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차버린 소꿉친구와 전 여친이 같은 반이라 곤란하다-88화 (88/201)

〈 88화 〉 변화 (2)

* * *

#3

“음식, 나왔습니다.”

직원으로서의 노련함을 보자면, 유스필은 매우 능숙한 편에 속했다. 프로 정신과 의식이 탁월한 사람이다. 직감적으로 그리 느꼈다.

아주 짧은 순간 표정을 와락 구겼다가 다시 원상태로 돌아오는 게, 마치 하나의 묘기를 보는 것 같았다.

……아니 근데.

네가 왜 여기서 나와?

직원 유니폼을 두르고 해맑게 웃고 있던 영업용 미소. 누가 봐도 이 카페에서 일하는 사람의 것이다.

아르바이트…… 하는 건가?

아까는 안 보였다. 저녁 타임이라 교대한 걸지도 모르겠다. 여튼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은 유스필 데리아가 맞다. 날 보자마자 황급히 표정을 고친 걸 보면 확실하다.

그러나, 일전에 양아치 같던 때와는 너무 인상이 달라서, 하마터면 몰라볼 뻔했다.

삐죽삐죽하던 머리도 좀 차분하게 정리해서 시원하게 틀어올린 상태였고. 살짝 누그러진 분위기의 소녀가 되었다고 해야 할지. 저 입에서 걸쭉한 욕설이 심심하면 나왔다는 게 조금 매치가 되지 않는다.

“53번 손님? 주문하신 음. 식. 나왔습니다?”

잠깐 당황한 나머지 물끄러미 자기 얼굴만 쳐다보는 날 향해 이마의 핏줄을 선명히 돋군다. 빨리 갖고 꺼지라는 것 같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르바이트?”

“……”

보면 모르겠냐, 하는 성난 목소리가 유스필의 내면으로부터 들려오는 듯하다.

아르바이트라. 이상한 건 아니다. 학생의 신분으로 돈이 필요하다면 그럴 수 있지.

장학금 없이 대출로 입학 비용을 충당했다거나, 생활비 혹은 유흥비가 필요하다거나­ 사람에 따라 여러 사정이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유스필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이유까진 자세히 알 수 없었다. 남의 사정에 깊숙이 관여할 이유도 없었고.

단지, 그런 생각을 했다.

어엿한 손님인 나한테 말하는 폼새나. 단정한 몸가짐이나. 신입 직원 같진 않아 보였다. 그렇다면 여기서 일한 지 꽤 되었다는 말일 터. 유스필은 신입생이고, 입학한 지 겨우 한 달도 되지 않았을 거다.

그런데도 유스필은 이곳에서 직원 일을 능숙히 해내고 있었다. 추측하건대, 프론티어에 입학할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거다.

저번에도 레이린을 보면서 생각했던 거지만 나는 그런 게 있다. 무언가에 대단히 열심이고, 꾸준한 사람을 보면 괜히 존경스러워지고 그런 게 있다고.

다만 유스필은 제대로 공부할 의지가 전혀 없어 보였다. 그러니 학생의 본분 외적으로 열심이다.

거기엔 또 어떤 사정이 얽혀 있을지 내 입장에선 아무것도 모르나, 결과적으로 우리 조에게 피해를 입힌 건 사실이다. 그렇기에, 그녀를 마음속으로 높이 평가한다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수고하네. 열심히 해.”

가볍게 툭 던졌다. 쓸데없는 사족이다. 뭐, 수고하고 있는 건 맞았으니까. 손님 응대라는 게 쉬운 일은 아니거든.

시큰둥한 말과 함께 트레이를 잡으려던 찰나.

내 말에서 풍기는 분위기를 읽었는지 모르겠지만. 처음 날 마주하고서 지었던 영업용 미소 그대로, 유스필이 말했다.

“어머, 지금 저한테 작업 거시는 건가요?”

“……뭐?”

갑자기 뭐라는 거야.

