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화 〉 변화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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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케테르관 1학년 종합강의실.
검술 강의가 끝나고 얼마 되지 않은 시간.
폐강된 「초감각특론」 강의 수강생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강의 있는 애들 빼고 다 모였나? …아무렴 됐겠지 뭐. 이 자리에 없는 녀석들한테는 너희가 알아서 전달해줘라.”
우리 1학년 담임 교수.
타일러 르베귄이 머리를 북북 긁는다.
“요번에 그 불미스러운 뭐시기로 폐강되었던 초감각특론 강의가 신설되었다. 교수가 바뀐 것 빼고는 이전과 동일하고. 프론티어에서 직접 엄별하고 선별한, 아니 뭐 전에도 마찬가지였긴 한데 이번엔 더 확실하게 탈탈 털었으니 괜찮을 거다. 전례가 있는 만큼 안전장치도 빡세게 걸어놨고. 그러니까 다음주부터 원래 예정대로 출석하면 된다.”
초감각특론 폐강 사건. 여기서 가장 직접적으로 연관된 사람은 아마 나뿐일 거다. 몇몇 애들이 내 쪽을 힐긋 쳐다보는 것을 느꼈다. 그건 타일러도 마찬가지였다.
“……거, 뭐냐. 엣지 크롬이었나?”
“에지오 크라닐입니다. 교수님.”
“그래, 에지오. 너는 굳이 안 들어도 된다고 했다. 프론티어 쪽에서 책임이 있다고 해서 말이지. 수강하지 않아도 학점은 반영될 거다. 일단 그렇게 알아라.”
수강하지 않을 이유가 딱히 없다. 강의 내용은 나한테 있어 꽤 중요한 것이기도 하고.
알고 보니 나디엘리가 마족이었다든가 하는 말은 적잖은 충격을 안겨주긴 했지만. 프론티어도 사건의 전말을 알고 있었을 테니, 이번에는 아주 확실하게 검토했을 거라 믿는 수밖에 없다.
“수강하겠습니다.”
“…뭐, 그래. 그럼 다음주부터 출석해라.”
되었다는 듯 타일러가 손을 휘휘 젓는다.
그렇게 발을 돌리려던 타일러.
그런데.
“…아, 그리고. 너희한테 하나 말해줄 게 있다.”
타일러가 우리를 슥 돌아본다.
“나중에 또 공지하겠지만, 아니. 굳이 그럴 필요 없나? 그냥 너희가 알아서 신입생 녀석들한테 말해줘라.”
귀찮음 가득한 표정으로 말을 잇는다.
“너희들 중에 서클 가입 안 한 학생이 있다면, 당장 뭐든 가입하라고 해라. 가능하면 3월달 끝나기 전까지.”
……예?
뭐라고요?
뭐야.
그런 말은 못 들었는데?
“처음 듣는단 표정을 하는 녀석들이 있군. 당연하지, 나도 처음 들으니까. 이번에 새로 지침이 그렇게 내려왔다. 가입 안 하면 불이익이 있을 거랜다. 뭔지는 나도 정확히 모르니까 묻지 말고. 이상. 끝.”
아니, 잠깐만……
타일러는 시큰둥하게 그리 말하더니, 문을 열고 강의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
서클 강제 가입이라니.
아직 아무것도 생각해놓은 거 없는데.
애초에 굳이 가입하고 싶지도 않았다. 뭐, 할 게 있어야 하지. 지금 나한테 도움될 만한 게 있나? 공터에서 홍보하던 선배들의 팜플렛을 제대로 읽지도 않았긴 해도, 글쎄……
별로 끌리는 건 없었던 것 같은데.
서클, 서클이라.
지금쯤 내 방 책상 위에 놓여 있을 패션 서클룸의 카드키를 떠올리던 내 옆으로, 떨어져 앉았던 가브리엘이 다가와 묻는다.
“야, 에지오. 너 뭐 가입한 거 있냐?”
“아직 아무것도. …넌?”
가브리엘이 씨익 웃는다.
“나? 좀 고민하긴 했는데, 얼마 전에 신청서 넣었다.”
“오…… 뭘로?”
가브리엘이라면 뭔가 놀기 위한 서클을 고를 것 같았다. 의외로 예상을 깨고 헬스 서클 같은 걸 가입하려 들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하던 한편.
