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차버린 소꿉친구와 전 여친이 같은 반이라 곤란하다-83화 (83/201)

〈 83화 〉 조각 (2)

* * *

#4

에지오는 슬쩍 손을 들어 가볍게 인사했다. 뮤가 주춤거리며 마주 꾸벅였다.

“아, 안녕. 에지오.”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더 이상 떨지 않기로 결심했었는데. 익숙해지는 건 아직인 듯했다. 소중한 물건을 다루듯 책을 품에 감싼 채 에지오에게 물었다.

“여, 여긴 무슨 일이야……?”

말하면서도 아차 싶었다. 무슨 일이긴. 도서관에 책 읽으러 왔겠지. 바보야.당황했다는 티가 여실히 드러났다. 가까스로 평정을 유지하기 위해 차분히 심호흡을 하자, 곧 안정되긴 했지만. 옆에서 사샤가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다.

뮤는 왜 에지오랑 얘기할 때만 어버버거리는 것일까. 사람 차별이 너무하다고 생각했다.

“과제 때문에 조사할 게 있어서. 너는……”

에지오의 눈길이 가운데를 향했다. 한층 강화된 시력이 책 표지에 쓰인 글씨를 선명히 담아냈다. 가스틴트의 악마. 저자 아그놀드 페이지. 들어본 적 있는 작가다. 사실 그것보단 ‘악마’란 키워드에 은근한 관심을 보였던 에지오였으나, 허구에 가깝게 엮어냈을 소설이란 걸 깨닫곤 말을 이었다.

“책 읽으러 왔구나.”

“으, 응.”

둘 사이에 기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책이란 사물은, 에지오와 뮤에게 있어서 남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어쩐지 그날 이후로 책에 손을 잘 대지 않게 된 둘이었으나, 오늘만큼은 달랐다.

익숙한 나무와 종이 내음. 많은 시간을 도서관 안에서 함께 보내왔던 추억이 아련하게 떠오르는 장소였다.

“…그것보다, 아까 무슨 말이었어?”

가슴이 살짝 아린다. 창졸간 일렁이며 서서히 덮쳐오는 기억을 털어내듯, 뮤가 입을 열었다.

“응? ……아.”

에지오가 사샤 쪽을 돌아보았다.

“사샤가 너한테 사과할 일 있다고 했거든. 너는 자기랑 얘기 잘 안 해준다고, 너랑 인연 있는 나한테 부탁해서 따로 사과하고 싶었던 것 같았는데. 어떻게 잘 해결된 건가 싶어서.”

“야, 그건……!”

사샤가 황급하게 말했다. 그러나 이내 목소리를 크게 냈다는 걸 자각하곤 옆을 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냉랭히 자신을 내려다보는 뮤가 그곳에 있었다.

사샤는 제 손으로 조심히 입을 막았다. 눈만 깜빡이며 뮤의 시선을 조용히 피한다.

뮤가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해결… 이라면 해결이지?”

“그래?”

정작 사샤는 불만이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볼에 바람이 살짝 들어갔다. 그렇지만 투정은 꺼내지 않는다. 뭐, 알아서 잘 했겠지. 에지오의 입장상 더 개입할 부분은 없었다.

“아무튼, 원래는 자료 조사하러 온 건데……”

여기서 뮤를 마주칠 줄은 몰랐다. 복장도 평소랑은 좀 다른 분위기고. 심지어는 표정도. 전체적으로 예전의 뮤를 생각나게 하는 그런 게 있었다. 덤으로 책까지 들고 있으니 더욱 물씬 향수가 피어난다.

'무슨 생각 하는 거람.'

괜히 여가 시간을 방해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지만, 기왕 얘기를 해야 한다면 지금 하는 편이 좋을 듯했다.

“혹시 시간 돼?”

에지오는 손가락으로 뒤를 가리키며 말했다.

“……시간? 왜?”

“잠깐 얘기 좀 할까 해서.”

“……”

뮤의 몸이 일순 딱딱하게 굳었다.

네 쪽에서 준비가 되면 언제든 말해달라 했던 사람은 에지오였다. 그걸 에지오도 알고 있었다.

당연히, 저번처럼 무턱대고 붙잡아 얘기하자고 할 건 아니었다. 갈 곳 잃은 뮤의 눈동자를 흘겨보던 에지오가 덧붙였다.

