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화 〉 변화 (9)
* * *
#17
수요일 새벽. 칼같이 기상해서, 이번에도 운동을 나서기 위해 일찍이 씻고 준비를 하려는데.
—에지오 크라닐 님 앞으로 1건의 우편물이 발송되었습니다. 확인해주십시오.
정체불명의 우편물이 도착했다.
‘뭐지?’
침대에 앉아 배달원이 준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그냥, 종이 봉투였다. 밀봉된 종이 봉투.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제법 묵직한 문서들의 덩어리 같았다. 누가 이런 걸 나한테 보낸 거지?
종이 봉투를 뒤집어 앞면을 내려다봤다. 거기에는 내게 우편물을 보낸 발신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아.”
그거구나.
알프리스가 나한테 보낸 것이다. 뭔가 했더니. 뜯어보기도 전에 내용물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굳이 약속을 잡지 않고 이런 식으로 조별과제 연구 논문을 보내온 걸 보면, 단순히 물건을 건네줄 뿐인데 만날 필요까진 없다고 생각했거나. 혹은 하루 만에 이 논문을 완성하곤 침대 위에 뻗었거나. 아마 전자가 맞겠지만, 둘 다일 수도 있었다.
지금쯤 뭐 하고 있을진 몰라도 고생했겠군.
—지이이익.
봉투를 뜯었다. 벌써 내일이 발표일이다. 보통 조별과제 같은 경우는 기한을 2주 정도 주던데, 이 강의는 일주일밖에 주지 않았다. 시간 안에 맞출 수 있을까 싶긴 했지만 어찌저찌 성공한 모양이다.
“……오.”
봉투 안의 결과물을 팔락이며 확인한 순간, 나는 짧게 감탄사를 흘렸다.
하루 내지 이틀 만에 뽑아냈다곤 믿을 수 없는 퀄리티. 두께는 적당하다. 알프리스가 영혼을 갈아 넣었음이 손바닥 위로 느껴진다. 글을 참 잘 쓰네. 역시 배운 사람이다, 이건가.
알프리스의 논문 덕분에 내 발표도 한층 더 쉬워질 것 같았다. 나도 최대한 열심히 해야지. 가방 안에 들고 다니면서, 시간 날 때마다 틈틈이 읽어야겠다.
으음, 대본도 작성해야 할 텐데.
그래 봐야 단상에 나설 땐 대본 없이 진행해야 할 테지만. 외우는 거나 암기는 자신 있었으니까, 별로 걱정은 들지 않았다. 당장 내일이라 그런지 조금 촉박한 생각이 들었을 뿐.
어느 목차에 적힌 내용을 쭉 읽어내리다가, 고유 마력 특히 ‘백색’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안력을 집중했다.
내용은 그닥 길지 않았다. 백색의 고유 마력이 대륙에서도 정말 극소수만 지니고 있는 매우 희귀한 색깔이라거나, 관련 인물인 테트라 크로울리의 설(?)을 예시로 들며 백색 마력의 불분명한 정체를 추측한다거나……
‘흥미롭네.’
글을 조리 있게 잘 써서 그런지 몰라도, 테트라 크로울리에 관련한 이야기가 나올 때면 몰입해서 읽었다.
‘……일정 경지의 특이점을 맞이하면 평범한 마력의 색깔도 고유 마력의 색으로 변해버린단 말이지?’
그건 또 새로운 정보였다. 물론, 그런 경지에 이른 사람은 얼마 없다고 한다. 당장 알프리스가 조사한 것만 해도 대륙에서 손에 꼽을 정도. 개중에 테트라 크로울리 역시 포함되어 있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흐음……”
테트라 크로울리.
대체 뭐 하는 사람일까?
운동 가야 하는데. 논문 읽는 데 시간을 소비하며 그 자리에서 한 시간 정도 죽치고 앉았던 나는, 문득 창밖에서 여명이 걷혀오는 걸 깨닫곤 어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괜히 품속에 넣고 다니다가 잃어버릴까 싶어 기숙사 방 테이블 구석에 고이 보관했던 엘레나의 쪽지. 저걸 보여주면, 테트라가 싫어도 내 부탁을 한 번쯤은 들어줄 거라고 말했었다.
엘레나 말로는 협박문이라던데. 진짜인가? 그냥 단순한 쪽지일 뿐이잖아. 게다가 옆에 있던 종이 뭉텅이 대충 찢어서 쓴 거고. 안에 뭘 어떻게 적으면 면식 하나 없는 내 부탁을 들어줄 거라는 건지……
으음. 엘레나 선배님도 딱히 열어보지 말란 말은 안 했고. 별 생각 없이 손을 뻗었다. 쪽지를 잡아 조심스럽게 펼쳐 나갔다.
