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차버린 소꿉친구와 전 여친이 같은 반이라 곤란하다-93화 (93/201)

〈 93화 〉 변화 (7)

* * *

#13

커피란 거, 정말 효율적인 음료인 것 같다.

과다복용하면 사람을 살아 있는 망자로 만들어준다. 아주 잠깐이나마 본능을 이기게 해준다.

단, 부작용도 있다.

거부할 수 없는 수면욕을 억지로 잠재우는 것이기에, 때때로 사람을 광인(?人)으로 만들기도 한다.

지금 남자는 그 직전의 단계에 서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사각, 사각, 사각.

퀭한 눈가의 남자가 기계적으로 손을 놀리고 있었다. 내가 펜이고, 펜이 나였다. 펜심일체. 지금 남자는 펜과 한몸이 되어 있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줄글을 그대로 옮겨 적을 뿐이다. 정말로 마공학 기계나 다름이 없었다. 멍하니 종이만 내려다보며 바삐 손을 움직인다.

‘…이러다 죽겠군. 아니, 이미 죽어 있나?’

낮인지 밤인지 잘 분간도 가지 않는다. 아무튼 활동 시간이었다. 밤샘 실험을 계속하며 결과가 나올 때까지 같은 루틴을 반복하다가, 지쳐 쓰러지듯 간이 침대에 누워 쪽잠을 잤다. 그리고 일어나 비척거리며 다시 연구 데이터를 정리한다.

아직 한참 남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다. 중간에는 연구비 관련 서류도 작성해서 전달해야 한다.

그뿐이랴? 온갖 잡무도 있다.

연구실 청소부터 시작해서, 남자보다 몇 개월 일찍 입탑한 연구실 인턴 선배의 심부름이라든지……

‘버텨야 한다. 버텨야 한다……’

신입 마법사에 대한 이러한 취급은 아카샤의 별에선 무척이나 당연한 거다. 적응해야 한다. 그래야 살아남는다. 여긴 괴물 천지다. 일단 달성한 위계만으로도 웬만한 마법병단의 장교쯤은 우습게 꿰찰 수 있을 마법사들이 지천에 널려 있다. 아니, 기본이 그 정도다. ‘아카샤의 별’은 입탑 기준부터가 엑시(6)에 달해 있었으니까.

‘더, 정진해야 한다.’

자신은 한낱 우물 안의 개구리와도 같은 존재였다는 걸, 마탑에서의 하루하루가 흘러갈 때마다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끼이이익.

그 순간.

문이 열리고, 환한 빛이 새어 들어왔다.

“펜테(Pente) 슈리엘. 부탁했던 자료는 준비됐나?”

“……아, 샤피스 님.”

남자의 이름은 슈리엘 데 라파르트.

로르센 아카데미 마법부 수석 졸업생이자, 이번 연도에 아카샤의 별 최연소 하급 마법사로 입탑한 펜테(5) 위계의 마법사였다.

슈리엘은 다급히 대답했다.

“지금 마무리 중입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뭐? 부탁한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마무리를 못했어?”

어제 새벽이었다. 그때도 아직 처리하지 못한 자료를 정리하는 중이었고, 거기서 새로운 데이터가 얹어진 것이었다.

게다가 양은 더 많았다. 이건 잠을 자지 말라는 소리나 다름이 없었다. 실제로도 밤샘해서 끝내 놓으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을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다른 업무가 밀려 있어서……”

슈리엘의 사수인 샤피스는 혀를 쯧쯧 찼다.

“쯧… 성실히 하는 건 알겠는데 속도가 너무 느리군. 이래서야 언제 정식 연구에 투입될 것 같나? 못 버틸 것 같다면 그냥 때려쳐. 자네 위에 있는 마법사들은 자네가 받은 것과 똑같은 양을 반나절만에 해결하고도 남는다네. 응당 훌륭한 마법사라면 효율을 극대화시킬 줄도 알아야지. 자네는 그게 뭔가? 미래가 아주 유망하다느니, 최연소 입탑이라느니 주위에서 신나게 떠벌린 만큼 결과를 보여줘야 할 거 아니야.”

