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화 〉 변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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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새벽 공기가 땀을 식혔다.
트랙을 일정한 페이스로 내달리고 있었다. 몸이 뜨겁다. 적당히 기분 좋은 열기였다. 트레이닝복을 입고 여느 때처럼 새벽 런닝을 했다.
바람도 선선하고 서늘하니 뛰기 딱 좋은 날씨였다. 여명이 아직 지워지지 않은 하늘에 문득 시선이 갔다. 공활한 그곳을 보고 있자니 복잡했던 생각들이 거짓말처럼 싹 지워지는 것 같았다.
카라의 지퍼를 살짝 아래로 내렸다. 열기가 밖으로 빠져 나간다. 목구멍에서 머무르던 숨결도 비로소 토해졌다. 탁, 탁, 탁. 일정한 리듬을 따라 위아래로 흔들리는 시야 속, 텅 비워졌던 머릿속에 무언가 다시 떠오른다.
‘제대로 노력하지 않고 있나?’
모르겠다.
새벽에는 칼같이 기상해서 운동을 나선다. 아침을 먹고, 강의가 있다면 강의실에 간다.
그렇지 않는다면 운동을 하거나 방에서 공부를 한다. 검술 강의가 있는 날엔 아침 일찍부터 검을 잡아본다. 오늘도 그랬다. 24시간 개방되어 있는 연무장에서 배운 것을 천천히 복기했다.
훈련 중 잘못된 자세로 타격한 탓에 저릿한 팔. 그래도, 하루하루 발전하고 있다는 걸 온몸으로 체감하고 있다.
가브리엘은 내가 성실하다고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그건 잘 모르겠다. 분명 열심히 하고 있다곤 생각하는데. 이제는 모르게 되어버렸다.어느 순간부터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예전처럼 다하지 않는 것 같다고, 그런 느낌을 어렴풋이 받았다. 어제 유스필과 잠깐 얘기를 나눴을 때부터 머릿속 한켠에 그런 생각이 자리잡았다.
유스필은 돈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반면 내겐 금전 걱정이 없다. 입학비 전액 면제. 졸업까지 전액 장학이고, 에픽 클래스의 혜택을 받아 웬만한 호화 시설들을 무료로 이용하고 있다.
더군다나 이번엔 피해 보상금이란 명목으로 거액을 지급받은 상태. 내가 터무니없이 큰 꿈을 꾸지 않는 이상, 글쎄, 평생 돈 걱정은 없지 않을까.
여하튼 유스필은 무언가를 위해 무언가를 포기했다. 전부 취하려 했다면 큰 문제가 생겼을 것이다. 때문에 전부를 가질 순 없었다.
어느 한쪽을 가지길 원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내놓아야만 한다. 그게 당연한 건데, 나는 놓치고 싶지 않은 게 너무 많았다.
욕심인가. 과욕이었나.
사고 없는 학교 생활도, 그 이후의 미래도. 지금 나에게 얽힌 그녀들과의 관계 역시 포기하고 싶지 않다.
“후우, 후우……”
내가 여기서 지금 이러고 있어도 되는 건가. 나는 더 열심히 할 수 있을 텐데. 런닝도 지쳐 쓰러질 때까지 하진 않는다. 곧 있을 강의에 출석해야 하니까. 당연한 거다.
탁, 타탁. 달리기 속도를 높인다. 심박수가 빠르게 올라가며 호흡이 점차 가빠진다. 전력으로 뛰듯 달렸다. 전이었다면 한 바퀴 완주하는 것으로 탈력하여 지쳐 쓰러졌을 터다.
지금은 다르다.
더 높은 한계까지 버틸 수 있고,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기만 한다면 내 몸은 더 강해진다. 이런 사기적인 육체를 가지게 되었음에도 나는 왜.
“!”
교차로 이어지던 발이 엇갈렸다. 기우뚱거리며 밸런스가 무너졌다. 순간적으로 땅바닥에 손을 짚고, 그대로 낙법을 통해 두어 바퀴 굴렀다. 트랙 바닥 위로 벌렁 드러누웠다.
아침을 맞이하여 한결 화창해진 하늘이 보인다. 입가에 흐른 침을 손등으로 닦아내고 있자니.
스윽.
그림자가 드리운다. 내 머리 앞에 수통이 들이 밀어졌다. 적갈색 머리칼이 사륵 내려왔다.
구부린 무릎과 허리. 나와 같은 트레이닝복은 아니고, 언제나의 분홍색 카디건이 눈에 익었다.
“아 해봐. 아.”
레이린이 뚜껑을 따서 그리 말하고 있었다.
“…그렇게, 마시면, 목, 막혀요.”
숨이 차서 단어를 잘라 말한 뒤, 상체만 벌떡 일으켰다. 수건에 감싸인 수통을 레이린이 내게 건넸다.
