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화 〉 조각 (1)
* * *
#1
—짹, 짹짹……
화창한 주말 아침.
뮤의 하루는, 전혀 개운하지 않을 지독한 기분 속에서 깨어나는 걸로 시작했다.
“……”
벌써 익숙해지기 시작한 천장이 보인다. 평소라면 눈을 두어 번 감았다 뜨는 것으로 정신을 차렸겠지만, 지금은 좀 달랐다.
채광 좋은 창문밖으로부터 햇살이 스며들어옴에도 몸을 일으킬 생각 하나 들지 않는다. 그저 이대로 조금 더 자고 싶은 마음이었다. 용납할 수 없는 나태함이 순간 뮤의 마음 한켠을 지배했다.
더 놀라운 건 그 사실을 뮤 본인이 자각했음에도 손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뮤는 졸린 눈을 끔뻑거리며 고개만 살짝 옆으로 돌렸다. 밖은 무척 밝다. 푸르스름한 새벽녘이 아니었다. 이마 위에 팔을 올리고선 자그맣게 한숨을 쉰다. 이럴 수가. 생활리듬이 깨져버렸다.
‘……예상은 했는데.’
고운 미간이 가운데로 좁혀졌다. 물결치던 단아한 흑빛 머리칼은 다소 부스스하게 뻗쳐 있었다.
평상시에 몸가짐을 흠잡을 데 없도록 완벽히 하고 다니던 뮤의 흐트러진 모습은, 이렇듯 기상 시간에만 유일하게 볼 수 있는 극히 희귀한 장면이었다.
어제 하루 무리하도록 몸을 혹사시켰던 게 원인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분명 후유증은 전신 여기저기에 흔적처럼 남아 있으나, 한계를 넘어설 정도의 고된 훈련 정도야 수도 없이 경험해봤다.
혈도를 불태우며 격렬히 날뛰던 기운을 잘 갈무리하고 충분한 휴식을 취하면 몸은 금세 원상태로 돌아온다.
그럼 이유는 하나였다.
원래라면 훈련 뒤엔 바로 잠들어야 했을 터.
어제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었다.
잠이 통 오질 않고, 억지로 의식을 끌어내려 보아도 귀신같이 급부상했다. 어깨며 팔이며 허벅지며 비명을 지르는데 눈은 똘망하기만 했다. 불 꺼진 방 안에서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은 채 숨만 골라보아도, 뮤는 잠들 수 없었다.
‘오늘은… 쉴까.’
그렇게 새벽 4시가 다 되어서야 결국 눈이 감겼고, 그걸로 끝인 줄만 알았으나 꿈자리에서까지 괴롭힘을 당했다.
신세가 처량했다. 이건 좀 너무하지 않은가. 질 좋은 휴식이 얼마나 중요한 건데.
한탄하듯 속으로 중얼거리며 보드라운 이불에 감싸인 몸을 옆으로 뒤척였다. 잠도 부족하겠다, 이대로 점심까지 눈이나 감고 있을 생각으로 움직임을 멈췄으나.
‘아, 진짜……’
역시, 잠들 수 없었다.
그럴 때가 있다. 몸은 극도로 피곤한데 눈을 감아도 잠이 전혀 오지 않는 순간이. 깊은 수면 아래로 내려갈 듯, 안 내려갈 듯 간을 보는 듯한 의식이 괘씸하게만 느껴졌다.
그래, 누가 이기나 보자. 정말 피곤하다면 알아서 잠들겠지. 몸은 정직하니까. 미간을 구긴 채 그로부터 삼십 분 정도를 눈 감고 있었다.
“아아악!”
이른 아침의 비명이 울려 퍼지고, 뮤는 신경질적으로 침대 위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2
“……푸우후.”
차가운 물이 끼얹힌다.
가장 먼저 이 더러운 기분을 해소하기 위해 일단 다짜고짜 세수부터 했다.
턱선의 끝에서부터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헤어밴드를 따로 사용하지 않아 옆머리나 앞머리 끝에서도 물이 떨어졌다. 조명 켜진 화장실 세면대 앞에서 고개를 들어본다.
살짝 심기가 불편한 상태였다. 짜증이 났다. 그럼에도 거울 속의 자신은 고요했다. 입을 다문 채 지긋이 거울을 바라본다.