“……죄송합니다. 정진하겠습니다.”

“말은 누군들 못하겠나.”

“……”

어두컴컴한 방구석을 둘러보던 샤피스가 말했다.

“오늘 점심 전까지 반드시 끝내놓게. 저녁에는 마탑주님께 그간의 연구 진척을 보여드려야 하니.”

슈리엘은 잠깐 고개를 들었다. 피곤이 극에 달한 건지 살짝 넋이 나간 표정이었으나, 곧 제정신을 차리곤 입을 열었다.

“……마탑주 님께, 말입니까?”

슈리엘은 세 개의 분파 중 에테르 학파 소속이었다. 사수인 샤피스도 마찬가지. 그러니까, 샤피스가 말하는 마탑주란——

“그래. 오늘 저녁에 돌아오신다는 소식을 받았지. 환영식이 있을 예정이니 자네도 꼭 참석하도록 하게.”

“아, 알겠습니다.”

“점심까지 끝내놓는 거 잊지 말고. 절대 잠들지 말게. 혹시라도 여기서 잠을 자다 환영식에 불참했단 소식이 들리기라도 하면, 그땐 자네한테 아주 좋지 못한 일이 벌어질 테니까. 알겠나?”

“……예, 샤피스 님.”

“그럼 계속하게.”

—쿵.

문이 닫히고, 샤피스는 떠났다.

“……”

슈리엘은 빽빽하게 들어찬 글씨와 술식들을 내려다봤다. 이 뒤로 수십 장이 넘게 남았다. 고개를 천장으로 꺾은 채 얼굴을 쓸었다. 입탑 이후로 너무나 바쁜 나날들이라, 다른 생각은 할 여유도 없었다.

무리하게 사용한 손목이 불에 데인 것처럼 시큰거리고, 펜촉에 어린 잉크가 묻어 시커먼 얼룩이 군데군데 자리잡고 있었다.

이걸 어떻게 네 시간 안에 해결해야 할지, 막막할 따름이지만.

‘마탑주께서 돌아오신다니.’

슈리엘에겐 하나의 원동력이 부여된 채였다.

거대 마탑 ‘아카샤의 별’ 제3마탑주.

테트라 크로울리.

그녀에 대한 명성은 익히 들어본 바가 있다. 마도(??)의 길을 걷는 자라면 어찌 모를 수가 있을까.

‘대마법사 위의 대마법사.’

그러니, 테트라는 이 넓은 대륙에서 그녀 혼자 규격 외로 취급받는다.

테트라 역시 전쟁 영웅 중 한 명이었다. 엘레나 크라이모어가 단신으로 남부 마계 중심부까지 침투하여 그 자리의 모든 생명체를 한 조각도 남김없이 도륙했다면, 테트라는 북부 마계 일부를 태워 한꺼번에 소멸시켰다. 그녀가 궁극으로 연마한 고유의 장기이자 특기­ 에테르 계열의 마법을 이용하여, 마족들의 생명을 죄 소각시킨 것이었다.

단 한 번의 대마법으로 소멸한 마족들의 숫자는 무려­ 3만을 가벼이 초월한다.

그날, 누군가 말하기를.

지상에 태양이 강림했다고 한다.

때문에 마족들은 엘레나보다도 테트라를 가장 두려워했다.

그러한 연유로, 같은 대마법사끼리도 한 수 접고 들어간다는 대마법사가 바로 테트라 크로울리였다.

살아 있는 신화 그 자체인 테트라는 쉽게 볼 수 없는 존재다. 지금만 해도 오래간 마탑을 떠나 있다가 돌아왔지 않는가.

워낙 신출귀몰한 사람이고, 위치가 위치인 만큼 하급 마법사인 슈리엘이 만나고 싶다고 해서 만날 수 있을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슈리엘에게 있어선 이번이 테트라를 실물로 접할 수 있는 단 한 번의 기회인 셈이었다.

‘절대 졸면 안 된다. 절대로.’