고개를 꾸벅 숙이며 받아 보니 손바닥이 시원하디 차가워졌다. 얼음물인가? 이런 걸 항상 가지고 다닌단 말야? 어디서 준비해 온 건지 몰라도 감사히 받아 마셨다. 수통을 거꾸로 들어 목구멍에 콸콸 붓듯 했다. 손이 자꾸 파들거려서 빗맞은 물줄기가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절반 정도 단숨에 비우고, 숨을 토해냈다.
“…살 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선배님.”
레이린이 빙긋 웃었다.
“고마우면 누나라고 해봐.”
“……싫어요.”
“에이, 왜!”
오글거려.
“…여긴 무슨 일이세요?”
“응? 우리 예쁜 후배 보러 왔지.”
“……”
“진짜야! 오늘은 좀 되게 일찍 일어났는데, 밖에서 네가 보이는 거야. 카드키 줬는데 서클룸엔 보이지도 않고. 대신 여기서 새벽부터 운동 열심히 하고 있길래, 힘들까봐 시원한 물이라도 주려고 했지.”
“……혹시 서클룸에서 주무신 거예요? 기숙사에선 여기 안 보일 텐데.”
“응, 거기서 잤어. 왜?”
“……아녜요.”
심심하면 거기서 잔다더니. 그게 진짜였구나.
“열심히 사네, 우리 에지오. 장하다, 장해.”
레이린이 어느샌가 내 뒤로 돌아와서 어깨를 주무르고 있었다. 아니, 땀 냄새 나는데. 슬쩍 몸을 빼자 흥얼거리며 다시 어깨를 주물러 온다. 숨도 차고 움직이기 힘들기도 해서 그냥 놔뒀다.
“…저만 하는 것도 아니던데요, 뭘.”
새벽 운동 정도야, 심심찮게 보인다. 여기 말고 다른 데서 운동하는 선배들도 많다. 부지가 되게 넓어서, 운동장도 하나만 있는 게 아니다. 학생 수에 비해 쓸데없이 넓다. 정말 이유가 뭘까. 제국의 미래란 간판이 가지는 위명이 도대체 뭐길래……
“아냐. 너는 특히 더 열심히 하는 것 같아서 보기 좋아. 역시 멋있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마구 든다. 응.”
싱글벙글한 레이린이 꾹꾹 내 어깨를 누른다.
내가 잠깐 손을 들었다.
“이제 괜찮아요. 고맙습니다.”
“에 그냥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건데.”
결국 어떻게든 떼어내자, 아쉽다며 툴툴거리던 레이린이 별안간 말했다.
“근데, 후배야.”
“네?”
“뭔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었어?”
“……티 났나요?”
“진지한 표정도 물론 멋있지만, 너무 진지해 보이던데. 리듬까지 꼬여서 넘어질 정도면 달리다가 딴 생각 한 게 아닌가 싶어서.”
“……틀린 말은 아니네요.”
은근 예리한 구석이 있다.
“선배님이라면 제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궁금해 하시겠죠?”
호기심 반 걱정 반으로 날 보고 있는 레이린의 얼굴. 안 알려주면 끈덕지게 달라붙을 기세다. 레이린이 그렇다고 긍정하면, 적당히 내놓을 만한 답변을 속으로 고민하고 있었는데.
“……혹시 내 생각?”
“……”
“……농담이야! 그런 표정 짓지 말라구! 나 진짜 상처 받는다?!”
어처구니 없는 대답에 과장스러운 리액션까지 보여주니, 이걸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 더 난감해졌다.
잠시 뒤, 레이린은 큼큼거리며 말을 이었다.
“……뭐어,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후배의 고민을 들어주는 건 선배의 의무? 같은 거기도 하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너는 어떨지 모르겠다. ……나, 나는 바보지만 얘기 정돈 들어줄 수 있으니까.”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볼을 긁적이는 레이린.
이렇게 보여도 나보다 두 살이나 많은 선배다. 정작 하는 행동거지를 보면 살짝 믿음직스럽지 못한 것도 사실이지만……
“심각한 건 아녜요.”
후, 하고 짧게 호흡하며 말했다.
“선배님도 방금 절 장하다니, 열심히 하는 것 같다니.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사실 전 그렇게 생각 안 하고 있는 것 같아서요.”
“으, 응?”
“물론 열심히 하려고 하는 건 맞는데, 이게 뭘 위해서 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일단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잔 1차 목표가 있긴 한데, 그걸론 부족한 것 같달까. 지금 저한테 있는 문제가 이러저러 많기도 하고. 다 한번에 해결하려니 머리도 복잡하고. 이대로 가다간 어디서 확 넘어질 것 같아서 불안하고, 뭐. 그런 거?”
레이린이 눈을 끔뻑이다 대답했다.
“……추, 충분히 심각한 고민 같은데?”
“그런가요?”
땀이 질척하게 흐른다. 인상을 찌푸리며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레이린은 잠깐 날 물끄러미 보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사춘기, 인가……?”