그렇게 잠시 뒤, 차례로 접힌 종이를 원래의 모양으로 되돌리자, 엘레나가 쓴 글씨가 줄지어 있는 걸 마침내 발견할 수 있었다.
보자, 뭐라고 적었을까.
음.
으음.
흐음?
……으으으음.
“뭐야 이게?”
—팔락.
나는 종이를 거꾸로 들어 보았다.
그래도 소용이 없었다.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원래대로 놓았다. 역시 모르겠다. 대체 뭐지. 아리송한 표정이 절로 지어졌다.
엘레나 선배님은 과연 무슨 의도로 이 쪽지를 쓰신 걸까.
「—. ——. ——. . ———. —.」
제국에서 사용하는 공용어가 아니라, 정체를 알 수 없는 해괴한 문자로 뭐라뭐라 잔뜩 휘갈겨져 있었다.
이와 비슷한 형식으로 어림잡아 대여섯 줄쯤 작성되어 있다. 당연하지만 뭐라 쓰여 있는지 하나도 읽을 수 없었다.
소통을 위한 문자라기보단 거의 술식(??)에 가까운 느낌이다.
지금은 소실된 어느 나라의 언어인가?
이런 건 책에서도 본 적 없다. 글자마다 형태나 특징이 조금씩 다른 걸 보니 분명 언어의 체계는 갖추고 있는 듯한데. 어쩌면 고대 문자일지도 모르겠다. 만약 정말이라면 왜 굳이 그런 문자로 쪽지를 작성한 걸까……
‘마지막은 공용어네?’
이건 나도 알아볼 수 있었다.
「*추신. 그거 나 아니다. 아무튼 아님.」
그래서 그게 뭔데.
내가 아니라 테트라 크로울리에게 전할 쪽지였으니, 아마 이건 그녀에게 전하는 말이리라. 내가 알 도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래도 이거 하나는 알 수 있었다.
쪽지의 마지막 끝에 적힌, 아니, 그려진 하나의 문양. 분명 엘레나가 중간에 손가락을 물어뜯곤 그 피로 뭔가를 적었던 것 같은데. 잠깐 푸른 빛이 나기도 했었다. 뭔가 마법적 처리를 가한 건 확실하다. 그 정체가 뭔지 전혀 모를 뿐.
“……”
한참 쪽지를 들여다보던 그 순간.
내 시선이 자연스럽게 멍해졌다.
스윽.
우연한 이끌림에 그대로 몸을 맡겨, 손끝에 마력을 담고 문양을 아주 미약한 힘으로 건드려봤을 때——.
……핫.
방금 문양에서 빛이 났다. 정신을 차렸다.
급하게 손을 떼니, 빛은 사그라든다.
“크, 큰일날 뻔했나……?”
위험한 물건인 것 같아.
건드리지 말자.
접힌 자국을 따라 다시 쪽지 형태로 접은 내가, 그것을 폭탄물 관리하듯 조심스럽게 테이블 위에 놓곤 밖으로 나설 준비를 했다.
#18
“좋은 아침, 루비아.”
“……아, 에지오?”
3동 1층 로비에서 루비아를 마주쳤다.
평소보다 조금 늦은 시간에 나서는 운동이었다. 나는 트레이닝복 차림이었고, 루비아는 단정한 유니폼 차림이다.
언제나 생각하는 거지만 루비아의 피부결은 정말로 뽀얗고 새하얘서, 순백의 유니폼과 무척 잘 어울린단 인상을 받고 만다.
뒷짐을 지고 서 있던 루비아가 몸을 옆으로 기울이며 내게 넌지시 물어온다.
“좋은 아침. 근데 왜 그렇게 봐……?”
“아니, 그냥. 유니폼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
“…어?”
“아침부터 어디 가? 나는 운동 가는데.”
뚜둑거리는 팔을 빙빙 돌리며 그렇게 말하자, 잠시 눈을 동그랗게 떴던 루비아가 어설픈 웃음과 함께 대답한다.
“아 아! 나, 나는 잠깐 학생회관에 볼일이 있어서……”
“학생회관? 거긴 왜?”
내 물음에 루비아가 말을 이었다.
“어제 타일러 교수님이 말씀하셨잖아. 서클 가입 안 한 사람은 당장 가입하라고.”
“아, 그랬지. 그럼?”
“가서 활동하고 있는 서클 목록이라도 받아오려고. 아무래도 신중하게 정해야 하니까……”
“…음? 어디 서클 가입할지 정해진 거 아니었어?”
저번에 물어봤을 땐 마법 관련 서클에 가입한다 하지 않았었나. 내 짧은 갸웃거림에 루비아는 손사래를 휘휘 젓는다.
