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차버린 소꿉친구와 전 여친이 같은 반이라 곤란하다-86화 (86/201)

〈 86화 〉 조각 (5)

* * *

#8

“괜찮은가?”

“아야야……”

미처 잡아줄 새도 없이 성대하게 넘어져 버렸다.

그런 루비아에 반해 아이리스는 주춤거리지도 않았다. 놀라움이라고 해봐야 살짝 눈을 크게 뜬 정도. 손을 잡아주지 못한 것에 작은 미안함을 느끼면서 아이리스가 루비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고마워…”

이게 무슨 추태인지. 에지오가 아직도 이쪽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속마음이 어떨진 모르지만, 왠지 엿보던 걸 들켰다는 생각에 한시라도 빨리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죽을 만큼 부끄러웠다. 반면 아이리스는 너무나도 차분한 얼굴이라, 혼란함은 배가 되었다.

루비아는 일단 아이리스의 손을 잡고 일어나서 치마 부근에 묻은 흙먼지를 털었다. 당연하지만 완전하게 깨끗해질 리가 없다. 간단한 마력 조작으로 먼지를 씻어내고, 멀뚱멀뚱히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리스를 향해 쉿, 하고 검지를 들어 보였다.

“그래서, 여기서 무엇을……”

“이, 일단 저기로 가자. 가서 얘기해줄게.”

“그렇게 중요한 얘기인가?”

“아냐. 아닌데, 일단. 일단 가자……”

루비아는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운 아이리스의 어깨를 잡아 돌린 뒤, 쭉 밀듯이 앞으로 걸어갔다.

아이리스가 굳은 심지처럼 땅바닥에 발을 박아넣는다면 루비아의 약소한 힘으론 택도 없겠으나, 아이리스는 순순히 밀려주었다. 그냥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았다.

#9

질질질.

땅바닥에 길쭉한 선을 그으며 자리를 피하는 그들을 바라보던 에지오가, 흐음 하는 소리와 함께 시선을 거두었다.

공터 구조물 뒤에서 잡은 기이한 포지션이라든지. 눈이 마주쳤을 때 화들짝 놀란 기색이라든지. 어쩐지 저기 은밀하게 숨어 여길 엿보고 있었단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역시, 없었던 일로 하긴 좀 그렇나.’

아직 말을 먼저 걸기가 불편한 건가.

그냥 그런 생각이었다.

저럴 필요 없이 가볍게 인사라도 건네줬으면 되었을 텐데. 아니면 뮤랑 얘기를 하던 도중이라 그랬을 수도 있다. 루비아가 오만 가지 부끄러운 미래를 떠올리고 있던 것과 달리, 에지오는 딱히 별생각 없었다.

그런 것보다도.

일단은, 뮤와 대화를 끝마쳐야 했으니까.

“……아무튼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그거야. 기억은 곧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자그마치 대마법사나 되시는 분께서 날 도와주신다는데, 뭐. 최소한 실마리는 찾을 수 있겠지.”

에지오는 뚜껑에 꽂힌 빨대를 빙빙 돌렸다. 한동안 의미 없이 젓다가 다시금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너한테는 상당히 조심스러운 얘기일진 모르겠지만, 네 상태가…… 그렇게 많이 좋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으니까. 널 위해서도 빨리 찾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어.”

그러자, 뮤의 어깨가 아주 약간 움찔거리는 모습을 보았다. 언급만 나오면 자연적으로 몸을 움츠리게 될 정도인가. 무엇이 뮤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입맛이 쓰다. 에지오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수그린 뮤를 향해 몇 마디를 덧붙였다.

“우리가 마냥 편하게 대할 수 없는 사이라는 걸 알고는 있긴 한데, 난 너랑 계속 이렇게 지내고 싶진 않거든. ……전에 네가 말했었지. 널 상냥하게 대해주지 말라고.”

무심코 쓴웃음이 지어졌다.

“네가 나한테 해준 걸 생각하면, 그게 될 리가 없어. 그 말은 못 지킬 것 같아. 미안해.”

“……”

에지오가 뮤에게 가지는 감정이란, 지금으로선 고마움이 태반이었다. 뮤가 없었다면 지금의 자신도 없었을 거다. 아마 더 일찍 자퇴하지 않았을까.