“너한테 물어볼 건 없으니 안심해. 대신 말해주고 싶은 게 있어. 중요한 거야. 책 읽는데 방해해서 미안. 하지만 가급적 빨리 말해주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서.”

“……”

“어떻게, 돼? 안 된다면 나중에 해도 괜찮아.”

물어볼 게 없다는 건 무슨 말일까. 뮤가 걱정하는 부분은 아직 말해주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까.

설사 그렇다고 해도.

“……”

뮤는 잠시 고민하다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대여한 뒤 방에서 읽어도 될 일이다. 무엇보다 피하지 않기로 하지 않았는가. 이 뒤에 무슨 얘기가 오가든, 똑바로 마주볼 용기를 내야 할 차례였다.

“예정 없어. 괜찮아.”

뮤는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가며.

그렇게 말했다.

#5

사람 많은 장소에서 할 만한 얘기는 아니라 생각했던 까닭에, 언제나처럼 3동 카페에서 테이크아웃한 음료를 들고 공터로 나섰다.

“내가 계산해도 됐는데……”

“그냥 마셔. 나 돈 많아.”

“……”

거짓말은 아니었지만, 뮤는 긴가민가했다.

뮤와 에지오는 한 벤치에 같이 앉았다.

빨대를 입에 물었던 에지오가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로 고개를 꺾었다. 뮤는 말없이 아이스 버블티를 한잔 마셨다. 시원하고, 맛있었다. 그러면서 옆의 에지오를 힐긋 눈으로 흘겼다. 뮤의 심장이 미약한 긴장감으로 두근거렸다.

해가 중천에 떠 있다가 슬슬 저물고 있었다. 오후 2시에 엘레나를 만나러 갔던 에지오가 기숙사로 복귀한 건 오후 4시가 가까웠을 즈음이다.

그러곤 기숙사에 들러 구석구석에 스며든 냄새를 제거하기 위해 거의 피부가 벗겨지도록 비누칠을 했으나, 체감상으론 아직 부족한 것 같았다. 다른 사람에겐 어떻게 느껴질지 모른다.

“혹시 냄새 나?”

스윽. 에지오가 팔을 옆으로 내밀었다.

주춤한 뮤가 눈을 가만 깜빡였다.

“무슨 냄새?”

“담배 냄새 아직도 나나 맡아봐. 불안하네.”

“……담배 폈었어?”

놀라 물어보는 뮤.

에지오는 냉큼 고개를 저었다.

“아니, 잠깐 엘레나 선배님 만나고 왔는데. 거기서 몸에 좀 심하게 밴 것 같아서. 씻긴 씻었는데 난 잘 모르겠거든.”

하긴.

평생 담배 같은 건 손에 안 댈 것 같긴 했어.

그보다 엘레나 선배님이라니. 그분은 또 언제 만나고 온 걸까. 의문을 담아두고선 뮤가 고개를 살짝 앞으로 내민 채 코를 킁킁거렸다. 조금 부담스럽고 부끄럽긴 한데. 여기서 빼면 더 기분이 묘해질 거다. 하는 수 없이 눈을 감은 채 냄새를 맡아 보았다.

“……조금 난다.”

“어, 정말?”

뮤가 인상을 쓰자, 에지오는 다급히 팔을 뺐다. 그렇게 열심히 씻었는데도 아직 냄새가 날 정도라니.

자기 팔의 냄새를 다시 한번 맡아본다. 아리송한 표정이 떠오른다. 아닌데. 전혀 모르겠는데. 왠지 모를 머쓱함에 곤란해하는 에지오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뮤는, 별안간 작은 웃음기를 담아 말했다.

“농담이야. 하나도 안 나.”

“……너.”

속았구나 싶어 그리 중얼거리지만.

“이것도 농담. 사실 진짜 조금 나.”

“아, 역시……”

루비아한테 마법이라도 써달라고 해야 하나? 이걸 과연 어쩌지 싶어 한숨만 푹 내쉬려던 사이에.

“미안. 거짓말이야. 좋은 냄새밖에 안 나더라.”

“……”

에지오가 할 말을 잃은 표정으로 뮤를 돌아보자, 뮤는 딴청을 피우며 빨대를 입에 물었다. 얄미움을 절로 유발하는 얼굴이었다. 예전의 뮤는 이런 식으로 에지오를 곧잘 놀리곤 했었다.

