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차버린 소꿉친구와 전 여친이 같은 반이라 곤란하다-92화 (92/201)

〈 92화 〉 변화 (6)

* * *

#11

“결말부는 열린 결말로 끝난 게 맞아요. 이건 토론자님도 동의하실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유크레미안은 지병으로 숨을 거두기 이틀 전 이런 말을 했어요. 유진은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자신을, 도로시는 그 어린 시절 실제로 만났었던 어떤 여자아이를 모티브로 삼았다고요. 그 아이가 만약 지금까지 살아 있었다면, 자신은 아마 죽을 당시에 혼자가 아니었을 거란 말도 했었죠. 그런 점을 보았을 때…….”

“작가는 글을 마무리 짓는 순간에 죽어야 한다는 말이 있죠. 작가의 손을 떠난 이야기는 더 이상 부연 설명이 들어가선 안 됩니다. 그게 맞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무엇보다 모티브로 삼았을 뿐,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건 아녜요. 등장인물은 어디까지나 등장인물입니다. 우리가 소설의 내용을 해석함에 있어 근거로 삼아야 하는 건 소설 속 등장인물의 말과 행동이지, 작가의 인생이 아닙니다.”

토론에서 승리하는 조건. 상대방을 논리로 설득해서, 납득시킨다. 물론 이건 딱히 진지한 대결 같은 것도 아니었지만 나와 뮤는 열과 성을 다해서 서로에게 의견을 피력하고 있었다.

중간에 잠깐 열기가 시들긴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불이 붙었다.이러나저러나 나와 뮤는 이 책의 열렬한 애독자였다. 일단 이야기를 꺼내기만 하면 입술이 절로 근질거리게 된다.

“으이익… 너무하세요. 어떻게 한마디도 져주지 않으실 수가 있어요? 토론자님은 정말 매정하신 것 같아요.”

“토론에 져주고 자시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냥 제 개인적 의견을 말씀드린 것뿐이죠. 게다가 이건 정식 토론도 아니구요. 저는 각자의 해석에 정답은 없다고도 생각하고, 토론자님의 의견도 아예 납득에 무리가 가진 않는 정도라 생각하곤 있습니다. 단지 저는 책의 어느 부분에 대해 이렇게 받아들이고 있다, 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던 겁니다.”

“그게 그거죠. 결국 제 의견이 토론자님이 가진 생각에 영향을 주진 못하고 있는 거잖아요. 왠지 저만 계속 지는 느낌이고. 다른 책은 몰라도 이 책은 항상 이런 식으로 의견이 갈렸단 말이죠…… 예전이랑 어째 하나도 바뀐 게 없으세요. 토론자님.”

“토론자님도 마찬가지세요. 로맨스 소설이 취향이신 건 알겠는데, 그 때문인지 연애 코드를 모든 소설에 적용하려고 하는 경향이……”

“아, 그게 뭐가 나빠요! 남자가 있고 여자가 있으면 일단 뭐라도 생기는 게 당연하지 않겠어요? 이건 토론자님께서도 말씀하신 본능의 영역과도 밀접하게 연관된 거라구요. 설마 본인이 말씀하신 것도 기억 못 하시는 건 아니시죠?”

“그럴 리가요.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나도 이해 안 하는 표정인데요!”

대충 요런 느낌으로.

강의가 마침을 알리기 전까지, 우리는 말로 캐치볼을 하고 있었다.

언뜻 신경전이 오가는 것 같지만­ 실제로도 별반 다르지 않다. 반쯤 재미를 위한 농담이고 반쯤은 명실상부한 진심이다.

뮤를 도서관에서 처음 만났던 그때부터 많은 얘기를 나눴지만, 이 책에 대한 결론만큼은 지금까지도 나지 않았었다.

결국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자, 라는 하하호호 엔딩으로 막을 내렸었으나, 지금에 이르러 n차전이 발발한 셈이다.

나는 여유와 태연을 가장하고, 뮤는 이익거리며 말꼬리마다 반박하는 날 째려보고 있었다.

그래, 예전에는 이러다 뮤의 기습 공격을 받아서 억지로 패배 인정을 할 때가 많았는데. 지금은 그럴 수가 없을 테지.여긴 다른 학생들처럼 보는 눈도 많고, 무엇보다 우린 이제 그럴 사이가 아니었으니까. 그걸 뮤도 아는지 부들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그 미묘한 거리감이,

조금은 씁쓸하기도 했다.

그런 때에.

—저 애. 되게 차가운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말 잘하네……? 이미지 확 달라 보인다, 갑자기.