잠시 멍을 때리는가 싶었으나, 어김없이 밀려오는 부정적인 생각들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기가 차서 쓴웃음을 짓는다. 입꼬리만 겨우 비틀어졌다.
자기 자신이 보기에도 냉랭한 썩소였는지라, 질린다는 듯 거울로부터 고개를 돌리곤 수건으로 얼굴을 가볍게 두드렸다.
—미안해, 뮤.
“……”
시야가 일순 어둠에 휩싸이자.
뮤는 손에 들린 수건을 무겁게 꾹 쥐었다.
냉수 덕분에 정신은 어느 정도 차렸다. 그래서 더 문제였던 것 같다.
어제 하루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대로면 좋지 못한 생각들에 잡아먹힐 것만 같아서. 무작정 검만 휘둘렀다.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열량 보충을 위해 식사를 했던 시간을 제외하고선, 뮤의 손에는 항상 검파가 쥐어져 있었다.
그 결과 뮤의 손아귀엔 상당한 굳은살들이 배겼다. 원래도 배겨 있었으나 이번으로 더욱 단단해졌다. 살짝 발갛기도 했다. 의외로 물집은 생기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생기긴 하는데, 그 자리에서 바로 터트려 버린다. 그리곤 빠르게 자가수복을 한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뮤는 강도 높은 훈련을 남들보다 오래 할 수 있다.
‘오늘도……’
숨을 들이킨 뮤가 얼굴에서 수건을 도로 떼어냈다.
걸이에 걸고선, 사르륵. 잠옷을 한 겹씩 벗었다. 잠깐 세수만 할 생각이었는데. 그냥 샤워를 하는 편이 더 나을 듯했다.
군살 하나 없는 새하얀 나신이 드러났다. 벗은 옷가지를 밖에 두고, 널찍한 화장실 안 샤워 부스에서 샤워기를 틀었다. 쏴아아아. 세찬 물줄기가 갈래갈래 뿜어져 나온다.
쇄골 사이에 물이 고였다. 흘러넘쳐 아래로 떨어진다. 시리도록 차가운 냉수를 고스란히 맞는다.
샤워기를 틀어놓은 채 뮤가 고개를 떨구었다. 푹 젖은 머리칼이 뮤의 얼굴 표정을 가렸다.
눈을 감고 있진 않으나 주변은 고요하기 짝이 없다. 여긴 뮤의 개인적 공간이기에 뮤를 제외한 어느 누구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목소리가 선명히 들려온다. 뮤는 결국 두려운 듯 눈을 감고 말았다.
‘……어디까지 아파야 하는 걸까.’
우습게도, 그런 생각을 해버린다.
이 정도 아팠으면 그만 아파도 되지 않나.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나. 어차피 안 되는 거 알고 있잖아. 그럼, 전부 포기하고 너는 너의 삶을 살면 되는 거 아닐까. 도대체 뭐가 두려워서 이러고 있는 건데. 한심하게.
여태 잘만 해왔잖아. 뒷일 걱정 안 하고 눈 꼭 감은 채 질러버리는 거.
이런 태도는, 전혀 너답지 않아……
결국 넌 에지오에게 미움받지 않는 미래를 원하고 있을 뿐이 아닌가. 이런 상태로 질질 끌어봐야 고통받는 건 자신뿐이다.
아니, 에지오도 매한가지일 터.
지금의 에지오라면, 자신이 이렇게나 뒤틀려 있는 상황 자체를 용납하기가 힘들 것이었다.
물에 흠뻑 젖은 얼굴을 손으로 쓸었다.
생각 정리는 오래전에 이미 끝냈다. 어쩌면 편지를 받은 순간부터 그리 생각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나는 에지오가 없으면 안 돼.
그간 큰일이 있었다곤 하나, 뮤는 여전히 뮤였다. 원하는 게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든 가지고 싶다. 그 예외가 적용되는 건 오직 에지오뿐이었다.
왜냐면, 실패했기 때문에.
원하는 게 있다면, 항상 가져왔으니까. 그게 실패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그런데 뮤는 처음으로 실패했다. 에지오의 전부를 가지지 못했고, 끝내 놓쳐버렸다. 가질 수 있었는데. 내가 몽땅 버렸다. 그게 그토록 본인이 원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르고. 절대 원하지 않았던 결말을 맞았다. 정말이지, 최악이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보다 확실한 결론을 내려야만 했다. 가슴 위에 손을 얹고 에지오를 생각해본다. 여전하다. 이 심장을 다시 뛰게 만들어 준 사람은 에지오였다.