뮤도 이렇듯 본능에 이끌려 저도 모르게 장난을 치긴 했으나, 돌이켜 보니 조금 의외스러운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조금만 더 주고받기가 이어졌다면 아마 뮤의 입에서 선배란 말이 튀어나왔을지도 몰랐다. 둘 사이에 잠깐의 어색함이 감돌았다.

“…아무튼 아까 엘레나 선배님을 만나고 왔거든.”

먼저 침묵을 깬 건 에지오였다.

“저번에, 그. 토요일 날 있었던 사건 때문에 날 부르셨나봐. 조사할 게 있다는데 막상 별로 한 건 없었고…… 대신 지금 내 상태에 대해 많이 알고 계시는 것 같더라고. 그래서 몇 가지 도움을 나한테 주기로 하셨어.”

“상태라면……”

뮤의 되물음에 에지오는 자기 머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아, 하고 뮤가 입을 다물었다.

“일단 그것도 있는데. 뮤.”

“어?”

“선배님 말로는 네가 현장에 같이 있었다고 했거든. 그건 얘기를 들어서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긴 한데. 들은 것보다 훨씬 가까이에 있었던 것 같더라. 괴물이 된 내 주변에 네가 있었다고.맞아?”

“……”

자세한 내막을 듣는 건 처음이었겠지. 뮤는 무어라 답할지 고민하다가, 결국 사실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에지오가 쓴웃음과 함께 입을 달싹였다.

“위험했을 텐데. 거긴 뭐하러 갔어.”

“……나보다 네가 더 위험했을 거 아냐. 구하러 가지 않을 수가 없었어.”

그 불길한 검은 연기가 건물을 뒤덮기 시작했을 즈음, 누가 말리든 간에 전부 뿌리치고서 달려갔을 것이었다. 실제로 그리 했다. 머릿속에 경종이 울린 순간 뮤는 본능적으로 건물을 향해 검을 뽑고 뛰었다. 결국 에지오를 구한 건 엘레나였음이 분명하겠지만, 뮤가 그 자리에 없었다면 엘레나는 에지오를 죽여 버렸을지도 몰랐다.

“나 때문에 다치거나 하진 않았어?”

“……봐. 멀쩡하잖아?”

“혹시 모르잖아. 어디 한 군데 심하게 다쳤는데 나한테 말 안 하고 있는 건지.”

“절대 그런 거 아냐. 그랬으면 나도 병원에 입원해 있었을걸? 너는 아무도 다치게 하지 않았으니까 안심해.”

“그러면 다행인데……”

엘레나도 뮤와 같은 말을 했다. 에지오로 인한 사상자는 한 명도 없었다는 말. 동일한 얘기를 하는 걸 보니 그게 정말인 듯했다. 에지오는 내심 안도했다. 자신은 그때의 기억을 정말 작은 조각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았으니까.

다만,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은 많다. 괴물이 되었다는 건 정확히 무슨 뜻인지. 이지를 상실한 상태로 날뛰고 폭주했다는 사실만큼은 알겠는데. 그게 전부였다. 엘레나는 더 설명해주지 않았다.

자신 내부에 숨어 있는 무언가가 해방되면 그런 기괴한 모습이 되어버린단 것을 제외하곤,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상태였다.

나중에라도 다시 만날 기회가 생긴다면. 기억을 전부 회복하고,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게 된다면. 그때는 답을 얻을 수 있게 될까. 속으로 생각을 정리하던 에지오가 문득 입을 열었다.

“아카샤의 별, 알지?”

모를 수야 없다. 뮤가 짧게 반문했다.

“……응. 거긴 왜?”

“거기 제3마탑주인 테트라 크로울리란 분께서 아마 내 기억을 되찾는 데 도움을 주실 모양이야. 사실 아직 확정된 건 아니긴 한데, 엘레나 선배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으니 신뢰할 만한 정보 아닐까?”

적어도 에지오가 생각하기론 그랬다.

“그러니까, 이제 괜찮아.”

어느새 말이 없어진 뮤를 돌아보지 않은 채, 에지오는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억지로 나한테 얘기해줄 필요도 없어. 이제부턴 내가 알아서 할게. 너와 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난 아직도 모르겠지만…… 우리가 헤어진 이유도, 아마 거기에 있겠지. 곧 그걸 알게 되면 네 문제와 나의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

“……뮤?”

더 이상 흔들리지 않기로 결심했었는데.

막상 닥쳐오기 시작한 거대한 흐름에, 뮤의 마음은 불안하도록 거칠게 일렁이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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