슈리엘은 눈을 부릅떴다. 붉게 충혈된 눈에 실핏줄이 돋았다. 테트라를 반드시 실물로 접하겠단 일념하에 각성한 슈리엘이 흡­ 하며 숨을 참고 펜을 놀렸다.

슈리엘의 손이 날개를 단 것처럼 빠르게 춤추었다. 사각, 사각, 팔락­. 사각, 사각, 팔락­. 두뇌가 팽팽히 굴러간다.

‘할 수 있다.’

이 속도라면, 시간 내에 맞출 수 있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사각사각사각.

아닌 새벽중에, 뾰족한 펜촉이 종이를 빠르게 긁는 소리만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각성한 슈리엘이 기적적으로 마감을 마치고.

그렇게 찾아온 저녁.

‘마탑주님, 어째서……’

환영식도 뭣도 없었다. 테트라 크로울리는 나타나지 않았고, 성대하게 준비된 연회와 축포들은 제 주인을 찾아가지 못했다.

정렬한 인파 끄트머리에 서서 기립박수를 준비하던 슈리엘은, 태어나서 세 번째로 울게 될 것 같단 기분이 들었다.

#14

“아니, 내가 그래서 일부러 4월달에 돌아온다고 말했었는데. 누가 대체 어떻게 알고 마탑에다가 귀환 소식을 퍼뜨린 거야?”

에테르 학파의 수장이자, 제3마탑주의 집무실.

“이건 말도 안 돼. 분명 누가 수작질을 부린 거야. 누구지? 누구냐고! 설마 엘레나 그 년이야!?”

몰래 입국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디의 누가 소문을 퍼뜨린 건지, 마탑 입구서부터 쭉 이어진 인파의 행렬들을 보자마자 섬뜩한 기분을 느낀 테트라 크로울리는 등록된 좌표를 통해 집무실로 워프했다.

피곤한 건 질색이다. 연회 같은 건 더 질색이고.

한참 머리를 쥐어뜯으며 우아악 거리던 테트라는, 이렇게 된 이상 여기서 죽 치고 딩가딩가 놀다가 4월달에 예정대로 복귀한 것처럼 상황을 조작해야겠단 생각을 했다.

어차피 요양 겸 쉬러 온 거였으니까. 4월달에 잠깐 마탑에 얼굴만 비추고, 다시 떠날 생각이었다.

테트라가 의자에 털썩 앉았다. 의자가 말했다.

—엉덩이가 딱딱해지셨군요. 주인님.

“그래, 땅바닥에 오래 앉고 살았더니 엉덩이가 환경 적응해서 단단해졌나 보네. 근데 너 뒤지고 싶어?”

—저는 주인님의 건강을 걱정했을 뿐입니다.

“의자 주제에 주인 걱정도 다 하고. 아주 장하다, 장해. 나 지금 매우 심기가 불편한 상태니까 좀 닥치고 있어줄래?”

—……

의자는 테트라의 말을 들었다. 그 뒤론 입을 열지 않았다. 아니, 입이 있긴 한가?

테트라의 집무실은 하나의 거대한 서고나 다름이 없었다.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은 천장. 중력이 없는 것처럼 책장 주위를 부유하던 서적들.

테트라는 손을 뒤로 들었다. 어디선가 홱­ 하고 날아온 그것은 부드럽게 유영하며 테트라의 손바닥 위로 놓였다.

책을 펼쳤다. 이번에는 다른 손을 들었다. 깃털펜이 테트라의 손에 안착했다. 테트라가 인상을 쓰면서 펜을 흔들어 보았다.

—으어어어어. 저 어지러워요.

“잉크가 없잖아. 빨리 채워와.”

—넵.

깃털펜은 혼자서 어딘가로 날아갔다.

확실히, 이곳은 범상치 않았다.

말하는 의자, 말하는 펜, 부유하는 책 등등.

이들은 전부 테트라의 작품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평범한 물건에 복제한 혼(?)을 옮겨 담은 것이다. 복제라곤 해도 이미 과거의 기억 따위 어디에도 들어 있지 않겠지만, 지성을 갖춘 인격은 그대로다.

