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차버린 소꿉친구와 전 여친이 같은 반이라 곤란하다-87화 (87/201)

〈 87화 〉 변화 (1)

* * *

#1

“알아낸 게 별로 없다고?”

월요일 저녁.

일전에 약속한 대로 한 자리에 다시 모인 「마나통제학 I」조별과제 조원들. 지난 주말을 포함한 시간 동안 각자 모은 정보들을 한데 모아 취합하는 도중, 면목 없다는 듯 머쓱하며 최대한 열심히 작성한 문서를 내미니 알프리스가 날 보며 그리 말했다.

“미안하다. 백색은 진짜 뭐 없더라고.”

“네가 설렁설렁할 사람이 아니란 건 나도 아는데……”

알프리스가 턱을 쓰다듬었다.

“이걸로 뭘 쓸 수나 있을진 모르겠다, 나도.”

레니와 알프리스, 그리고 맞은편 의자에서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있는 헥토르까지. 전부 두께가 꽤 그럴싸하다. 저것들을 한 논문으로 합친다면 세미나를 따로 열어야 할 정도의 분량이 되겠지만,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거다. 삐뚤빼뚤한 가지를 쳐내고 중요한 것들만 간추려야 한다.

개중에 나만 꼴랑 세 페이지였다. 어떻게든 다른 책들까지 되는 대로 뒤져가며 관련 정보들을 싹 다 욱여넣긴 했는데, 결국 뭔가 엉성한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억지로 분량을 늘이기라도 한 것처럼. 알프리스가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해는 간다.

“이거 봐. 진짜 뭐 없다니까?”

그럴 줄 알고 내가 참고했던 책들을 가져왔다.

딱히 날 의심하는 기색은 아니었으나, 정보를 찾지 못한 데엔 무슨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하는지. 호기심 짙은 기색으로 조원들이 내가 펼친 책의 페이지를 들여다보았다. 헥토르는 빼고.

“……정말이네. 설명은 페이지 하나가 끝이라니. 게다가 이 책, 비교적 최근에 나온 신간이잖아. 다른 책들도 이거랑 똑같아?”

“그렇대도.”

“백색에 대한 얘기는 사실 저도 들어본 적이 없어서, 시간 남을 때 찾아보긴 했는데…… 저만 못 찾은 게 아니었네요.”

레니가 그리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지. 그럼 우리가 조사한 것만이라도 일단 풀어보자. 당장 제출 마감 기한이 사흘 뒤니까, 가능하면 여기서 1번 과제는 마무리 지어야 해.”

알프리스가 정갈히 정돈한 문서를 탁자 위에 두어 번 두드렸다.

연구 논문 담당인 만큼 이 자리에서 끝을 맺지 못하면 적잖은 차질이 빚어질 게 분명했다. 정보가 없으니 어쩔 수 없다곤 해도,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는 정보를 찾지 못한 나의 불찰이라면, 면목이 없었다. 목요일에 있을 발표 준비라도 더 열심히 하는 수밖에.

“나는 갈색 계열이야. 공통적으로 마법에 능통하며, 그중에서도 대지 계열 마법에 적성이 높다고들 하더라고. 시조는 십천 중 삼천(三?), 아키엘 비나. 이 사람이 인간의 마법 수준을 한 세기 위로 올려버린 마법의 어머니 같은 인물이라는데…… 왜 난 들어본 적이 없지?”

그 뒤로 쭉 갈색 계열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간략한 설명을 마친 알프리스가 앞을 돌아보았다. 레니가 다음 차례를 준비하고 있었다. 타이밍을 엿보던 레니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는 황색 계열이에요. 먼 옛날에 마룡을 격살한 팔천(??), 로바트 호드란 분이 시조이시고…… 몸을 쓰는 일, 체술 등에 뛰어난 자질을 보이고…… 화, 화염 계열에 적성이 높대요. 살면서 마법은 제대로 배워본 적도 없는데, 이게 진짜일까요?”

“꼭 마법에만 속성 계열이 들어가는 건 아니지. 검사나 기사 중에서도 속성 마법을 쓸 줄 아는 사람들이 꽤 많은 걸로 알아. 레니 넌 성실하니까 한번 배워보면 잘할 것 같은데.”

“아, 아녜요. 제 주제에 무슨…… 당장 검 하나 다루는 것도 미숙한걸요. 하나도 제대로 못 하는데 둘 이상을 한꺼번에 하려면 제 몸은 두 개라도 부족할 거예요……”

하기야 그런가.

