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화 〉 조각 (4)
* * *
#7
공터를 걷다가 우연히 발견한 친구들의 모습.단지 그뿐이었다. 혹시라도 마주치면 인사라도 하면 되었을 일이다.
그러나 루비아는 걸릴 게 있다는 듯 숨을 곳을 찾았다. 정원의 수풀 뒤로 몸을 숨겼다. 순간적으로 휘청거릴 만큼 거하게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이상해.’
평소보다 조금 심각하도록 크게 고동치는 심장. 루비아의 인상이 찡그려졌다.
싫어하는 음식을 억지로 먹었을 때처럼. 전혀 달지 않고 쓰디쓴 과자를 한입 베어물었을 때처럼. 뱀이 휘감듯 가슴이 옥죄이고 목구멍이 텁텁해지면서, 문득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지는 기이한 감각.아마도, 현실을 부정하기 위함이라. 이 기분의 정의를 무어라 하면 좋을지 루비아는 알지 못했다.
이런 기분이 닥쳐올 때면 언제나 그랬듯.
엄지 손톱을 조용히 깨물었다.
화목한 분위기. 정겨운 분위기. 차가움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루비아의 피는 싸늘하게 식은 채였다.
저 자리에서 웃고 있는 건 루비아가 아니라 뮤였다. 유리나 스텔라였다면, 달랐을지도 모른다. 이렇게까지 아프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다만 현실은 바로 저기에 있었다.
뮤.
에지오의 전 여자친구.
이미 깨진 관계였을 텐데, 어째서 그렇게 서로를 대할 수 있는 거야?
저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던 걸까. 분명, 분명. 그렇게 좋아 보이지는 않았었는데. 어느새?
‘……’
—글쎄, 쥬드 그 새끼가. 저번 주말에 나한테는 말 한마디 없이 지 친구랑 상점가에서 놀다왔다는 거야.
갑자기 이 기억이 왜 떠오르는 건진 모르겠지만.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같은 마법부 학생이었던 데이지가 당시 남자친구였던 사람의 얘기를 하는 걸 들은 적이 있었다.
—여자?
—당연한 걸 묻냐? 안 그랬으면 빡치지도 않았겠지.
—말은 왜 안 했대?
—지도 찔리니까 몰래 간 거지. 걸린 경위도 어이없어. 세릴다가 지나가다 보고서 나한테 말해줬다니까? 아니라고 잡아뗄 줄 알았는데 막상 들키니까 대가리 먼저 박는 것도 어이없고. 아, 짜증나.
덥다는 듯 손으로 연신 부채질을 하던 데이지에게 루비아는 슬쩍 물었었다.
—저기, 데이지.
—으응?
—상점가에서 같이 논 게 문제가 되는 거야……?
친구들끼리 놀 수도 있는 거 아닐까. 루비아는 그런 관점에서 조심스레 접근했으나.
—뭐어? 당연하지. 걔들이 나 없는 데서 뭘 하고 자빠졌을지 내가 어떻게 알아? 딱히 확인할 방법도 없고. 지들끼리 손발 맞춘 담에 거짓말로 대충 꾸며주면 나만 병신 되는 건데.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던 데이지의 말에 루비아는 그런 건가, 하는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야, 걔 이름이 뭐랬지?
—누구? 쥬드한테 꼬리친 애?
—어.
—클라라 세르핀. 통합학부 3학년 5반. 왜?
—아냐, 잠깐 확인할 게 있어서.
—뭘 확인해?
—아냐, 좀 있다 알려줄게.
—뭐길래……
—그, 데이지.
—응? 너는 또 왜.
—둘이 같이 논 게 문제가 되는 거라면…… 말을 안 하고 놀러간 것도 문제가 되는 거야?
데이지는 당시 할 말을 잃었던 듯 보였다.
—……좋아, 루비아. 네가 굉장히 퓨어한 애라는 건 나도 알고 있는데. 그거랑 이거랑은 좀 다른 문제라고 생각해.
—으, 응.
—내가 걔 여자친구잖아. 클라라 그년이 아니라.
—그렇지……?