한편 뮤가 곁에 있었음에도 결국 자퇴를 해버린 건에 대해선,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지만. 분명 가까운 시일 내에 해답을 찾을 수 있겠지. 그렇게 되면 일은 순조롭게 풀릴… 수야 없더라도, 어떻게든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대로 기억을 되찾아 버리는 게 정말 뮤를 위한 길이 맞는 건지는, 에지오의 입장에선 명료히 알지 못했다.

확실히, 에지오가 무너져 버린 그 순간의 일들을 전부 떠올리게 된다면, 뮤는 구태여 진실을 제 입으로 말해줄 필요가 없었다. 무엇보다, 매우 어렵고 험난할지 모르겠지만. 본래 상태로 돌아간 에지오로부터 거짓 아닌 용서를 받을 수 있었다.

모르겠다. 지금 뮤 본인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 건지, 아무것도 모르게 되어 버렸다.

……폭풍 전날의 고요함에 잠긴 듯, 적잖게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컵을 감싸고 있는 손바닥에 식은땀이 맺혔다.

어제 날 보며 부드럽게 웃어주었던 사람이, 다음날 싸늘한 얼굴로 철저히 자길 무시해버릴 생각을 하면, 얼굴근육이 미세하게 파들파들 떨려왔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머릿속이 공허한 것처럼 새하얗게 변해버릴 것만 같았다.

분명 그런 미래를 맞이해도 굳건히 버텨내고자 결심했었는데. 전혀 다른 방식으로 찾아온 위기가 예상지도 못한 곳에서 타격을 주고 있었다. 에지오가 테트라 크로울리를 만나기까지의 한 달 동안, 뮤는 하루하루 피말리는 기분 속에서 살아야 할지도 몰랐다.

결국, 지금 에지오가 무슨 말을 약속하든.

그건—— 영원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에.

꾸욱. 컵의 옆면이 작게 우그러졌다.

“……미안, 해야 하는 건…”

“나라고 말하려고?”

“……”

“내가 말했잖아. 괜찮을 거야. 아무 일도 없어.”

잃어버린 기억과 연관된 키워드가 나오자 뮤의 상태가 차츰 이상해짐에 따라, 에지오는 뮤를 어르고 달래며 안심시키듯 그리 말해주었다. 바짓자락을 쥐어잡으며 입술을 깨물기 시작하던 뮤의 손을, 살포시 잡아 주었다.

우리가 이래도 될 사이는 아니다 싶긴 한데. 이렇게 하면, 뮤의 떨림은 거짓말처럼 사그라든다.

“괜찮아. 넌 아무 잘못 없어, 뮤.”

아는 것 하나 없으나, 마치 그게 유일한 정답인 것처럼. 장담하는 채 말한다.

“……”

“이제 그만 자책해도 돼. 나는 네가 이렇게까지 트라우마를 가져야 할 이유를 솔직히 모르겠거든. 이만하면 되지 않았을까 싶어. 봐, 난 지금 멀쩡하고. 네 옆에서 네 손을 잡아주고 있잖아. 네가 걱정하고 있는 게 뭔진 알 수 없지만, 지금만큼은 괜찮아.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긴다고 해도, 그땐 내가 어떻게 잘 해볼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야. 난…”

“쉽지 않아도 어쩌겠어. 해봐야지. 안 되는 걸 알아도, 반드시 해야 할 때가 있었어. 난 계속 그렇게 살아왔고. 너도 알잖아.”

엘레나가 말했었다. 고통스러운 기억을 되찾는 건 썩 달가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말하는 걸 보면, 어느 정도 본인의 상태에 대해 알고서 말하는 것이었겠지.

분명 좋은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망가진 인격­ 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엉망진창이었던 내면이 돌아오는 셈이다. 기억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과는 별개로, 에지오는 언젠가 찾아올 변화에 아주 작은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 작은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 정도야.

수백 수천 번 절망의 벽 앞에 가로막혔던 에지오에겐, 어렵지만 해볼 만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너는, 정말 바뀐 게 없구나.’

그런 에지오를 좋아했었던 뮤인 만큼.

반드시, 어떻게든. 기억을 전부 되찾은 뒤 한 차례 망가졌던 자기와의 관계를 잘 풀어 보이겠단 말에.