한데 유스필의 목소리가 좀 컸다. 옆에서 커피를 내리던 남자 직원이 슬쩍 여길 돌아본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잠시 뒤, 뭐라고 혼자 궁시렁거린다.

약간 진상 손님 보는 듯한 눈빛이다가, 어느 순간 작은 탄식을 흘리며 고개를 홱 돌렸다.

1층 테이블에 앉은 학생들에게도 작게 들린 모양이다. 원래도 그랬긴 했는데, 더 많은 시선이 슬금슬금 꽂혀 들었다.

얼결에 직원한테 작업 거는 모습으로 비추어졌다.

……아, 알겠다.

내 성격 알고서 그냥 쪽을 주려고 하는 거구나.

유스필은 날 은근 순진한 사람으로 보고 있었다. 왜, 강의실에서 초면에 그런 말도 했잖은가. 날 얕보고 있다는 건 확실하게 알겠다. 내가 무슨 반응을 보이든, 유스필은 내가 더 곤란한 쪽으로 상황을 이끌 것이 분명했다. 한층 더 괘씸해진 나머지.

유들하게 받아치며 한마디 했다.

“작업은 네가 먼저 걸었지. 유스필.”

대충 직원과 알고 있다는 뉘앙스로 답했다. 그럼 모르는 사람에게 대뜸 들이대는 손님으론 보이지 않을 것이었다.

사실 틀린 말도 아니다. 만나자마자 여자친구 있냐고 물어왔잖아. 그게 작업이 아니고 도대체 뭐야.

일말의 동요도 없는 내 모습을 보곤, 딱히 기대했던 반응이 아닌 듯한지 유스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야? 누가 작업 걸었다고?

—잘생겼네. 근데 쟤 어디서 본 것 같지 않아?

—저 알바 이름이 유스필이었어? 난 말도 제대로 못 붙여봤는데…… 이게 인생이냐?

—포기해라. 네 얼굴론 이번 생엔 무리야.

뭔지 몰라도 저기서 흥미로운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라는 걸 직감한 학생들은 몇 명쯤 대놓고 여길 구경하는 채였다.

“아무튼 수고해라. 열심히 하고.”

“잠깐……”

위층에 조원들이 있다는 사실까진 구태여 말하지 않았다. 굳은 상태였다가 뭔가 더 말하려던 유스필을 놔둔 채 트레이를 들었다. 허니 치즈 케이크 등이 담긴 그것을 들곤 계단을 올랐다.

“아, 오셨다.”

레니의 말이었다. 자기가 시켰던 치즈 듬뿍 케이크를 보더니 눈을 빛내며 군침을 흘린다.

앞에 놓아주니 포크를 들고 그것의 옆면으로 자른 뒤, 푹 찍어 조각을 입안에 쏙 넣는다. 느슨해진 입매 사이로 행복한 신음이 흘러나온다. 빵빵한 볼이 다람쥐 같아서 귀여웠다.

“뭐하는 데 이렇게 오래 걸렸어?”

내가 자리에 착석하자, 알프리스가 물어왔다.

“아­ 별거 아냐. 아래층에 유스필이 아르바이트 하고 있길래. 시킨 거 가져오면서 마주쳤거든.”

“그렇…… 뭐?”

알프리스가 고개를 퍼뜩 들었고, 레니도 관심을 가졌다.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는데, 입가 옆에 하얀 게 묻어 있는 듯해서 티슈를 뽑아 건넸다. 손으로 대충 위치를 표시해 주니 고개를 꾸벅임과 동시에 입을 닦는다.

정말 별거 아니었다. 분명 신경은 쓰이는데, 그렇다고 해서 또 엄청 크게 중요한 일이냐면 그런 건 아닌 정도.

“귀족 영애가 아르바이트라니…… 의외네.”

“그렇긴 했지.”

정확히 말하자면 몰락한 귀족의 딸이겠지만.

결국 알프리스와 레니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과제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팔락.

알프리스 쪽은 거의 완성된 모양이고. 레니는 조금 더 노력이 필요해 보였다. 다들 열심히 하고 있다. 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서, 가방에 넣고 다니던 다른 과목 교과서를 펼쳤다.