그것이 테트라의 입맛대로 조정되었을 뿐.

물건에 혼을 담는다니. 사이한 주술로 평가받아도 할 말이 없다. 교리적으로 옳지 않다. 테트라 이외에는 감히 아무도 시도하지 못할 법한 일이다.

반대로, 테트라이기에 이 넓은 세상에서 오직 그녀만이 이러한 연구를 지속할 수 있었다.

왜 이런 짓을 했냐면, 여느 대마법사가 그렇듯, 이러한 과정들이 테트라가 궁극적으로 목표하는 바와 밀접한 연관이 있었던 까닭이다.

이 외에도 테트라의 작품은 여러 가지가 있었으나, 그중에서도 대표적으로 꼽히는 것은——

끼이이익.

“오셨어요, 주인니……”

“마루우우우우우우! 보고 싶었다구!”

그녀가 가장 애정하는 물건.

실제 인간의 복제된 혼이 아닌, 만들어진 혼을 담고 인공적으로 생명을 얻은 호문쿨루스­ ‘마루’였다.

“…아파요, 아파. 너무 달려들지 말라고 했잖아요. 전 아직 내구성이 약하다고요.”

“으엑­.”

꽁. 마루가 테트라의 정수리에 꿀밤을 놓았다.

만약 이 자리에 일반적인 상식을 가진 일반인이 있었다면, 놀라 졸도할지도 몰랐다.

테트라는 존엄하고 지엄한 제국의 황제조차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인물이다. 테트라가 제후국을 방문할 일이 있다면, 준황제급 대우를 해준다. 그런 지고한 대마법사의 머리에 꿀밤을 놓다니? 보통 머리론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다만 테트라는 보통 머리가 아니었다. 마루는 그녀의 아래서 태어났다. 그러니 마루도 보통은 아니었다.

테트라는 꽤 세게 맞았음에도 눈물을 찔끔 흘리며, 되레 헤실헤실한 얼굴로 웃다가 문득 급격히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널 보기 위해서 이렇게 한아름에 달려왔는데, 너는 항상 냉정하구나…… 이 누나는 슬프단다……”

“누나가 아니라 어머니 아녜요?”

“떽! 누나라고 했지! 어머니는 너무 늙어 보이잖아!”

“아, 네……”

테트라가 그렇다는데 어쩌겠는가. 마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참. 주인님.”

“왜? 혹시 배고파? 안 그래도 내가 북대륙에서 가져온 게 하나 있는데……”

“아뇨, 그게 아니라. 전해드릴 소식이 있어요.”

“……응? 뭔데?”

마루는 테트라의 지식을 전수받았다. 아카샤의 별 고위 관계자가 아니라면, 마루의 존재는 대외비로 철저히 봉해져 있다. 사실상 테트라가 떠난 중 대부분의 대행 업무를 마루가 맡고 있었다. 물론 모습은 다른 마법사들에게 드러내지 않는다. 애당초 테트라부터가 그걸 원치 않았다. ‘완성’되었다면 몰라도, 아직은 절대로 공개할 수 없었다.

단순한 업무 대행 외로도, 마루는 자신의 주인인 테트라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 많았다.

예컨대,

이것도 마찬가지였다.

“이틀 전에 엘레나님의 ‘낙인’이 사용됐어요.”

“——! 뭐어?”

녹아내릴 듯 흐물거리던 테트라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순간 잘못 들었나 싶지만 마루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아, 정말인가 보다. 마루가 이런 걸로 장난칠 성격은 아니지.

…가야 하는데.

진짜 조금만 쉬다 가려고 했었는데.

낙인이 뭐에 쓰였는지 알기 전까진 못 떠난다.

‘너구나, 엘레나……! 이 빌어먹을 년이……!’

상황이 이쯤까지 치닫자, 자신의 복귀 소식을 마탑에 몰래 알린 것도 엘레나가 틀림없었음을 확신하게 되는 테트라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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