문득 이대로 에지오를 전적으로 믿고 기대고 싶단 마음이 들어 버려서, 그런 자신에게 짙은 혐오감을 느끼고 말았다.

무엇보다.

에지오가 잡아준 손이 너무 따뜻해서.

정말로, 만에 하나 에지오가 그 거짓말 같은 말을 실현시켜, 서로 웃으며 대화할 수 있는 사이가 될 수 있다고 해도.

그걸로, 만족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자신도 몰랐으니까.

아예 남처럼 지낸다면 몰라도.

어줍잖게 친한 친구로 지내며, 이따금 다신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의 추억을 그립도록 회상하는 관계가 되어버린다면.

——결국 자신은 선택받을 수 없고.

그의 가까운 곁에 있었던 다른 소중한 인연이, 먼 옛날 자신의 자리를 대체하게 된다면. 그리고­ 자신은 그 다정한 모습을 멀리서 지켜볼 수밖에 없는 입장에 놓여버린다면.

그거야말로, 가장 힘든 미래가 될 것 같아서.

‘……이젠 절대, 옛날로 돌아갈 순 없겠구나.’

뮤는 조용히, 남몰래 후회하고 말았다.

#10

팔락, 팔락.

뮤에게 할 얘기도 다 했겠다. 일주일의 마지막 밤, 에지오는 자신의 기숙사 방에서 책을 펼치고 무언가를 복기하는 중이었다.

‘일단 자기 거만 찾는 게 먼저였으니까……’

그리 생각하며 펜을 빙빙 돌렸다.

「세피로트와 십천(??)」페이지를 촤르륵 넘기고, 그 아래로 늘어진 수십 개의 목차 항목에서 「고유 마력이란 무엇인가?」이란 곳의 페이지를 펼쳤다.

「……갖가지 모습으로 단련된 마력 회로의 형태는 분명 개체별 차이를 지니나, 그것을 ‘고유 마력’의 핵심이라 보기는 어렵다. (중략) ……근본적인 차이점은 각각의 마력에 담긴 고유한 성질에서부터 빚어진다. 그것은 인간의 영()이 탄생함과 동시에 부여받는 혼(?)의 일부이다. (중략) ……이러한 발견은 대륙력 482년 제1차 인마대전이 발발함에 따라 등장한 십천(??)들에 의해 최초로……」

“……보기만 해도 어지럽네.”

몸이 좀 피로해서 그런가. 빽빽하게 들어찬 글씨를 보자마자 현기증이 밀려왔다. 교양 수업에서 이미 한번 배운 적이 있던 역사라, 대충 짚고 넘어가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중요한 건 지금부터였다. 에지오는 안력을 집중한 채 책을 들여다보았다.

고유 마력의 색깔. 에지오 자신의 것은 백색이었다. 그것에 대한 정보를 찾아야 했다.

팔락, 팔락.

차츰 넘겨간 페이지에는.

「갈색(?色) 계열」

일전에 보았던 알프리스의 것도 있었고.

「황색(?色) 계열」

레니의 것을 포함하여.

「남색(?色) 계열」

헥토르의 것으로 보이는 색깔을 지나쳐.

「백색(白色) 계열」

“……왜 이렇게 끝에 있어?”

결국 마지막의 마지막 장에 도달해서야, 딸랑 한 페이지에 간소히 적혀 있는 백색 마력에 대한 정보를 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라.”

에지오는 잠깐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백색(白色) 계열」

­ 제1차 인마대전을 인간의 승리로 이끈 십천 중 일천(一?), 시아인 케테르가 ‘천상의 검’으로 북쪽 마계 대륙을 이등분할 때 백색의 마력이 방출된 것을 시초로 한다.

­ 모든 원소와 속성에 적합성을 보인다.

­ 그 외, 기록된 정보는 극히 적다.

­ 본 서적이 발간된 대륙력 872년 기준, 대표적으로 알려진 백색의 소유자는 대마법사 테트라 크로울리다(정확하지 않을 수 있음).

눈코 뜨고 찾아봐도.

백색 마력에 대한 정보가 너무 적었다.

“……”

에지오는 잠시 고개를 위로 꺾었다.

...이러면, 과제에 뭐라고 제출해야 하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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