하여, 이미 끝난 관계임에도 구차하게 그를 떠나보내지 못한다. 그간의 정 때문인가. 하루하루 충족감으로 가득했던 그와의 추억이 너무나도 많았던 까닭일까. 뭐든 알 수 없다.
단 하나 확실한 건, 자신은 아직 에지오를 사랑하고 있단 사실이었다.
에지오는, 아니었다.
“……”
그는 이미 마음 정리를 끝낸 상태였다. 마음이 떠난 상대를 무릎 꿇고 붙잡는 것만큼 추한 일이 어디 있을까. 없을걸.
세상 많은 연인들이 깨지고 붙는 것을 끝도 없이 반복한다지만, 실연을 처음 겪는 뮤에게 있어선 다른 사례 따위 전혀 도움되지 않았다. 이건 그와 나만의 사정이었으니까. 누군가 조언을 해준다 한들, 본질적으로 해결해야만 하는 건 결국 본인이었으니까.
실연의 아픔은 시간이 해결해준다고 하던데.
전 남자친구가 같은 반이어도 그럴 수 있을까.
절대 안 될걸.
그러기엔 아직 미련이 너무나도 많았다.
겨우 감춰두었던 그것은 검에 평생을 바치기로 결심한 지 몇 개월 지나지 않아 재회한 에지오에 의해, 어김없이 떠올라 버렸다. 얼굴을 다시 볼 일 없었다면. 그랬다면 차라리 정말, 에지오를 잊고서 검에만 매진할 수 있었을지도 몰랐을 텐데.
추억이 유화처럼 흐려지기도 전에, 오히려 가장 신경 쓰일 시기에. 너무 빨리 에지오를 만나버렸다. 뮤의 마음이 한층 더 복잡한 이유 중 하나였다. 시간이 해결해주기도 전에 덜컥 전 남자친구와 재회해버린 것이었다. 누군가의 농간이자 운명의 장난이라고밖에 볼 수 없었다……
그뿐인가. 에지오는 최근 기억을 잃어버리기까지 했다. 자신들의 관계가 파탄남에 있어 결정적이었을 그 말들을, 모조리 잊어버린 것이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죄스러움을 감춘 채 다시 잘해보려고 해야 하나?
아니, 뮤는 성격상 그러지 못했다. 이기적인 사람이었으니까. 누구보다 우선적으로 본인 스스로에게 떳떳해야만 살아갈 수 있었다.
말인즉 언젠가 탄로날 거짓말을 지껄이며 에지오를 기만하는 일 따위, 본인의 속내부터가 절대 허용할 수 없단 얘기였다.
그렇다면 뮤는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답은 정해져 있었다.
에지오를 아직 좋아한다. 그가 없으면 안 된다.
반면 에지오는 뮤를 포기한 상태다. 지금은 아닐 수도 있다.
뭐가 어떻게 됐든 간에, 뮤는 선택할 수 있었다.
노력해서 그의 마음을 돌려볼지. 아니면 이대로 에지오를 연심 속에서 떠나보낼지. 무엇이 옳고 그르길 판단하고 자시고, 전부 제쳐두고서. 일단 선택지 자체는 주어져 있는 셈이었다.
그 모든 선택을 감행하기 전에.
뮤는 선행적으로 에지오에게 말해야만 했다.
문이 열리지도 않았는데 그 뒤의 풍경을 눈으로 볼 순 없을 노릇이다. 상상할 순 있겠으나 결국 그뿐이다. 뮤는 반드시 문을 열어야만 했다.
본인이 원하는 미래로 관계를 이끌려면, 자기를 매일 밤 좀먹는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로부터 용서를 구하는 편이 옳았다.
용서를 구하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그거야, 당연히 정해져 있잖아.
어차피 해야만 할 일이라면.
고민하지 말고 그냥 질러 버려.
그게 네가 살아왔던 방식이잖아.
“……”
물줄기가 차츰 사그라들었다. 뚝, 뚝. 샤워기를 끈 뮤가, 감았던 눈을 뜨며 머리를 들었다.
‘……할 수 있어. 뮤.’
조금은, 정신이 맑아진 것 같았다.
#3
뮤의 마음가짐에 아주 약소한 변화가 생겼다.
아직 완전하게 결심이 선 것은 아니었으나, 이제부터 에지오를 무턱대고 피하진 않을 거였다.