헥토르는 여전히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있었는데, 저런 상태로 뭔 생각이라도 하는 걸까 싶은 의문이 들었다. 어련히 잘 하겠지 뭐.

그러다 조원들 각자 자기 일에 몰두함에 따라 저절로 고요해진 분위기 속, 헥토르의 고른 숨소리만이 들려올 때쯤.

슬쩍 옆을 돌아보며 생각했다.

……설마 자는 건 아니겠지?

물론, 확인해 볼 방법은 없었다.

#4

“이, 이 정도가 한계예요……”

“아냐. 괜찮은 거 같아. 진짜 많이 발전했는데?”

시간이 흐르고 흘러 야심한 밤이 찾아왔다.

집중을 너무 하다가 방전된 모양인지 테이블에 쓰러지듯 상체를 뉘인 레니가 고개를 떨구었다.

과연 알프리스는 노력 끝에 훌륭하게 성공했고, 나와 헥토르도 문제없이 색을 빈틈없이 채웠다. 문제는 레니였지만, 실수를 줄이고 줄여서 세 군데 정도 울퉁불퉁한 모양새인 걸 빼면 완벽에 가까웠다.

내가 봐도 깔끔했다. 썩 만족스러웠다.

역시, 프론티어인가. 다들 재능이 넘친다. 무엇이든 하려면 할 수 있는 사람들의 모임 같은 곳이다. 예전의 나였다면 백날 천날 해봐야 같은 결과에 머물렀을 텐데. 정교한 마력 조작이 뭔지 막연한 개념으로만 알고 있었을 터였다. 실제로 해볼 생각은 하지도 못했겠지.

그렇게 완성된 2번 과제 시트지를 바라봤다.

오묘한 빛깔로 섞인 중앙의 오각형. 네 자리는 주홍색, 갈색, 남색, 그리고 백색으로 칠해져 있다. 백색의 경우는 이걸 칠해져 있다고 봐야 할지 잘 모르겠긴 한데. 아무튼 과제 평가만 잘 받으면 되니까.

“으그그극­ 피곤해 죽겠네. 정신 각성용 포션이라도 사 마셔야 하나……”

알프리스가 팔을 위로 쭉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오늘 제일 고생하게 생긴 건 알프리스였다. 내 쪽에서 넌지시 물었다.

“도와줄까?”

“……아냐, 됐어. 그래도 꽤 흥미로운 내용이라, 좋은 원동력이 생길 것 같아.”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그런데, 이건 어떻게 하지?”

“뭘?”

“여기 말야.”

알프리스가 손으로 어딘가를 짚었다. 거기엔 미처 채우지 못한 별 도형의 빈칸이 있었다. 아마 지금 탈주하고 없는 조원의 것이다.

아직도 있는진 모르겠지만, 아래층에 있을 수도 있는 유스필을 의식한 걸까. 알프리스의 얼굴은 묘한 기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과제를 끝마칠 동안 나도 고민하긴 했다. 이러나저러나, 이제 와선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다. 따지고 보면 지금껏 아무것도 하지 않은 셈인데 우리와 같은 점수를 나눠주긴 좀 그렇지.

“이건……”

“놔둬라. 정말로 점수를 받고 싶었다면 먼저 고개를 숙여왔겠지. 그렇지 않았으니 평가를 받을 자격도 없다.”

여태 자는지 안 자는지 긴가민가했던 헥토르가 입을 열었다. 역시 자는 거 아니었구나. 그런데, 왜일까. 어쩐지 목소리가 조금 잠겨 있는 듯했다.

……역시 잔 거 아냐?

그런 내 생각과는 별개로 헥토르의 의견에는 똑같이 동의하는 터라,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건 내가 내일 교수님께 잘 말씀드려 볼게.”

조원 전체의 합의하에 이루어진 이름 빼기라면야…… 나머지 조원들의 점수가 깎일 염려는 딱히 없다고 보아도 괜찮지 않을까. 조원들도 조장인 내가 알아서 잘 할 거란 생각인 것 같았다.