“내가 유학 온 취지에 아주 딱 맞는 서클이지.”
“뭔데?”
“여행.”
“……!”
놀란 건 내가 아니었다.
은근슬쩍 우리 얘기를 엿듣는 것 같았던 저 건너편의 유리가, 어깨를 들썩거리며 크게 움찔했던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저 녀석.
여행 서클 가입을 생각하고 있었나.
“선배들 얘기 들어 보니 학기마다 한 번씩은 제국 밖으로 여행 간단다. 그냥 여유 있으면 서클 부원끼리 날 잡아서 주말에 외출도 하고. 어디 어디가 관광으로 유명하더라, 휴양지로 유명하더라, 하는 얘기가 떠돌면 대번에 1박 2일 잡기도 하고. 가끔 고대 유적지나 그런 데도 지식 함양을 위해 간다던데. 여행이 있는 곳엔 만남이 있지 않겠어? 나는 이 서클이 내 청춘을 완벽하게 만들어 줄 마스터피스라고 본다.”
“……그러냐.”
가브리엘은 무한한 열정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이 녀석, 갈수록 아름다운 만남에 대한 갈망이 격해지는 것 같다. 애초에 여자를 만나러 유학을 왔으니 당연한 건가.
아마 순수히 경관을 보고 답사하며 넓은 세계를 체험하기 위한 목적의 부원도 있을 텐데. 노골적으로 음습한 목적이 있다는 걸 드러내면 넌 바로 퇴출감일지도 몰라. 가브리엘……
그래도.
“여행이라… 괜찮네.”
내가 갔던 여행의 대부분은, 가족끼리 갔던 가족여행이다. 개중엔, 루비아의 가족과 함께 갔던 단체여행이 또 태반이었고. 전부 재밌게 놀았던 기억밖에 없어서 여행이란 단어엔 적잖은 친밀감이 든다.
끝없는 세계를 향한 여행이야말로 휴식이란 취지에 가장 걸맞는 일이 아닐까.
잘 들어 보니,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원래 서클은 가입할 생각 하나도 없었는데. 흐음……
‘……?’
여행이란 말을 입안에서 굴려대고 있자니, 문득 유리의 시선이 이쪽을 향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
저번 식당 앞에서의 얘기가 생각나서 그런지,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홱 돌린다.
그때.
“잠깐. 넌 안 돼.”
뭔가 싶어 옆을 본다.
가브리엘이 진중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뭐야, 왜? 나도 여행 가는 거 좋아해.”
“좋아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야. 진심으로 부탁한다. 너는 오지 마라. 나는 나의 청춘을 즐기고 싶다. 평생의 숙원이다. 에지오.”
“……아니, 뭔데? 왜 그러는데?”
“꼭 말로 해야 알겠냐?”
가브리엘이 통탄할 노릇이라는 듯, 이마를 손목으로 짚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다가, 다시 날 바라보곤 입을 연다.
“네 옆에 서면 대부분의 남성은 초라해진다는 걸 잊지 마. 네가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 뒈질 수도 있다고. 넌 가만히 서있는 걸로도 돌멩이를 사방팔방에 발사하는 살인병기야. 제발 내 청춘을 방해하지 마라. 에지오 크라닐. 네가 여행 서클에 가입하는 순간, 너와 나는 중립 관계를 해제하고 적이 된다.”
턱. 가브리엘이 내 어깨에 손을 올린다.
강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뭐, 임마.
왜 끄덕이는 건데?
“네가 이러면 더 가입하고 싶어지는 거 아냐?”
“……에지오, 아니. 형님. 제발. 제가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저도 가능성이 적다는 걸 알곤 있지만, 가능성이 아예 0%인 것과 1%인 것은 땅과 하늘만큼 차이가 있지 않겠습니까? 저에게도 기회가 있다 이겁니다. 이 아우를 부디 불쌍히 여겨주시옵고……”
굉장히 필사적이었다. 지난 17년간 꾹꾹 억눌러 담아온 욕망의 해방이란 이리도 무서웠던 건가.
……아, 음. 그동안 멀리서 날 보며 피눈물을 흘리던 가브리엘의 모습이 떠오른다.
근데 이 녀석, 말은 이렇게 하는데 실제로 엄청 여학생에게 집적댄다든가 그런 모습은 별로 못 봤다.