“……”
“이, 이게 아닌가? 사춘기 땐 다들 인생 고민하거나 사색에 빠지는 경우가 잦다길래…… 나도 그랬고……”
사춘기 치고는 너무 늦게 찾아오지 않나 싶은데. 아니, 애초에 사춘기는 이미 지나갔다. 중등부 시절의 나는, 정말, 뭐랄지. 어. 가끔 내 스스로도 눈 뜨고 못 봐줄 말과 행동을 했던 적이 있다고 할까. 떠올리면 가끔 부끄러워진다. 지금은 좀 더 고차원적인 뭔가다. 2차 사춘기라도 온 건가. 모르겠다, 정말.
내가 문득 물었다.
“선배님은 귀족이시죠?”
“어…… 그렇지? 너도 귀족 아니야?”
같은 귀족이라고 전부 같은 것도 아니다만, 레이린은 그냥 그렇게 물어왔다. 어차피 프론티어 내에서 신분이란 게 엄청 크게 작용하는 건 아니기도 하고. 밖으로 나서면 또 다른 얘기가 되겠지만. 레이린은 어엿한 백작가의 따님이었다. 그에 반해 나는, 뭐.
“몰락했거든요.”
“아.”
레이린이 입을 다물었다.
분위기가 싸해지려길래 내가 한마디 했다.
“괜찮아요, 가족들끼리 화목하게 잘 지내고 있으니까. 오히려 전보다 더 잘 지내고 있어요.”
“그, 그래? 정말 다행이다……”
레이린은 정말 안도한 듯 보였다. 바람 빠진 풍선 같은 소리를 내며 한숨을 포옥 내쉰다.
맥락을 보면 딱히 말실수를 한 것도 아닌데. 나를 위하는 마음은 진짜인 것 같기도 했다. 곁에 있으면 조금 기 빨리는 선배지만, 이럴 때는 괜히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된다.
귀족에 대한 화제는 더 꺼내지 않았다. 이어 말하다 보면, 남 앞에서 못할 얘기까지 하게 될 것 같았던 까닭이다.
으음, 하고 신음을 흘리던 레이린이 말했다.
“아까 고민에 대해서 말인데……”
“네.”
“음, 으음…… 네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든, 네가 만족하지 못한다면 그건 그거대로 문제일 수 있겠지만…… 적어도, 네 옆의 사람들이 보기에 너가 열심히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일단 최악은 아닌 거잖아?”
“…음, 그렇게 되려나요.”
“응. 당연하지. 오히려 엄청 잘하고 있는 거야. 나만 해도 널 되게 성실하고 착한 후배라고 생각하고 있구, 그래서인지 널 더 개인적으로 막 도와주고 싶기도 한데…… 이, 이 정도면 충분히 잘하고 있는 거 아닐까? 지금 너한테 필요한 건 아마 자신감, 이라고 생각해. 너는 잘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 이런 말을 해주고 싶어, 나는.”
결국 해결 방법도 무엇도 아닌 응원의 한마디였다.
“그리고 너무 쫓기듯 사는 것도 안 좋아! 운동, 훈련 이런 것들만 하고 살기엔 인생이 너무 짧다구. 가끔은 일상에 여유를 둬. 사람이 어떻게 정해진 일만 하고 살아? 적절한 휴식도 취해줘야 일의 효율도 훨씬 올라가는 법이야.”
그게, 조금은 안심이 됐다.
그런데, 잠깐 어디서 들어본 말 같기도 해서. 나는 멍해져 하늘만 하염없이 올려다보았다.
“……”
턱을 쓰다듬다가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의외로 맞는 말도 할 줄 아시네.
트랙 바닥에 두 손을 짚은 채로 레이린을 돌아봤다.
“하긴, 그렇죠. 고마워요. 역시 선배는 선배네요.”
“……어, 어.”
내 웃음에 레이린이 눈을 깜빡였다.
“끄응.”
잠깐 기지개를 켜고, 내가 몸을 일으켰다.
“물 잘 마셨습니다. 저는 이따 강의 들으러 가야 해서, 이만 가볼게요.”
“벌써 가? 강의 언제인데?”
“9시요.”
“아직 한참 남았잖아!”
“기숙사 들어가서 준비할 게 있어서.”
그렇게 말하고, 트랙을 나서려던 때.
“후배야.”
“네?”
“혹시 취미 같은 게 필요한 거라면, 역시 나랑 같이 옷”
“안 해요.”
“……히잉.”
#8
오늘 아침에 있을 문학 교양 강의는, 뮤와 같이 듣는 수업이었다. 그다음에 있을 검술 강의도 마찬가지.
—지금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각자 자유 형식으로 토론하시면 됩니다.
아침의 강의 시간은 정해진 책을 읽고, 내용에 대해 토론하는 수업이었다.
“같은 조네? 잘 해보자.”
“……아, 아. 응.”
뮤와 같은 조가 되었다. 일대일 대면이라, 조원은 두 명. 나와 뮤 뿐이다. 같은 테이블에 의자를 붙여 앉아 책을 펼쳤다. 사실 뮤와 같은 조가 된 건 그러려니 하겠는데, 선별된 책에 살짝 문제가 있었다.
[ 너와 나만의 세계 / 유크레미안 지음 ]
“……”
“……”
음, 으음……
역시, 어색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