—근데 내가 아니라 클라라 걔를 더 우선시했다는 게 말이 돼? 연인 사이에 있어서는 신뢰가 굉장히 중요한 거야. 쥬드는 그걸 먼저 깨뜨린 거고.
—……
—쥬드 본인보다 내가 우선순위에 올라갈 순 없다고 해도, 그 다음은 반드시 내가 되어야 해. 주변 여자들 중에선 내가 1순위가 되어야 한다고. 그게 안 된다면 그 순간부터 나는 걔 여자친구가 아니게 되는 거야.
—……
—말을 안 했다는 게 문제가 되는 이유는 그거지. 자기 여자친구인 나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조차 안 한 거니까. 어차피 물어봤어도 허락 안 해줬겠지만, 미리 말을 한 거랑 안 한 거랑은 하늘과 땅 차이야. 방금 말했던 신뢰가 흔들릴 수 있는 중요한 문제란 말야.
데이지는 아주 중요한 설교를 하듯, 루비아의 앞에 손가락까지 반듯하게 세워가며 열변을 토했다.
—그리고, 루비아 너는 여자인 친구랑 남자인 친구가 왜 같이 놀면 안 되냐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어. 에지오 크라닐인가? 맞지? 통합학부. 걔랑 어렸을 때부터 거리낌 없이 같이 놀았다며? 그것도 그거인데, 아무튼. 이성 친구끼리 같이 노는 거 자체는 문제가 안 되지. 서로한테 여자친구나 남자친구가 없다면, 말야.
누군가와 연애를 하기 위한 과정이 경쟁과 공성의 과정이라면, 연애를 시작한 뒤로는 수성의 과정이다. 기꺼이 꽂은 깃발이 뽑히거나 부러지지 않도록. 유지보수가 잘 되지 않아 성벽이 낡아 허물어지지 않도록. 관계를 온전히 지켜내는 것이 쟁점이다.
—루비아. 이건 본능이야. 내가 가진 걸 남에게 빼앗기기 싫어하는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본능이라고. 신경 쓰인단 말야. 누가 내 간식 몰래 처먹는 것도 기분 나쁜데, 이미 여친도 있는 남자한테 누가 꼬리치면 기분이 좋을 것 같아? 심지어 지도 이미 알고 있었을 거잖아. 쥬드한테 여친 있는 거. 알면서도 그랬다는 게 더 화나는 거지.
일평생 질투라는 감정에 한번도 이입해 본 적이 없었던 루비아는, 막연한 상상을 하다가 결국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자기 물건을 누군가 홱 빼앗아 간다면 분명 기분이 나쁠 수야 있겠지만. 사람은 물건이 아니잖는가. 여전히 아리송한 느낌이었다.
—그, 그렇구나……
—듣고 보니 클라라 그년이 먼저 놀자고 했다는데. 진짜 나랑 뭐 하자는 건지. 그래서 오늘 본관 찾아가려다가 말았잖아.
화를 삭이던 데이지가 문득 말을 이었다.
—자, 루비아. 잘 생각해봐.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그래, 말 나온 김에 물어보자. 지금 좋아하는 사람 있어?
—어, 어?
—야, 그렇게 물어보면 퍽이나 알려주겠다.
—있어봐. 루비아 얘, 워낙 표정에 잘 드러나니까 얻어걸릴 수도 있잖아. 혹시 졸업했던 슈리엘 선배? 그 선배 너 되게 잘 챙겨줬잖아. 응?
—아, 아냐. 슈리엘 선배는 그냥……
—에이. 아니긴. 그렇게 잘 챙겨주면 안 끌릴 수가 없을 것 같은…… 뭐야, 진짠가 보네? 그냥 선배야? 진짜 그냥 선배?
—그, 그렇다니까……?
—말도 안 돼…… 그럼 지금 아무도 좋아하는 사람 없어?
—아마도……?
—아마도는 뭐야, 아마도는. ……그러고 보니까 3년 동안 남친 한 명 없었네, 루비아 너. 천재 모범생은 달라도 뭐가 다른가? 이해할 수가 없어 진짜.
—아, 아하하……
좋아하는 사람이 있냐는 돌발질문에, 자신은 그때 누구를 떠올렸더라.