대충 예상하고 있는 건, 여자를 좋아할 뿐이지 막상 여자와 대화하거나 친해지는 방법은 전혀 모른다던가…… 그런 슬픈 종류의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좀 안쓰러운 것 같기도 하고.
“거, 참…… 지금은 그냥 재밌을 것 같단 생각만 한 거지, 실제로 가입하겠다 정했다거나 그런 건 아냐.”
가브리엘은 엄지를 척 들어 보였다.
“믿고 있었다, 에지오. 앞으로도 계속 생각만 해주길 바란다. 그럼 난 너와 계속 친구일 수 있을 거야.”
“지랄은… 일단 그렇게 알어.”
나는 픽 웃었다.
……이후, 가브리엘이 늦은 밤 체력단련장에서 운동을 하다 헬스 서클 선배들의 눈에 띄어 강제로 헬스 서클에 가입하게 되었다는 건, 조금 나중의 이야기였다.
참고로 중복 가입은 안 된다.
중복 가입 불가능 목록에 없는 다른 서클이면 몰라도, 둘 다 에픽 클래스에서 적잖게 지원을 받는 중앙 서클이었던 까닭이다.
근데 말야.
여행은 그렇다 치고.
헬스는 왜……?
#16
화요일 일과를 마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똑, 똑.
나는 지금 교수 연구실 앞에 서 있었다.
어느 담당이냐고 묻는다면, 「마나통제학」교양 강의를 가르치는 교수님의 연구실이었다.
“게포르트 교수님. 마나통제학 강의 수강 중인 에픽 클래스 에지오 크라닐입니다.”
방문 신청을 했더니 금방 시간이 잡혔다.
복도에 서서 짧게 문을 두드리고 응답을 기다리는데, 안쪽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아, 네.”
끼이이익.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흔한 연구실의 풍경이 드러났다.
책장, 테이블, 종이, 마력 등불. 중앙에 놓인 푹신해 보이는 의자에 앉은 사람.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안경을 쓴 지긋한 교수님이셨다. 테이블 위에 놓인 명패에는 ‘게포르트 휴센’이란 글씨가 음각되어 있었다.
“반갑군요. 차 한잔 하겠습니까?”
“감사하지만 괜찮습니다. 긴 얘기는 아니라서.”
“…그래요. 무슨 일입니까?”
꾸벅 고개를 숙였던 내가 천천히 말을 꺼냈다.
“교수님께서 담당하시는 ‘마나통제학 I’ 강의에서 내주신 조별과제 말입니다. 거기에 문제가 좀 생겨서 여쭙고자 하는 게 있었습니다.”
“말씀해 보세요.”
흔쾌히 머리를 끄덕인다. 내가 말했다.
“…저희 조원 한 명의 태도 문제로 조원 간 불화가 있었습니다. 문제를 일으킨 조원을 제외한 나머지 조원들의 협의 결과, 문제 대상이 된 조원의 이름을 제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그 때문에 1번 과제와 2번 과제 수행에 해당 조원은 참가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 결과 나머지 조원들에게 불이익이 있는지 어떤지를 알고 싶습니다.”
“……”
내 얘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게포트르 교수가 느지막이 입을 열었다.
“조원의 이름이 무엇이죠?”
“유스필 데리아, 입니다.”
“……아, 그 학생 말이군요. 음. 음. 그래요.”
게포르트는 알 만하다는 듯 턱을 쓰다듬었다.
“조장은 누구죠?”
“접니다.”
“흐음, 그렇습니까. 그러면 유스필 학생이 정확히 어떤 문제를 보였죠?”
“……”
나는 잠깐 말을 아꼈다.
조 모임에 한 시간 가까이 지각하고, 조잡한 변명과 의미 없는 사과, 그리고 과제 수행의 의지가 완전히 결여되어 있었다고밖에 볼 수 없도록 가방까지 가져오지 않았었다. 누가 봐도 불성실한 조원이다. 퇴출하는 게 당연할 정도로. 그렇게 생각했었다.
문제가 정확히 뭐였냐, 라……
첫 모임 당시 보였던 유스필의 모습들을 여기서 읊으면 될 뿐이다. 교수가 안경알 너머의 눈동자로 날 바라본다. 말을 꺼내야 하는데, 입이 잘 열리지가 않았다.