그의 앞에만 서면 트라우마 탓에 호흡이 불안정히 떨리긴 해도, 두렵다고 피하기만 할 게 아니라 맞서 싸워야 하는 것이었다.
유니폼이 아닌 사복 차림. 트레이닝 바지 위에 품 넓은 흰색 박스티를 걸쳤다. 머리도 편히 틀어올렸다. 남들이 어떻게 보든 상관없이 자기 편한 대로 다녔다.
오후의 공터를 걷는 동안 뭇 선배들이 말을 걸어오긴 했으나, 언제나처럼 짧고 적당히 대답해주고선 갈 길을 갔다. 이런 점은 딱히 바꿀 생각이 없어 보였다.
—위이이잉……
점심이 지난 시각. 뮤는 오랜만에 도서관을 찾았다. 아침에 생각한 대로 오늘은 휴식을 취할 예정이었다. 자그마한 변화 중 하나였다.
물론 휴식이라고 해봐야 저녁 즈음엔 다시 검을 잡긴 할 거였다. 느슨하도록 감을 잃지 않으려면, 항상 날을 세우고 있어야 하니까.
도서관에 들어오자, 어쩐지 익숙한 냄새들에 약소한 미소가 지어졌다. 티는 나지 않는다. 한적한 도서관의 1층을 거닐던 뮤가 계단을 타고 2층으로 올라섰다.
스르륵. 손으로 저서들의 표지를 훑으며 걸었다. 그러다 코너를 돌아 「근대문학 01」이란 글씨를 발견하고선, 자연스레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긴 찰나.
“……?”
툭, 툭.
무언가 뮤의 등을 콕콕 찔렀다. 하필이면 다소 민감한 부분을 건드렸던지라 빠르게 뒤를 돌았다. 시선을 아래로 내려보는데.
“무, 무시 안 하네……?”
놀란 눈으로 그리 중얼거리는 사샤가 있었다.
“아, 안녕…? 도서관에는 뭐하러 왔어…?”
“……”
뭐야. 또 이 녀석이었나. 그것보다 도서관에 왔다면 뭘 하러 왔겠는가. 당연히 책을 읽으러 왔겠지.
일련의 생각을 마친 뮤는 그것을 입밖으로 꺼내지 않고, 언제나 그랬듯 귀찮은 녀석에게서 머리를 홱 돌렸다.
조용히 책을 읽으려 했는데. 주변에서 조잘거리는 녀석이 있다면 살짝 곤란해진다. 방해나 하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사샤를 그 자리에 두고서 뮤는 본인이 읽을 책을 골랐다. 이번에 새로 들어온 신간. 나름 재밌게 읽었던 책의 작가가 책을 새로 낸 모양이었다. 전작과 똑같이 추리 소설이었다.
뮤는 책을 빼들곤 주변에 위치한 테이블을 잠시 바라보다가, 문득 개인열람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고선 아래로 내려갈까 싶었다. 그렇지 않는다면 분명 그 녀석이 귀찮게 방해할 테니까.
라고 생각하며 뒤를 돌았는데.
‘……?’
사샤는 아까 뮤와 마주했던 장소 그 자리에서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하늘빛 트윈테일은 언제나 그렇듯 축 늘어져 있고, 자기보다 한 살 많다는 걸 의심케 할 만큼 작은 체구도 여전하지만. 항상 뮤의 옆에서 방방 뛰던 그 활력은 어디 가고, 우물쭈물하는 채 프릴 달린 치마의 끝자락만 꾹 쥐고 있었다.
그러다 뮤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고개를 돌린다.
뭐하는 건지. 어차피 무시할 생각이긴 했지만 계속 뒤따라왔을 줄 알았는데. 평소와 달리 시끄러운 말소리가 안 들리긴 했다. 도서관이라 그런가. 정숙이란 걸 안다면 다행이었다.
‘방해 안 한다면… 나야 좋지.’
턱. 잠깐 사샤를 흘겨보던 뮤가 책을 든 채로 테이블 의자에 착석했다. 표지를 펼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잠깐 옆을 돌아본다.
사샤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다시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며 이번에는 옆 책장으로 스윽 몸을 감춘다. 그래봤자 트윈테일의 한쪽 묶음머리가 빼곰 튀어나와 있었다.