“아, 아냐. 아직 아무것도 안 정해졌어. 그냥 관심이 있을 뿐이지, 조금은 여유를 두고 지켜볼까 했는데…… 생각이 좀 바뀌어서.”
“그렇구나.”
의외였다. 그런다고 루비아가 불성실해지는 것도 아니었으니, 걱정 같은 건 하나도 안 들지만. 그럴 이유도 없고. 난 루비아가 재밌는 학교 생활을 보내길 바란다. 자기 취향에 맞는 서클을 선택한다면 앞으로도 분명 재밌을 수 있겠지. 내가 말했다.
“잘 선택했어. 너무 공부만 하는 것도 안 좋지.”
“그렇게 말하는 에지오는 항상 공부나 훈련만 하던데. 너도 조금은 쉬는 편이 좋을지도 몰라. 맨날 볼 때마다 여기서 운동하고.”
“응? 너도 3동 체단실 자주 와?”
“……!”
황급히 루비아가 덧붙인다.
“아, 내 말은. 가끔 보인다 싶으면 항상 여기서 나오니까. 저번에 지나가다 운동하는 것도 딱 한 번 봤고. 그래서……”
뭐야. 내가 체단실에서 운동하는 거 본 적 있구나. 아마 대부분 웃통 까고 있었을 텐데. 좀 부끄럽네.
나는 수긍하며 대답했다.
“그랬구나. 뭐…… 맞아, 쉬는 게 좋을 수도 있지. 나도 요즘 그런 생각 하거든. 너무 빡빡하게 살아온 것 같아서 좀 휴식도 취해보려고.”
“으, 응……”
아하하… 어색하게 웃던 루비아가 문득 물어온다.
“에지오는 서클 가입하고 싶은 거…… 있어?”
“…으음, 글쎄.”
정말로 별 생각 없는데.
“굳이 하나 말하자면, 여행?”
“……여행? 아.”
저번의 일이 생각난 건지 루비아가 머리를 끄덕인다. 여행, 여행. 루비아는 작은 입술 속에서 그 단어를 조용히 굴려본다.
나는 그쪽에서 시선을 거두며, 위층에서부터 내려오는 승강기를 보곤 중얼거리듯 말했다.
“어릴 때 너랑 너희 가족이랑 여행 많이 갔잖아.”
“……”
그때를 떠올리는 듯 루비아가 슬쩍 미소지었다.
“……응, 그랬지.”
어딘가 추억을 그리는 듯한 목소리.
내가 말을 이었다.
“내 기준에서 여행은 그때밖에 안 가봤거든. 부원들이랑 함께 가는 여행은 또 느낌이 다르겠지만, 힐링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은 하고 있어. 듣기론 제국 밖에도 간다던데. 견문 넓히는 데 좋을 것 같기도 하고……일단은 그래. 아직 확실하게 정해진 건 아니지만.”
“그렇구나……”
잠시 뒤, 승강기가 1층 로비에 도착했다.
내 옆의 루비아는,
“…여행, 좋겠네. 괜찮을 것 같아.”
그렇게 말하며 잔잔한 웃음을 그렸다.
—띠링.
학생회관으로 가려면 나랑 같은 층에서 내려야 한다. 같은 승강기를 타고 층을 오르는 동안 루비아와 나는 말 없이 있었다.
다만,속으로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
“……”
이유 모를 침묵이 흐르고, 신호음이 울리며 승강기의 문이 열렸다. 왠지 뒷짐을 지고 서 있던 루비아가 내 뒤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길래, 내가 먼저 밖으로 한 걸음 나섰다.
스윽.
그러자 루비아는 날 뒤따라 천천히 걷는다.
바로 그 순간.
“!”
“가만 있어.”
몸을 홱 반대로 돌려, 화들짝 놀란 루비아의 팔을 붙잡는다. 힘을 세게 주진 않았다. 다치면 안 되니까. 하얗게 질린 루비아는 내 손을 다급히 뿌리치려 한다. 절대 놓아주지 않았다.
“에, 에지오. 그만……”
“……”
나는 루비아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읏.”
루비아가 입술을 깨물곤 내게서 시선을 돌린다.
창백한 안색에 드리운 그림자가 선명하다.
……처음엔 기우이겠거니, 아니면 어디서 뭐 하다가 실수로 다쳤겠거니.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간과할 수 없게 되었다.
날이 갈수록 심해지기만 했던 까닭이다.
이제 눈으로 보게 되면 절대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그걸 루비아 본인도 아는지, 날 만나서부터 뒷짐을 지고 있었다.
손을 가리려고.
내가 낮게 입을 열었다.
“너, 이거 왜 이래?”
“……”
루비아의 예쁜 손톱은.
여기저기 뜯기고 잔뜩 망가져 있었다.
* * *