차라리 몰랐다면 좋으련만.
골목에서의 모습이 떠오르고 만다.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유스필이 우리 조에게 해를 끼쳤다는 점은 그대로였다.
나를 제외한 조원들은 유스필의 사정이 어떤지 아무도 모르고, 알 필요도 없을 거다. 유스필에 대해 그다지 좋은 인상이 박혀 있지도 않았고. 게포르트 교수의 반응을 보면, 교수 역시 유스필의 불성실한 태도를 조금은 알고 있는 듯했다.
보이는 이미지는 변함이 없는데. 유스필의 뒷사정을 알고 나니까, 쉽사리 안하무인이라 지적할 수가 없었다. 교수에게는 내가 말한 내용이 사실로 받아들여질 테니까. 결과적으로 유스필에 대해 좋지 못한 인식을 계속해서 가지게 될지도 몰랐다.
유스필이 성적 관리를 반쯤 포기했다곤 하나, 여기서 내가 부언하지 않는다면 아주 조금 정도는 패널티를 받지 않을 수 있는 거 아닐까.
짧은 찰나에 수도 없이 고민했다.
내가 무얼 어떻게 말해야 옳을지.
결국.
천천히 입을 연다.
“교수님, 사실은……”
바로 그때,
게포르트는 부드럽게 웃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유스필 학생의 태도가 불성실할 수밖에 없다는 걸.”
“……”
나는 눈을 깜빡였다. 게포르트 교수가 말한다.
“하지만 여러분은 이제 성년이 됩니다. 스스로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하는 때입니다. 사실은 이렇다고 해도, 직접 말하거나 드러내지 않으면 진실은 감춰지기 마련입니다. 그것 또한 선택이겠지요. 그렇다면, 책임을 져야 합니다. 유감스럽게도 평가는 냉정해야 하니까요. 두 사람의 요청에 따라 유스필 학생의 점수는 0점 처리를 하겠습니다.”
게포르트 교수가 말을 마친다. 거기서 하나의 의문점을 발견한 내가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두 사람?
지금 여긴 나밖에 없는데.
그러자.
“저번에 유스필 학생이 여길 방문했었습니다.”
“……”
게포르트 교수가 유스필의 이름을 듣고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와서 부탁하더군요. 자기 점수만 0점 처리를 해달라고. 이유를 물어봤지만, 에지오 군을 비롯한 조원들에게 태도 문제로 피해를 끼쳤고, 그로 인한 책임을 지겠으니 혹시라도 자신의 불참으로 다른 조원들의 점수가 깎이지 않도록 해달라고. 그런 식으로 말을 해왔습니다.”
“……”
“저는 처리를 보류했었습니다. 명확한 사유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지금 에지오 군의 방문으로 무언가 일이 있었다는 건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또, 올바른 과제 평가에 관련하여 하나만 말하자면, 리더가 조원을 잘 이끌어야 하는 건 맞는 일이지만…… 이 경우는 조금 다른 해석이 필요해 보였습니다.”
탁, 타닥.
게포르트 교수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린다.
“유스필 학생, 고된 일을 하더군요. 본인은 말한 적이 없지만 제 눈에는 다 보였습니다. 흔적은 어디에나 남으니까요.”
“……”
“자세한 사유는 불문에 부치겠습니다. 두 분의 요청대로, 유스필 데리아 수강생의 이번 조별과제 점수는 불참으로 0점 처리를 하겠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어떠한 불이익도 없을 것을 이 자리에서 약속드립니다. 여러분만 최선을 다해 결과를 보여주신다면, 저는 오직 그 결과만을 보고 정당히 평가하겠습니다. 충분한 대답이 되었습니까?”
“……”
최선의 결과가 나왔다.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무얼요. 다른 용건이 더 있습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그럼 이제 가보셔도 좋습니다.”
문을 나서기 직전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마친 뒤, 교수 연구실 밖 복도 한가운데로 나왔다.
“……”
건물 창밖으로, 어둑어둑해진 하늘이 보였다.
얼마 뒤면, 3월달의 끝이 다가온다.
그리고 며칠이 더 지나서 4월이 찾아오면……
아마,
많은 게 변할 거다.
투명한 창문에 투영되어 비치던 내 모습이, 오늘따라 조금 더 어색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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