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화 〉 변화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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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이 책이 주제로 선정된 것에 대해서 의구심을 품을 순 없었다. 나름 유명했으니까. 좋은 글은 잘 팔린다. 일단 가도에 오르기만 하면 그 뒤론 불티나게 팔린다. 이건 상식이다. 결국 상업적으로도 대성공해서, 한 시대를 풍미한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너와 나만의 세계.
이미 사망한 작가, 유크레미안이 지었던 한 권의 책.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가는 두 남녀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하나 신기한 건, 이 작품에는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 둘만의 이야기를 줄글로 그려내고 있음에도, 그 어떤 직접적인 로맨스적 러브라인 같은 게 보이지 않는다.
또한, 유크레미안은 고작 한 권의 책으로 모든 이야기의 기승전결을 맺었다. 물론 그 탓에 두께가 좀 두껍긴 하지만. 쪽수로 따지자면 장편 소설에 한참이나 못 미치는 분량을 가지고 있으나, 독자는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며 더없는 충족감과 풍성함을 느낄 수 있다.
하물며, 한 권으로 끝났기에 더 여운이 남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내가 이 책을 좋아한다.
좋아했기 때문에.
“저, 음. 시작할까요?”
“아… 네, 네.”
토론은 상대방을 존중하기 위해 대부분 존대를 사용한다. 나한테는 뮤에게 존대를 쓰는 것이 어색하기 짝이 없지만, 뮤는 아니다. 그 편이, 더 자연스러웠다. 조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 토론 전 이 책을 읽고 오란 교수님의 지시는 있었다. 우리는 읽을 필요가 없었다. 안 보고도 몇 페이지에 무슨 내용이 적혀 있는지 알아낼 수 있을 정도로, 애독자였으니까.
내가 지금 읽는 것까지 합하면 정독한 횟수가 다섯 번이고—세 번째부턴 어느 한 파트를 음미하기 위해 반복해서 읽었던 것 같다—, 뮤는 몇 회였더라. 잘 모르겠다. 나 정도로 많이 읽었던 건 확실하다.
“교수님이 자유 형식이라고 하셨는데…… 어디서부터 뭘 이야기해야 할까요……?”
뮤와 나는 각자 책을 한 권씩 들고 있었다. 뮤가 내 옆자리에 앉아 있고, 고개만 돌려 나를 쳐다보는 모양새다.
토론을 원래 이렇게 진행하던가. 아닌데. 말만 토론이지, 사실상 친목 다지기 겸 문학적 소양 교류회다. 더군다나 뮤와 나는 과거 이 책을 좋아했던 애독자로서, 많은 얘기를 나눴었다.
지금 더 새롭게 나눌 만한 얘기가 있을까? 독자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했던 종장(??)에 대한 각자의 해석도, 생각의 물밑까지 전부 공유했던 상태인데……
“글쎄요.”
근래 이 책을 읽었던 기억은 없다. 내 머릿속 안에 들어 있는 공백 사이엔 존재할지도 모르나,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정말로 뭘 어디서부터 토론해야 할지, 아무것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 책을 사이에 놓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괜시리 각자 표정 관리를 하게 된다.
동요하고 있다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 어차피 둘 다 행동에 결림이 있는 걸 알고 있겠지만. 겉으로는 자연스럽게 행동해야 하는 법이었다.
그건 그렇고.
—쟤네는 무슨 얘기 할까?
—뭔가 다를 것 같단 말야. 절대 평범한 얘기는 안 할 것 같아.
—둘이 붙여 놓으니까 그림이 팍 사네. 어우, 눈 부셔. 큭큭.
왜, 하필. 수강생 중 두 명밖에 없는 에픽 클래스를 이렇게 갖다 붙여서. 부담스러운 시선을 끌게 만드시는 거예요, 교수님……
이러면 될 것도 안 된다니까. 진짜로?
“…일단 뭐라도 해보죠. 첫 장 펼쳐보시겠어요?”
“아, 네.”
한숨이 절로 내쉬어진다. 우리가 딱히 별 얘길 나누고 있지 않자, 저들도 곧 자신들의 파트너와 함께 토론하기 시작했다. 관심의 화살이 죄 다른 곳으로 돌려지자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이미 전부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며 흠집 난 뼈밖에 존재하지 않는 책의 내용에 대해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교류해야만 했을까. 고민을 담고 책의 페이지를 뒤로 훌쩍 넘긴다.
연식이 꽤 된 책인지, 페이지의 모서리 부분이 살짝 누렇다. 그게, 차라리 더 감성 있었다. 나와 뮤는 같은 페이지의 글씨를 눈에 담았다.
「너를 만난 1년 1월 1일. 세상은 새 시대를 맞았다.」
익숙한 구문을 속으로 읊자, 내 정신은 아주 쉽게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책을 읽었던 당시의 기억들이 오버랩된다. 울고, 웃으며, 감동했다. 그 아름다운 기억들을, 나는 옆자리의 한 살 어린 소녀와 함께 나누었다. 그것이, 우리의 서장(??)이었다.