한 가지 확언할 수 있는 건, 분명 데이지의 말을 따라 누군가의 얼굴을 자연히 상상했다는 사실이었다.
결국 몰입 대상이 없으면 심도 깊은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대충 질문을 넘긴 데이지에게 불현듯 퓨카가 말했었다.
—근데, 그. 데이지. 나 이거 말해도 되나?
—뭔데?
—내가 걔랑 같은 초등부 나와서 아는데. 쥬드랑 클라라 걔, 6학년 때 잠깐 사귀었다가 깨진 걸로 기억하거든. 얘기 듣다 보니까 넌 모르고 있는 거 같아서. 아니면 알고 있었어?
—……
—데이지?
—……쥬드 이 새끼 지금 어딨어?
어린애들의 연애가 무슨 연애겠냐만은, 상황에 따라 매우 민감한 문제가 될 수도 있는 법이었다.
그 뒤로 데이지와 쥬드의 이야기가 어찌 되었는지는, 그닥 좋은 결말이 될 것 같지도 않았다가 결국 오해를 풀고서 해피 엔딩을 맞이했던 것으로 공공연히 알려져 있었다.
참, 사람 일은 알다가도 몰랐다.
“……”
여하튼,단순히 그런 이야기였다. 수업 중간 쉬는 시간에 벌어졌던 짧은 대화였다. 이런 순간에 왜 데이지의 이야기가 떠올랐던 것이었을까. 루비아는 자세한 이유까진 알 수 없었다.
자신이 모르는 사이 이성친구가 곁에 있었단 이유로 데이지가 화났던 건, 쥬드가 자신의 남자친구였기 때문일 것이다.
소중한 연인.
평범한 친구 관계가 아니라, 어쩌면 미래의 동반자이자 배우자로서 발전할 가능성이 있는. 루비아의 부모님과 같이 행복한 가정을 꾸릴지도 모르는. 그 첫 단계의 아주 친밀한 사이.
에지오는 자신의 남자친구가 아니었다.
그런데 왜, 중등부 친구들에게서 들었던 일이 자신에게도 똑같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남자는 괜찮았다. 가브리엘인가? 그 친구가 에지오와 같이 다니는 모습을 정말 많이 봤다. 나도 저렇게 친하게 지내고 싶단 생각은 좀 했지만, 그뿐이었다. 이렇게 아프진 않았다.
반면——
유리, 스텔라, 그리고 뮤.
어쩌면, 아이리스도.
자신의 친구들이라 할 수 있는 유리와 스텔라를 포함해서, 지금 저 벤치에 같이 앉아 있는 뮤까지.
명백한 이성친구들이 에지오의 곁에 있는 모습을 보거나, 정답게 장난을 친다거나. 자기가 모르는 곳에서. 예전 같았으면 본인이 자리했어야 할 그곳에서. 도대체 어떤 얘기를 나누고 어떤 교류를 하고 있을지 무척이나 신경 쓰였다.
그러니까, 이건 잘못된 감정이다.
한시라도 빨리 없애버려야만 했다.
에지오는 자신의 것도 아니고. 지금은 누구의 소유도 아니었다. 그러니 질투라는 걸 해선 안 된다. 에지오와 다시 친해지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에서, 남들이 먼저 에지오와 친해지는 모습을 보고 부러워하는 것과 매한가지였다. 루비아는 단지 그렇게 생각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그리고……
—지금 그 말은…… 너무 늦었어, 루비아.
정말로, 이미 늦어버렸다는 걸.
이제서야 깨닫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
—……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이전보단 한층 작아진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는 에지오와 뮤의 뒷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며.
“…읏.”
살짝 아린 가슴을 부여잡고, 루비아가 등을 돌렸던 찰나였다.
“여기서 뭐하고 있지?”
“꺅—!”
떡하니 등장한 아이리스의 앞에서, 루비아는 놀라 자빠져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비명?
—……
그와 동시에, 저편에 있던 에지오와 뮤도 루비아 쪽을 돌아보았다.얼떨결에 에지오와 눈이 마주친 루비아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