시트지를 가방에 넣었다. 테이블 위를 정리하고, 얼추 마무리 된 것 같자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모두 수고했어. 나랑 알프리스는 내일 안 되면 이틀 뒤에 보기로 하고…… 이만 해산할까?”

“그래, 다들 들어가서 쉬어. 난 좀 더 수고해야겠다.”

“고생하셨어요오……”

여기에 오래도 있었다. 어느새 창문 밖은 캄캄하디 어둡기만 하다. 시계를 보니 10시가 훌쩍 넘었다. 트램도 곧 끊길 텐데. 슬슬 돌아가는 편이 좋았다.

뭔가 하나를 제대로 끝냈다는 후련함과, 왠지 지친 마음에 흐느적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조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수고했다. 나중에 보자.”

“어, 에지오 너도.”

“목요일에 또 봬요!”

우리는 카페를 나와 대로변에서 해산했다.

……그리고.

카페 1층 건물을 나서면서 힐긋 카운터 쪽을 보았지만, 유스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5

“야. 에지오.”

이미 퇴근하고 돌아갔을 거라 생각했는데.

트램 정거장으로 가기 위해 가도를 지나던 찰나, 으슥한 골목에서부터 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스며든 달빛. 창백한 빛깔로 물든 손과 얼굴. 까끌까끌한 벽면에 기댄 채 하얗고 길쭉한 무언가를 물고 있는 소녀. 한데 묶어 틀어올린 금발과 하얀 블라우스는 그대로였다.

퇴근한 줄 알았던 유스필이 거기에 있었다.

“……설마 기다린 거야?”

“그럴 리가. 나도 막 퇴근한 참이거든? 가는 길에 너 보여서 잠깐 불러봤다. 오해하지 마. 너한테 작업 거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까진 생각 안 했는데.

“잠깐 와봐. 할 얘기 있으니까.”

“시간 없어.”

“아­ 씨…… 잠깐이면 돼 진짜. 그냥 와봐.”

트램 끊기는데.

분명한 신경질을 담고 있지만 막상 거절하면 그래, 그러냐 하고 말 듯한 분위기였던 까닭에, 하는 수 없이 발을 옆으로 돌렸다.

그러다 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일단 담배나 꺼. 냄새나니까.”

“……”

엘레나와의 대면 이후로 담배 냄새만 맡으면 소름이 우수수 돋을 지경이다. 유스필 주변에 있다가 또 배기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그건 진짜 싫은데.

내 말에 유스필이 나를 잠깐 물끄러미 보더니, 연기를 한 모금 내뱉으며 픽, 하고 그것을 아래로 던졌다. 신발로 질근 밟아 끈다. 블라우스 위에 걸친 자켓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채 툭 물어온다.

“됐지?”

……사실 그런다고 냄새가 사라지진 않을 것 같았다. 뭐 어쩌겠나. 적당히 쓸데없는 얘기를 할 것 같다면 빠르게 끝내는 수밖에.

유스필의 주변으로 다가갔다. 일전의 드세고 의기양양했던 분위기나, 싼티나게 거들먹거리는 행동거지나, 전부 달빛에 녹아내렸다. 비스듬히 벽에 등을 기댄 채로 날 슬그머니 올려다본다.

내가 먼저 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뭔데?”

“그냥, 궁금한 게 있어서.”

“뭔데. 말해.”

“……너무 쌀쌀맞은 거 아냐?”

유스필이 투덜거렸다. 그럴 만한 짓을 하긴 했지만, 이라는 말까지 중얼거린다. 자기가 잘못했단 자각은 하고 있는 걸까.

“그래서, 뭐냐고.”

“……아니, 뭐.”

유스필은 잠깐 말을 아꼈다.

그러다 이어 묻는다.

“내가 어떻게 보여?”

“……뭐?”

“지금 내가 어떻게 보이냐고.”

무슨 질문인지, 영 감을 잡기가 힘들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