알프리스와 마찬가지로 동글동글하고 예쁜 글씨체로 직접 작성한 줄글을 또박또박 읽는 걸 보자니, 왠지 모르게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워낙 순박하게 생긴데다가 작은 몸집이라 더 귀여워 보이는 걸지도 모르겠다. 유리도 그렇고, 난 귀여운 게 좋더라. 힐링되는 기분이야.

“왜, 왜 그렇게 보세요?”

“응? 아냐, 계속해.”

레니가 설명하다 말고 날 물끄러미 바라봤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으로 고개를 저어주니, 갸웃하며 시선을 다시 아래로 내린다.

레니의 차례가 넘어가고, 그다음은 헥토르였다.

“……남색 계열. 구천(九?), 하인켈 예소드가 시조라는군. 여기 적힌 대로, 마력 조작과 수(?) 계열에 우수한 재능을 보인다. 이런 조상을 섬긴 적은 없지만 틀린 말도 아닌 듯하군.”

아, 예.

짧은 설명에 그렇지 못한 길이의 문서는, 헥토르가 과제 수행을 허투루 하지 않았단 사실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 뭐. 초면에 해왔던 말이 있어서 그런지 마음에 안 들긴 해도. 아랫것들을 내려다보는 편의 의식과 허영에 찌든 부패한 귀족들보단 차라리 이편이 더 낫다. 이러나저러나 모임엔 꼬박꼬박 출석하고, 과제도 제대로 해오고 있잖는가. 조원으로선 딱히 결함 없는 인물상이었다.

차례가 돌아와서, 결국 내가 말했다.

“난 너희가 말로 해준 설명처럼 짧은 게 전부인데. 뭐라 해줄 말이 없다. 미안. 그래도 잠깐 설명하자면……”

힘껏 쥐고 싸대기를 쳐도 힘없이 나풀거릴 것 같은 두께의 종이를 내밀곤, 조원들에게 보여주며 말을 이었다.

“아까 봤을진 모르겠는데, 일천(一?) 시아인 케테르가 시조라는 모양이야. 대표적인 적성은……”

나 대신 알프리스가 중얼거렸다.

“……모든 원소와 속성에 적성을 보인다, 라. 어떤 속성 계열을 다루는 데엔 비정상적인 마력 감응력이나 조작력이 필요하기도 하니까. 이거 사실상 대마법사의 자질이 충분하다, 란 말과 똑같은 거 아니야? 아니지. 그냥 뭐든 하려면 할 수 있다? 이 정돈 되어야 에픽 클래스 들어가는 건가? 미쳤네.”

“저도 처음 보고서 깜짝 놀랐어요…… 고유 마력이란 게 혼(?)에 부여되는 것이긴 하지만, 대를 거듭할수록 본질이 점점 흐려진다는데 백색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 같아요. 워낙 개체 수도 극히 적었고……”

“그런 것치곤 네 마학적 재능은 잘 쳐봐야 펜테(5)에도 못 미치는 것 같았다만. 에지오 크라닐.”

알프리스와 레니가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고, 헥토르는 매우 아니꼬운 듯한 얼굴로 날 보고 있었다. 그만한 재능을 가지고 있으면서 왜 아직 거기에 머물러 있냐는 듯한 표정인가.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다.

마냥 고깝게 반박할 순 없었다. 그게 사실이었던 까닭이다.

하지만 중등부 시절엔 이런 걸 배운 적도 없고. 내가 새로운 재능을 얻게 된 건 고작 몇 개월 전의 일이다. 이 정도 발전도 매우 빠른 거라고 생각한다. 내 안에 얽힌 비밀을 헥토르에게 말해줄 생각은 물론 없었지만.

“앞으로 알아서 잘 발전하겠지, 뭐.”

“……흐음.”

네 알아서 하라는 듯, 헥토르는 신경을 껐다.

#2

그로부터 두 시간 정도를 회의한 결과.

“좋아. 1번 과제는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아. 이야­ 생각보다 빨리 끝났네. 한 세 시간 정도 잡아먹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논문 작성을 담당한 알프리스가 웃음을 지었다. 일단은 갖고 가서 내일 복사본으로 돌려주겠단 말과 함께 문서들을 가방에 넣었다.

“오늘부터 밤샘해서 쓰는 거야?”

“어…… 아마 그렇지 않을까? 이틀 뒤까진 너한테 줘야 하니까. 발표 준비를 당일 아침에 할 순 없잖아?”

“고생하겠네. 다음엔 밥이라도 사줄게.”

“진짜? 이런 거 거부하는 성격은 아닌데. 2학구에서 제일 비싼 레스토랑 사달라고 해도 되나?”

