러니 아카샤의 별은 대륙 최고이자 인세 최강의 마탑이다.

대륙에서 태어난, 마도의 길을 걷는 자들이 아카샤의 별 입탑을 평생의 일차적 목표로 삼는 데엔 전부 이유가 있다.

“거기 마탑주가 내 친구거든. 그 녀석이라면 너한테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

어제 밥을 먹었다, 정도의 무심한 투로 그리 말하는 엘레나를 보고선 놀라움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마탑주다.

일반 마탑도 아니고 거대 마탑.

그중에서도 지상 최고의 마탑으로 꼽히는 아카샤의 별 꼭대기에 존재할 터인 이를 친구로 두고 있다니……

제국의 황제조차도 함부로 대하지 못할 인물이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것은 물론이고 마법사이자 학자로서의 명성은 10위계­ 데카(Deca)를 우습게 넘볼 정도.

“너도 알지 모르겠지만, 아카샤의 별은 현재 3분할로 운영되고 있다. 지금으로선 9년 전부터 에테르학파가 가장 우수한 진영이라 평가받고 있는 상태고. 에테르학파의 수장인 제3마탑주 테트라 크로울리가 영혼을 다루는 분야엔 도가 튼 녀석이니, 아마 나보다 확실한 해결 방법을 알려줄지도 모르지. 꽤 오래전 일이지만 나도 녀석한테 적잖은 도움을 받았었다. 실력은 확실해.”

그야, 확실하겠죠. 대륙 최고의 마법사라면……

“물론­ 지금 당장 가서 만날 순 없을 거고. 워낙 자유분방한 년이라. 마지막으로 봤던 게 1년 전인데…… 아마 지금쯤 돌아오는 길일 거다. 4월달 중순쯤이면 이미 도착해 있겠군.”

4월달인가……

얼마 남지 않았다.

이후의 일정을 곰곰이 생각해보던 내게, 엘레나가 불쑥 말한다.

“거기서 한동안 꼼짝도 안 할 테니, 네 시간 봐가며 약속 잡아라. 걔 사정이야 알 바 없고. 내가 괜히 낙인까지 그어서 편지 쓴 게 아니니까. 냅다 들이밀면 어떻게든 널 만나줄 거다. 대신 좆같이 띠껍게 굴면 한 대 패도 돼. 내가 특별히 허락하지.”

“……예? 그, 그건 좀…”

“뭐 임마? 선배 말이 우스워?”

“아니, 그게……”

“구라 같지? 진짜야. 테트라 그 년, 사실 맞는 거 좋아해. 너처럼 생겼으면 아예 가능성 없진 않을 것 같은데. 대뜸 엉덩이 걷어차도 속으론 기뻐할걸?”

“……”

여기서 뭘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그냥 닥치고 있었다. 굳이 알고 싶지 않았던 정보를 얻었다. 대륙 최고 마법사 되는 사람의 특이한 기벽이라니……이런 정보를 돈 주고 판다면 과연 얼마를 받을 수 있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아울러 엘레나는 장난스럽게 말하는 것 같았지만 의외로 진지해 보이는 것이, 정말로 오묘한 기분을 내게 선사해주고 있었다.

엘레나는 내 굳은 얼굴을 보고선 푸핫, 하는 웃음을 흘렸다.

“딱히 긴장 타지 말라고 하는 소리다. 마탑의 마법사란 놈들이 대부분 어디 한 군데 맛이 가 있는 집단이긴 한데, 결국 너와 똑같은 인간이란 걸 잊지 마. 같은 언어를 쓰는 이상 말은 통하니까. 네가 원하는 걸 확실히 말해. 눈을 피하지 않고. 지금처럼 네 의지를 명확히 전달한다면, 테트라도 어느 정도 진심을 내줄 거다.”

엘레나가 그리 말하며 날 본다. 더없이 뚜렷한 눈으로. 아까까지의 몽실한 듯한 분위기가 불시에 싹 걷혔다. 안대에 가려져 나머지 한쪽 눈은 보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엘레나의 형형한 금빛 동공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그래, 그렇게. 빌어먹게도 잘생겼네.”

종래에는 김빠지게 웃는다.

마지막 담배를 다 태우고선, 튕기듯 재떨이로 떨군다. 머리를 북북 긁던 엘레나가 끄응, 하는 신음과 함께 허리를 꺾었다. 천장을 하염없이 올려다보던 그녀가 시선만 살짝 내려 나를 향했다.

“이제 됐다. 난 너한테 할 얘기 다 했어.”

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감사의 말을 건넸다.

“……이렇게까지 챙겨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엘레나 선배님. 제가 어떻게 보답을 드려야 할지…”

말끝을 흐렸다. 엘레나에겐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이었다. 세간에 워낙 제멋대로인 사람으로 알려져 있고, 실제로 그녀의 말과 행동 역시 다소 부담스러울 때가 있긴 하나, 결국 이 자리에서 나를 위해 번거로운 일들을 여럿 해주었다. 어쩌면 영영 되찾지 못할 수도 있었던 기억을, 엘레나 선배님 덕분에 작은 희망이나마 품을 수 있게 되었다.

본인도 확실지 않다 했지만 내겐 분명 큰 수확이었다. 엘레나를 찾아가면 답을 얻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결과적으로 정답인 셈이었다.

엘레나가 킬킬 웃는다. 어깨를 뚜둑거리더니 돌연 의자에서 일어선다. 타박거리며 내게 걸어온 엘레나가, 내 어깨 위에 손을 툭 하고 얹는다. 담배 냄새. 땀 냄새. 성인 여성의 냄새. 날 지긋이 내려다보던 엘레나가 별안간 말했다.

“아쉽지만, 네가 나한테 해줄 수 있는 건 없어. 너한테 뭘 받고 싶어도 네가 나한테 줄 수 있는 게 없다. 그러니까 보답은 아무것도 필요 없어.”

“……”

“넌 이제부터 네가 해야 할 일을 해라. 언제나 최선을 다해서 살고, 후회없이 살아라. 그래야 죽었을 때 그나마 덜 좆같을 테니까. 알겠냐, 후배?”

엘레나는 내 짧은 대답을 원했고.

나는 그리 했다.

“……네, 선배님.”

엘레나가 만족스럽다는 듯 씩 웃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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