—오히려 좀 더 호감인 건 나뿐이냐? 전엔 말도 못 붙여볼 것 같았는데, 지금은 친근하게 인사 받아줄 것 같잖아. 혹시 어쩌면 나도?

—야, 정신 차려. 네 눈은 장식이냐? 쟤를 보고 거울을 한번 봐. 힘의 차이가 느껴질걸.

—…치, 친한 사람한테만 살가운 타입일 수 있지.

—그니까 친해지기가 쉬워 보이냐고. 일단 깔고 들어가는 게 있어야 한단 얘기지. 아까도 말했지만 거울을……

—과도한 팩트는 사람을 죽여. 폭력 멈춰.

강의실의 학생들 몇몇은 토론하는 척하면서 슬슬 우리 쪽의 이야기를 엿듣고 있었다.

나는 잘 모르겠는데, 대부분이 뮤의 새로운 모습을 보아서 신선하단 반응이었다. 아니, 뭐. 얼음 풀풀 날리던 그 싸늘한 뮤가 내 옆에서 잘만 얘기하고 있으니까. 그럴 만도 하다.

그런데 나는 오히려 이편이 더 익숙하고 친근하다.

이게, 내가 아는 뮤였다.

장난 좋아하고, 은근 고집 있고. 감정 풍부하고. 그런 후배.

처음 이 책을 사이에 두었을 때만 해도 살짝 어색한 기분이었는데, 지금은 그런 게 전혀 없었다.

무척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딱히 할 얘기가 떠오르지 않아 서로 어색해하고 있을 때, 한번 옛날 추억 꺼내기 시작하니 시간 흘러가는 것도 까맣게 잊고 대화를 나눌 때처럼.

순수하게 즐거웠다.

……

즐거움, 즐거움이라.

이런 기분을 느껴봤던 게 얼마 만이더라.

스텔라와 함께 별하늘을 올려다봤을 때도 비슷한 기분이 들긴 했다.

그래, 그게 시작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조금은 답답했던 숨이 그제야 트인 느낌. 나는 내가 그동안 잊고 있었던 게 뭔지 깨달았다.

너무,한 가지 목표를 위해 맹목적으로 살았다.

중등부 시절부터 미천한 내 능력을 발전시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던 나날들. 그렇게 계속 무생물처럼 살다가, 결국 의미 없는 졸업장만 받은 다음에. 평생을 열등감 속에서 살아갔을지도 모른다.

그러지 않을 수 있었던 건, 뮤 덕분이었다.

지금도 뮤는 나의 옆에 있다. 나는 재능을 얻었다. 최악의 환경을 완전히 극복했고, 미래에 대한 걱정은­ 엘레나 선배님의 의미심장한 말들을 제외하면, 엄청 크게 들진 않는다.

프론티어 졸업장. 이거 하나만으로도 취직 같은 건 일절 문제가 없어진다. 당장 금전적 여유가 부족한 것도 아니고, 현실적인 문제는 전혀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아직까지 답답한 주박에 사로잡혀 있었다. 멈추지 않고 쉼 없이 달려야 한다는 강박이 머릿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었다.

사실 그렇게 사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을 거다.

끝도 없이 노력하고 노력해서 최고의 자리까지 올라가기 위해. 테트라 크로울리처럼 흔히 대마법사라 불리는 인물들이나, 엘레나 같은 초인. 검술의 극에 달한 제국 칠검 등. 나는 구태여 그 자리까지 올라가고 싶진 않았다. 한 차례 몰락한 가문을 다시 부흥시키겠단 목적 같은 것도 없었다. 우리 부모님들은 현재를 더 만족하며 살아가고 계시니까.

나는 원대한 업(?) 같은 걸 짊어지고 살았던 사람이 아니었다. 가문이 몰락하기 전에도, 딱히 귀족적인 삶을 살진 않았다. 사소한 행복 하나에 울고 웃는 소시민에 가까웠다.

아버지는 좀 더 귀족에 가까운 분이시긴 했지만, 결국 가정을 지키는 길을 택하셨다.

내가 만약 아버지였고, 내게 대의가 있었다면, 하나뿐인 목숨과 검을 쥐고 전장에 홀로 나섰을 거다. 아마도.

하지만 나는 아버지가 아니다.

대의가 있지도 않다.

시골 아카데미 출신의 몰락귀족 에지오 크라닐.

그게 나였다.

당장 내 눈앞에 있는 것들만 챙기기에도 벅차다. 너무 먼 미래만 내다보면서, 앞도 제대로 보지 않고 무작정 달려가면 언젠가는 넘어지기 마련이다.