“……”
“……”
뮤의 표정이 어떤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 그런가. 이건 전에 없었던 새로운 내용을 교류하기 위한 토론이 아니었다. 이젠 그럴 게 남지도 않았으니까. 전부 눈에 익은 페이지들이다. 독자의 해석이 갈리는 부분에 대한 평가는 이미 결론이 났다. 그 외로도, 우리는 우리만의 토론을 전부 끝낸 채였다.
그렇다면 지금 진행하는 토론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배움이나 학습이란 표현보단 복습에 가까운 단어가 더 어울릴 것이다.
시계를 거꾸로 돌린다. 기억은 최초로 돌아간다. 그러니 어쩌면, 이건.
회고(回?).
“그거 아세요?”
“……뭘요?”
“이 첫 구절, 굉장한 복선이라는 거.”
—당연히 알죠! 복선 말고도 책의 시작과 끝을……
팔락. 나는 다음 장을 넘기며 말했다.
토론의 시작을 그렇게 열었을 뿐,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진 아무도 몰랐다. 책의 서장만 하염없이 들여다보다가, 문득 고개를 옆으로 돌렸을 때.
“몰라요.”
나는 잠깐 멈칫하고 말았다.
살포시 눈꺼풀을 내렸다 올린 뮤가 입을 달싹였다.
“무슨 복선인데요?”
어쩐지, 입꼬리가 조금 올라가 있었다.
……말을 잃었다. 이렇게 되면 전제가 완전히 무너진다. 대충 머리를 굴려 의도를 이해해 보았다.
아예 처음부터 시작하자 이건가.
단 하루만 지나도 생각이 손바닥 뒤집듯 휙휙 바뀌는 게 사람인 만큼, 반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전혀 소통하지 못했던 우리 사이에도, 이 책에 대해 더 나눌 만한 무언가가 생겼을지 모른다.
근데 그게 언제 어디에 있는 것인지 서로 잘 모르니까, 차라리 아예 처음부터 짚어가는 편이 더 좋을 거다 라고, 일단 나는 생각하지만, 이미 알고 있는 얘기만 하면 재미 없으니까.
뮤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젠 토론이고 뭐고 잘 모르겠다. 책을 읽었으면 당연히 알 내용을 모른다고 하니 어쩌겠는가.
그러나 따로 토론할 필요도 없는 게, 서로가 가진 관점이나 생각에 대한 건 전부 알고 있었으니까. 결국 장난 섞인 잡담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뮤에게 어울려주기 싫냐고 묻는다면, 글쎄.
“사실 둘은 예전에 만난 적이 있었어요.”
원하는 대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작중에서 1년 1월 1일이라고 부르는 날, 세상이 멸망하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지만, 남자 주인공에겐 먼 옛날 여자 주인공을 우연히 만났던 그 날이 비로소 새로운 세상의 시작이었던 거예요. 작중 간간이 나오는 과거 남자 주인공의 모습과 현재 시점 남자 주인공의 모습은, 전혀 달라요. 변화하게 되는 어떤 계기가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죠. 그게 바로 어린 시절 여자 주인공과의 기적적인 만남이었어요.”
“와… 알고 보니 되게 운명적인 사이였네요.”
“그렇죠.”
소리없이 손바닥을 맞대어 손뼉까지 쳐준다.
어처구니 없는 웃음이 나오려고 한다. 입만 살짝 벌린 채 작은 물개박수를 치는 게, 썩 예전 모습을 떠오르게 해서.
“남자 주인공은 여자 주인공을 위해 살아갈 수 있었죠. 여자 주인공은 아니었어요. 세상이 한 차례 멸망하면서, 혼약한 연인을 잃어버리고 만 거예요. 이젠 둘밖에 남지 않게 되었지만, 여자 주인공이 가진 상처를 남자 주인공은 보듬어 줄 수 없었어요. 한계가 있었거든요. 남자 주인공은 그래도 괜찮았어요. 그에겐 여자 주인공을 지킬 힘이 있었으니까요. 그런 관계 속에서 둘은 멸망한 세계를 외로이 살아가고, 끝에는…… 뭐. 아시는 대로예요.”
“아시는 대로요? 저 결말 모르는데요?”
“그러시겠죠.”
과연 그 컨셉을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까.
대화의 물꼬는 쉽게 트였다. 좋은 흐름이다.
……하지만,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책의 줄기를 꿰뚫는 어느 특정한 화제를 꺼내면 반드시 깨지고 말리라 생각했고.
그 예상은 아주 정확히 들어맞았다.
#10
“아니, 유진은 도로시를 사랑했다니까요?”