잠시 뒤 뮤는 책으로 시선을 돌렸으나, 왠지 모르게 얼굴 한켠이 따가웠다.
……처음엔 말로 방해하는가 싶더니 이제는 참신한 방법으로 방해하는 건가. 휴식도 제대로 못 취하게 만드네.
아주 작은 짜증과 함께 책을 덮었다. 아무래도 단단히 일러둘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뮤는 성큼성큼 사샤를 향해 다가간다. 히익, 하는 숨소리가 책장 뒤에서 들리는가 싶더니 물빛 머리칼이 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
“……”
하지만 아예 도망간 건 아닌지, 곧 책장 뒤에 굳어 있던 사샤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저, 저기… 그게…… 사샤는……”
사샤가 눈을 데굴 굴리며 손을 가슴께에 가져갔다. 뮤는 말없이 사샤를 냉철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나는 너랑 친해질 생각 전혀 없으니, 귀찮게 굴지 말라고. 딱 선을 그어둘 생각이었는데. 뮤는 목구멍 끝까지 차오른 그 말을 결국 뱉지 못하고 삼켰다.
“…저번에, 그거. 사과하고 싶어서……”
“……”
저번에?
뮤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뭘 사과하고 싶은진 모르겠으나, 뮤는 잠자코 사샤의 말을 들어보았다.
“사샤가 너무… 막, 귀찮게 했지? 치, 친해지고 싶어서 그랬던 건데… 사샤는 너랑 같이 놀고 싶어서…… 또, 또래 친구는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몰라서……”
“……”
“마, 많이 짜증났다면 미안해…… 다음부턴 안 그럴게……”
사샤가 결국 우우… 하면서 고개를 툭 떨궜다.
‘…흐음.’
며칠 전부터 묘하게 이상했던 태도. 그랬던 건가. 뮤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참새처럼 시끄러운 녀석은 싫지만.
주제파악을 한다면, 얘기는 좀 달라진다.
“알았으면 하지 마. 오늘은 책 읽으러 왔으니까 평소처럼 방해도 하지 말고. 알았어?”
“……!”
원래 하려던 말은 담아둔 채로, 그리 말했다.
사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답이 나온 순간 몸을 잘게 떨었지만, 확실히 냉랭한 투긴 했어도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부드러웠다. 뭐가 어쨌든 자신의 말에 반응해줬단 것에 사샤는 순수히 기뻐했다. 고개를 빠르게 끄덕인다.
“응, 응! 방해 안 할게! 그, 그럼 사샤…… 용서해주는 거야?”
“뭘 용서해야 될지도 모르겠는데.”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평상시엔 사샤를 공기 취급하고 있을 뿐이었으니까. 그러다 저번…… 아, 뮤가 작게 입을 벌렸다.
그때 사샤가 팔을 붙잡아서 욱 하는 마음에 싸늘히 말하긴 했다. 그때 일을 사과하려는 건가. 별로 아무런 신경도 안 쓰고 있었는데. 사샤가 구태여 언급하지 않았어도 사샤에 대한 뮤의 태도는 한결같았을 것이었다.
사샤가 눈을 빛내며 뮤에게 물어왔다.
“요, 용서해준다는 말이지?”
“마음대로 생각해. ……그리고, 귀찮게 알짱거리지만 않는다면 네가 나한테 미안할 일은 없을걸.”
“응, 응! 안 그럴게! 사샤, 평범하게 너랑 친해질 수 있도록 노력해볼게……!”
“……난 딱히 친해질 생각 없어. 그건 알아둬.”
뮤의 냉랭한 말에 사샤가 일순 충격받는가 싶더니.
도리질을 하고선 힘차게 말한다.
“그, 그러면 사샤가 좀 더 노력할게! 사샤가 너한테 친구로서 도움될 수 있도록……”
“알았으니까. 제발 목소리 좀 낮춰. 여기 도서관이잖아. 이런 거 하나 하나가 내 신경 거슬리게 하는 거 몰라?”
“헤윽. 이, 이제부터 기억할게……”
“나 참……”
됐다. 됐어. 귀찮다는 듯 뮤가 한숨을 쉬었다.
그때였다.
“뭐 잘못한 거 있다더니. 해결됐나 보네.”
“……어?”
가까운 곳. 도서관 2층으로 올라오는 계단에서, 에지오가 모습을 드러냈다. 뒤돌았던 뮤가 화들짝 놀라 가슴께에 책을 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