오늘 새벽의 트랙에서처럼.

—그리고 너무 쫓기듯 사는 것도 안 좋아! 운동, 훈련 이런 것들만 하고 살기엔 인생이 너무 짧다구. 가끔은 일상에 여유를 둬. 사람이 어떻게 정해진 일만 하고 살아? 적절한 휴식도 취해줘야 일의 효율도 훨씬 올라가는 법이야.

레이린 선배가 그렇게 말했었다.

사실.

그런 말을 처음 내게 해준 건, 뮤였다.

“토론자님.”

“……네?”

오늘 하루만 열심히 하자.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자.

“우리, 얘기 많이 하죠. 앞으로.”

“……어, 네?”

그러기 위해선, 변화가 필요했다.

#12

“꽤 늘었군. 훈련을 많이 했나?”

검술 전공 시간.

한 명씩 나서서 교수인 아벨과 검을 나누던 도중,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한 손으로 내 검을 쳐내던 아벨이 그리 말했다.

나에 비해 리치도 훨씬 짧고, 가만히 서서 한 손은 뒷짐을 진 채 수비만 할 뿐이다. 검을 쥔 손과 눈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내 움직임 하나하나를 읽고 냉정히 평가하기 위해서다.

새삼 볼 때마다 놀랍단 생각이 든다. 검술로 하는 독심술이 있다면 아마 아벨은 그러한 독심술의 극한에 달했을 것이다.

내 의도는 무엇이든 완벽히 읽힌다. 내가 검을 채 내지르기도 전에 아벨의 검은 이미 그쪽으로 가 있다. 정말이지, 이 정도 해야 에픽 클래스 교수 하는구나­ 싶은 마음이었다. 달리 말해 존경스러웠다.

한참 어린 외관을 가졌다고 절대 무시할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래서 더 정체가 신비로워 보이는 것도 있겠지만은.

“꾸준히 하긴 했습니다.”

“동작의 전환이 한결 자연스러워졌다. 이건 내가 가르쳐준 기술이 네 몸에 충분히 숙달되었단 증거겠지.”

내 손에 검은 들려 있지 않았다. 저 뒤에 나가떨어져 있다. 대충 내 실력을 다 보았다 생각한 아벨이 가볍게 쳐내었던 것이다.

“15번. 검을 절대 손에서 놓지 마라. 무기를 잃는 순간 네 목숨도 함께 사라질 테니. 마력검을 휘두를 수 있는 고위 기사들이라면 모르겠으나, 너희는 아직 그 정도 수준에 다다를 순 없다. 방금은 네가 좀 더 검을 놓지 않고자 했다면 충분히 붙들고 있을 수 있었다.”

“…더 노력하겠습니다.”

“음. 그래야지.”

스르릉­. 아벨이 검을 집어넣었다.

“…여긴 꽤 재밌는 녀석들만 모인 곳이라는 걸 깜빡 잊고 말았군. 처음 봤을 때만 해도 네 검술이 가장 별 볼 일 없었다. 조잡하고 형편없을 정도였어. 혹 스승을 잘못 만난 건가? 습득력은 분명 여기 있는 녀석들 중에서도 범상치 않은 편에 속하건만. 영 이해가 가질 않는군.”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웬만해서는 아벨이 칭찬을 잘 하지 않는 성격이란 걸 알고 있었던 까닭이다.

아벨의 뒤편에 선 스텔라가 조용히 날 보며 싱긋 웃는다. 뮤는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작은 물개박수를 치고 있었고, 그 옆에서 사샤가 뮤에게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는 듯했는데……

—아, 아팟…

아, 때렸어.

꿀밤 맞았다.

…그래도 반응해줬으니 장족의 발전인가?

아무튼.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제 노력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이제야 제대로 노력하기 시작했고요. 물론 교수님께서 잘 가르쳐주시는 것도 있겠지만요.”

“무얼, 시원찮은 아부는 되었다. 이제 막 걸음마를 뗐을 뿐이지, 본 수업은 시작하지도 않았으니까. 여기서 한 달만 지나도 지금의 배는 더 노력해야 할 것이다. 언제나 같은 마음가짐으로 꾸준히 노력해라. 네 수준이 점차 올라갈수록, 넘어서야 할 벽도 그만큼 높아지니.”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아벨은 도복의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말했다.

“그리고……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네 그 기이한 능력은, 영 익숙해지질 않는군. 일시적이나 15년 정도 내 검술이 퇴보하는 느낌이야. 께름칙하고 불길한 사술(??)은 아닌 듯한데, 이거 참… 알다가도 모르겠군.”