“토론자님, 잘 생각해 보세요. 처음부터 세세하게 따져보면 유진이 도로시에게 가진 감정은 이성적인 사랑이랑은 거리가 멀어요. 몇몇 묘사를 보았을 때, 이 책이 강조하고 있는 주제와는 사실 동떨어진……”
“아니, 토론자님. 자길 끝까지 의지하지 않는 도로시를 위해 목숨까지 불사르면서 어떻게든 지켜주려고 하는데, 이게 사랑이 아니고 뭐예요? 아니 사랑하지 않았다면 애초에 그럴 수도 없었다니까요? 게다가 여기 보세요. ‘도로시는 아무 말도 없었으나, 유진은 굳은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도로시는 괜찮다고 했어요. 하지만 유진이 거부했고요. 이건 분명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배려에 가까워요. 게다가 잠깐 고민하는 듯한 묘사도 있었잖아요. 분명 흔들렸지만, 결국 참아낸 거라구요. 사랑하는 사람이 한 순간의 실수로 다칠까봐.”
“그거는 극심한 스트레스 속 혹시 모를 사태를 예방하기 위함이죠. 아직 불안정한 사람을 함부로 건드렸다간 누구라도 무너질 거예요. 하물며 이성이 아닌 본능에 잡아먹혀선 둘이서 살아가는 데 큰 문제가 생기니까, 유진으로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요. 게다가 이 뒤론 성적 묘사가 한 번도 안 나왔잖아요? 사실상 이 소설적 장치는 소설 초반부 긴장감을 불어넣기 위해 삽입한 장면이었……”
“전부터 계속 생각했던 거지만, 감성이 들어가야 하는 때에 쓸데없이 이성적인 부분이 있어요. 선…… 아니, 토론자님은.”
잠시 말실수를 했던 뮤가 목소리를 큼큼거리며 가다듬더니, 재차 손가락을 치켜세운다.
그래, 뮤의 발화 포인트는 이거였다.
작중 등장인물 간의 로맨스. 소설엔 그게 결여되어 있으나, 몇몇 암시하는 부분들을 봤을 때 이건 한 편의 비극적인 로맨스 소설로도 볼 수 있다고, 뮤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엄청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면 내가 이렇듯 말꼬리마다 반박하는 것처럼 뮤에게 얘기하는 이유는, 그야……
재미있으니까?
“저도 처음엔 남자 주인공인 유진과 여자 주인공인 도로시 간의 뭐 그런 걸 중시해서 봤던 것 같기도 해요. 하지만 두 번, 세 번 읽을 수록 이 책이 시사하는 바가 그게 아니란 걸 알게 됐죠. 실제로 러브라인을 직접적으로 형성한 적도 없었고.”
“결국 유진이 도로시를 사랑했단 건 맞잖아요.”
“그러니까, 사랑할 수도 있었겠죠. 사랑의 정의는 각자 다르니까요. 그런데 저는 유진이 도로시에게 가진 감정이, 연애 소설에 흔히 등장하는 그런 게 아니란 말이었어요. 결국 이 책은 유진과 도로시의 연애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그건 동의하시죠?”
“모르겠네요. 더 말해보세요.”
“아무튼, 이미 멸망한 세계. 둘밖에 남지 않은 인류. 결국 종장에서 도로시는 먼 길 돌아온 유진을 받아들여요. 인류의 존속을 위해서. 거기에 전 혼약자와 같은 사랑이란 감정은 들어 있지 않았어요. 정확히는 열린 결말로 끝난 거지만. 도로시가 유진을 정말 사랑했는지, 유진이 도로시를 정말 사랑했는지는 끝까지 나오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해석을 제대로 해야죠. 아니, 그보다 도로시도 유진을 사랑한 게 맞다니까요? 그런 헌신적인 남자한테 어떻게 안 반할 수 있어요? 혼약자도 죽었고, 이제 남은 건 유진밖에 없는데.”
“안 반할 수도 있죠. 사랑은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니니까요. 얼마나 뭘 얼만큼 잘해줘도, 결국 해준 만큼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는……”
사랑은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니다.
그 말을 꺼냈을 때, 미간을 좁힌 채 무언가를 따박따박 반박하려던 뮤의 얼굴 표정이 잠시 굳는 것을, 나는 볼 수 있었다.
아, 음……
실수했나?
“……그거야, 물론… 그렇겠죠.”
눈꺼풀과 함께 눈동자가 아래로 내려간다.
과열되었던 분위기가 찬찬히 식는다. 이야기에 한참 매몰되었던 의식이 차츰 원래대로 돌아온다. 자기도 모르게 긍정하려던 뮤의 기세가 팍 꺾였다.
금세 다시 어색해지려던 분위기.
“토론자님, 그래도 저는……”
하지만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으나, 나와 뮤는 예전처럼 편하고 재밌게 얘기할 수 있었다. 때문에 뮤는 나와 얘기를 더 나누고 싶었는지, 이야기의 화제를 다른 곳으로 애써 돌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던 찰나.
“흠, 흠. 아주 열정적인 토론이군요. 두 학생.”
목소리가 컸던 건지. 어느새 우리에게 몰려 있던 시선들을 발견할 수 있었고, 이유 모를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붉어진 나와 뮤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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