부자들이라곤 해도 내 돈 쓰고 남의 돈 쓰고는 차이가 있는 법이다. 애초에, 제국에서 황금의 도시라 불릴 만큼 번쩍번쩍한 프론티어에서 제일 비싼 음식점이라고 하면, 제아무리 부유한 귀족들이라고 한들 지갑을 꺼낼 때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지금의 내겐 근거 있는 자신감이 생긴 채였다.

“한 번 정도야 무리는 없지.”

“오케이. 돌아가자마자 바로 작업 들어간다.”

유들유들하게 웃던 알프리스.

나는 그 옆을 돌아보았다.

“레니 너도 괜찮지?”

“네, 네?”

“나중에 같이 먹자고. 밥.”

“저, 저는 도움 된 게 별로 없는데……”

“그런 소리 말고. 같이 수고했단 의미로 한 끼 정돈 괜찮잖아? 올래 말래? 딱 한 번만 물어본다. 다음은 없어.”

“……가, 갈게요!”

그래. 그래야지.

무심코 헥토르 쪽에 눈길을 주었는데, 헥토르는 당연하게도 모임에 참여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무 반응 없이 눈만 감고 있다.

알프리스도 굳이 헥토르에게 얘기를 꺼내진 않았다. 쟤는 조별과제 아니더라도 항상 바쁜 녀석이었으니까. 뭐가 그렇게 할 일이 많은지.

“일단 1번 과제는 끝났고.”

남은 건 하나였다.

2번 과제. 별 완성하기.

“다들 연습은 많이 해왔어?”

나와 헥토르는 걱정이 없다. 첫 단계부터 깔끔히 성공했으니까. 반면 알프리스는 아주 조금 더 노력이 필요했고, 레니는…… 지금 보는 것처럼 면목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게…… 죄, 죄송해요…… 연습은 많이 해보긴 했는데…… 역시 안 되나 봐요……”

하루아침에 갑자기 마력 조작에 눈을 뜰 수는 없는 노릇이지. 열심히 노력했단 흔적만 잘 보인다면 교수님도 일부 참작해주실지 몰랐다. 괜찮다는 의미로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괜찮아. 할 수 있는 데까진 해보자. 시트지 가져왔으니까, 개인별로 몇 번 그어 보다가 해산할 때쯤 합쳐보자. 오늘 안 되면 내일이나 이틀 뒤에 모여서……”

“안 돼. 그때 전부 선약이 있다.”

“……아, 그래? 그럼 오늘까지 해야겠네.”

드럽게 바쁜 녀석 같으니. 정 안 되면 과제 제출 당일 아침에 모여서 부랴부랴 만드는 것도 방법의 일환이다. 우선 오늘 해산 전까지 모든 과제를 완성하는 게 최우선 목표였다.

내 가방에서 꺼낸 시트지를 조원들에게 나눠주고, 내 분량의 시트지를 테이블 위에 펼쳐 살펴보던 찰나에.

백색이야 그렇다 치고.

남은 한 자리가 눈에 걸렸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다. 유스필 데리아, 그 뒤로 어디에서도 안 보였고. 따로 앙심을 품고선 내게 해코지를 해오지도 않았고. 그냥 이대로 자긴 조별과제나 점수에서 완전히 손을 뗄 생각인 걸까.

유스필은 원활한 과제 수행을 망치려던 주범이었으니 퇴출하는 게 맞다고 생각은 한다.딱히 선택을 후회한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단지, 유스필이 참여하지 않음으로 인해 2번 과제 평가에 뭔가 감점이 들어가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잠깐 들었을 뿐이었다.

“나 아래층 갔다 올게. 음식 나온 거 같다.”

“어, 그래.”

그러다가 시간이 흘러 조원들도 허기가 졌음에 따라, 각자 하나씩 먹을 걸 시켰었다. 아래층에서 날 부르는 것 같자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리 말했다.

가는 김에 다 마신 컵들을 트레이 위에 담아 선반 위에 올려놓았다.

걸을 때마다 조금씩 꽂히는 시선들을 무시하며 계단을 타고 1층으로 천천히 내려갔다.

“53번 님­ 주문하신 허니 치즈 케이크 나왔습니다­.”

아마 레니의 것이다. 저것 말고도 시킨 게 있었다. 트레이 위에 올려진 접시들을 보고선 그쪽으로 다가갔다. 그렇게 주문했던 음식을 받으러 가서,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감사합니다­. 좋은 시간 되세……?”

뭐야.

……뭔데?

“……유스필?”

“……아.”

카페 직원 유니폼 앞치마를 두른 유스필이, 내 앞에서 해맑게 웃다가 그 상태 그대로 돌처럼 딱딱히 굳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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