왠지 모르게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그런 것 치고는 전혀 다른 게 없어 보였는데. 실력이 줄어들었단 티가 하나도 안 났다.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사람은 역시 다르다는 건가?

근데 15년이면 대체 언제야.

교수님은 대체 몇 살이신 거지……?

“하지만 이것도 의외로 좋은 경험이 되었다. 세월을 버티며 무뎌졌던 향상심이 자극된단 말이지. 오랜만에 옛 생각도 나고.”

아벨이 그리 중얼거리며 픽 웃었다.

많이 쳐줘야 중등부 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사람이 옛 추억을 그리는 모습을 보니까, 뭔가, 뭔가……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 들어가라. 다음.”

고개를 꾸벅 숙이고, 나는 내 앞의 차례였던 가브리엘의 옆으로 돌아갔다.

“새끼, 좀 치던데?”

“기본이지.”

“…어우, 꼴보기 싫어.”

너스레를 떨며 어깨를 으쓱이자, 가브리엘은 진심으로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들어가고, 다음 사람이 나왔다.

“잘 부탁드립니다. 교수님.”

“음.”

간단한 인사와 함께 뮤가 아벨 앞에 섰다.

“네가 마지막이던가?”

“예.”

“좋아. 강의 종료 때까지 어디 한번 마음껏 공격해봐라. 제한 시간은 따로 두지 않을 테니.”

뮤를 상대로 하는 아벨은 나를 비롯한 학생들을 대할 때와 눈빛부터가 달랐다. 좀 더 무거워지고, 진중해지며, 엄격해진다. 뮤의 수준을 제대로 평가하려면 필연적으로 배의 집중을 요하는 까닭일까.

“한 손만 쓰실 겁니까?”

문득 뮤가 물었다.

아벨은 고개를 갸웃한다.

“질문의 의도가 뭐지?”

“두 손을 쓰시는 게 좋으실 것 같아서, 입니다.”

“……오호. 그 이유는?”

아벨이 흥미로운 기색을 흘린다.

잠시 뒤, 뮤가 입을 연다.

“오늘은 컨디션이 좋거든요.”

“흐음?”

지금의 나는 아벨의 뒷모습을 마주하는 채였고, 그 앞에 선 뮤의 얼굴이 보이는 상태였다.

어깨 너머로 뮤의 자줏빛 눈동자가 별안간 어딘가를 향하는 걸 보았다.

나였다.

아주 찰나의 순간, 부드러운 미소가­.

“확실히, 그래 보이는군.”

아벨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담겼다.

스윽.

뒷짐을 지던 아벨이, 왼손을 앞으로 꺼냈다.

검을 양손으로 쥐고, 아래로 내린다.

“신호는 따로 주지 않겠다. 원하는 때에, 원하는 검로를 그려라. 가능하면 새로 배운 것을 활용해보는 것도 좋겠——”

말소리가 잘렸다.

아벨의 목소리를 갈래로 베어낸 뮤의 검이 일격을 내리긋는다. 순간에 사라졌다가, 순간에 다시 나타났다.

1초와 2초 사이에 공간이라도 있었던 것처럼. 뮤는 그 공간을 통과해서 빛줄기처럼 쇄도했다. 눈으로 보고서도 전혀 좇을 수 없었다. 그건 차라리 신위(??)에 가까웠다.

—캉!

“쾌검(??)으론 널 따라올 학생이 없을 터다.”

아벨은 간단히 막아냈다.

그쯤은 뮤도 예상하고 있었을 거다.

하나가 막히면 다시 하나. 그 하나가 막히면, 또 다시 하나.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동작의 전환.

아니, 자연스럽고 자시고 너무 빨라서 눈에 보이지도 않는데 내가 감히 평가할 건덕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캉! 카앙! 캉! 캉! 캉!

눈부신 불똥이 튀었다. 거대한 검력(?力)이 공간마다 상충한다. 날카롭게 잘려나간 바람 줄기가 우리들의 뺨을 할퀴고 지나가는 듯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었다. 그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뭐가 어디서 지나가는 건지도 모르고 멍하니 구경하기만 했다.

나부끼는 뮤의 머리카락이 그리는 검은색 잔상. 그것으로 간신히 형체를 구분할 수 있었다.

뭐가 저렇게 빨라? 예전에도 저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새삼 내가 어떤 사람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던 건지, 온몸의 피부로 느끼고 말았다.

“……”

……마음만 먹으면 날 손쉽게 찌부로 만들 수 있는 여자애랑 사귀었단 거, 의외로 무서운 과거였을지도 모르겠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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